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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219
11월20일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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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잘 했다. 너는 착한 종이로구나.”>
불꽃처럼 살아가야겠습니다. 서해바다 한적한 곳에 저희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청소년 캠프장이 하나 있습니다. 오래 전, 캠프장에서 일하던 때가 떠오릅니다.
캠프가 끝나면 참새처럼 재잘대던 아이들이 떠나갑니다. 피정이 끝나면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갑니다. 그리고 한적한 바닷가에 남는 것이라곤 끝도 없는 적막함입니다.
그 적막함과 함께 저녁노을이 찾아듭니다. 붉게 물든 서녁 하늘을 넋 잃고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일몰’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일출광경은 감탄을 자아내게 하지만 일몰장면은 어쩐지 슬픕니다.
쓸쓸합니다. 그러나 장엄합니다. 찬란합니다. 마치도 달릴 곳을 다 달린 한 영혼이 이제 막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임종의 순간처럼 아름답습니다.
돈보스코 성인의 임종이 그랬습니다. 그의 얼굴은 수많은 일과 고뇌와 누적된 피로로 인해 초췌했지만, 그의 신체는 모든 에너지가 완전히 빠져나간 나머지 왜소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의 영혼은 활활 불타오르는 석양과도 같았습니다.
수많은 어린 영혼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고, 이제 모든 것을 다 이루었기에, 일말의 아쉬움도 없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그의 영혼은 더 없이 당당했습니다.
돈보스코의 시신을 검안했던 의사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그런 시신은 정말 보기 드물었습니다. 마치도 모든 것이 다 타고 이제 겨우 재만 남은 것과도 같은 그런 시신이었습니다. 영혼이 빠져나간 그의 시신에는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의 시신에는 에너지가 모두 고갈되어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며, 누적된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완전히 시든 꽃과 같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금화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각자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잘 사용해서 하느님께는 영광을 드리고 이웃들에게는 사랑을 실천하라고 당부하고 계십니다.
돈 보스코의 임종을 묵상하면서 달란트를 잘 사용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우리의 손과 발은, 우리의 삶은 그저 살결 매끄럽게, 주름살 없게 잘 가꾸었다가, 고운 모습을 간직한 채 이 세상 하직하라고 주신 선물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한 몸 잘 먹고 잘 살라고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라고 보내셨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세상에 보탬이 되라고,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는데 기여하라고, 세상의 평화를 위해 일하라고 우리를 보내셨을 것입니다.
우리 존재 자체로 이웃들에게 기쁨이 되고 선물이 되라고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셨을 것입니다. 하루하루를 허송세월하지 말고 불꽃처럼 살아가야겠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리라 확신합니다. 언젠가 다가올 우리의 마지막 날, 더 노력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도록, 이웃들에게 더 친절하게 대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워하지 않도록, 더 기쁘게 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도록, 오늘 우리 자신의 삶을 늘 돌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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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나의 냉혹함을 보지 않으면 하느님을 냉혹하게 본다>
두 아이와 한 호두나무가 있었습니다. 한 아이는 목수가 되었고 한 아이는 백수가 되었습니다.
호두나무는 목수보다는 백수가 더 좋았습니다. 목수는 자신을 베어버릴 것 같았지만 백수에겐 자신이 그늘도 주고 호두열매도 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수는 호두나무를 이용해 임금의 의자를 만들고 싶었지만 이것을 눈치 챈 호두나무는 자신의 몸을 뒤틀어 목재로 쓰일 수 없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호두를 따기 위해 자기에게 돌을 던지고 가지를 부러뜨리는 백수에게만 몸을 맡겼습니다.
그렇게 호두나무는 백수에게 충성을 다 바치고 백수와 함께 흙이 되었습니다. 호두나무가 임금의 의자가 되어 귀중하게 쓰일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던 이유는 누가 더 좋은 사람인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열리는 호두를 따먹는 백수는 자아를 상징합니다. 자아가 좋게 보이면 자신을 변화시키러 다가오시는 하느님은 나쁘게 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 나라의 상속을 받지 못하는 악한 종이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악한 종은 주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자신을 잘 살게 해 주려는 주인을 냉혹하게 보고 있다면 그 종은 주인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해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변화되고 싶다면 먼저 하느님을 선하신 분으로 보고 자신을 나쁘게 볼 수 있는 눈이 생겨야합니다.
아담도 죄를 짓고는 하느님을 냉혹한 분으로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 숨었습니다. 이때 하느님께서 하신 일은 아담으로부터 생명나무로의 접근을 막은 것이었습니다.
생명나무는 성체입니다. 성체를 영하면 그리스도의 뜻대로 변화 되어야 합니다. 자아가 죽어야합니다.
그러나 이미 자아를 주인으로 선택하여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께 자신을 맡길 의향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성체도 무익하기 때문에 주어지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루카 8,10)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자아를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깨달아 돌아와서 성체를 영해서는 안 됩니다. 자아가 완전한 악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는 성체가 그 사람 안에서 어떠한 역할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아를 섬기는 이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시며 그 자아의 힘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려주시려 하십니다. 망하고 망해봐야 자아가 얼마나 냉혹한지 알게 되고 그 자아로부터 구해주러 오시는 주님을 참 주인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위의 구절은 하느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신 구절입니다.
이때 이사야가 묻습니다.
“주님, 언제까지입니까?”(이사 6,11)
주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성읍들이 주민 없이 황폐하게 되고 집집마다 사람이 없으며 경작지도 황무지로 황폐해질 때까지다.”(이사 6,11)
황무지는 광야를 의미합니다. 광야는 자아를 죽이는 장소이고 숫자로는 40입니다. 자신을 죽일 줄 알기 전까지는 성체를 영하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죽이는 일은 무엇으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어쩔 수 없습니다. 소유욕을 죽이기 위해 소득의 10분의 1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통해 주님께서 내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자리 잡으십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사람들을 멀리 쫓아내 이 땅에는 황량함이 그득하리라. 아직 그곳에 십분의 일이 남아 있다 하여도 그들마저 다시 뜯어 먹히리라. 향엽나무와 참나무가 잘릴 때 거기에 남는 그루터기와 같으리라. 그 그루터기는 거룩한 씨앗이다.”(이사 6,12-13)
10분의 1이 봉헌되면 자아라는 향엽나무와 참나무가 잘리고 그 그루터기로부터 거룩한 씨앗인 그리스도께서 자라나 새로운 본성의 나무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악한 종은 하느님을 모진 분으로 판단하고 자신을 자비롭게 여겼습니다. 자아를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이 자신을 바꾸어놓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성체를 아무리 모셔도 소용이 없습니다. 먼저 자아를 모질게 보아서 오직 하느님만이 좋으신 분으로 여겨져야 합니다. 그래야 내 안의 주인을 바꿀 수 있습니다.
