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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강 대추(棗)와 밤(栗)
1. 향당편 4장
공자가 임금을 모시러 궁궐을 드나들 적에 어떻게 들어갔는지 적어놓은 향당편이라는 게 있다. 공자의 생활 모습을 적은 향당편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入公門, 鞠躬如也, 如不容.
선생님께서는 궁전의 정문을 들어설 때는 마치 자신의 자리가 아닌 듯 몸을 굽히셨고,
공문(公門), 광화문 같은 큰 문을 들어가는데, 국궁여야(鞠躬如也)라 한다. 국궁(鞠躬)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어깨를 수그리고 가는 것을 말한다. 여(如)는 모습을 형용하는 것이다.
여불용(如不容)은 자기 몸을 좁혀서, 자기 몸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수그리고 들어갔다는 것이다. 아주 초라한 모습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立不中門, 行不履閾.
문의 중앙에는 멈춰 서지 않고, 문지방을 넘을 때는 발로 밟지 않으셨다.
그렇게 들어가면 가운데 중문(中門)이 있다. 거기 가서는 가운데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옆문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왕은 가운데 문으로 들어가지만, 자신은 옆문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넘어갈 때 반드시 문지방을 밟지 않았다.
過位, 色勃如也, 足躩如也, 其言似不足者.
군주의 좌석 앞을 지날 때는 긴장한 얼굴로 천천히 걸으셨다. 말을 할 때는 더듬는 것 같으셨다.
그리고 지나가면 정1품, 정2품 등이 적혀있는 위계석들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경복궁을 들어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위계석이 있는 곳을 지나갈 적에 얼굴이 불그스레하게 되고, 긴장이 되어서 발걸음은 종종걸음을 쳤다. 그리고 말씀을 하는 것을 보면, 뭔가 말이 제대로 안 나오는 것처럼 떠듬거리고 부족한 듯이 말을 했다.
攝齊升堂, 鞠躬如也, 屛氣, 似不息者.
옷자락을 걷어올리고 계단에서 당을 오르실 때는 몸을 굽히셨고 숨을 죽여서 마치 숨쉬지 않으셨던 것 같으셨다.
그 다음에 계단이 있고 근정전이 나타난다. 제(齊)라는 것은 옷의 제일 하단 부분을 말한다. 섭(攝)이라는 것은 그 옷을 드는 것이다. 계단을 올라갈 적에는 치마를 들고 걷는 것처럼 옷을 들어올리고, 어깨를 움츠리고 올라가셨다는 것이다. 아주 공손한 모습이다. 그리고 숨을 멈추어 거의 숨을 안 쉬는 것 같았다.
出, 降一等, 逞顔色, 怡怡如也.
당에서 내려갈 때는 한 계단 내려갈 때마다 안색이 펴지면서 여유 있는 모습이 되셨다.
그렇게 하고 임금님 앞에서 일을 보고나면, 다시 나와서 한 단을 내려오시면 얼굴색이 편안해지면서 여유 있는 모습이 되었다.
여러분들이 교수실에 들어와서 학점 등을 상의하고 나갈 적에 등을 보이면 안 되는 것이다. 이게 중요한 것이다. 요새 학생들은 나갈 적에 문을 탁 열고 나간다. 반드시 돌아서서 인사를 하고 나가야 한다. 등을 보이면 안 되는 것이다. 그걸 모르고 있다.
沒階, 趨進, 翼如也.
계단을 다 내려와 종종걸음을 하실 때는 날개라도 달린 듯 경쾌히 걸으셨고
그러고 나서 계단을 다 내려오면 걸음이 빨라진다. 이제 살았다는 기분으로, 아까는 종종 걸음으로 들어오셨는데 나갈 때는 씩씩하게 옷이 날갯짓을 하듯이 가셨다.
復其位, 踧踖如也.
자신의 좌석에 돌아와서는 차분하면서 여유 있는 모습이 되셨다.
-향당 4
그리고 공무를 보는 자기 자리로 오면 건강하게 척척 일을 해 나가셨다.
2. 팔일편 19장
定公問 : “君使臣, 臣事君, 如之何?”
孔子對曰 : “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
-팔일 19, 도올논어2, 321쪽
여기 또 중요한 이야기가 나온다. 정공이라는 사람은 BC 509년에서 495년까지 재위했던 사람이다. 공자가 대사구를 지낼 때 모신 군주였다.
그런데 공자와 정공의 관계는 애증관계가 있다. 정공은 공자를 상당히 존경해서 결국 등용했지만, 또한 공자를 내쫓은 사람이다. 그래서 이 정공 때문에 유랑길을 가게 된 것이다. 훗날 애공의 아버지다.
정공(定公) : BC 509년에서 495년까지, 15년 간 재위한 노나라의 군주. 소공의 동생, 애공의 아버지. 공자가 대사구 시절에 모심.
이 정공이 묻는다.
君使臣, 臣事君, 如之何?
이 대화는 공자가 노나라에서 벼슬할 시절, 그러니까 공자 나이 50여세 때의 대화로 추정된다.
임금이 신하를 부리고, 신하된 자로서 임금을 섬기는 것은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정치의 본질이다. 임금은 아랫사람을 어떻게 부리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 것입니까? 하고 물으니깐, 공자가 대답을 한 유명한 말이 여기에 있다.
임금은 신하를 예로서 부리고, 신하는 임금을 충으로서 섬겨야 합니다.
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
여기서 나오는 ‘사군이충(事君以忠)’이라는 말이 우리나라 화랑의 세속오계에서 제1명제가 된다. 이 말은 원광법사가 만들어낸 말이 아니고, 논어의 구절이다.
사군이충의 충(忠)은 외재적 권력에 대한 충성심(loyalty)이 아니라 마음 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truthfulness)을 의미한다.
이미 신라 시대 때 논어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읽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원광법사의 세속오계는 어떻게 되는가? 사군이충, 사친이효, 교우이신, 임전무퇴, 살생유택이라고 했다.
화랑의 세속오계 : 1) 事君以忠 2) 事親以孝 3) 校友以信 4) 臨戰無退 5) 殺生有擇
사군이충·사친이효 : 유교의 충효(수직적 관계)
교우이신 : 화랑간의 수평적 관계
임전무퇴 : 멸사봉공의 공동체적 희생정신
살생유택 : 불교사상의 세속화
여기가 지역적으로 백제다. 여기 백제문화연구소는 옛날부터 유명한 곳이다. 세계적인 연구소다. 충남대학은 백제문화의 요람이다.
