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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론을 통한 근대성의 모색
장성진(창원대 교수)
1. 근대화의 관점과 시조 논쟁
고시조를 계승했다는 의미에서이건 극복했다는 의미에서이건 “근대시조” 또는 “현대시조”라고 부르는 대상은, 다른 갈래에 비해서 그 정체가 분명하지 않다. 그것은 시조의 장르적 견고성이 분화나 변화의 표지를 잘 드러내지 않는 데 기인한다. 일반적으로 문학의 한 갈래에 시대를 뜻하는 관형사나 접사를 붙이는 것은, 후대의 갈래가 보여주는 뚜렷한 특징을 전제하고, 그와 현저히 다른 특징을 보여주는 앞 시기의 작품을 묶어서 규정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시조의 경우는 고시조와 현대시조로 나누어지는 작품들 사이에 형식적 표지나 구조적 장치 같은 요소가 현저히 달라진 모습을 찾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갈래보다도 오랜 동안 창작이 지속되고, 하위 갈래의 종류와 양상도 초기와 별반 달라진 게 없다. 따라서 명확히 규정되는 근대시조를 기준으로 그러한 특징이 드러나기 이전 시조를 고시조라고 부르기에는 난점이 있다. 그렇다고 공통점이나 불변성에 주목하여 시조의 역사성을 무시해도 좋다는 뜻은 더욱 아니다. 작자의 위상, 발표 매체, 음악과의 관계, 시대 정신, 이론 등 많은 요소를 달리하고 있는 만큼 작품의 내적 질서도 상당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것은 작품을 분석한 뒤에 확인되는 요소여서, 한 갈래의 자질로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2차적 성질이라는 점에는 유의를 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해 보면 시조의 시대적 규정은 “근대시조” 또는 “현대시조”라는 규범적(規範的) 규정보다 시조의 “근대성” 또는 “현대성”이라는 기술적(記述的) 설명이 더 큰 의미를 가질 것이다. 서술의 편의상 근대시조나 현대시조라는 규범적 명칭을 쓰더라도 그것이 기술성을 중요하게 가진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런 관점을 중시하여 보면 시조의 근대성 또는 근대 시조의 출발은 이미 애국계몽기에 진행되었다.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한 언론매체에 매일 또는 잦은 터울로 게재되면서 몇 가지 유형의 형식적 실험, 시사성 추구, 계몽을 위한 대중 지향성 등 뚜렷한 특성을 확보하였다. 이것을 곧바로 근대성으로 해석하는 데는 반론이 있다. 계몽을 위한 주제 의식의 과잉, 구태를 여전히 지닌 문어체의 어법 등이 근대문학의 영역에 들어서기에는 미흡하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어느 방향을 취했느냐고 되물어 보면 근대화의 방향을 확보해 간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근대냐 전근대냐의 귀속이 문제가 아니라, 근대로의 진화가 얼마나 진행되었느냐 하는 과정의 문제로 풀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근대화의 애국계몽기적 단계는 외부적 요인에 의하여 하나의 마디를 형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정치적 강제 합병과 이로 인한 언론 매체의 전면적 폐간이다. 일제 관변 언론인 『매일신보』가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총독부 기관지에 불과하였고, 근대 시가의 절대적 토양이던 매체가 사라지자 시가의 발표도 자연 중단되었다. 일부 해외 매체에는 여전히 기존의 양식과 경향이 이어졌지만, 해외 동포를 대상으로 한 제한적 언론은 대중 매체로서의 본령은 아니었으며, 이런 상황에서 게재된 시가도 질량면에서 명맥 보존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애국계몽기와 그 다음 시기 사이에는 상당한 단층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근대 시조 논의에서 이와 같은 단층이 상식적이고 온건하게 극복되지는 못하였다. 이른바 계급문학과 국민문학의 논쟁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흔히 시조론이 논쟁을 촉발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부분적 진실이고, 시조가 이 논쟁에 이용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다. 1920년대 『조선문단』을 통한 민족문학론은 시조보다 민요를 대상으로 먼저 시작되고 이후 시조와 민요를 계속 다루었지만, 논쟁은 시조를 대상으로 하여 훨씬 강경하게 진행되었다. 부분적 진실이란 이렇다. 논쟁의 계기가 된 최남선의 「조선 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에서 그가 비판한 대상은 과격한 주장과 함께 분분하게 시도된 여러 가지 사조, 갈래, 기법 등 문단 전반적 상황이었다. 그 대척점에서 정돈되고 정통성 있는 갈래로 선택된 것이 시조이며, 그 핵심 가치가 ‘민족성’이다. 또 그는 시조를 불변의 절대적 실체가 아닌 가변의 상대적 생명체라는 점을 전제로 논의하였다. 그런데 이에 대해 계급문학파의 김기진은 「문예시평」에서 최남선의 전제를 외면한 채 시조와 민요에서 추구하는 민족성이나 향토성 같은 것이 문명화된 시대에 무의미해졌으며 폐기될 수밖에 없는 국수, 반동적 사고에 불과하다고 단정하였다. 그 자리에 계급성을 가치로 설정함으로써 ‘민족성’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분명히 한 것이다. 뒤이어 매체들의 기획에 힘입어 많은 사람들이 논쟁에 가담하였다. 