할머니표 김부각과 산자 / 백현
외할머니는 우리 집에 그냥 오시는 법이 없었다. 호박이며 늙은 오이, 단감 등 그 철에 난 농산물을 싼 보따리가 여럿이었다. 때로는 김부각이나 산자가 들어있는 석작도 있었다.
찹쌀로 만든 풀이 곱게 발린 두툼한 김에 통깨와 실고추가 많이 붙어있는 할머니표 김부각은 최고였다. 우리는 그 김부각을 튀기지 않고 그대로 찢어 먹었다. 쫄깃하고 매콤했다. 산자는 또 어떻고? 찹쌀로 만든 바탕떡에 초청을 발라 하얀 고물을 묻힌 네모 넓적한 산자였다. 한 입 베어 물면 적당한 단맛과 바삭한 소리에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 생각하면 할머니는 딸네 집에 가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밭에서, 산에서, 들에서 나는 모든 것을 거두어들였으리라. 텃밭에서 가지나 고추라도 따고, 까막골 밭 비탈에서 밤이라도 주울 수 있는 철이면 좋았으리라. 마땅히 가져갈 것이 없는 때면 얼마나 애를 쓰고 찾았을 것인지. 김부각과 산자가 이런 어려움 속에 선택된 음식일 것으로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시골집에서 밭일 틈틈이 종종거리며 바쁘셨겠지.
인터넷에서 어제 찾아본 산자 만드는 방법이다. 먼저, 찹쌀가루를 약주나 탁주로 축이듯이 반죽한 뒤 시루에 쪄낸다. 그리고 공기가 반죽에 고루 섞이도록 방망이로 치대에서 얇게 편 다음 겉면이 갈라지지 않도록 바람이 들지 않는 그늘이나 더운 방바닥에서 말린다. 이렇게 만든 산자 바탕이 바싹 마르면 기름에 두 번 지져서 바삭바삭하게 만들고, 그 겉면에 흰 엿이나 꿀을 섞어 조린 것을 말라 여러 가지 고물을 입히면 완성이다.
그 산자가 이렇게까지 힘들여서 만들어진 줄 몰랐다. 주름이 가득한 그 노인이 앙상한 손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찹쌀가루를 치대는 모습, 방망이로 펴는 모습이 너무나 잘 떠올랐다. 요리법을 보면서 꺼이꺼이 울었다.
그땐 몰랐지만, 할머니는 광주에 사는 셋째 딸 집에 그냥 다니러 오신 적은 거의 없었다. 신경통이 심해져 큰 병원이라도 가볼 양으로 오셨거나, 용한 의원이 있다는 딸의 연락을 받았을 것이다. 몇 번은 힘든 대소사를 논의해 볼 양으로 가장 믿음직한 사위를 찾아오신 것이다. 편하지 않은 몸과 마음으로 애써 준비한 보따리를 들고 집을 나섰을 것이다. 글도 모르는 노인네가 긴장하며 묻고 물어가며 군내 버스와 시외버스를 탔겠지. 머리에 이고 손에 든 채로.
혹시 할머니에겐 아들이 없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겠다. 아니다. 아들이 있다. 그에 얽힌 눈물 나는 사연도 있다. 그녀는 아이를 열 명이나 낳았다. 딸, 아들, 딸, 아들, 딸, 아들, 이런 순서였다. 그런데 아들은 낳기만 하면 일 년을 못 넘기고 죽었다. 아이를 셋이나 잃은 참담함이 어땠을까? 위로는커녕 대를 이어야 한다고 시댁 문중에서 작은 부인을 들였단다.
옆 동네에 살던 시앗은 다음 해에 아들을 낳았다. 할머니는 딸을 둘이나 더 낳은 후에 아들 둘을 둘 수 있었다. 시집간 첫째 딸, 둘째 딸이 손주를 낳을 때 같이 낳았다고 했다.
한을 풀었으니 기 좀 펴고 이제는 사람 사는 것처럼 사는가 했단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쉰 줄에 중풍으로 쓰러졌고, 병구완 몇 년 만에 세상을 등졌다. 늦게 본 아들은 귀하게만 키웠더니 세상 물정에 눈을 늦게 떴다. 돌아가시기까지 이십여 년을 혼자 잘 살아내셨다. 한 번도 남의 탓을 하면서 자신의 삶을 흩트린 적이 없다.
할머니 생각을 하면 가슴이 따뜻해지면서도 마음이 애잔하다. 그렇게 힘든 삶을 꿋꿋하고 강인하게 산 여인으로 존경스러운 어른이라 생각한다.
첫댓글 에구, 할머니들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면 다 짠해요. 딸네 집에 하나라도 더 가져가려고 며칠 동안 준비해서 보따리 챙기시는 할머니의 모습에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우리 할머니 생각나요.
가슴아픈 사연이네요. 저도 제사가 있으면 산자를 꼭 준비하는데 만드는 사람의 수고를 생각 해야겠습니다.
참... 옛날 분들은 왜그리 어렵게 사셨을까요? 마음엔 늘 돌덩이를 지니고 계셨을 것 같아요.
어려서는 부모님 눈치, 결혼해서는 남편 눈치, 늙어서는 아들 눈치... '나'는 없는 인생이죠.
제 친정엄마만 봐도 순탄한 삶은 아니었지요.
뭐, 멀리 가지 않더라도... 예순을 바라보는 저 역시, 이제사 '나'를 찾아보려 두리번 거리지만 처한 환경이
나를 내버려두질 않네요. 갑자기 서글퍼지는. 하하
산자가 참 어려운 음식이군요. 자식, 손주 생각하며 동동거렸을 할머니가 그려지네요.
보따리 두 손 가득 들고 휘적휘적 오시는 할머니.... 눈물 나는 광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