백제연구소 : 1964년에 설립된 충남대학교의 대표적 연구소로서 백제학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백제연구』를 발간.
우리나라 국민들이 충남대학을 잘 모른다. 이 충남대학은 세계적인 대학이다. 왜냐하면 여기 대덕 연구단지에 우리나라의 박사들만 몇 만명이 와 있다. 그러니깐 진짜 유성(儒城)이다. 여기 유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박사가 사는 동네다. 충남대는 대덕연구단지하고 공동으로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 많다. 그래서 충남대는 연구의 질이 아주 높다.
3. 계백장군
나는 충남대에 와서 캠퍼스가 너무 아름다워서 놀랐다. 옛날 문화동에 있을 때는 가보았는데, 유성은 처음 와 봤다. 정말 아름답다. 이렇게 좋은 데서 공부밖에 할 게 더 있나? 우리나라의 지방 지방마다 이렇게 좋은 대학이 있다는 게 놀랍다. 캠퍼스가 아름다워서 꼭 내가 미국에 온 거 같다. 그렇게 캠퍼스가 아름답고 좋다. 그리고 또 여기 학생들이 그렇게 양반스럽다.
그런데 충남대의 상징인 백마상은 바로 계백장군이 마지막에 타고 나갔던 말이다.
660년 황산벌 싸움이 있었던 황산벌은 바로 이 근처다. 거기서 나당연합군과 백제가 싸웠다. 중국 당고종 때 우리나라를 쳐들어온 것이다. 신라하고 연합해서, 수 만 대군이 왔다.
唐顯慶五年庚申, 高宗以蘇定方爲神丘道大摠管, 率師濟海, 與新羅伐百濟.
당나라의 현경(顯慶) 5년 경신(660)에 고종이 소정방을 신구도대총관(神丘道大摠管)으로 삼아,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신라와 더불어 백제를 칠 때,
계백장군은 오천명의 결사대를 모집해 나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階伯爲將軍, 簡死士五千人, 拒之曰 :
계백은 장군이 되어 결사병 5천 명을 뽑아 대항하면서 말하였다.
“일국의 사람으로 수 만 명의 나당 대군을 우리가 접하게 되었으니 국가의 존망을 알 수 없다.”
“以一國之人, 當唐羅之大兵, 國之存亡, 未可知也.
“한 나라 사람이 당나라와 신라의 대군을 당해내야 하니 국가의 존망을 알 수 없다.
그러면서 “나의 처자식은 분명히 나라가 망하게 되면 노비가 되고 말테니, 그렇게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내 손으로 차라리 죽이고 가는 게 낫다.” 그래서 자기 부인하고 자식들을 다 죽인다.
恐吾妻孥, 沒爲奴婢, 與其生辱, 不如死快.”
내 처와 자식들이 포로로 잡혀 노비가 될지 모르는데, 살아서 욕을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쾌히 죽는 것이 낫다.”
그리고 5천명 결사대를 이끌고, 계백은 백마를 타고 황산벌로 간 것이다. 이 마지막 장면에 얽힌 설화가 많다.
그런데 신라 쪽에서 워낙 세게 나오니깐, “삼국사기 계백전에 보면 옛날에 월왕 구천이 5천명을 데리고 오나라 부차의 대군 70만명을 쳐부셨다. 나를 따르는 그대들이여, 싸워 이겨 국은에 보답하자.”고 한다.
昔句踐以五千人, 破吳七十萬衆, 今之日, 宜各奮勵決勝, 以報國恩.
“옛날 구천(句踐)은 5천 명으로 오나라 70만 군사를 격파하였다. 오늘은 마땅히 각자 용기를 다하여 싸워 이겨 국은에 보답하자.”
遂鏖戰, 無不以一當千, 羅兵乃却.
드디어 힘을 다하여 싸우니 한 사람이 천 사람을 당해냈다. 신라 군사가 이에 물러났다.
그리고 1당 100이 아니라 1당 1,000이라고 했다. 그렇게 나가니깐 나당연합군이 계백한테 밀렸다.
4. 관창
그런데 저쪽에는 부장으로 관창이 있었다. 이게 화랑의 이야기다. 임전무퇴에 걸리는 이야기다. 관창은 김유신의 동생인 품일이라는 사람의 아들이다. 그 당시 나당연합군의 부장인데 나이가 16세였다.
관창(官昌) :
황산벌 나당연합군의 부장(副將). 김유신의 동생인 품일(品日)의 아들.
爾雖幼年有志氣, 今日是立功名, 取富貴之時, 其可無勇乎?
“너는 비록 어린 나이지만 뜻과 기개가 있으니 오늘이 바로 공명을 세워 부귀를 취할 수 있는 때이니 어찌 용기가 없을손가?” 하였다.
품일은 관창에게 “이제 우리가 국가를 위해서 너의 기개를 펼 날이 왔다. 진격하라!” 그러니깐 16세 소년 관창은 나당연합군을 데리고 계백이 있는 곳으로 쳐들어갔다.
그런데 계백한테 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계백한테 생포가 되었다. 갑옷을 벗기고 보니깐 16세 동안(童顔)의 소년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아마 계백에게 관창 같은 아들이 있었을 거 같다. 바로 자기가 아들을 죽이고 나왔다. 그러니 거기서 관창을 또 죽일 수 있었겠나? 그래서 계백이 거기서 관창을 못 죽이고 말한다.
“신라군의 16세 소년이 이렇게 위대한 기개를 가지고 있는데, 하물며 나이 많은 장년의 병사들은 어떻겠느냐? 기특하다.” 하면서,
新羅多奇士, 少年尙如此, 况壯士乎?
“신라에는 뛰어난 병사가 많다. 소년이 오히려 이러하거든 하물며 장년 병사들이야!”
“다시 돌아가라.” 하면서 관창을 묶어서 말에 태워 보낸다.
乃許生還.
살려 보내기를 허락하였다.
그런데 화랑은 임전무퇴였다. 관창은 화랑 출신이다. 세속오계에 따라서 관창이 돌아가서 “내가 저쪽 장군의 목을 못 베고, 저쪽의 깃발을 빼앗아 오지 못한 게 나의 한이다. 난 여기서 살 수가 없다.”라고 하고 다시 쳐들어간다.