김기진의 주장에 대하여 김영진은 조선적인 작품이야말로 오히려 사회 민중의 생활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에 ‘문학’이 남아 있는 한 ‘국민문학’도 지속될 것이라고 강변하였다. 염상섭은 시조야말로 조선 사람의 생명의 울림을 표현하는 조선말에 들어맞는 형식이기 때문에 시조가 ‘부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주요한은 위대한 작가의 탄생을 기다려 시조의 제약과 약점을 고쳐야 하기 때문에 부흥운동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손진태도 시조의 형태와 하위 갈래를 활성화하여 시조의 발전을 주장하였으며, 권덕규는 시조의 부흥이 장래 신시형 발견의 경로로서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양주동도 내용의 漢臭的 경향 타파를 통해 시조형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이은상도 민족정신과 결부시켜 시조의 부흥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카프의 논객인 김동환은 『조선지광』을 통해 적극적으로 반론을 펼쳤다. 문학은 성장하는 것인데 시조는 死文學이라고 단정하고, 이를 대신할 신시형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시조를 폐기해야 하는 이유를 들기 위해 최남선의 전제를 무시하였으며, 나아가 시조의 구성 요소별로 다소 견강부회를 써가면서 논척하였다. 시조의 초중종장은 한시의 기승전결에 비해 무리하게 정서를 마무리하는 구조이며, 시조의 3‧4 또는 4‧4조 율격은 사회 질서가 잘 유지되는 넉넉한 시절에나 맞는 율조이며, 45자 단형은 목청 좋게 부르는 데 생명이 있는 노래라는 주장은 견강부회이다. 내용상의 비판에도 시조를 중세적 질서에 묶어 둠으로써 적지 않은 무리가 있다. 국민문학파와 계급문학파의 논쟁은 그 출발이 문학 전반에 대한 포괄적인 것이었는데, 논쟁이 격해지면서 시조에 초점을 모으게 되었다. 논쟁의 성격도 공격과 방어의 양상을 띠면서 점점 방향이 어긋났다. 공격하는 쪽에서는 근대시조를 고시조와 동일시하여 분석의 정확성보다 분석 대상 자체를 놓쳤으며, 방어하는 쪽에서는 배격론자들의 주장이 어떻든 간에 내부적 진화에 대한 논의를 계속하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이광수의 중용론에 근거한 常의 문학 주장에 대하여 백기만과 양주동이 혁명론과 시대성으로 반격하는 단계에서는 논쟁의 핵심 제재가 시조를 벗어나 확대되었다. 이 논쟁은 그 자체로서 그다지 생산적이지 않았지만, 국민문학파 내에서 시조의 새로움을 계속 추구하고, 배격론자들에게 맞서서 시조가 고루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이론과 창작에 힘을 기울였고, 그 과정에서 시조의 근대화가 크게 진전되었다. 결국 시조의 근대화는 애국계몽기 이후 지속적 진행과 논쟁을 통한 재정립의 종합이라고 하겠다.
2. 국풍과 시조의 거리
국풍(國風)은 시조문학사상 1910년대의 단층과 극복을 동시에 보여 주는 자산이다. “국풍”은 저 시경에 연원을 둔 문학의 갈래로서, 민간의 노래 곧 민요라는 원천과 규격화라는 가공의 결과물이다. 후대에는 민요적 성격이 강한 시라는 일반명사의 영역으로 옮겨왔지만, 여기에는 집단 정서와 의도적 보급이라는 원래의 유전자가 내재해 있어서, 시대와 사회의 분위기에 따라 부각되곤 하였다. 애국계몽기 국풍적 모색은 다각도로 이루어졌으며, 구체적 언명은 신채호의 국시론 또는 동국시 논의에서 잘 드러났다. 그는 1909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시론 「천희당시화」에서 국시의 요건을 ‘동국어, 동국문, 동국음’이라고 명시하고, 여기에 ‘新手眼을 放하는 者’라는 내적 가치를 더하여 그것을 수행하는 이를 ‘동국시 혁명가’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드물게 그러한 경지에 이른 작품을 예로 든 것이 최영이나 김종서 등의 시조였다. 이 국시에 장르 의식을 더한 것이 국풍론이다. 육당 최남선(1890 ~ 1957)은 1908년 11월 잡지 『소년(少年)』을 창간하고, 제 10호부터 이후 1911년 5월 통권 23권으로 종간될 때까지 1년 남짓 국풍이라는 장르명 아래 시조 32 편을 창작 게재하였다. 같은 시기에 일본에서 유학생들이 간행한 『대한유학생학보』나 『대한학회월보』에도 같은 양상을 보였다. 그가 국풍에 대하여 별도로 설명을 하지는 않았지만, 하나의 장르로 인식한 것은 틀림없고, 그 장르는 바로 시조이다. 최남선에게 국풍이란 실체는 설명을 하거나 주장을 할 이유가 없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전까지의 유학자들이 가졌던 문학관과는 달리 최남선은 한시의 하위 갈래들을 이미 국문시와 상위 단위에서 분류시켜 내었기 때문에 국풍은 당연히 고유시 영역에서 모색되었으며, 노래부를 수 있는 창작 전통시는 시조 밖에 없다고 여긴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이것은 뚜렷한 장르 체계를 전제하고 창작하였다기보다는, 그가 감각적으로 선택하거나 시도한 여러 시형 중에 하나의 상대적인 양식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알 수 있다. 시 양식에 대한 그의 초기 발언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나는 天稟이 詩人이 아니러라. 그러나 時勢와 및 나 自身의 境遇는 連해 連方 所願 아닌 詩人을 만들려니 처음에는 매우 頑固하게 또 强猛하게 저항하고 拒絶도 하였으나 畢竟 그에게 拒折한 바 되어 丁未의 條約이 체결되기 前 三朔에 붓을 들어 偶然히 생각한대로 記錄한 것을 시초로 하여 三四朔동안 十餘篇을 지었으니 이 곧 내가 붓을 詩에 쓰던 始初요 아울러 우리 國語로 新詩의 形式을 試驗하던 始初라.