자아는 뱀입니다. 대화할 상대도 아니고 친해지거나 그의 말을 따라줄 상대도 아닙니다. 자아를 뱀으로 명확히 볼 줄 알아야 눈이 열려 성체가 나를 변화시키게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악으로 보일수록 주님은 선으로 보입니다. 선한 종은 자신을 악하게 보는 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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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9,11-28 : 열 미나의 비유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으려고 ‘먼 고장’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는 거룩하신 아버지의 거룩하신 아들이고, ‘여행’은 그분께서 하늘 아버지께로 올라가시는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 왜 왕권을 받고자 하늘에 오르셨을까? 아버지께서는 사람이 되신 당신 아들에게도 그것을 주셨다. 그분은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이 오른 쪽에 앉으시어”(히브 1,3) 당신의 원수들을 발판으로 삼게 될 때를 기다리고 계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갖가지 거룩한 선물을 주신다. 이것이 미나/탈렌트의 뜻이다. 이 미나를 받은 사람들은 충성스러운 종으로서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직무를 받는다. 그들은 직무를 실행하며 이윤을 낸다. 그래서 성실히 일했다는 칭찬을 듣고, 영원한 영예를 누릴 자격을 인정받는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탈렌트를 나누어 주셨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일러주신다.
그러나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다.”(14절)고 한다. “일찍이 다른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들을 내가 그들 가운데서 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한 일을 보고 나와 내 아버지까지 미워하였다.”(요한 15,24) 예언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끊임없이 예고했는데도 그들은 그분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려 했고, 그분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의 능력과 준비된 상태에 따라 선물을 나누어 주셨다. 마태오 복음에는 각 사람이 받은 탈렌트가 달랐다고 한다.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그리고 또 한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셨다고 한다(마태 25,15 참조) 가가 사람에게 그 능력에 따라 그 분배가 이루어졌다. 그것을 잘 받아서 잘 활용한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보도록 하자.
우리가 바쳐야 할 이자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과 행실 안에 자리 잡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산다면 주님께 이익을 남겨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만들 수 있다. 그러면 주님께 이런 칭찬을 들을 것이다. “잘 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17절)
우리는 주님께 받은 돈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거나, “땅에” 숨겨두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그분은 당신의 돈이 어떤 면으로든지 이윤을 남기기를 바라신다. 수건에 싸서 두었던 종은 심판을 받았으며, 결국은 가지고 있던 것을 빼앗기고 만다. “저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24절)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우리가 열 미나를 바치고 다섯 미나를 바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모두 우리에게 돌려주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께 제물을 바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바친 것을 모두 돌려받는다. 하느님께는 필요한 것이 없다. 우리가 풍요하기를 바라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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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부산교구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신학사무처장) 염철호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왕권을 받으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는 어떤 귀족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인물은 헤로데 임금의 첫째 아들 아르켈라오입니다. 그는 헤로데 임금이 죽은 뒤 유다와 사마리아 땅을 물려받았는데, 아버지처럼 왕권을 인정받으려고 로마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그는 폭군이었기에 유다인들은 그가 임금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뒤따라 로마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어 그가 자신들의 임금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간청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왕권을 인정받지 못한 아르켈라오는 화가 나서 유다 땅으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이 임금이 되기를 바라지 않던 이들을 찾아내어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더한 폭정을 펼칩니다. 결국, 로마 황제는 그를 소환하여 오늘날 프랑스 땅으로 유배시켜 버립니다. 이후 유다와 사마리아 땅은 로마 총독이 직할 통치를 하게 됩니다.
다소 어색하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빗대어 종말과 관련된 이야기를 펼쳐 내십니다. 종말이 되어 주인이 돌아오게 되면, 맡은 임무를 얼마나 잘 수행하였는지에 따라서 주인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지, 쫓겨날지가 결정되는데, 주인이 임금임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는 영원한 죽음을 맞게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인 마카베오기에서는 하느님께 참으로 충실하였던 일곱 형제와 어머니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죽음을 맞게 되지만,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그들에게 생명을 다시 주실 것입니다. 그들과 달리 안티오코스 임금은 세상의 모든 권력을 누렸지만, 영원한 처벌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을 대적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대적하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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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미나의 비유>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루카 19,12) “그런데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사절을 뒤따라 보내어,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루카 19,14) “그러나 그는 왕권을 받고 돌아와, ..."(루카 19,15ㄱ) “... 내가 저희들의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그 원수들을 이리 끌어다가, 내 앞에서 처형하여라."(루카 19,27)
‘미나의 비유’ 속에 들어 있는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승천, 재림, 심판에 관한 비유입니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났다는 말은 예수님의 승천을 뜻합니다. 여기서 ‘먼 고장’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기간이 짧지 않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를 미워해서 그가 임금이 되는 것을 반대한 백성은, 예수님을 안 믿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가 왕권을 받고 돌아왔다는 말은 예수님의 재림을 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왕권은, ‘생살여탈권’을 포함해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마태 28,18)입니다. 반대자들이 처형당하는 것은 심판 때에 멸망을 당하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그가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라는 말은, “다른 사람이 자기들의 임금이 되기를 바랐다.” 라는 말이 되기도 하는데,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를 거부한 사람들이 메시아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또 예수님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메시아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출신을 싫어해서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들을 받아들이기가 싫어서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닌 다른 것을 받기를 원해서, 즉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을 원해서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만일에 사람들이 하느님께, 예수님이 아닌 메시아를, 즉 자기들이 원하는 다른 메시아를 요구하면, 하느님께서 그 요구를 들어주실까?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그런 요구를 할 권한이 사람들에게 있을까? 없습니다. 어떤 메시아를 보낼 것인지, 또 그 메시아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무엇을 줄 것인지를 정하는 것은 하느님만의 권한입니다. 그 권한이 없다면 전지전능하신 분이 아니고, 그러면 하느님이 아니고, 하느님이 아닌 분이 보낸 메시아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구원을 받기 위한 신앙생활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다수결로 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최후의 심판이 ‘반대자들을 처형하는 일’로 표현되어 있어서 마치 앙갚음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르침을 좀 더 생생하게 하기 위한 비유적인 표현일 뿐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예수님께서 앙갚음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죄인들의 멸망은 그들 자신들이 구원받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선택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애쓰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처형’이라는 말은, 실제로 어떤 형벌에 처한다는 뜻이 아니라,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곧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이 곧 영원한 멸망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루카 19,13) “첫째 종이 들어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였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루카 19,16-17) “그런데 다른 종은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루카 19,20-21)
‘미나의 비유’는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잘 맞아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는 최후의 심판을 잘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인 종은,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실행한(마태 7,21) 신앙인을 뜻합니다. 자기가 받은 한 미나를 보관했다가 그대로 다시 주인에게 돌려 준 종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신앙인입니다. 첫 번째 종이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받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서 예수님의 통치권에 참여하는 것을 뜻하고, 다시 이 말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받은 미나를 보관하기만 했다가 돌려 준 종은 그 미나를 빼앗기는데(루카 19,24), 그것은 ‘받은 은총’을 모두 잃게 된다는 뜻이고, 은총을 잃게 된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벌은 없습니다.