向吾入賊中, 不能斬將搴旗, 深所恨也, 再入, 必能成功.
“아까 내가 적지 가운데에 들어가서 장수의 목을 베지 못하고 그 깃발을 꺾지 못한 것이 깊이 한스러운 바이다. 다시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
다시 쳐들어갔지만 계백한테 당할 수가 없었다. 계백은 위대한 장군이었다. 그래가지고 계백은 꽃다운 16세 관창의 목을 날린다. 그리고 관창의 목을 말안장에 묶고 말을 돌려보낸다.
階佰擒斬首, 繫馬鞍送之.
계백이 잡아서 머리를 베어 말 안장에 매어 보내었다.
그러니깐 김유신 동생인 품일은 자기 아들인 관창의 목을 치켜들고, 그 아이의 피를 소매로 닦으면서 “여기 내 아들의 얼굴이 살아있는 거 같다. 국가의 일을 위해 내 아들이 이렇게 죽었으니 나는 후회가 없다.”고 한다.
品日執其首, 袖拭血曰 : “吾兒面目如生, 能死於王事, 無所悔矣.”
아버지 품일이 그 머리를 손으로 붙들고 소매로 피를 닦으며 말하기를 “우리 아이의 얼굴과 눈이 살아 있는 것 같다. 능히 왕실의 일에 죽었으니 후회가 없다.” 하였다.
그렇게 하니깐 삼군(三軍)이 그걸 보고서, 강개한 마음이 생긴다. 그리고 진격해서 백제를 쳐부쉈다. 관창의 죽음 때문에 백제가 밀리고 만 것이다.
三軍見之, 慷慨有立志, 鼓噪進擊, 百濟大敗.
전군이 이를 보고 용기를 내어 뜻을 세워 북을 요란하게 쳐 진격하니 백제가 크게 패하였다.
거기서 계백이 최후를 맞이했다.
저 충남대의 백마를 볼 때 황산벌 싸움을 생각해 보라. 계백장군의 기개가 살아있는 백마를 잘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임전무퇴를 생각해보고, 국가를 위하는 화랑을 생각해보라.
오늘날 젊은이들은 그런 기개를 배울 필요가 있다. 관창이나 계백장군이나 모두 위대하다. 서로 적장이지만, 서로 끝까지 공동체를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그런 정신들이 과거에 산 사람들의 모습들이고, 그것이 양반의 본질이다. 그게 없으면 소인이다. 양반의 자격이 없다.
그러니깐 여러분들은 충남대에서 교육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처자를 죽이면서까지 백마를 타고 적군을 향한 계백의 마음으로, 진리를 향해 나갈 수 있는 기개가 있어야 한다.
5. 재아
哀公問社於宰我. 宰我對曰 : “夏后氏以松, 殷人以栢, 周人以栗. 曰, 使民戰栗.”
子聞之, 曰 : “成事不說, 遂事不諫, 旣往不咎.”
-팔일 21, 도올논어2 335쪽
이것도 멋있는 유명한 구절이다.
여기에 애공이 나왔다. 애공은 아까 말한 정공의 아들이다. 공자가 노나라에 돌아왔던 말년의 군주다. 이때 애공은 상당히 어린 군주였다고 한다. 공자의 아들뻘 되는 사람이다.
어린 군주와 재아라고 하는 공자의 제자와 나눈 대화를 공자가 듣고, 거기에 대해서 공자가 논평한 유명한 이야기다.
재아(宰我) :
본명은 재여(宰予).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학단에 일찍 참여. 29세 연하. 사과십철 중의 한 사람으로 자공과 더불어 언어(言語)로 꼽힘. 공자의 미움받는 제자로서 유명.
재아는 공자의 제자 중에 사과십철, 10명의 현인 가운데 들어가 있다. 자공과 더불어 언어(言語)로 꼽혔다. 그러니깐 말의 도사였다. 그런데 공자는 말 잘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눌어언이 민어행’이라고 했다.
子曰 : 君子欲訥於言, 而敏於行.
- 이인 24, 도올논어3 93쪽
말을 하는 데는 어눌할수록 좋고, 행동으로 옮길 때는 민첩할수록 좋다는 말이다. 이게 공자님 말씀이다.
그러니깐 재아는 공자한테 미움을 받게 되어 있는 사람이다. 말 잘하고, 머리 회전이 빠르고, 상황 상황 판단이 빠른 사람이었던 거 같다.
6. 공야장 9장
그래서 재아와의 관계가 참 묘하다. 한 마디만 읽어본다. 공야장에 나오는 말이다.
宰予晝寢.
재여가 낮잠을 자자,
재아가 낮잠을 자고 있다.
곡부에 가면 공자가 제자를 가르치던 곳이 있다. 정자 같은 곳에서 학생들하고 세미나를 했다. 공자가 옛날에 서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데 재아가 낮에 졸고 있었다.
내가 대학을 다니면서 강의를 하는데 상당히 보람을 느낀다. 우리 젊은 학생들은 졸지 않는다. 발랄하고 잘 듣는다. 그런데 가끔가다 조는 학생도 있다.
강의실에 들어가서 졸 사람은 안 들어가면 된다. 그런 곳이 대학이다.
난 옛날부터 강의실에서 조는 학생은 가만 두지 않았다. 왜 나로 하여금 강의하는 열정을 떨어뜨리냐는 것이다. 내 강의가 졸리다는 느낌이 얼마나 괴로운가? 그리고 그것이 다른 학생들에게 영향을 준다. 가뜩이나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졸린 것인데 다른 학생까지 졸게 된다.
그러니깐 내 강의가 졸리면 안 들어오면 된다. 대학은 안 들어오면 된다. 대학은 자유다. 그러나 강의실에 들어와서 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대학이라는 곳은 그런 곳이다. 고등학교랑 다르다. 그래서 난 대학에서 조는 학생은 가만 두지 않았다.
재아가 자니깐, 공자가 거기에 대고 말한다.
朽木不可雕也.
“썩은 나무에는 조각을 할 수 없고,
썩은 나무는 조각을 할 수 없고,
糞土之牆不可杇也.
거름흙으로 쌓은 담은 흙손질할 수 없으니,
썩어서 부슬부슬해진 흙으로는 쌓은 담은 흙손질을 할 수가 없다.
