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보약 / 양선례
나는 아침잠이 많다. 오래전에도 그랬고, 성인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새벽형 인간이 되어 본 적이 없다. 어쩌다 일이 있어서 30분쯤 빨리 하루를 시작하면 하루 종일 하품을 달고 산다. 그러니 세 아이를 키우면서 한밤중에 우는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거나 기저귀를 가는 게 가장 힘들었다. 시어머니와 함께 살 때는 휴일 아침에도 밀린 잠을 보충하지 못하고 약을 드시는 어머니의 시간에 맞춰 아침밥을 차리는 게 부담이었다.
새벽 버스를 타고 장에 왔다가 볼일 다 보고 집에 들른 이모는 몇 번이나 불러도 대답이 없는 우리를 보고는 ‘해가 중천에 뜨도록 자는 게으른 새끼들’이라고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결혼 후 남편은 잠 덜 자는 약이 있으면 1번으로 사서 아내에게 먹이고 싶다고 말했다. 아이를 돌봐 주던 둘째 시누이에게는 휴일이나 방학이면 오전 열 시 이전에 전화하지 않는 게 규칙이었다. 혹여 일이 있는 날이면 미안하다는 말로 포문을 열었다. 그 버릇은 여전하여 여행지에서도 가장 늦게 잠들고, 나중까지 이부자리에서 뒹구는 사람이 바로 나다.
그런 나도 한때는 잠을 이루지 못해 고통스러웠던 적이 있다. 보성 바닷가 마을의 작은 학교 교감으로 발령을 받았다. 광주에서 출퇴근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서 학교 주변에 사는 사람이 몇 안 되었다. 학교 울타리 안에는 교장, 교감, 실장이, 밖 관사에는 총각 둘이 살았다. 친가가 고창인 40대 초반 미혼의 여선생이 근처 빌라에 세를 얻어 퇴근 후에는 유일한 친구가 되어 주었다.
저녁을 간단히 먹고는 교문 앞에서 만났다.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왼쪽으로 가면 다비치 콘도를 지나 호젓한 바닷가로 길이 이어진다. 여름이면 야영객이 친 텐트와 캠핑카가 즐비했다. 작은 등대도 만날 수 있다. 오른쪽으로 가면 한적한 백사장과 군에서 운영하는 야구장을 지나 멀리 회천서초등학교까지 다녀올 수 있다. 가방에 작은 칼과 비닐봉지를 넣고 다니다가 아카시 꽃이 주렁주렁 달린 걸 본 그녀가 어릴 적에 엄마가 만들어 주던 튀김을 떠올리면 꽃을 따서 담았다. 또 해풍 맞고도 부드럽게 잘 자란 쑥이나 나물을 캤다. 수확이 끝난 밭에서 트랙터 날에 찍힌, 그러나 먹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는 감자를 줍기도 했다.
자운영 꽃밭에서 노래 부르거나, 토끼풀을 따서 화관을 만들어 머리에 쓰고 사진을 찍었다.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해변의 긴 의자에 앉아 그녀는 맥주를 마시고 나는 새우깡을 와작와작 씹으며 달이 만든 붉고 긴 그림자를 한없이 바라보았다. 윤슬이 은은하게 빛났다. 또 어느 날은 쪽파를 거두는 마을 사람에게서 몇 단을 사서 낑낑대며 들고 왔다. 여러 날 내 팔뚝에서 파스 냄새가 진동했지만 나눠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조금 쌀쌀한 밤에는 산책을 마치고 참새방앗간에서 차를 마셨다. 주민에게는 500원씩 할인해 줘서 좋았다. 가만히 음악 듣다 오는 게 다였지만 고요한 그 밤이 참 좋았다.
관사의 작은 방에 돌아와서는 라디오를 켰다. 허스키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임지훈이 부르는 <꿈이어도 사랑할래요> 코너를 기다렸다. 평범한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가 유난히 달달하게 느껴지는 날에는 일기를 썼다. 전년까지 정신없이 바쁘게 살던 학교 일에서 비로소 해방되었다는 기쁨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자유인이 된 듯 하루하루가 소중했다. 그런 나날을 기록하고 싶어서 블러그를 시작했다. 모임도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었다. ‘그동안 너무 많은 가지를 치고 살았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 책 읽고, 글 쓰고, 자연과 벗하며 단순하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단 하나가 문제였다. 마을과 떨어진 학교 관사는 아이들과 선생님이 퇴근하고 나면 쥐죽은 듯 조용했다. 잠자기 전에는 책을 읽었다. 눈꺼풀에 잠이 99%쯤 붙으면 바로 머리 위의 스탠드 버튼만 살짝 누르면 되었다. 그런데 불을 끄자마자 온갖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이리저리 굴렀다. 멀리서 고양이가 울었다. 누군가 내 방 창문 아래서 귀 기울이는 듯 신경이 예민해졌다. 나는 잠탱이다. 나는 둔하다. 아무리 자기 암시를 걸어도,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를 끝까지 세어도 의식은 점차 또렷해졌다. 결국 다시 불을 켤 수밖에 없었다. 책을 읽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깜빡 졸았지만 깊은 잠으로 이어지지는 못 했다. 결국 새벽녘이 되어서, 그것도 현관 입구의 백열등을 켜 두고서야 잠들 수 있었다. 하루는 새벽 두세 시, 다음날은 전날의 후유증으로 열 시도 되기 전에 잠드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갱년기를 지나던 지인 둘은 불면증이 심해서 고생했다. 그중 한 사람은 여행 계획이 잡히면 병원에 들러 아예 수면제를 처방받아 온다. 그들은 어디서나 잠을 잘 자는 나를 부러워했다. 그런데 이제 그조차 옛이야기로 남으려나 보다. 잠잘 때를 놓치거나, 늦은 저녁에 마신 커피 한 잔의 영향으로 밤을 꼬박 샐 때가 있다. 겨우 10분을 자고 무거운 몸으로 출근한 적도 있다. 그런 날은 점심을 먹고 관사에서 잠시 눈을 붙이기도 했는데, 관사가 없는 이 학교에서는 그조차 어렵다.