그 종이 변명하면서 한 말에서 ‘냉혹하다.’라는 말은 ‘계산이 철저하고 엄격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주님은 계산이 철저하고 엄격하신 분이 아니라 한없이 자비로우신 분이고,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분입니다. 또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간다.”라는 말은, 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또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요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이 우리에게 주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가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강요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바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고,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당신이 직접 그 일을 해 주시는 분입니다.
<세 번째 종의 죄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입니다. 그 죄를 지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인물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입니다.(루카 10,31-32) (그 비유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은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인 사람입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루카 16,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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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최영균 시몬 신부님]
<자녀와 종의 차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하던 외국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성실한 사람이었고 주인도 그에게 신뢰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이 해외 여행을 가게 되면서 가게를 그 학생에게 맡겼습니다. 극구 사양하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처럼만 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는 2주간의 여행을 떠난 것입니다.
그 학생은 주인이 있을 때보다 더 열심히 봉사하고 손님들을 더 친절히 대했으며 틈나는 대로 청소를 하면서 가게를 깨끗하게 했습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주인이 없음에도 더 열심인 이 외국인 학생을 눈여겨보다가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의 성실함에 대해서 주인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날 주인이 학생을 불러 “너는 이제 더 이상 이 가게의 점원이 아니다. 너는 우리 집 식구다. 나는 이제 너를 내 아들처럼 대해 주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학생이 이렇게 일한 것은 의무감을 뛰어넘는 어떤 것, 즉 주인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분에 대한 사랑과 신뢰 때문에 어떤 일을 행한다면 우리는 주님과 종의 관계에서 벗어나 벗의 관계로 도약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과 맺게 되는 참된 우정은 매일의 충실성 안에서 드러나는 사랑과 신뢰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우리의 충실성으로 이 선물을 받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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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그리스의 고난 수도회 서현승 베드로 신부님]
<사랑의 기회>
딱지를 떼이지 않기 위해 교통법규를 지키려고 하는 태도와 조화로운 질서를 위해 교통법규를 지키려 하는 태도는 겉으로 보기엔 비슷한 것 같지만 삶의 질적인 내용과 그 결과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내적인 삶의 방향이 틀린 것입니다.
딱지를 떼이지 않기 위해서 운전하는 이에게는 사방팔방이 딱지의 위협이 아닌 곳이 없을 겁니다.
그러나 서로 양보하고 양보 받는 질서를 맛본 이는 교통법규가 사실 얼마나 운전을 편하고 안전하게끔 해주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계명을 지키는 것에 모든 관심이 있다면 ‘죄’가 아닌 것이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고해성사’감이지 않을까요? 수도자가 하는 세 가지 서원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생 동안 그것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살기’ 위해 있는 것이죠. 서원을 어기지 않기 위해 바둥거리는 것보단 차라리 즐기며 살 때 그 가치를 온전히 알 수 있겠죠.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시는 하느님은 그 자유의 결실에 대해 많고 적음을 물으시는 분이 아니라 얼마만큼 자유롭게 각자의 삶을 잘 살았는지를 물으시는 분이라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계시해주십니다.
하느님은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특별한 능력, 즉 당신을 닮은 사랑의 능력을 우리 모두에게 주셨던 것이죠.
사랑하기를 두려워하며 주어진 삶을 노심초사하느라 몽땅 소진하는 사람은 사랑의 결과에 실패하더라도 사랑했다면 사랑 그자체가 이미 주어진 보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기회가 영영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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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이재화 안셀모 신부님]
<땅에 묻어버린 은총>
신학교 시절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발표하는 기회가 있었는데, 장점을 이야기하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웠습니다. 단점을 이야기하는 것은 겸손한 듯 보이는 데 비해서 장점을 이야기하는 것은 왠지 쑥스러웠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잘난 체하는 것을 꺼려하는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깊이 묵상하다 보니 근본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평상시 제가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 삶에 만족하지 못하니 기쁠 일이 없고, 당연히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도 못했으며, 이러한 삶의 태도는 하느님께서 제게 주신 많은 좋은 것들을 알아보지도 활용하지도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하느님께 새로운 은총을 청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하느님께 청원을 드리는 것은 믿음의 표현이요, 소중한 기도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은총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셨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주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비록 우리가 일상 속에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해도 말입니다.
‘미나의 비유’에서 예수님의 초점은 불어난 ‘미나의 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성실히 활용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게 양은 달라도 하느님의 뜻에 맞게끔 쓸 수 있는 충분한 은총을 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사소한 일상 속에서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알아보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종처럼 은총을 땅속에 묻어두는 어리석은 삶을 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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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을 다시 만나는 날>
루카 19,11ㄴ-28 (미나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신 데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 그런데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사절을 뒤따라 보내어,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왕권을 받고 돌아와, 자기가 돈을 준 종들이 벌이를 얼마나 하였는지 알아볼 생각으로 그들을 불러오라고 분부하였다. 첫째 종이 들어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였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그 다음에 둘째 종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다섯 미나를 만들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인은 그에게도 일렀다. ‘너도 다섯 고을을 다스려라.’