조각을 한다는 게, 바로 교육을 한다는 것이다. 인간을 빌딩하는 것이다. 인간의 모습을 만드는 것이다. 나무가 다 썩었는데, 거기다가 어떻게 조각을 하겠냐는 말이다. 재아에게 욕을 해도 이렇게 지독하게 욕한다. 잠을 자니깐 그렇게 욕한다.
공자님 말씀이 썩은 나무는 조각을 할 수가 없고, 부슬거리는 똥흙은 흙손질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於予與何誅?
재아에게 무엇을 꾸짖겠는가.”
내가 이런 재아에게 무슨 야단을 치겠느냐? 야단을 안치는 게 아니라, 야단칠 가치도 없는 놈이라는 것이다. 공자님 말씀이 얼마나 지독한가?
공자는 성인이라고 하는데, 웃기는 이야기다. 공자는 아주 정열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재아를 야단칠 때 이렇게 지독하게 야단친다.
Confucius was a passionate man.
그러면서 또 하시는 말씀이,
始吾於人也,聽其言而信其行;
“전에는 내가 사람들에 대해 그의 말을 듣고 그의 행실을 믿었는데,
내가 인간을 대할 적에, 그 사람의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의 행실을 믿었다는 것이다.
今吾於人也, 聽其言而觀其行。
지금은 내가 사람들에 대해 그의 말을 듣고 그의 행실을 살피니,
그런데 이제 사람을 대할 적에 그 말을 들으면, 반드시 그 행동을 살피게 되었다.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於予與改是。
재여의 낮잠으로 인해 이를 고쳤노라.”
- 공야장 9, 도올논어3 180쪽
내가 이 버릇을 재아 때문에 고치게 되었다.
이제 여러분들도 공자와 재아의 관계에 대해 감이 올 거다.
7. 양화편 21장
하나를 더 소개한다. 양화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宰我問: “三年之喪, 期已久矣.
재아(宰我)가 물었다. “3년상은 기간이 너무 오랩니다.
재아가 묻는다. 삼년지상은 너무 길지 않습니까? 재아가 말을 잘한다.
君子三年不爲禮, 禮必壞 ; 三年不爲樂, 樂必崩.
군자(君子)가 3년 동안 예(禮)를 행하지 않으면 예(禮)가 반드시 무너지고, 3년 동안 음악(音樂)을 익히지 않으면 음악(音樂)이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군자가 3년 동안 아무것도 안하고, 예를 지키지 못하고 그저 그냥 상(喪)만 지내고 있으면 예가 오히려 망가질 것이고, 3년 동안 상(喪)을 지내느라 음악을 하지 않으면, 음악이라는 게 전부 붕괴되어 버릴 것이라고 한다.
舊穀旣沒, 新穀旣升, 鑽燧改火, 期可已矣.”
1년이면 묵은 곡식이 이미 없어지고 새 곡식이 익으며 계절에 따라 불씨를 일으키는 나무도 바뀌니, 1년이면 그칠 만합니다.”
그리고 묵은 곡식이 다 없어지고 1년이면 새 곡식이 난다. 그리고 옛날에는 불씨를 1년마다 한 번씩 갈았다. 그래서 1년이면 불씨도 가는 판에 1년이면 되지 않습니까? 3년은 너무 비현실적입니다.
국가체제라는 것이, 예를 들면 임금이 붕어했다고 3년 동안 때려 치고 들어가서 복상한다고 움막을 치고 틀어 앉는다면, 이게 비현실적이지 않습니까? 재아는 가롯 유다처럼 이론이 있는 사람이다.
현실적인 정치를 우리가 해야 하는데, 어떻게 3년을 지냅니까? 1년으로 줄입시다. 공자한테 이렇게 권유를 한 것이다.
子曰 : “食夫稻, 衣夫錦, 於女安乎?”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상중(喪中)에 쌀밥을 먹고 비단옷을 입는 것이 네 마음에 편안하냐?”
그러니깐 공자가 그러면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쌀밥을 처먹고 비단옷을 입고 마음이 편하겠느냐?
曰 ; “安”
재아(宰我)가 대답하였다. “편안합니다.”
그런데 재아가 무식하게 앉아서, ‘네 편합니다.’라고 답한다. 그러니깐 공자가 얼마나 화가 났겠나?
“女安, 則爲之!
“네 마음이 편안하거든 그리 하라.
편하다고? 그럼 그렇게 해라!
夫君子之居喪, 食旨不甘, 聞樂不樂, 居處不安, 故不爲也.
군자(君子)가 거상(居喪)할 때에는 맛있는 것을 먹어도 맛이 없으며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으며 거처하는 것도 편안하지 않다. 이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니,
군자가 상(喪)에 거(居)할 때는 아무리 맛있고 달콤한 것을 먹어도 달콤할 수가 없는 것이고, 아무리 음악을 들어도 그것이 즐거울 수가 없는 것이고, 아무리 편안하게 살아도 그것이 편안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부모님 돌아가시면 3년 동안 상(喪)을 지내고 그런 짓을 안 하는 것인데,
今女安, 則爲之!”
네가 편안하거든 그리 하라.”
네가 편안하다고? 그럼 그렇게 해라!
그렇게 재아는 욕을 잔뜩 먹는다. 재아는 뭔가 공리주의적인 입장이 있는 것이다.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굉장히 날카롭게 문제를 지적한 것인데, 공자가 화를 내면서 말하니깐,
공리주의(utilitarianism) : 선의 기준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에 있다는 현실적 생각.
宰我出.
재아(宰我)가 밖으로 나가자,
풀이 죽어서 나갔다. 그러니깐 공자가 뒤에다 대고,
子曰: “予之不仁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재여(宰予)는 인(仁)하지 못하구나.
저 녀석처럼 불인(不仁)한 녀석이 어디 있냐? 저 재아의 불인(不仁)을 보라.
子生三年, 然後免於父母之懷.
자식이 태어나서 3년이 된 뒤에야 부모의 품을 벗어난다.
자식은 태어나서 최소한 3년은 되어야 부모님의 품을 떠날 수 있지 않냐? 3년 동안 기저귀 갈아주고, 먹여주고 다 해 주었는데, 그 뒤는 말할 것도 없고 3년을 그렇게 보살펴 주었는데,
夫三年之喪, 天下之通喪也.
