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부모의 자녀 교육관 / 곽주현
손주가 여럿이다. 일곱 명이나 된다. 그래서 가끔 이름을 헷갈려 부를 때도 있다. 벌써 다섯 아이가 학교에 다닌다. 가끔 받아쓰기나 덧셈, 뺄셈에서 100점을 받았다며 문제지를 휘날리며 자랑하는 놈도 있다. 다른 집 아이가 그랬다면 별것 아니라고 여겼을 텐데 내 손주의 것은 ‘그 녀석, 잘했네, 똑똑하네.’ 하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럴 때는 좀 바람을 넣어서 칭찬해 준다. 가끔은 과자도 사주기도 하면서. 그런데 세 부모의 교육관이 각기 달라서 당황하곤 한다.
먼저 막내아들네부터 이야기하자. 아들만 셋이다. 큰애가 초등 1학년이고 아래로 엊그제 돌이 지난 쌍둥이가 있다. 첫째는 영어 전문 유치원을 다녀서 일상적인 회화가 가능하다. 화상통화 하면서 가끔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영어로 말해보라.’ 하면 막힘없이 뭐라고 표현한다.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어 멍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옆에서 카투사 출신인 아빠가 통역해 준다. 영어권의 어린이 방송도 무리 없이 시청할 수 있다.
그 애가 영어 전문 유치원에 다닌다는 것을 입학하고 몇 달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아직 우리말도 익숙지 않은 이제 네 살 아이에게 외국어를 가르치는 것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다며 이런저런 설명을 했다. 혈압을 높이며 비용도 만만치 않을 테니 그만두면 좋겠다고 강하게 말했지만, 부모의 의지를 꺽지는 못 했다. 그들의 논리는 이랬다. 영어는 일찍 배워 두면 다른 공부는 쉽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다. 며느리가 학교에 다니면서 외국어 때문에 너무 고생해서 일찍부터 꼭 그러고 싶다는 말도 덧붙인다. 조기 교육을 하는 많은 부모가 이렇게 대리만족하려고 그런다는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다.
며느리에게 직접 말하는 게 좀 그래서 아들에게 수강료가 만만치 않을 텐데 얼마나 들었느냐고 살짝 물었다. 아이 엄마가 주도한 일이라 잘 모르겠다고 얼버무린다. 가정을 꾸리는 가장이 맞냐고 채근하니 그때서야 한 달에 백만 원 이상이었을 것이라 한다. 3년 동안에 투자한 금액이 수천만 원은 될 것 같다. 그래도 조금도 아깝지 않다며 만족해한다.
이럴 때 참 난감하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40여 년 했으나 그런 조기 교육은 ‘아니다, 틀린 선택이다.’라고 똑 부러지게 말하지 못한다. 학부모 특히 우리나라 어머니들의 극성스러운 교육열 앞에서는 교육학자의 연구 결과나 견해도 무용지물이 되는 세상이다.
큰아들네는 첫째가 중학교 1학년이다. 지난 여름 방학에 서울에서 내려와 하룻밤 자고 갔다. 방학이니 며칠 더 있다 가라고 권해도 학원에 가야 해서 어렵다고 한다. 저녁이 되자 숙제가 많다며 내 서재로 들어간다. 중학교 3학년 수학 문제지를 풀고 있다. 2년 후에 배울 것을 벌써 공부하고 있단다. 영, 수, 국을 모두 그런 수준으로 선행 학습하고 있다. 이제 중 1인데 이렇게 매달리니 안타깝다. 둘째는 4학년인데 똑같이 2년 앞선 공부 중이다. 아들, 며느리에게 무슨 정승 벼슬 만들려고 그러냐며 큰소리를 냈다. 좀 공부한다는 애들은 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이러지 않으면 소위 서울의 에스, 케이, 와이 대학에 입학하기가 매우 어렵다. 손자는 공부가 재미있다며 걱정하지 말란다.
광주 사는 맏딸은 늦게 결혼해서 이제야 초등학교 1학년, 2학년 남매를 두고 있다. 그저 건강하게만 크라며 애들 공부에 전혀 신경을 안 쓴다. 하루는 2학년 손녀가 저녁을 먹고 자기 아빠하고 거실 긴 안락의자에 앉아 속닥거리는 것을 물을 먹으러 가다가 들었다. 받아쓰기에서 30점을 맞았다고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괜찮다며 다음에 잘 보면 된다고 등을 토닥토닥 두드린다. 손녀 말하기를 이제껏 배운 낱말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을 골라 시험 본 것이라 그랬다며 해해 웃는다. 그렇다고 30점이 뭐냐고 좀 나무라면 좋겠는데 태평이다.
이 문제로 나와 딸 내외가 논쟁을 벌였다. 나도 아이를 자유롭게 키우는 것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이런 낱말을 받아쓰기하겠다고 학교에서 미리 가정으로 보내준 것을 한 번도 연습하지 않고 시험을 보는 것은 좋은 학습 태도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 맞춤법에 맞게 잘 쓰게 될 땐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한 마디 더했다. 학년에 따라 꼭 해내야 할 성취목표가 있는데 그 시기를 놓치면 학습 부진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 적정 수준에서 관리되어야 한다. 그러면서 이러면 부모의 직무유기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다음 날은 100점을 맞았다며 밝은 표정을 지으며 들어 온다. 어제 두어 번 연습 시킨 결과다. 아들딸의 저마다 다른 세 가정의 교육관을 보면서 ‘이것이 옳은 방법이다.’라고 잘라 말할 수 없다. 내가 손자들 교육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 여겼다. 그게 아니었다. 그저 뒤에서 지켜볼 뿐이다.
첫댓글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마음이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합니다. 사실 저는 대책이 없는 편이라 맨 처름 거론하신 자제분과 교육관이 같습니다. 외국어를 일찍 배우게 하여 의사소통을 원활히 하도록 미리 공부시키면 좋겠는데 - 아무리 아이가 유치원 생이라도- 부모가 딴전이라 조바심이 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들 내외도 사실 교육비가 엄청나서 미리 서두르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하
그러겠네요. 일단 부모에게 맡겨둘 일이긴 하지만 조언도 필요하겠죠.
많이 다른 세 자녀의 교육관, 할아버지 부모 그리고 4촌을 옆에서 보고 자라서 잘 해 내리라 믿습니다. 하하하.
저는 딸 스타일에 한표를 던집니다.
제가 좋아하는 형님이 항상 그랬어요.
"거죽 안에 복만 많이 들어 있으면 된다."고요.
교수님이 추천하신 책에서 이런 구절을 봤습니다.
어느 나라에 태어났느냐가 50%, 어떤 부모의 유전자를 받았는가 30%, 자신의 노력은 겨우 20%라고요.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 만으로도 80%의 가능성을 가진 거죠.
영어 유치원을 다녀서 영어를 조금 더 유창하게 말하면 가능성은 높아지겠지만
행복이 따라온다는 보장은 없겠지요?
첫 아이 초등시절이 교육열 최고조 시기였던거 같아요. 그리고 점점 내려놓게 되더라구요. 하하. 지금은 아이들이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