이 글은 『소년』 제2년 4호에서 <구작삼편> 창작 동기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짤막한 언급이지만 육당의 문학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보여준다. 그에게 시작(詩作)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며, 장르 의식이 어떠한가에 대한 것이다. 육당이 시인을 지향하지 않았다거나 시인이 되기를 완고하게 거절하였음은 과장이나 겸사가 아니며, 결과적으로 그러한 자신의 뜻이 환경에 의해 거절되었다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미조약 체결 석 달 전이라는 시기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는 대한제국 황실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1906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사범부 역사지리과에 입학하면서, 이 해 7월부터 대한유학생회에서 발간하는 『대한유학생회보』의 편집인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6월 와세다대 정치학과 주관의 모의 국회가 조선국왕이 일본에 알현하러 오는 가상의 상황을 토의 안건으로 삼자, 이에 반발하는 한국인 유학생의 총대(總代)를 맡았고, 이로 인해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정미칠조약이 이 해 7월의 일이니, 그 석 달 전이라면 육당이 일본 유학생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때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택한 시 창작은 10대 후반의 청년 육당으로서 처음의 계획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가 “신시”라는 생각을 가지고 “시험”한 “시초”의 작품들은 후에 연구자들에 의해 “신체시”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소위 신체시를 육당이 꼭집어서 무엇이라고 명명하지도 않았으며, 또 그가 말한 “신시”가 특정 양식을 따로 지칭하지도 않았다. 달리 말하면 그 후에 지어진 이른바 7․5조나 8․6조는 물론, 자수를 통일한 채 행수를 다양하게 조합한 여러 종류의 양식을 범칭하였으며, 이러한 실험의 목적은 오로지 사회적 계몽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다양한 양식적 실험을 통하여 주로 그는 읽는 시를 지향하였다. 그렇지만 이것은 연구자들이 흔히 말하듯이 노래하는 시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라든지, 전통 양식에 대한 탈피를 지향한 새로움의 추구는 아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정형성이 강화되는 창작 경향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굳이 정형성을 강화하려는 의도를 가졌다는 뜻은 또한 아니다. 그는 다양함의 효용을 실험했을 뿐이다. 여기서 그가 명시적으로든 묵시적으로든 “시”라고 한 영역과 “가” 또는 “노래”라고 부른 영역의 차이는 있다. 그 “가”의 영역에서 새로운 것은 주로 서양식 음악에 얹어 부르는 것이었으며, “국풍”은 이미 창법이 정해져 있으니 새로운 형식적 모색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시조이다. 육당의 시조를 굳이 시조창으로 실현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미 이 무렵에 시조시를 민요 등 다른 음악으로 확대 실현하려는 시도가 다른 언론매체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시조시의 주된 음악은 여전히 시조창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육당의 초기 시조에서는 이러한 모습이 섞여 나온다.
봄이 한번 돌아오니 눈에 가득 和氣로다 大冬風雪 사나울 때 꿈도 꾸지 못한 바라 알괘라 무서운 건 「타임」의 힘.
『소년』 제 3년 4권에 실린 <봄맞이> 연시조 7수 중 첫 작품이다. 애국계몽기 시조의 전형이다. 종장 끝음보가 생략되었고, 신문명에 대한 경도가 다소 유치한 어휘로 나타났다. 이는 분명히 시조창-시조시를 얹어 부르던 정통의 음악인 가곡창이 아닌-으로 부르기 위함이다. 이 시기 육당에게 국풍은 말할 나위 없이 노래로 인식되었으며, 1910년대 그의 시조는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학회지 성격의 잡지는 1910년대를 넘어서도 여러 가지가 간행되었지만, 이전과 같은 계몽 활동의 도구는 아니었다. 더욱이 1920년대 이후 문학 작품은 문예지 또는 단행본 형태로 발전하여 장르와 성향을 선명하게 드러내었다. 동시에 문학론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이것이 논쟁의 성격을 띠기도 하였다. 시조도 이 논쟁의 중심에 여러 차례 놓였다. 논쟁에 앞서서 논의와 창작의 방향을 설정한 것이 육당의 『백팔번뇌』이다. 1925년 12월 동광사에서 간행한 최남선의 창작시조집에는 박한영(朴漢泳)의 한시로 된 서시, 홍명희(洪命熹)와 정인보(鄭寅普)의 발문이 곁들여 있어서 당대 지식인의 관심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전체 3부로 구성된 시집의 제1부에는 「동청나무 그늘」이라는 소제목 아래 <궁거워> 등 36수, 제2부에는 「구름 지난 자리」라는 소제목 아래 <단군굴에서> 등 36수, 제3부에는 「날아드는 잘새」라는 소제목 아래 <동산에서> 등 36수의 시조가 각각 실려 있다. 이 시조집과 1926년 5월에 발표한 「조선 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 이론은 표리를 이루면서 시조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새로운 시조론의 표명이자, 이후 시조부흥론쟁으로 이어지는 단초를 마련한 「조선 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는 좀 더 차분히 분석해볼 필요가 있는 글이다. 지금까지 많은 논자들이 글 중에서 “조선심”과 “국민문학” 등 몇몇 핵심어를 단편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육당의 이론과 작품을 지나치게 정태적 관점에서 이해한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이 글은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그 변화를 읽어내는 진화의 측면을 잘 보여주는 실체이다. 