3년의 상(喪)은 천하의 공통된 상례(喪禮)이니,
대저 3년의 부모님 상을 지내라고 하는 것은 천하의 통상(通喪)이라는 것이다. 천하에서 모두 통할 수밖에 없는 자연적인 이치라는 것이다.
이것은 재아의 공리주의적 입장에 대해, 공자가 강력한 도덕주의 입장을 표방한 것이다. 공리주의로 먹히려면, 그 공리주의를 가능케 하는 사회의 도덕적 기반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포근한 인정이 최소한 보장되어야 하지 않냐? 이러는 것이다. 그런데 너는 그게 편해?
予也有三年之愛於其父母乎!”
재여(宰予)도 그 부모(父母)에게 3년 동안의 사랑을 받았었는가?”
-양화 21-
저 녀석도 최소한 부모님한테 3년은 사랑을 받았을 텐데.
여러분들은 논어의 세계를 옛날의 도덕 교과서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 얼마나 적나라하게 입장과 입장, 아이디어와 아이디어가 충돌하고 있는가? 선생과 제자 사이에서도 충돌한다. 그리고 그것을 꾸짖는 공자의 입장이나 반박하는 사람이나 얼마나 멋있나? 그 입장들이 얼마나 멋있나?
8. 팔일편 21장
그래서 애공이 재아한테 물었다. 사(社)에 대해서 물었다.
哀公問社於宰我.
哀公이 宰我에게 社에 대해 묻자,
옛날 동네 어귀에 거대한 느티나무 같은 게 있으면 보통의 느티나무로 여기지 않았다. 옛날 사람들에게 나무라는 것은 어떠한 땅의 신적인 기운이 위로 솟은 것으로 보았다. 생명이 표출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느티나무 거목 같은 것은 신령한 것이다.
이것 자체가 생명의 지기(地氣)를 빨아서 분출한 모습이다. 나무처럼 위대한 것이 없다. 옛날 느티나무 같은 것은 신이 깃드는 곳이었다. 그래서 나무에 신줄을 걸고, 그 주변을 성역화시켰다.
지금은 대개 나무 밑에 평상을 깔고 노인들이 모여 놀고 있지만, 옛날에는 성스런 곳이었다. 이런 것을 옛날에 서낭당이라고 했다. 동네 어귀에 조그만 집을 지어놓고, 들락날락할 때 절도 하고, 거기다가 북어도 걸어놓고 그랬다.
지금 사직공원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옛날에는 나무가 있었고 주변을 성역화하였다. 이것이 원래 사(社)였다.
재아는 사(社)에 관해서 대답했다. ‘하(夏)나라는 소나무로, 은(殷)나라는 측백나무로, 주(周)나라는 밤나무로 사(社)를 삼았는데,
宰我對曰 : 夏后氏以松, 殷人以栢, 周人以栗, 曰 ; 使民戰栗.
재아가 대답하였다. “夏后氏는 소나무를 사용하고, 殷人은 측백나무를 사용하고, 周人은 밤나무를 사용하였으니, ˂밤나무를 사용한 것은˃ 백성으로 하여금 戰慄(두려워 떪)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왜 밤나무로 했느냐?’하면, 백성들로 하여금 전율케 하려 함이라고 한다.
사민전율(使民戰栗)
여기서 율(栗, 밤)은 율(慄, 두려움)과 통하는 쌍관어(pun)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재아는 이 해석을 통해 어린 애공에게 공포정치를 가르친 것이다.
成事不說, 遂事不諫, 旣往不咎.
도올논어2 335쪽
“이루어진 일이라 다시 해설할 수 없으며, 완수된 일이라 다시 간할 수 없으며, 이미 지난 일이라 다시 추구(追咎)할 수 없다.”
공자께서 이를 듣고 말씀하시기를, 이미 이루어진 일은 말하지 않겠다. 엎질러진 물에 대해서 내가 말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성사불설(成事不說)이라는 것은 지나간 일을 자신이 탓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재아에 대한 욕이다. ‘이 녀석아, 그 따위 말을 해버렸다는 거냐!’하고 욕하는 것이다.
이렇게 재아는 끊임없이 논어에 있어서 위대한 역할을 한다.
9. 결혼
여기서 대추와 밤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 우리나라에서 지금 가장 웃기는 게 뭐냐 하면 바로 결혼식이다. 결혼식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2, 3시간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다. 우리가 요즘 하는 결혼식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되어도 이만저만 잘못된 것이 아니다.
결혼식장을 보면, 신랑신부가 주례자 앞에 서고, 그 뒤로 십자가가 있다든지 한다. 즉 뭐냐 하면 두 사람이 주례자를 중계로 하여,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神)에게 공증을 받는 것이다. 그 공증을 받는 구조가 수직적이다. 그래서 공증 장소를 향해서 웨딩마치에 따라 들어가는 것이다.
현재의 결혼식의 공통구조는 두 사람의 결합의 공증방식이 수직적(vertical)이라는 것이다. 즉 결혼식장의 하객들과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옛날 우리 결혼식은 신부집 마당에 상을 차려놓고, 신랑신부가 마주서서 맞절하고, 수작례를 하였다.
신부집 마당에서 이루어지는 전통예식은 관세례(盥洗禮)·교배례(交拜禮)·수작례(酬酌禮) 등으로 이루어진다.
동네사람들이 주변에 동그랗게 모여서 그 장면을 보았다. 이것은 수직적 구조가 아니라, 원형의 수평구조다. 여기엔 주례자가 없다. 우리의 과거 결혼식은 유사라고 해서 제식을 진행하는 사람만 있지, 주례자라는 개념이 없다.
전통결혼식은 주례자도 없고 수직적 공증자도 없다. 두 사람의 결합의 공증은 그 마당에 모인 사람들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원형마당의 수평구조(horizontal structure)이다.
10. 새로운 결혼 문화
그리고 결혼이 끝나고 나면 폐백을 드린다고 한다.
“폐백(幣帛)을 드린다”는 의미는 완전히 왜곡되어 있으며 고례와 전혀 무관하다.
거기에 가면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앉아서 ‘아들딸 많이 낳아라.’하고 밤과 대추를 던져준다. 밤, 대추만큼 아이를 많이 낳으라는 뜻이다.
이것은 추저분하기 그지없는 짓거리들이다. 고례(古例)에도 없고, 족보도 없는 이상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잘못된 것이다.
옛날 결혼식의 구조에 대해 오늘 하나를 가르쳐 주겠다.