머리가 멍해 글쓰기에 집중이 되지 않는다. 잘 시간이 되었나 보다. 눈꺼풀이 태산보다 무겁다. 남편의 코 고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보약 먹으러 가야겠다.
첫댓글 잠이 쏟아지는 것보다 잠이 오지 않는 게 더 큰 고통 같아요. 저는 목포에 내려와서 불면증이 조금 사라졌답니다. 숙제까지 잘 마무리하셨으니 푹 주무셨을 것 같네요.
불면증이 사라졌다니 축하해야 할 일이네요.
갱년기 증상 중 가장 큰 고통이 불면증이라고 하더라고요.
잠이 보약이라는 말이 맞아요. 잠을 잘 못 잔 날은 하루가 피곤해요.
맞아요. 특히 저는 그 증상이 심합니다.
맞아요. 잠이 보약, 보성 율포 잘 배회하고 갑니다.
배회하지 마시고 산책하시지는. 히히.
고맙습니다.
가끔이지만 불면의 밤을 보내 본 후에야, 힘든 친구의 고통을 이해하게 되었네요. 할 일을 제대로 못해 잠을 원망하던 시절이
축복이었다는 걸 깨닫는 요즘입니다. 양 교장샘 숙면 취하시길 기도할게요.
네. 저녁에 커피만 참으면 되는데, 어떤 날은 땡겨서 절제가 안 되는 날이 있어요.
오늘 못 자면 내일 자지 뭐.
용가리 통뼈처럼 그 순간을 견딥니다.
선생님, 글이 정말 좋아요.
전에 저희 할머니는
잠 때가
저녁 일곱 시였어요.
우리 자매도 강제 취침.
글 잘 쓰는 황 선생님의 칭찬에 기분 좋아요.
우리 집은 남편을 빼고는 다들 올빼미과라서 두 딸과 자정에도 낄낄대고 놀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글쓰기 수업 시간에는 반짝반짝하던 걸요.
잘 읽었습니다. 회천서초등하교 한번 가 봤네요. 시어머니 고향집이 아주 가까워요.
그곳 회천에 주말 주택이 있어요.
매주 가서 초보 농사꾼 흉내를 내다 옵니다.
놀러 오세요.
저도 커피를 참 좋아하는데, 1월의 어느 날 저녁에 두 잔 연달아 마시고 단 10분도 자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그 뒤로는 저녁 커피는 안 마셔요. 나이는 거피도 시간 가려서 먹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러는 편인데 마음이 땡기면 - 가령 비가 온다거나, 유난히 우울하고 처지는 날- 잠 안 잘 생각하고 마셔 버립니다. 잠시 행복해지는 걸 보면, 커피는 마약이 분명합니다.
잠도 보약 맞아요. 읽는 내내 공감되는 부분이 있어 더 재미 있게 읽었습니다. 저도 거의 코고는 소리를 자장갸 삼는 답니다. 하하
잠에 얽힌 일화는 많은데 그중 한 가지만 썼네요.
오래전에 한번 쓴 기억이 납니다만.
그 아름다운 시절에 잠까지 달게 잤다면 더 좋았을 텐데요.
저는 집에선 잠퉁인데 잠자리 바뀌면 꼬박 날을 샌답니다.
제목을 '아름다운 시절'로 할까 생각했어요.
산 좋고, 물 좋고, 정자까지 있는 곳은 없는 것 같아요.
세상 일이요.
선생님의 열정이 느껴집니다. 저도 올빼미과였는데 지금은 뒤죽박죽입니다.
잘 읽고 구경도 잘 하고 갑니다.
하하. 저보다 더 올빼미인 걸 압니다.
대단하셔요.
하하, 저도 시어머니에게 혼 많이 났어요. 잘 자니 깨어있는 동안 열정도 넘치시는 거 같아요. 선생님 글 공감하며 재미있게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