몇 가지를 지적해 보자. 첫째는 문학의 중요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다. 이는 국풍 창작 시기에 문학을 거부하였다는 진술을 뒤집는 태도이다. 그것은 “문학”이란 것에 대하여 육당이 설정한 범위가 달라졌다는 점을 포함한다. “세상에서 문학만큼 시만큼 세계성(보편성)을 가진 것이 없는 동시에 또 그만큼 향토성(특수성)을 가진 것이 없다.”든가, “예술처럼 虛假不眞實과 空幻無根據와 浮薄不內容을 허락하지 아니하는 것이 없다.”는 문학 긍정론은 민족문학을 강조하기 위한 바탕으로 설정한 진술이기는 하지만, 이전의 태도와 상당히 다른 면이다. 둘째는 이러한 바탕 위에 민족문학론이 다양하게 전개된다. “各異한 자연적 조건과 사회적 과정이 각이한 情味와 맛 그것을 담은 각이한 문학을 만들어냄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시로 말할지라도 그 形에서, 色香味에서 그 표현되는 태도 조건 과정 物的形的 依支에서 능히 각지방 각인족 각집단의 본질 특질을 따로따로 표현하여 각기 一朶花를 지어야만 그것이 한데로 統攝되고 總攬되는 세계적 대예술전당이 출현”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인은 세계에서 조선이라는 부면을 맡은 사람이요, 조선이라는 것에 현현되는 우주의지의 섬광을 붙잡을 의무를 짊어진 사람임은 문학에서도 똑같을 따름이다.”고 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인의 조선문학은 우열의 표지가 아니라 보편적 가치의 일부이다. 셋째로 여기서 시조의 특성과 가치가 논의된다. 우선 시조를 더이상 가(歌)의 범주에서 생각하지 않고 기(詩)의 범주에서 논의하였다. “터질 듯한 마음이 먼저 말에게 하소연을 하고, 말은 그 주체 못하는 鬱結을 음절의 조리로 건지려 하매, 詩道는 이에 발흥하였다.”라고 하여, 율격으로 조리질하듯 걸러낸 모든 시의 하나로 시조를 포함시켰다. “문학으로서의 시조, 시로서의 시조가 얼마만한 가치가 있는가, 시조라는 그릇이 담을 수 있는 전용량과 나타낼 수 있는 전국면이 얼마나 되는가?”를 되물어서 시 일반의 기준을 적용하여 규명하였다. 읽는 시로서 시조를 규정함으로써, 시조가 시의 범주에서 가지는 상대적 가치에 주목하였다. 그래서 시조를 문학 내외적으로 격리시키지 않고 객관적 전제를 찾았다. 그는 당대에 시의 경향이나 작가가 폭발적으로 넘쳐나는 상황을 봄날 소생하는 우주의 기운에 비유하면서도, “너도나도 짓는 시는 동시에 그런지 아닌지 모를 허다한 검불을 만들어 내었다.”고 진단하고, “모처럼 내미는 朝鮮情調의 싹도 떡잎에서 마르지 아니할 것을 담보하지 못하며”, “반가운 瞻匐香이 아니라 코를 싸매고 달아날 臭荊이면 어찌할까 하여” 우려하였다. 이는 “자기 스스로를 모르고, 자기 스스로에게 터잡지 않고 자기 스스로와 상응하지 아니하는 詩心과 詩態가 결국 개구리밥 같은 것, 아니 허수아비 같은 것”임을 아는 데 이르렀다. 이러한 자성을 한 사람들은 “내던져졌던 부시쌈지 속에는 나를 좀 보아주어야지 하는 時調란 것이 이네의 새 注意주기를 기다리는 것”을 발견하고, “별것이나 찾아낸 것처럼 시조 시조 하는 소리가 문단에 새 메아리를 일으키기”는 하지만, 시조를 찾은 것이 신기할 것이 없는 것처럼 시조를 내세우는 것이 반드시 큰 일, 끔찍한 일이 아니겠다는 전제도 수용하였다. 객관적으로 시조가 시의 형식으로 人類情思의 운율적 표현의 방법으로 최선이란다든지 至妙란다든지는 물론 말할 수 없으며, 시적 절대가 시조에 있을 리는 본래부터 만무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시조의 본체가 조선 국토, 조선심, 조선인, 조선어, 조선음률을 통하여 표현한 필연적 일 양식”임을 천명한다. 양식의 문제로 시조는 “조선인의 손으로 인류의 운율계에 제출된 일 시형” 곧 “조선의 풍토와 조선인의 성정이 음조를 빌어 그 渦動의 일 形相을 구현한 것”이다. 환경과 사람과 언어가 종합된 장르 내지 구조라는 본질에서 다른 민족의 문학과 비교한 상대성이다. 다른 조선문학과의 비교에서도 의미가 있다. 예술상으로 조선은 소설로 희곡으로 도무지가 아직 발생기 내지 발육기에 있다 할 것이지, 이것이오 하고 내어 놓을 완성품은 거의 없는데, 시조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관조하고 味驗하는 上으로도 유일 최고의 準的인 것, 유일한 成立文學이다. 또 그것은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의 의의로만 하여도 조선인으로는 아득한 源頭로서 발하여 오늘날까지도 涓涓히 혹 滾滾히 흘러내리는 정신상의 유일한 계류라는 전통성이 있다. 이런 문학 내외적 요건을 종합하여 이름붙이자면 “조선스러움”이다. 나아가 시대적 부활과 변용의 필요성이다. 시조가 아무리 전통적인 양식이고 정체성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완성품은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시대와 사회에 적응할 수 있고 또 적응해야 한다는 진화론적 시조론이다. “아직 충분한 발전 開敷를 보이지 못하였을 법하여도 기왕보다 퍽 많은 장래가 그 속에 包藏되어 있음”을 알고, “아직 璞玉대로 鑛石대로 있는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희망하는 精金美玉을 만들 여유”임을 누구든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연장하여 “그 전의 꼴이나 시방의 출발이나 이 다음의 희망이나를 여기서 한번 응시할 것과, 얼마든지 앞으로 발전시키고 변화시키고 내지 脫化하여 조선심의 소리됨에 가장 적절한 새 형식도 만들려니와, 조선시의 금자탑적 의의 효용을 발휘도 하고, 또 그 본래의 사명을 완성할 것을 힘쓰고자 함”이 궁극적 목표이다. 이와 같이 전통과 현재에 더하여 미래적 목표까지를 함의한 용어가 “국민문학”이자 “민족문학”인 것이다. 이 논의는 시기적으로『백팔번뇌』 출간 이후에 발표되었지만, 실제로는 이론이 창작의 바탕이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가 끝까지 강조한 조선심이 시조에서 몇 가지 상징으로 표출된다.
위하고 위한 구슬 싸고 다시 싸노매라,
때뭇고 니빠짐을 님은 아니 탓하셔도,
바칠제 성하옵도록 나는 애써 가왜라.
『백팔번뇌』 제1부의 첫 작품 <궁거워>의 첫 수이다. 제 1부에 수록된 작품은 모두 “임”은 읊었다. 그리고 육당의 시에서 “임”의 실체가 조선 또는 조선심이라는 것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핵심어는 “구슬”이며, 이것은 곧 내가 가진 조선심이다. 이것을 바칠 절대적 대상은 조선이라는 임이며, 둘의 관계는 종교적 경건함 내지 순교이다. 그가 시집 서문에서 말한 “獨自의 內面生活”을 “絶對한 一世界”인 “時調라는 한 表象”에 담고 있기 때문에 애국계몽의 외침이 아니라 간절한 표백으로 나타났다.