그런데 다른 종은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내가 냉혹한 사람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되찾았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곁에 있는 이들에게 일렀다. ‘저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 그러자 그들이 주인에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이는 열 미나나 가지고 있습니다.’ ─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저희들의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그 원수들을 이리 끌어다가, 내 앞에서 처형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을 걸어가셨다.
<주님을 다시 만나는 날>
언젠가 그날이 오겠지요.
나를 세상에 보내신
주님을 다시 만나는 날 말이지요.
그날 무엇을 내어놓을까요.
나를 세상에 보내시면서
나를 다시 만날 날을
기쁨과 희망으로 기다리셨을
주님께 말이지요.
그날 빈털터리로
주님 앞에 나설 수야 없겠지요.
주님의 기대 가득한 낯빛이
어두워지면 안 되잖아요.
무엇을 챙겨갈까 고민하다가
주님께서 세상에 나를 보내시면서
정성껏 챙겨주셨던 보따리를
주섬주섬 풀어봅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라고
사랑도 담아주시고
약한 이 아픈 이 함께 하라고
섬김과 돌봄도 넣어주셨네요.
빼앗는 이 빼앗기는 이 없게 하라고
나눔도 챙겨주시고
더불어 함께 하나 되라고
평화도 잊지 않으셨네요.
주님께서 맡겨주신 것들로
무엇을 했나 돌아보니
아직은 많이 부끄럽네요.
언제일지는 몰라도
주님을 다시 만날 날이 올 텐데
어쩌면 바로 내일일 수도 있고
생각지 못한 순간일 수도 있을 텐데
몸 마음 삶 모두
새롭게 다져야겠어요.
나를 세상에 보내신
주님을 다시 만나는 그날
내가 주님의 작은 기쁨이
될 수 있도록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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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말씀 속에….>
우리가 살다가 숨이 막힐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일 때문도 아니고, 세상에 시련과 고통 때문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말씀으로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 대한 배신으로 제자들은 숨어 있으면서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 순간 ‘평화가 너희와 함께’ ‘평화가 너희와 함께’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연이어 들려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로소 성령으로 용서받았음을 느낍니다. 그리고 기도하면 주님께서 함께하시고,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말씀으로 기도에 전념하게 됩니다.
저 두레박은 기도하면서 큰소리로 외쳐봅니다.
“주님, 오셔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주님, 오셔서 ( )에게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아멘.
그러므로 항상 매 순간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면서 살아가는 은혜로운 날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간호하는 이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 성령의 도우심으로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라는 주님의 영광이 임하게 되기를 기도하면서 영적일기를 준비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인이 “왕권”이라는 것을 받아오려고 먼 길을 떠납니다. 그래서 종에게 돈을 맡기고 떠납니다. 돌아와서 많이 번 종에게는 칭찬과 함께 더 많은 축복을 주고, 그대로 놔둔 종에게는 냉엄한 심판을 내리게 됩니다.
저는 오늘 복음 말씀을 오랫동안 묵상하면서, “성경 말씀대로 살면 축복을 받는다.”라는 말씀이 계속해서 떠올랐습니다. 일을 시작한 사람은 일이 너무 많아 견딜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일이 잘되어 갑니다.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인 부지런한 종은 10 고을을 다스리는 일을 하고, 한 미나를 땅속에 묻어둔 게으른 종은 돈도 빼앗기고 일도 없어집니다. 어떤 일(기도의 일, 감사의 일, 자비의 일, 나눔의 일, 어여삐 여기는 일…. 등등)을 시작하십시오. 할 일이 몰려옵니다. 그리고 일이 잘되면 이어서 계속 잘되어 갑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오늘 나의 처지에 맞는 말씀을 성경에서 찾아보시는 데만 그치지 말고, 그 말씀을 써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특히,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간호하는 분들은, 예수님께서 치유의 기적을 통해 주신 말씀으로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너희가 낫기를 원하느냐?”
코린토 2서 4장 6-7절에서 사도 바오로가 말씀합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어라.’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고운님들 안에 주신 엄청난 힘을 만나러 가시기를 바랍니다.
1. 위험에 처했을 땐 시편 91편으로 가세요.
2. 외롭거나 두려울 때 시편 23편으로 가세요.
3. 신앙인으로서 확신 필요할 때 로마서 8장 1-30절로 가세요.
4. 평화와 휴식을 원하시면 마태복음 11장 25-30절로 가세요.
5. 죄를 지었을 때는 시편 51편으로 가세요.
6. 근심이 있을 때 마태복음 6장 19-34절로 가세요.
7. 괴로움과 위기 안에 있을 때 고린도 1서 13장으로 가세요.
8. 풀이 죽어 있거나 따돌림을 당하는 것 같을 때는 로마서 8장 31-37절로 가세요.
9. 일과 여행으로 집 떠나있을 때 시편 121편으로 가세요.
10. 믿음의 발동이 필요할 때는 히브리서 11장으로 가세요.
11. 좁고 이기적인 맘으로 기도할 때는 시편 67편으로 가세요.
12. 슬플 때 요한복음 14장으로 가세요.
13. 사람이 실망하게 할 때는 시편 27편으로 가세요.
14. 하느님이 멀게 느껴질 때는 시편 139편으로 가세요.
15. 세상이 위대하게 보일 때는 시편 90편으로 가세요.
16. 열매를 많이 맺고 싶으면 요한복음 15장을 가세요.
17. 의기소침할 때는 시편 27편으로 가세요.
18. 세상이 작아 보이고 자신은 커 보일 때 시편 19편으로 가세요.
19. 돈이 없을 때는 시편 37편으로 가세요.
20. 사람들이 불친절해 보이면 요한복음 15장으로 가세요.
21. 내가 한 일에 낙심될 때 시편 126편으로 가세요.
22. 아주 좋은 기회가 있으면 이사야서 55장으로 가세요.
23. 다른 사람과 잘 지내려면 로마서 12장으로 가세요.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기도하는 축복으로 ‘길 속에 길이 있음을….’ ‘감사 속에 감사가 있음을….’ ‘자비 속에 자비가 있음을….’ 깨닫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성령 충만한 날이 될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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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21)
♧♧ 시편 62편 4절….