처음에 신랑이 들어간다. 씩씩하게 뚜벅뚜벅 혼자 들어간다. 그 다음에 신부가 들어가는데, 반드시 아버지하고 같이 들어간다. 그리고 아버지가 신랑한테 신부를 넘겨준다.
이런 결혼식을 여러분들은 다 알고 있다. 다들 이렇게 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거다. 이게 웃기는 이야기다. 이것은 옛날 봉건적인 서양의 중세기에 있었던 여자에 대한 소유개념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결혼 전 여자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 소유였다. 그래서 소유 노예를 인신매매하러 가는 것이다. 들어가서 신랑에게 ‘네 것이다. 이제 가져라!’라고 하는 것이다.
예식의 의미를 정확하게 생각해야 한다. 정말 내가 거짓말을 하나도 안 보탠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중세 봉건 시대의 여성에 대한 악질적이며 아주 잔악한 풍습의 유물이다. 이런 것을 우리 땅에서 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죄스러운 것이다. 말이 안 된다.
나는 결혼식 주례를 하지도 않지만, 한두 번 도올서원에서 모범적인 예식을 했다. 현대 예식을 내가 부정할 수도 없어서, 신랑이 들어올 적에 웨딩마치를 안 틀고 수제천 같은 우리 아악을 틀었다. 그리고 남자가 처음 들어갈 적에 신랑의 부모를 같이 모시고 들어간다. 그 다음에 신부가 들어갈 적에 양가부모가 들어간다. ‘우리가 이만큼 키워 주었으니, 이제 너희들이 잘 살아라.’라는 의미다. 이런 정도는 하나 바꿀 수 있는 거 아닌가?
현재 우리나라에서 자행되고 있는 결혼식은 서양의 퇴폐적 문화의 파행적 답습에 불과하다. 현재 의식화되고 있지 않은 비도덕적 구조는 반드시 개선되어야 한다.
- 도올
서양 것이라고 해서 아무런 의식 없이 받아들여진 아주 그릇된 관념들이 우리나라를 꽉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신부의 아버지가 신랑한테 바통터치를 하는 것은 정말 하지 말아야할 일이다. 우선 이런 것부터 타파해야 한다. 그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주례자도 필요 없다. 주례사라고 주절주절 떠드는데, 사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주례자들이다. 옛날에는 모인 사람들이 모두 주례자였다.
그래서 나는 주례사도 간단하게 몇 마디만 하고, 내가 한 마디 하면 같이 온 사람들이 낭독하고 끝낸다. 결혼식에 온 사람들이 공증을 해주는 것이니깐, 거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 주례사다. 나는 이렇게 주례사를 한다.
“이성적 삶은 끊임없이 더 나은 삶을 향해 새로움을 추구하는 충동이다. 결혼은 하늘과 땅의 만남의 시작! 연애의 시작! 아름다움을 향한 몸부림! 끊임없이 서로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자! 우리 모두 A와 B의 삶을 축복한다.”
11. 친영
원래 결혼식은 원래 의례(儀禮)에 6례라는 예(禮)가 있었다.
『의례』(儀禮) 「士昏禮」의 6례
1) 납채(納采) 2) 문명(問名) 3) 납길(納吉) 4) 납징(納徵)
5) 청기(請期) 6) 친영(親迎)
여기에는 납채(納采), 문명(問名), 납길(納吉), 납징(納徵), 청기(請期), 친영(親迎)라는 6가지가 있었다. 그 후에 주자가 너무 복잡하다면서 4례로 바꾸었다. 의혼(議昏), 납채(納采), 납폐(納幣), 친영(親迎)으로 바꾸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의 4례 :
1) 의혼(議昏) 2) 납채(納采) 3) 납폐(納幣) 4) 친영(親迎)
이걸 다 설명드릴 수가 없고, 고례(古禮)가 복잡한데,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결혼식이라고 하는 것은 제일 마지막 단계의 친영(親迎)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지금 함을 지고 가고, 사주를 보고 그러는 데, 그건 앞의 단계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마지막에 친영이라는 예를 지낸다.
이게 뭐냐 하면 신랑이 신부집으로 신부를 데리러 가는 게 친영이다. 친(親)히 가서 신부를 영접(迎接)하는 제식이라는 말이다.
친영(親迎) :
6례의 마지막 단계로서 신랑이 친히 신부집으로 가서 신부를 신랑집으로 데려오는 예식.
그런데 여러분들은 친영의 의미를 잘 모른다. 이게 조선왕조에서 가장 큰 문제였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조실록부터 세종실록까지, 이방원부터 세종까지 이게 골치 아픈 문제였다.
혼례는 여자가 남편의 집으로 가는 것인데, 나라의 풍속이 옛 습관에 젖어서 친영(親迎)하는 것을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므로 태종께서 혼례를 바르게 하시려다가 이루지 못하셨던 것이다.
- 『세종실록』세종7년 5월 12일조
두 남녀가 만나서 새로운 가정을 꾸미는 것이 결혼이다. 이게 복잡하다. 여러분이 아는 것보다 복잡하다. 결혼식이라는 게 간단하지 않다.
예를 들면, 가정을 남자 쪽에 꾸리냐, 여자 쪽에 꾸리냐의 문제가 있다. 가정을 성립하는 지역성에 따라서 patrilocal이라고도 하고, matrilocal이라고도 한다.
patrilocal : 가정을 남자 쪽에 차리는 결혼방식. 현재 풍속.
matrilocal : 가정을 여자 쪽에 차리는 결혼방식. 과거 서옥제.
patrilocal은 시가혼, 남가혼이라고 하고, matrilocal은 처가혼, 여가혼이라고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matrilocal marriage라고 하는 것은 장가가는 결혼이다. patrilocal marriage의 경우는 시집가는 결혼이다.
matrilocal marriage : 장가가는 결혼
patrilocal marriage : 시집가는 결혼
12. 예전의 결혼 문화
지금 여러분들은 장가를 가는 게 아니라, 시집을 가는 결혼만 하고 있다. 이게 우리나라 풍습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
동이전 시대부터 서옥(壻屋)이라는 것이 있었다.
其俗作婚姻, 言語已定, 女家作小屋於大屋後, 名壻屋.
- 三國志 魏書 東夷傳 고구려조.