아득한 어느 제에 님이 여기 나립신고
버더난 한 가지에 나도 열림 생각하면
이 자리 안 찾으리까 멀다 놉다 하리까.
제 2부의 첫 작품 <단군굴에서>의 첫 수이다. “정강말에 채찍을 더하여 靈泉을 찾아다니며 感激과 嘆美의 祭物로 드리던 祝文”이라는 自序 그대로 조국이라는 신성한 대상에게 드리는 축문이다. 임은 단군이고 가지에 열린 열매는 자신이다. 단군굴은 근원지이자 성소이므로 이 탐방은 거룩한 祭儀이다. 이와 같이 육당의 시조에서는 조선심이라는 알맹이를 국민문학이라는 제도로 확산시키려는 의도가 강하게 들어 있다. 그것이 애국계몽기적 캠페인과 달리 내면화한 데서 근대 지향성의 진화를 읽을 수 있다.
3. 시조혁신론과 문예화
가람 이병기(1891∼1968)는 창작과 평론에도 힘을 기울였지만, 학자로서 학술적 관심 특히 문학사적 연구에 공이 많은 사람이다. 1898년부터 고향의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중국의 변법 사상가 梁啓超의 『飮氷室文集』을 읽고 신학문에 뜻을 두었다는 경력에서 알 수 있듯이, 한학과 신학문을 차례로 수학한 애국계몽기 진출한 지식인 또는 문사(文士)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그가 시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시조부흥론이 일어나기 시작한 1924년 무렵부터였는데, 학문적 접근을 통한 고시조 탐구에 힘썼으며, 계속하여 당대 문학으로서의 시조에 대한 논의를 신문과 잡지에 게재하였다. 「시조란 무엇인가」(동아일보 1926. 11. 24~12. 13.), 「律格과 시조」(동아일보 1928. 11. 28~12. 1.), 「詩調源流論」(新生 1929. 1~5.), 「시조는 唱이냐 作이냐」(新民 1930. 1.), 「시조는 혁신하자」(동아일보 1932. 1. 23~2. 4.), 「시조의 발생과 가곡과의 구분」(진단학보 1934. 11.) 등 20여 편의 시조론을 잇따라 발표하였는데, 후에 이들을 모으고 재정리하여 『가람文選』에 실어 두었다. 근대시조에 대한 논의는 「시조는 혁신하자」에 집약되어 있는데, 같은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같은 지향을 보인다. 1932년 동아일보에서 기획한 설문을 통해서이다. 가람은 일관된 혁신론을 폈으며, 다른 작가들도 한결같이 ‘새로움’을 강조하고 나섰다. 염상섭은 시조를 “순문학으로만 보면 그만”이라고 함으로써 현재성을 추구하였으며, 정인섭은 시조가 ‘새로운 진로’를 개척해야 지지층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앞 시기의 “시조는 부흥할 것인가?”라는 가상의 설문에 비해 이 시기는 이미 부흥한 시조를 “어떻게 가꾸어 나갈까?”라는 질문을 설정한 단계로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 이론을 발표할 무렵인 1926년에 ‘시조회’를 발기하였고, 1928년 이를 ‘가요연구회’로 개칭하여 조직을 확장하면서 작가의 발굴과 보급에도 앞장섰다. 창작에 대한 정보는 잘 알 수 없지만 이시기에 창작도 함께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1939년에 『가람시조집』이 간행되었는데, 여기에 수록된 그의 전기 시조들은 〈난초〉로 대표되는 자연관조와 〈젖〉에 나타난 인정물 등 순수 서정 지향성이 강했다. 그 뒤 옥중작인 〈홍원저조(洪原低調)〉 등에서 사회성이 다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의 후기작은 6 · 25사변의 격동을 겪으면서 시작되어 사회적 관심이 더욱 뚜렷해졌으며, 비리의 고발, 권력의 횡포에 대한 저항이 후기의 특징을 이루면서 현대시조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그는 「時調와 그 硏究」에서 시조 운동이 점점 성하게 되는 상황을 말하고, 그것에 대하여 조소 혹은 배척 혹은 말살까지 하려는 이들이 있다고 전제함으로써 논쟁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항목별로 들어서 해명하고 그 가치를 천명하면서 고시조론을 전개하였다. 시조가 고전적이라는 공격에 대해서는 고전의 가치를 역설하고 그 改新과 改善을 제안하였다. 시조가 형식적이라는 견해에 대해서는 모든 시는 본질적으로 적합한 형식을 선택하는 것이며, 시조가 오히려 자유스러운 정형시라는 점을 역설하였다. 시조가 문자유희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唱의 전통에서 그러하였음을 해명하고, 앞으로 창작과 감상의 대상인 詩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제안을 하였다. 이런 전제 아래서 고시조의 명칭, 형식, 유래, 음악 등 학술적 고증을 전개한 것이다. 동시에 동일한 주제를 가진 고시조와 현대시조를 대비시켜 현대화의 가능성과 당위성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혁신론에서도 이러한 견해를 되풀이하고, 고시조형을 맹목적으로 고수하거나 어설프게 파괴하는 태도를 동시에 경계하면서, 치열한 작가의식과 진지한 창작 태도를 강조하였다. 그리고 혁신의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그것은 實感實情을 表現하자, 取材의 範圍를 擴張하자, 用語의 數三, 格調의 變化, 連作을 쓰자, 쓰는 법과 읽는 법 등 여섯 개 항목이다. 실감실정론에서는 “그저 한 타령으로 하는 생각”과 “남의 정신을 가지고 함” 때문에 고시조가 발달되지 못했다고 진단하고, 그러한 고시조의 예를 여러 편 들면서 비판하였다. 생활과 유리된 관념적 삶을 노래한 작품을 타령으로 분류하고, 한시를 번역하거나 용사한 작품을 남의 정신으로 규정하였다. 이것을 극복하고 내용을 혁신하되, 주관으로 하는 서정과 객관으로 하는 서경 즉 절실한 감정이나 색채가 가득한 감각적 경관을 표현하라고 주문하였다. 취재 범위론에서는 서로 다른 고시조 작품들 사이에 장 단위로 겹치는 예를 여럿 들고, 그것이 한시 작법의 영향임을 말하였다. 이를 탈피하기 위해서는 관찰력을 늘리고 깊이 완상할 것과, 작은 사물을 세밀하게 살피라고 권한다. 용어의 선택에 대해서는 漢文句語의 남용을 먼저 지적하였으며, 조선말 중에서도 종장 첫구에 흔히 쓰이는 “아희야”, “아마도”류를 경계하고, 끝음보의 감탄형 어미 같은 상투어 사용을 경계하였다. 그 대신 한자어도 조선어화한 어휘와 서구 외래어도 활용해야 한다고 권장하였다. 격조론에서는 음악으로서의 시조보다 문학으로서의 시조, 부르는 시조보다 읽는 시조 짓는 시조를 강조하였다. 더 구체적으로 귀족에게보다는 평민에게, 농민에게보다는 시민에게 받아들여질 만한 기준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연작은 연시조를 뜻하는 말로, 오늘날 생활상이 예전보다 퍽 복잡해지고 새 자극을 많이 받기 때문에 단수로서는 부자연스럽다는 판단에서 나왔다. 한 제목 아래 여러 수의 시조를 쓰되, 각편 사이에 “감정의 통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각편이 독립한 것이면서도 감성의 통일이 이루어지면 좋은 작품이지만, 반대로 제목만 같거나 독립성이 없는 작품을 경계하였다. 물론 이러한 논의가 서로 독립된 것은 아니고, 한 작품에서 두루 추구되어야 할 사항들이다.