"너희 모두는 언제까지나 한 사람에게 달려들어 그를 무너뜨리려 하느냐? 기우는 벽, 넘어지는 담처럼."
* 너희 모두는 언제까지나 한 사람에게 달려들어 그를 무너뜨리려 하느냐? ‘달려들어...’라는 말은 ‘부수다’, ‘공격하다.’라는 의미로 상대방을 해치기 위해 소리를 지르면서 손을 들고 달려드는 행위나 모습을 뜻합니다. 그리고 ‘언제 까지나...’ 3절의 ‘기우는 벽’ 과 ‘넘어지는 담’과 대조되는 표현으로 큰 무리를 지은 대적들이 막강한 힘으로 미약한 다윗을 죽이려고 맹렬히 달려드는 모습을 강조적으로 나타내 줍니다. 이로 볼 때 당시 다윗의 처지는 실로 위태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그 와중에서 흔들리지 아니하고 잠잠히 하느님만을 바라노라고 고백하고 있음은 다윗의 야훼 하느님께 의지하는 신앙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2, 3절. 참조)
* 기우는 벽, 넘어지는 담처럼...
이 구절이 가리키는 한 사람이가 누구인지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 원수들의 계속적인 도전을 받고 있던 다윗 자신(사무엘 하권 15장 13-17장 26절. 참조)을 가리킨다는 해석입니다. 원수들에게 있어서 다윗은 충격을 받아 곧 기우려져 쓰러지고야 말 것 같은 벽과 넘어지려고 흔들리는 담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둘째, 다윗을 괴롭히던 악인들로서 ‘기우는 벽’ 과 ‘넘어지는 담’은 그들의 마지막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이에 의하면 이 구절은...‘너희들은 기우는 별과 넘어지는 담고 같다.’말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 중 두 번째 해석을 주장하는 자들이 내세우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넘어지는 담과 같다.’라는 표현이 이사야서 30장 13절 “이 죄는 너희에게 점점 부풀어 몰랐다가 떨어지는, 갑자기 일순간에 부서져 내리는 높은 성벽의 돌담과 같으리라.”에도 나오는데, 거기서는 악인들의 말로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자신의 처한 상태를 악인들의 말로에 비유했다고 보기에는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문맥이 다윗이 위기상황에 처하여 하느님의 구원을 바라는 내용임에 비추어 볼 때 첫 번째 해석이 보다 타당하다고 하겠습니다.
♧♧ 시편 62편 5절….
"진정 그들은 높은 곳에서 그를 떨어뜨리려 꾀하며 거짓을 좋아하는구나. 그들은 입으로 축복하지만 속으로 저주하는 구나. 셀라."
* 높은 곳에서 그를 떨어뜨리려 꾀하며...
‘높은 곳’이란 다윗의 왕위를 가리킵니다. 시편 62편의 정확한 저작 동기는 알 수 없지만, 이 시편에서 말하는 다윗의 대적은 압살롬과 아히토펠이 아닌가? 추측됩니다.(사무엘 하권 15장 7-12. 참조) 이들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다윗에 반역하여 왕권을 탈취하려 하였습니다. 이들의 이 같은 행동은 비단 다윗 개인을 대적하는 것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하느님을 대적하는 행위였습니다.
* 거짓을 좋아하는구나...
이는 구체적으로 사무엘 하권 15장 2-6절에 나타는 압살롬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압살롬은 다윗의 재판권을 성문에서 가로채어 재판을 정의롭지 않게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하는 죄를 범했었습니다.
* 입으로 축복하지만 속으로 저주하는 구나...
곧 ‘이웃들에게 입으로는 평화를 말하지만 마음에는 악이 도사리고 있으며(시편 28편 3절)’, ‘저마다 이웃에게 거짓을 말하고 간사한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 자들(시편 12편 3절)’, ‘그 입은 사기와 억압으로 가득 차 있고 그 혓바닥 밑에는 재앙과 환난이 도사리고 있는 자들(시편 10편 7절)을 가리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한 입으로 두 마음을 품어 말하는 거짓 예언자들을 가리켜 이들은 곧 양의 옷을 입고 사람들에게 나아오지만, 속에는 이리들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마태오 복음 7장 15절. 참조) 종말이 가까울수록 이런 자들이 더욱 더 기승을 부릴 터인즉, 주님께 충실한 이들은 영적으로 더욱 전진하여 거짓 예언자들에게 유혹 당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테살로니카 1서 5장 6절. 참조)
* 셀라
이것은 시편에 자주 나오는 음악 용어로서 노래를 부를 때 소리를 높이라는 지시어인 것으로 이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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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유튜브에서 시사 정치 문제를 다루는 채널을 즐겨보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자극적인 말로 현재의 시사 정치 문제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유튜버의 말에 공감하면서 그 역시 지금 사회를 비판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알 수 없는 고열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도 그 원인을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침대에 누워서 자신이 즐겨 보던 유튜브를 더 즐겨봤습니다.
하지만 병은 나아지지 않고 더 아픈 것입니다. 이제는 유튜브를 볼 힘도 없어서 그저 누워서 잠만 잤습니다. 이렇게 3~4일을 꼼짝하지 못하고 누워있었던 그는 점점 기력을 회복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워있을 때 아픈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유튜브를 보면서 얻게 된 자그마한 지식으로 계속 부정적인 생각과 말을 쏟아붓다 보니 주님께서 그런 생각과 말을 하지 못하게 아예 보지 못하도록 아프게 만든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제 부정적인 생각과 말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이고 좋은 모습도 너무 많이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더불어 건강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보시니 좋은’ 곳입니다. 이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 ‘보시니 나쁜’ 곳으로 만드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갖가지 거룩한 선물을 주십니다. 이것을 오늘 복음에서는 ‘미나’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각 사람이 받은 미나가 달랐습니다. 능력에 따라서 분배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서 잘 활용해서 열 배로 또 다섯 배로 불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둔 사람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주님의 일을 했을 뿐인데 그 혜택은 종이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사업에 동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든 수익을 우리가 차지합니다.