혼인 풍속은 구두로 미리 약속이 되면 여자의 집 본채 뒤편에 작은 별채를 짓는데, 이를 ‘서옥’이라고 한다.
서옥이라는 게 뭐냐 하면, 여자집에 사위를 들이는 집을 따로 짓는 것이다. 그 집을 서옥이라고 했다. 동이전 고구려조에 서옥이라는 게 나온다.
옛날 결혼은 서옥을 만드니깐, 고래(古來)로부터 조선중기까지 결혼식은 전부 matrilocal marriage였다.
우리나라는 고례로부터 조선 중기까지 거의 예외없이 서옥제와도 같은 여가혼(女家婚)의 형태를 유지해왔다. 즉 강력한 모계의 매트리로칼 매리지였다. 이것을 『조선왕조실록』에서는 "男歸女家"(장가간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한국 여자는 시집살이를 심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여자는 한반도 반만년 역사에서 시집살이를 거의 하지 않은 여자들이다. 한국 여자들의 시집살이 역사가 200년밖에 안 된다. 사실 시집살이는 조선중기 이후에 시작한다.
우리나라 여성의 한 많은 "시집살이"의 역사는 불과 200여 년밖에 되지 않는 과도기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조선 중기 유교 종법제가 정착된 이후의 특수현상이다.
matrilocal marriage를 patrilocal marriage로 바꾸는 결사적인 노력을 친영(親迎)이라고 하는 것이다.
친영(親迎)은 장가가는 결혼을 시집가는 결혼으로 바꾸려는 유교종법제도의 노력이다. 친영이 최초로 성립한 것은 세종의 딸 숙신옹주(淑愼翁主)의 혼례였다.
옛날에는 결혼을 하면 여자 집에 가서 살았다. 우암 송시열은 옥천에서 29살까지 컸다. 바로 외가집에서 자란 것이다. 그리고 율곡선생은 어디서 컸냐? 강릉에서 컸다. 외가인 신사임당 집에서 컸다.
옛날에 결혼을 하면, 결혼식을 여자집에서 하고, 남자가 거기서 그냥 살았다. 그래서 나중에 분가를 하던지, 아니면 그냥 여자 집에서 살았다.
조선실록에 보면, 이걸 남귀여가(男歸女家)라고 한다. 남자가 여자집으로 간다는 것이다.
男歸女家, 本國行之久矣, 未易改也.
실록, 세종16년 4월 己未
그러니깐 옛날 우리 사회는 기본적으로 모계가 강했다. 그래서 지금도 결혼식을 하고나면, 반드시 여자집을 먼저 간다.
중국의 친영(親迎)이라고 하는 것은, 결혼하는 날 신랑이 신부집으로 가서 여자 집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여자를 가마에 태워 그날로 데리고 왔다. 신방을 신부집에서 차리지 않는다. 신방은 여자를 데려와서 신랑집에 차린다. 이게 중국의 친영제도다.
중국의 친영(親迎)은 남자가 여자집에 가서 여자 집사당에 초례만을 지내고 여자를 데려온다. 즉 신방을 여자 집에 차리지 않는다.
13. 조선 중기 이후의 결혼 문화
그런데 이런 중국의 친영은 우리나라 풍습으로 보면 혁명적인 것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우리 풍습을 바꾸려고 조선 세종조부터 안간힘을 썼다. 친영제도에 따르면 여자들은 시집을 가게 되는 것이다.
坡原君尹泙, 親迎淑愼翁主. 本國親迎自此始.
파원군(坡原君) 윤평(尹泙)이 숙신 옹주(淑愼翁主)를 친히 맞아 가니, 본국에서의 친영(親迎)이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실록 세종 17년 3월 4일
옛날 우리나라에서 결혼식은 여자집에서 하고, 그날 저녁에 신방을 여자집에 차리고, 그뿐만 아니라 여자집에서 아이를 낳고 그냥 살았다. 그래서 나중에 아이를 하나 둘 낳으면 나중에 남자집으로 가는 수도 있었다.
그러다가 점점 조선중기로 오면서, 남자가 여자집에 머무는 기간이 짧아진다. 처음엔 아이 하나 낳을 때까지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석 달이 되었다가, 일제 시대 때는 9일이 되었다가, 해방 후에는 사흘이 되었다. 그리고 요새는 하루다. 이렇게 여자집에 머무는 기간이 점점 줄어가는 역사다.
이렇게 원래 친영에 대한 복잡한 이야기가 많은데, 이걸 다 이야기할 수는 없다.
14. 폐백
그 다음 문제는 폐백을 드린다고 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폐백이라고 하면 ‘아이 잘 낳아라!’라고 하면서 대추, 밤을 던져주는 것을 생각한다.
하지만 원래 폐백(幣帛)이라는 말의 폐(幣)는 돈 패(幣)자다. 백(帛)은 비단 백(帛)자다.
폐백을 드린다는 말은 납폐(納幣)다. 이것은 결혼 전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당신 딸을 우리가 데리고 오니깐, 그 보상으로 비단을 드린다.’고 하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 여러분들은 전혀 이것을 이해 못하고 있다.
"폐백(幣帛)을 드린다"는 표현은 납폐(納幣)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친영(親迎) 이전에 남자가 여자 집에 비단을 예물로 보내는 것이며, "대추·밤"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러니깐 폐백을 드린다는 것은 친영 즉 결혼식이 이루어지기 전에 남자집에서 여자집에 dowery 즉 지참금을 가져다 드리는 것이다. 여자를 데리고 오는 대신에 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중국의 고례(古禮)다.
dowery(지참금) : 서양에서는 여자가 남자 집에 가져가는 돈이다. 우리나라 전라도 풍속이 이러하다. 그러나 고례에는 남자가 여자 집에 폐백(돈)을 바치는 것으로 되어 있다.
14. 밤, 대추의 의미
그럼 여기서 밤, 대추 문제를 살펴보자.
친영제도에 의하면, 여자를 데리고 와서, 첫날밤을 신랑집에 보낸다. 물론 거리가 멀 적에는 며칠씩 걸릴 수도 있다. 그리고 첫날밤을 신랑집에서 보내고 나서, 다음날 아침에 시부모를 뵙는 현구고례라는 제식을 한다.
현구고례(見舅姑禮) : 친영 후 첫날밤을 신랑집에서 보내고 아침 일찍 일어나 시부모를 처음 알현하는 제식.