나의 무릎을 베고 마지막 누우시던 날 쓰린 괴로움을 말도 차마 못 하시고 매었던 옷고름 풀고 가슴 내어 뵈더이다
까만 젖꼭지는 옛날과 같으오이다 나와 나의 동기 어리던 八九 남매 따듯한 품안에 안겨 이젖 물고 크더이다
<젖> 전문이다. 어머니의 임종이라는 절박한 체험을 읊으면서도 감성어는 “쓰린 괴로움” 하나에 그쳤다. 실감실정을 설명하던 “절실한 감정이나 색채가 가득한 감각적 경관”의 전형인 듯하다. 첫수는 어머니가 제재인데 화자는 담담히 묘사만 하고 있다. 그렇지만 매었던 옷고름을 푸는 행위는 살아온 세월을 함축하고, 그를 무릎에 뉜 화자는 그것을 다 받아들이기 때문에 말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둘째 수는 화자의 관찰이다. 詩眼은 “八九 남매”이다. 자기 남매의 수를 어떻게 어림수로 표시할 수 있을까?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의 갈림이다. 죽은 자까지 마지막으로 불러모으는 것이 같이 물었던 “이 젖”이다. 가람의 이론은 이렇게 절실한 데서 나온 것이다. 가람의 시조 혁신론은 창작 방법론으로서 매우 구체적이기는 한데, “혁신”이라는 말이 함의하듯이 바꾸어야 할 원자료로서 그 무엇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다음에 혁신의 방향이나 목표나 방법 등이 요구된다. 이때의 원자료는 고시조이며, 혁신된 시조는 고시조와 다른 장르가 아니라 고시조의 근본 정신을 구현하는 것이며, 그 근본 정신은 조선민족이 원래 가졌던 신성한 원형이다. 고시조는 그 근본 정신이 왕조 사회와 한문화에 의해 훼손된 것이므로, 이것을 혁신하여 근본 정신을 담을 수 있는 양식으로 가꾸어 가자는 뜻이다. 그가 끊임없이 고전을 찾고 연구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혁신론은 달리 말하자면 “전통론”이다. 가람의 전통론은 그가 처한 민족의 현실에 대한 학자로서의 인식과 대응이다. 그가 시조론을 전개하고 창작과 지도를 계속하고, 시조집을 간행한 시기가 대체로 1930년대 초에서 10여년 사이인데, 이 시기의 국내외 정세에 대한 대응이자 문학적 모색의 과정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일제는 1930년대 초반부터 조선의 고적에 대하여 조사와 보존 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조선의 식민지화가 안정되었고, 조선의 고적도 일본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는 판단에서, 일본의 지식과 기술이 조선을 재건해 준다는 등의 동화 정책이었다. 가람의 기행문과 기행시조가 조선의 역대 도읍지였던 경주, 부여, 개성, 익산, 전주 등에 집중된 것도 이와 관련이 있으며, 특히 석굴암이 주요 소재가 된 것도 거기에 일제의 사업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고적 복원을 통하여 일제가 조선의 일본화를 진행할 때, 가람은 그것을 통해 민족 문화의 전통을 확인하고 그 전통을 계승하려 했던 것이다.