주님께 제물을 바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바친 것을 모두 돌려받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말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미래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신이 받은 하나의 미나 마저 빼앗기고 맙니다. 우리가 풍요롭게 되기를 바라는 주님께서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을 심판하십니다. 지금을 사는 내 모습을 보신 주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까? 칭찬의 말일까요?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며 혼나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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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지혜}
옛날 한 왕국이 이웃 나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왕은 전쟁 영웅들을 불러서 큰 상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전쟁에 참여했던 왕자가 자신에게도 상을 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왕은 왕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하들에게 과인이 왕자에게 대장군의 지위를 내리려고 했는데 왕자가 거절했다고 말하겠다.”
상을 달라고 청했더니 이상한 말만 하는 왕을 이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동시에 서운한 마음이 가득했지요. 그러나 며칠 뒤에 왕자는 깜짝 놀랄 체험을 하게 됩니다.
대장군의 지위를 거절한 왕자는 매우 겸손하고 올바른 사람이라는 소문이 퍼져서 왕자 주변에 훌륭한 인재들이 모여드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더 큰 선물이었을까요? 눈앞에 놓인 것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한발 앞서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지혜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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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제 모임이 있었습니다. 반가운 얼굴들입니다. 한국에서도 안식년 중인 사제가 왔습니다. 켄터키, 랄리, 뉴욕, 필라델피아에서 모였습니다. 워싱턴, 델라웨어, 코네티컷에 있는 사제들은 사정이 있어서 참석 못했습니다. 저처럼 이제 막 온 사제도 있고, 적응을 마치고 의욕적으로 활동하는 사제도 있고,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제도 있습니다. 저는 차로 3시간 운전해서 모임 장소인 필라델피아로 갔습니다. 비행기로 온 분도 있었습니다. 마음이 있으니, 먼 길도 기쁜 마음으로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는 힘들고 외로울 수 있는데, 함께 모이니 위로가 되고, 용기를 얻습니다.
2019년입니다. 교회의 전례력은 곧 새해를 맞이합니다. 안식년을 보내던 저에게는 삶의 둥지를 옮기는 해이기도 합니다. 2019년에 여러 가지 일이 있었을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기도 하고, 원하지 않는 사람과 또 다시 만나기도 하고, 바라는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기도 하고, 굳게 결심하지만 또 다시 무너지는 모습을 보기도 했을 겁니다. ‘산해숭심(山海崇深)’이란 말이 있습니다. 산은 높고, 바다는 깊다는 뜻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일에 너무 기뻐하지도, 너무 슬퍼하지도 말라는 뜻입니다. 높은 산은 모든 이을 품어 주고, 깊은 바다는 모든 이를 받아 주기 때문입니다.
높은 산과, 깊은 바다를 꿈꾸었던 시인 박노해의 시 ‘동그란 길로 가다’를 나누고 싶습니다.
“누구도 산정에 오래 머물 수는 없다.
누구도 골짜기에 오래 있을 수는 없다.
삶은 최고와 최악의 순간들을 지나 유장한 능선을 오르내리며 가는 것
절정의 시간은 짧다
최악의 시간도 짧다
천국의 기쁨도 짧다
지옥의 고통도 짧다
긴 호흡으로 보면
좋을 때도 순간이고 어려울 때도 순간인 것을
돌아보면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쁜 게 나쁜 것이 아닌 것을
삶은 동그란 길을 돌아나가는 것
그러니 담대하라.
어떤 경우에도 너 자신을 잃지 마라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위엄을 잃지 마라”
애플을 창업한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겨준 글이 있습니다.
“지금 병들어 누워 과거의 삶을 회상하는 이 순간, 나는 깨닫는다. 정말 자부심 가졌던 사회적 인정과 부는 결국 닥쳐올 죽음 앞에 희미해지고 의미 없어져 간다는 것을. 이제야 나는 깨달았다. 신은 우리에게 부가 가져오는 환상이 아닌 만인이 가진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감각(Senses)을 선사하셨다. 내 인생을 통해 얻은 부를 나는 가져갈 수 없다.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사랑이 넘쳐나는 기억들뿐이다. 그 기억들이야말로 나를 따라다니고, 나와 함께하고, 지속할 힘과 빛을 주는 진정한 부이다. 우리가 현재 삶의 어느 순간에 있든, 결국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삶이란 극의 커튼이 내려오는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가족 간의 사랑을 소중히 하라. 배우자를 사랑하라. 친구들을 사랑하라. 너 자신에게 잘 대해줘라. 타인에게 잘 대해 줘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이라는 문을 열고 영원한 생명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방법도 알려 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상대평가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갈 수 있는 절대평가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예수님을 조금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손이 둘인 것은 하나는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고, 다른 하나는 남을 돕는 데 사용하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에게 발이 둘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눈이 둘인 것은 하나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을 아름답게 보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에게 귀가 둘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는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듣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의 어려움을 들어 주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의 재능과 능력은 본인을 위해서 사용해야 하지만 그 반은 남을 위해서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과 재능을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밤하늘은 별이 있어서 아름다운 것처럼, 우리들의 선행과 우리들의 봉사가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희망의 별빛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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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나 내일이 아닌 오늘!>
-오늘,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가장 귀한 보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오늘입니다. 하루하루 주어지는 참 좋은 선물이 오늘입니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입니다. 하늘 나라의 행복을 살아야 할 날은,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야 할 날도 오늘입니다.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할 날도 오늘입니다.
어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오늘이요, 오늘이 있어 내일도 있습니다. 과거 아무리 잘 살았어도 오늘 못살면 소용이 없습니다. 살아 온 날들 보다 오늘 하루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어제를 후회할 것이 아니라 심기일전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끝은 시작입니다. 늘 오늘의 시작이 있을 뿐입니다.
루가복음사가가 강조하는 날도 오늘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이 자캐오에게 한 두 말마디도 기억할 것입니다.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그러니 오늘 하루의 선물에 감사하며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일어나 새롭게 오늘을 시작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구상 시인의 오늘이란 널리 회자되고 있는 시를 나눕니다. 읽을 때 마다 새롭습니다.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더불어 생각나는 자주 인용하여 나눴던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제 좌우명시 마지막 연도 생각납니다. 역시 하루하루 ‘오늘’ 하루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참으로 오늘 만나는 이들을 행복하게 해드리는 것도 이웃에 줄 수 있는 참 좋은 선물입니다. 어제 예수성심자매회 오전 강의시 열심히 참여하던 80대 전후 의 두 자매님의 행복해 하던 모습에 저도 행복했고, 오랜만에 만난 어느 자매님께 드린 덕담에 행복해 하던 자매님 모습에 저도 행복했습니다. 빈손 방문을 몹시 미안해 하던 자매였습니다.