신부가 안방에 가서 신랑 부모를 뵈면 절을 하고, 그때 밤과 대추를 시부모한테 바치는 예식을 한다. 조촐하게 상 하나를 차려놓고 예식을 한다.
그럼 여기서 밤과 대추는 뭐냐? 대추라고 하는 것은 한자로 조(棗)자다. 이건 일찍 조(早)자와 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밤 율(栗)자는 두려워할 율(慄)자와 통하는 것이다. 이게 재아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대추 조(棗) = 일찍 일어날 조(早)
밤 율(栗) = 두려워할 율(慄)
여자가 시집을 왔으면 시집살이를 해야 하는데, 시집살이의 핵심이 뭐냐? 우선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고, 매사에 조심조심 송구스럽고 떠는 마음으로 임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부터 제가 시집에 왔으니, 여기 시집에서 밤과 대추처럼 일찍 일어나고 조신조신한 마음 상태로 살겠습니다.’하고 시부모한테 그 성의를 보이는 예식이 바로 밤과 대추를 드리는 예식이다.
그런데 이렇게 주요한 예식을 요즘은 추저분하게 예식장 뒷구멍에 앉아서 업고 지랄을 한다. 그렇게 추저분하게 하지 말고, 결혼식 하나를 해도 뭔가 생각을 가지고, 우리 식으로 하는 게 훨씬 더 좋다고 생각한다.
식장에 들어가서, 두 사람이 서로 절하고, 같이 노래 부르고, 신혼여행 갔다와서 신부집에 간다. 거기서 자서 신랑집에 왔을 적에 신랑 부모를 처음 뵈면서, 그때 정식으로 밤과 대추를 놓고 서로 인사하고 시작하면 얼마나 좋겠나?
이렇게 뭔가 예식이라는 것의 의미를 알아야 된다. 각 시대마다 하나하나 구조가 있다. 결혼식 하나도 구조가 있다.
밤 율(栗)에 관한 재아의 이야기는 국가 사직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고례(古禮)의 결혼식이라는 문제가 크게 걸려 있다.
15. 여성 문화
내가 결혼식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엄청나게 많다. 이게 아주 복잡한 것이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유교의 종법 질서가, 유교의 예학 문화가 우리나라에 정착된 것은 조선 중기이후부터다. 그걸 알아두어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과거의 우리나라 여자들은 굉장히 위엄이 있다. 옛날부터 비굴하지가 않고 당당하게 산 여자들이었다. 그래서 지금 시집살이를 해도 잘 한다. 그리고 자기 권위를 획득할 줄 안다.
옛날에는 여자들이 자기 집에서 버티었다. 결혼해도 ‘안 가!’라고 했고, 신랑보고 ‘네가 와!’라고 했었다. 그런데 그게 친영제로 바뀌면서 ‘너 이제 죽어봐라!’하면서, 조선후기부터 지독한 시집살이가 시작된 것이다.
한국 여자의 지독한 "시집살이"는 조선 중기 이후 과거 서옥제(男歸女家)에 대한 반동으로서 성립된 좀 악랄한 시가의 풍속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간단하게 보면 안 된다. 신라의 역사를 보라. 김유신의 누이가 김춘추와 결혼을 했다. 그런데 그 사이에서 낳은 딸을 김유신이 부인으로 삼았다. 지금의 유교 종법 사회 개념으로 이해가 가는가?
고려 현종의 어머니는 왕건의 손녀였는데, 왕건의 아들과 관계하여 낳은 아들이 고려 현종이다. 지금은 상상도 안 되는 일이다.
우리나라는 여러분이 생각하듯이 그렇게 간단한 나라가 아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유교적 종법 질서라고 하는 게 2, 300년밖에 안 된 것이다.
조선중기 이전으로 가면, 분재기 이야기가 나오지만, 여자들도 똑같이 상속을 받았다.
분재기(分財記) : 자식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준 가족회의 기록. 17세기 말 이전에는 모두 여자가 동등하게 재산을 분배받았다.
과부 재가 금지도 성종 때나 생긴 법이다. 그러니깐 과거의 우리 사회는 우리가 지금 말하는 가족 구조와 다르다. 간단하지 않다. 그래서 여기를 둘러싸고 역사적으로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중층적 구조가 많다. 그래서 한국여자들은 대가 센 여자들이다.
과부의 재가금지도 성종 8년에나 결정되어 『경국대전』에 실렸다. 그전에는 과부의 재가·삼가가 자유롭게 허락되었다. 심지어 이퇴계의 맏며느리도 재가하였다.
최근에 와서 여자들을 남자한테 완전히 복속되는 형태로 유교문화가 길을 들여놓았지만, 거기서 좋은 것도 있다. 그러나 한국여성문화사라고 하는 것이 간단하지 않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유학자들이 싫어하겠지만, 이것이 중요한 사실이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 된다.
16. 지방 국립대의 활성화 의미
마지막으로 내가 충남대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지방국립대가 활성화되어서 지금 서울대학교와 같은 위치를 가져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사실 서울대학은 신입생과 졸업생을 내지 말아야 한다. 최소한 학부만이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최근 서울대 교수 20명의 서울대 개혁안, “대학 간 협력을 통한 국립대학교 학사과정 개방화 방안”(장회익, 소광섭, 백낙청, 조동일, 한상진 등 서명)은 우리나라의 본질적 교육개혁을 위한 휴매니스트적 용단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문제로 우리나라의 미래는 지방 자치 등 모든 문제에 앞서서, 지방국립대학에 그 지방의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 몰려드는 구조이어야 한다. 전국에서 서울대학으로만 학생들이 모여드는 곳이 되면 우리나라는 희망이 없다.
지방국립대학이 서울대학 수준으로 발전될 때만이 진정한 지방자치제도가 이 땅에서 정착될 수 있다.
- 도올-
나는 충남대학만 가지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 전국에 있는 모든 국립대학들이 지금의 형태가 아닌, 그 지방의 문화적 중심이 되고, 인재들이 그리로 몰려들고, 거기서 배출된 인재들이 그 지역에서 크게 쓰이게 되는 사회가 와야만 우리 사회는 민주사회가 된다.
여기 와보니깐, 충남대가 너무너무 아름다운 곳이다. 여기 와서 유감없이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훌륭한 학생들이 이리로 모여들게 되기를 희망하고, 오늘 여러분들의 훌륭한 수강 자세에 대해서 감사하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