한고개 또 한고개 고개를 헤어오다 吐含山 넘어서서 東海바다 바라보고 저문날 돌아갈 길이 바쁜 줄을 모르네
보고 보고지어 이곳에 石窟庵이 험궂은 고개 넘어 굽이굽이 도는 길을 잦은 숨 잰걸음 치며 오고 오고 하누나
<석굴암> 전문이다. 앞의 <젖>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석굴암>에는 석굴암이 없다. 첫수에서는 고개와 산과 바다와 저문날이 시간과 공간을 이룰 뿐 그 속에서 화자도 대상이 되었다. 둘째 수에서는 보고 싶어 서두르는 화자의 행위만 있지 그 대상인 석굴암은 이름으로만 있다. 석굴암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전략이다. 석굴암이 들어앉은 고개와 산과 바다, 거기에서 화자는 날저물어도 돌아갈 길이 바쁘지 않다. 그 산해가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뒷수에서는 석굴암이 보고 싶다고 하면서도 보지 않았으니, 여기서 보고 싶다는 것은 “오고 싶다”와 동의어이다. 화자의 석굴암은 일제가 복원하고 수리한 “돌”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고 지녀온 정신임을 뜻한다. 엄혹한 시기에 문학을 통한 문화적 주권국 의식을 어떻게 드러내었는지 알게 한다. 한편 1930년대 중반을 넘어, 특히 1937년 중일전쟁 승리를 계기로 일제는 대동아(大東亞) 정책을 강력하게 실시하였다. 지금까지의 서구식 근대화에 편승하였던 일본의 정책을 미래의 동양화로 바꾸고, 서양을 적대시하는 하나의 동양을 구축하려 하였으며, 이는 자연히 일본화와 동일시되었다. 현실적으로 조선의 지식인들이 가까운 장래에 이러한 일본의 객관적 물리력과 정교한 정책을 극복하고 독립을 이룬다는 생각을 견지하기에는 힘겨웠다. 많은 지식인들이 대동아 정책에 휩쓸려 들어간 것을 현실적 이익 추구나 의지 박약 탓으로 단정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이러한 정황 속에 일본어의 국어화 정책과 이에 대응하여 조선어를 지키려는 노력이 문학론에 표출되었다. 도구로서가 아니라 정신의 그릇으로서 조선어는 문학에 가장 잘 구현되며, 문학 중에서도 고전은 전통을 잘 간직한 실체일 뿐 아니라 일제의 국어화 정책을 비켜갈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또 고전을 통한 전통론은 현대의 정책과 정면으로 마주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시조론이 고시조에 편중되고, 『문장』지에 게재된 문학론이 일제에 저항하지 못하고 현실순응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이러한 대응과 무관하지 않다. 이것을 단순히 민족의식의 약화 또는 타협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4. 현장성과 대중화
노산 이은상(1903~1982)은 문학 애호가에게는 물론 대중들에게도 가장 친근한 시인 중 한 사람이다. 주된 이유는 아마 그의 많은 시조 작품이 노래로 작곡되었고, 널리 불린 데 있을 것이다. 애독자보다 애청자가 더 많다고 해야 할까? 이로 인해 그에 대한 인상은 다정다감한 시인, 격정적인 문장가 등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문학을 포함한 국학의 여러 영역에 걸쳐 치밀한 이론을 전개한 학자이기도 하다. 시조도 그 중요한 영역 중 하나이다. 「시조 문제」(동아일보 1927.4.30.∼5.4.), 「시조 단형추의」(1928.4.18.∼25.), 「시조 창작문제」(1932.3.30.∼4.9.)> 등이 그것이다. 1932년에 간행된 첫 시조집 『노산시조집』에는 그러한 이론을 반영한 작품들이 실려 있다. 노산의 시조 형식론은 유의해서 살펴 보아야 한다. 그는 가람의 소위 “자유스러움”을 더욱 구체화하였는데, 이는 변동과 제약을 동시에 뜻하기 때문이다. 우선 그는 시조의 형식을 아주 중시하였다. 「시조 단형추의」에서 평시조 각장의 구(음보)별로 서로 다른 한계 자수를 제시하였는데, 口調 朗讀에 적의하다고 인식된 것에 관심을 두었다고 하였다. 이 글의 서두에서 시조의 형식은 樞要의 문제이며, 시조의 형식이 굳건하였으므로 오늘날 시조를 논하고 창작할 수 있다고 그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또 고시조를 부른 ‘歌曲’에 대하여 설명하고, 그것은 음악가에게 맡기고 오직 ‘읽는 시’로서 형식을 논하자고 함으로써, 시조 배격론자들이 시조는 귀족적 창에 묶였다고 공격한 것을 일축하였다. 한계 자수율을 정할 때, 고시조의 자수를 단위별로 분석하여 한계 자수를 추출하고, 여기에 다시 읽는 시로서의 가능성을 고려하여 새로운 한계 자수율을 제안하였다. 여기에는 서로 다른 자수 사이의 시간적 등장성 개념이 적용되었으며, 이것을 음표로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것이 지나친 압박이 되는 것을 경계하여 다른 큰 의미는 없다고 첨언하고 각 구의 장단에 있어서는 상하를 조응하여 전체의 조화를 얻으면 그만이라고 하여, 낭독의 음향적 효과를 중시한 점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종장의 제 1구는 3자로 고정하자고 하였으니, 이는 관습이 그러하고 읽는 시로서 적합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 제 2구는 5자에서 8자까지로 제안하였는데, 이는 종장이 轉結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라는 구조적 개념을 활용한 것이다. 「시조 창작문제」에서는 이제 시조가 튼튼하게 자리잡았다고 하면서 내용론으로 시작하였다. 내용을 題材와 思想이라고 규정하고, 고시조 문헌의 분류를 소개한 뒤 오늘날 사회와 문학관이 달라졌으므로 폐기할 것과 추가할 것을 예로 들었다. 그 중 “국토”와 “민족”을 새로운 제재로 제시한 점은 그의 창작 경향과 일치한다. 이를 심화시켜 내용을 “무엇”의 문제보다 “어떻게”의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고 하였다. 더 구체적으로는 이것이 생활과 문학의 관계이며, 시가란 자기 생명 내지 생활의 표현이므로 시조의 내용은 자기화와 현대화라고 하였다. 여기서 이루어진 논의 중 특이한 것은 행 구성에 있어서 4장시조와 양장시조론이다. 4장시조는 고시조 중에서 초장이나 중장이 짝을 이루면서 길어진 것이나, 7언율시 현토식 장시조를 두고 스스로 명명하였다고 하였으나, 시조가 아닌 4행시가 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창작을 권장하지는 않았다. 양장시조는 좀 다르다. 3행으로 부족하면 4장시조가 있듯이 3행까지 불필요하게 되는 경우에는 양장시조가 있을 수 있다고 파격적으로 주장하였다. 고시조에는 없지만 현대시조에서는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례로 든 작품은 초장과 중장을 합하여 한 장으로 만들고, 그럼으로써 더 압축미가 있다고 하였다. 실제로 그가 창작한 양장시조 6편이 1932년에 간행된 『노산시조집』에 실렸으며, 이후 1958년에 간행된『노산시조선집』과 그 후에 간행된 시조집에는 20여 편이 실린 것으로 보아 양장시조를 한때의 시도로만 끝내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뵈오려 못뵈는님 눈감으니 보이시네 감아야 보이신다면 소경되어 지이다.