“자매님 자체가 참 좋은 선물입니다!”
사실이었습니다. 참 좋은 사람은 빈손으로와도 참 반갑고 기쁜 선물이 됩니다. 하느님 앞 최후심판정에 섰을 때도 똑같을 것입니다. 언젠가의 그날의 심판날이 아니라 오늘 하루 미사를 최후심판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미나의 비유’도 독서 ‘한 어머니와 일곱 아들의 순교’도 오늘에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이 거륵한 미사시간, 주님 앞에서 과연 어제 하루는 내 능력에 따라 최선의 노력을 다해 하나의 미나로 열 미나를, 혹은 다섯 미나를 남겼는지, 또는 한 미나 그대로의 불충한 삶은 아니었는지 깊이 성찰하며 오늘 하루 새롭게 살 각오를 하는 시간입니다. “이 악한 종아!”가 아닌 “잘하였다, 착한종아!”주님의 칭찬을 들을 수 있도록 오늘 하루를 살아야 하겠습니다.
제1독서 마카베오 하권의 한 어머니와 일곱 아들의 순교 장면이 참 감동적입니다. 오늘 하루에 모두 일어난 일입니다. 마지막 오늘 하루에 한 가족의 전 생애가 담겨 있습니다. 평생 삶의 반영이자 요약같은 마지막 오늘 하루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어제가 아닌 오늘입니다. 일곱 아들이 단 하루 오늘에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주님께 희망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용감하게 견디어 낸 그 어머니와 일곱 순교 아들들입니다.
어머니는 조상들의 언어로 아들 하나하나를 고결한 정신으로 격려했고 마지막 막내 아들은 물론 어머니도 온갖 회유에 넘어가지 않고 숭고한 순교의 죽음을 맞이하니 평생 영적전쟁에 최종 승리를 뜻합니다. 결코 우연한 영적 승리가 아닌 하루하루 ‘오늘’에 충실한 결과임을 봅니다.
믿는 이들의 삶에 우연이나 요행, 비약이나 도약은 없습니다. 하루하루 시종여일始終如一, 경천애인敬天愛人, 신망애信望愛의 자세로 깨어,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묵묵히, 충실히, 항구히 ‘오늘’을 살아갈 때 함께 하는 하느님 도움의 은총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오늘 하루도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을 뵈옵고, 깨어날 때 당신 모습에 흡족하오리다.”(시편17,8.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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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작은 일에 충실해야>
하느님의 나라, 천상의 축복은 믿는 이들이 바라는 희망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놀랍고도 신기한 모습으로 오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잘못된 환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서 비유를 들어 이야기해 주십니다. 각자는 자기 맡은 일에 충실하고 적극 협력하며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은 사람들이 있었고 다섯 미나를 벌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각자의 탈랜트대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 충실하게 힘들여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협력의 강도는 분명히 다릅니다. 열개도 있고, 다섯도 있습니다. 그림같은 호숫가에 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험한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모험을 강행하는 담대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지극히 수동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한 미나를 그냥 수건에 싸서 보관한 사람입니다. 그는 은총의 삶과는 멀리있는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활용해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한다면 무엇인가 해야 했습니다. 눈먼 거지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쳤습니다.’
자캐오는 ‘먼저 달려 나무에 올라 기다렸습니다.’ 철은 녹이 슬고, 용수철도 느슨하게 풀어집니다. 깨끗한 물도 흐르지 않으면 썩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았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잘 써야지!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지 말고 하느님의 은혜에 협력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적극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인이‘한 미나를 가진 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자에게 주어라.’ 하고 말하자 주인에게 ‘주인님, 저이는 열미나나 가지고 있습니다.’하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얘기한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것만 가지고 따지고 대드는 사람입니다. 순명하지 않고 이유를 대는 그들은 결국 마지막에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는 물론 이웃을 망가뜨립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탈랜트가 있고 그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는 용기와 지혜가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몫을 사용한대로 그만큼의 대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인과법칙을 피할 수 없으니 주님께서 주신 달랜트를 뿌리고 때를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루아침에 무엇을 이루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실까?’를 소중히 여기는 하루를 기대합니다.
어떠한 큰 일도 작은 것에서 시작되니 만큼 작은 것이 결코 작지 않음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각자가 받은 은총은 다 다르고 그것은 단순 비교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어진 것을 분수에 맞게 쓸 수 있으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많이 이룬 것도 중요하지만 이루기 위한 과정을 귀히 여기는 주님이시니 하나를 가지고 열 개를 늘렸건 다섯으로 늘렸건 그것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를 위한 땀과 노력과 정성, 희생이 값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성공하도록 부르신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도록 부르셨습니다.’
옛말에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 산다.”고 했습니다. 젊어서 열심히 노력하면 나중에 큰 보람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듯이 주님을 뵙고자 노력하면 만나게 되고 열매도 맺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면 지금은 힘들고 고달프겠지만 그만큼 보람도 기쁨도 크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겠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가19,26)하신 말씀은 노력한 정성과 수고는 크게 이룰 것이요, 그렇지 못함은 결국 잃는 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빼앗아가기도 전에 잃고서는 남의 탓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욕심을 부리지 말고 지금 주어진 일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신자들이 신앙심이 없다고 넋두리 하고 예전 같지 않다고 말하기 전에 신앙을 키워주지 못하고 일깨워 주지 못한 저의 잘못을 자책하는 오늘입니다.
대접 받기에 익숙해지고 독불장군으로 고착되는 오늘을 봉헌합니다. 작은 일에 충실할 것을 다짐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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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심판에 이르기 전 우리가 거쳐야 하는 일들을 알려 줍니다.