1931년에 지은 <소경되어지이다>라는 단수 양장시조이다. 노산이 주장한대로 “3행까지 불필요해서” 양장으로 지었다. 이 작품은 엄격히 말해서 3행까지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2행으로 쓰기에 적합한 구성이다. 초장과 중장을 압축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시조의 변형인가, 별개의 양식인가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가질 만하다. 또 행구분을 다양하게 하여 현대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 점은 후대의 시집으로 갈수록 더 다양해지며, 같은 작품을 다른 시조집에 재수록할 때도 원작보다 더 많은 행으로 나누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이것을 “먼저는 그 말 그 시상에 대한 작자의 주관적인 강조 심리에서요, 다음은 독자로 하여금 작자의 호흡을 따라 객관적으로 공명하게 함으로써 작자의 체험세계를 같이 맛보게 함에 효과를 거두게 하자”는 의도와 함께, “시조도 자유시와 마찬가지인 시가적 성격에서 같은 이론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으로 의의를 천명하였다. 이것은 시조의 현대성에 대한 강조하고 하겠다. 이러한 형식론은 주제적 지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그에게 있어서는 “솟아오르는 詩想이 저절로 時調라는 하나의 도가니 속에서 용해되었다가 다시 그대로 鑄成되어진 것”으로서, 이것이 곧 “내용과 형식이 둘이 아니요, 하나임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1958년에 간행된 『노산시조선집』에서 표명한 말이기 때문에 1920년대 생각 그대로라고 할 수는 없지만, 시조의 문예적 가치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발견하고 수용한 시조라는 장르에 대하여 확신과 사명감을 가지는 경지에 이른다. “거기에 내 문학적 생명을 걸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는 시조와 함께 사는 사람이다. 그날 그날의 일들을 소재로 하고 시조를 읊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 길을 가야 할 것을 잊은 적이 없다. 다만 거기에 정진하지 못했을 따름이다.”라는 노년의 고백은 시조의 당대성과 일상성에 대한 지향을 강하게 드러낸다. 정진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러한 성취를 자신하는 겸사이고, 그날 그날의 일이 시조의 소재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현대 장르로서 충분하다는 뜻이다.
고개를 숙으리니 모래 씻는 물결이오 배뜬 곳 바라보니 구름만 뭉기뭉기 때묻은 소매를 보니 고향 더욱 그립소.
<고향생각> 두 연 중 뒷연이다. 창작 시기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견해가 있지만, 1923년 8월 15일 가덕도에서 지었다는 고증이 있으니, 갓 스물 예민한 문학청년 때 작품이다. 대체로 노산의 시조 창작이 1928년부터 시작되었다는 통설에 비겨 보면 한참 시차를 둔 초기 작품이다. 그가 말한 “그날 그날의 일”이 곁에서 보는 듯이 선명하다. 그리고 시조가 무엇인지 감각적으로 체득하였다. 초장에서 고개를 숙인 발밑의 정경, 중장에서 고개 들고 바라보는 구름의 모습은 근경과 원경으로서 서경이다. 종장의 “때묻은 소매”는 외로움, 서러움, 그리움 같은 여러 가지 명사를 합친 정도의 사물이다. 그 맞은편에 고향이 있으니 고향은 또 행복, 안정, 편안함 등 여러 개의 명사를 겹친 값을 한다. “시조도 자유시와 마찬가지인 시가적 성격”이 이런 것이다. 노산의 시조는 끊임없이 조국과 강산을 노래한다. 그는 노래하기 위해 조국과 강산을 찾아다니기도 했고, 찾아다닌 것을 노래하기도 했다. 유난히 활동적인 사람이어서 거침없이 나서기도 했지만, 수학과 수행의 과정도 있었다.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울분에 차서 도시를 떠나기도 했고, 이름을 숨긴 채 숨어 살아야 할 때도 있었다. 심지어 타지의 감옥으로 이감되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을 수많은 기행시조로 썼다. 당연히 애환의 격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였지만, 그의 시조론이 추구한 “자기화와 현대화”를 잘 보여주었다.
신은 사람을 지어 신의 입김을 불어넣었다 사람은 땀을 흘려 땅을 숨쉬게 했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鼓動소리 들린다.
뜨거운 햇볕 비와 바람 구슬 같은 땀에 젖어 땅은 언제나 부푸는 꿈과 보람 풀 나무 온갖 곡식들 땅의 자서전이다.
<땅의 자서전> 전문이다. “신, 사람, 땅, 비바람, 보람, 초목, 곡식”이란 관념어들을 짧은 시형 그것도 시조라는 정형시 안에 조합해 넣으면서 신선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노산은 그가 말한 “어떻게”를 활용하여 시의 완성도를 극대화하였다. 초장은 성경의 인간 창조를 용사(用事)하였으며, 중장은 연쇄법으로 사람과 땅의 관계를 만들었다. 종장에는 땅이 사람과 신을 품게 하였다. 전통적인 “천지인(天地人)” 관계를 재편한 것이다. 둘째 수도 그러하다. 초장에서는 하늘과 사람이 땅을 가꾸는 도구가 되었다. 중장은 꿈과 보람이라는 최종 의미이다. 종장은 꿈과 보람의 구체적 항목들이다. 당연히 중장과 종장이 바뀌어야 전형이 된다. 그렇지만 자서전이라는 부분을 꿈이라는 전체와 도치시켜서 구체성을 확보하였다. 기행시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실제 공간 체험을 “어떻게” 표현하여 “자기화 현대화”하였는지 잘 보여준다. 이러한 이론과 주장을 펼친 사람들이 시조 창작에서도 획기적인 공헌을 하였거니와, 그들에게 영향을 받거나 길러진 사람들이 시조를 폭발적으로 확산시킴으로써 시조문학은 또 한 단계 진화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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