복음 속 예수님의 비유는 목적이 분명합니다(루카 19,11 참조). 당신은 지금 수난과 죽음의 도성이 될 예루살렘을 지척에 두고 계시는데, 사람들은 당장이라도 메시아를 통한 해방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루카 19,13)
한 미나는 당시 화폐 단위로 약 100데나리온 정도라고 합니다. 1데나리온이 일꾼의 하루 품삯이니 지금 우리 돈으로 하면 한 미나는 평균 700-1,000만 원정도라 보면 될 것 같네요. 병행구인 마태 25,14-30에서는 탈렌트 단위로 등장하는데 한 탈렌트는 6,000데나리온이니 그에 비하면 루카 복음사가가 언급한 단위는 훨씬 소액입니다.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루카 19,14)
마태오 복음의 탈렌트 비유는 오로지 탈렌트의 활용과 그 대가라는 주제만을 담고 있는 것에 비해, 이 비유는 거기에 왕권 이야기까지 겹친 복합 구조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명을 굳이 이 비유 앞뒤에 배치해 언급하면서 이 도성이 주는 함의적 긴장을 비유에 섞어 넣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는 왕권을 받고 돌아와 ... 그들을 불러오라고 분부하였다."(루카 19,15)
나누어 받은 것에 대해 셈을 하는 시간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누리기 전, 사람의 아들의 날을 맞이하기 전 모든 인간은 이처럼 셈을 하는 자리를 거쳐야 합니다. 이 자리는 오늘 종들의 태도에서 보듯 일방적인 추궁이나 취조의 시간이 아니라, 받은 것에 대한 자신의 노력을 소신껏 밝히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잘 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루카 19,17)
주님께 얼마나 듣고 싶은 칭찬인지요! 첫째 종은 장사 수완이나 투자 감각으로 칭찬받지 않고 아주 작은 일에 성실했다고 칭찬을 받습니다. 크건 작건 중요하건 덜 중요하건 소명에 충실한 이는 주인에게 착한 종입니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루카 19,22)
다른 종은 주인을 냉혹하다고 여기기에 혹시라도 손실이 날까 두려워 받은 것을 그냥 둡니다. 그는 자기 나름대로 주인에 대한 앓과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앎이 자기에게 올가미가 되어 버리지요. 주인이 그의 앎에 기인해서 그를 대하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심판은 어쩌면 자신이 스스로 초래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신관, 하느님관'대로 그분께서 내게 보답하시는 것이 심판이 아닐까 하는... 이 말씀에 따르면, 그 보답이 칭찬과 보상이 될지, 징벌이 될지는 '내게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와 영 별개의 문제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각과 마음에 따라 하느님은 작은 분도 큰 분도 되시고, 냉혹한 분도 자비로운 분도 되십니다.
"그리고 내가 저희들의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그 원수들을 이리 끌어다가 내 앞에서 처형하여라."(루카 19,27)
주인과 종의 셈하는 이야기에 묻힐 것 같았던 또 다른 주제가 함께 마무리됩니다. 이 역시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 전, 사람의 아들을 맞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심판의 순간입니다. 허락받은 생명과 소명에 대해 주님과 셈을 하는 시간과, 그에 상응하는 갚음을 요구받는 심판의 시간은 이상적이고 관념적으로 막연하게 꿈꾸던 하느님 나라와 구원을 보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마주하게 해 줍니다.
이 말씀까지 마치신 예수님께서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루카 19,28) 올라가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당장이라도 나타날 것처럼 들떠있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당신도 거치셔야 할 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는 이교도들에 의해 일곱 아들의 순교를 지켜본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모른다 ... 내가 아니다."(2마카 7,22)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께 희망을 둔 지혜롭고 용감한 한 여인의 입에서 놀라운 고백이 흘러나옵니다. 사실 모든 인간이 주님 앞에서 솔직히 고백해야 하는 근원적인 명제가 아닐까 합니다. 그 처참한 고통의 순간에 이 어머니는 창조의 원리와 창조주의 능력, 육신에 깃든 목숨의 덧없음을 조목조목 일깨우면서, 그 거대한 존재 앞에서 지녀야 하는 인간의 기본 자세를 아들과, 현장에서 듣는 이들과, 지금 여기서 이 말씀을 읽는 우리 가슴에 각인시키고 있습니다.
"나는 모른다 ... 내가 아니다."
이런 자기 부정과 겸손은 하느님 존재에 대한 놀라운 인식으로 연결되지요. 모르는 것을 진실되고 겸손히 모른다고 하는 이는 실상 엄청난 앎의 소유자입니다. 당시 교육과 사회활동에서 소외된 여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통찰과 지혜는 여느 신학 못지 않게 거룩하고 명철한 진리입니다.
오늘 복음 속의 '다른 종'이 차라리 주인에 대해 몰랐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얼핏 듭니다. 그가 차라리 주인에 대해 몰랐다면, 모른다고 여겼다면, 섣부른 편견을 앎으로 여기지 않았다면...
하느님을 넘겨짚거나 내 의식 안에 가두지 않는 이는 주어진 생명과 소명에 그저 성실히 임합니다. 크건 작건, 중요하건 하찮아 보이건, 드러나건 드러나지 않건 관계 없습니다. 주인이 주셨으니, 주어진 또 다른 재화인 시간과 노력을 다해 충실히 임합니다. 그는 착한 주인의 착한 종입니다.
전례주년으로 한해의 끝을 향해 가는 요즘입니다. 거듭되는 종말, 사람의 아들의 날,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이야기가 "그때"의 무게와 강도와 부담을 경감시켜 주는지, 증가시키는지는 하느님에 대한 나의 앎, 인식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모르는 바는 그분께서 밝혀주시지 않은 것이니 모르는 채로 , 드러내시고 베푸신 것에 대해서는 깨닫고 기억하고 감사하면서 아주 작은 일부터 성실히 꾸려갑시다. 착한 종은 착한 주인과 함께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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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끊임없는 기쁨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기쁨은 청소를 하거나 영양을 섭취하는 것과 같습니다. 청소는 깨끗이 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영양 섭취는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합니다.
어쩌다 한 번 기뻐한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기쁨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기쁨을 빼앗아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행복한 마음을 오염시키는 크고 작은 장애물을 경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지금 행복하세요?」에서
♣청소 한두 번 하는 것으로 집안이 깨끗하지 않습니다. 꾸준히 쓸고 닦아야 하듯이 기쁨도 기쁨을 빼앗아 가는 장애물을 경계하는 습관이 길러 덕행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몸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영양 섭취를 한두 번 하는 것이아니고 끊임없이 해야 하듯이 성령 안에 누리는 내면의기쁨이 꾸준히 흘러넘치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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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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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원당성당 이종경 비오 신부님]
☆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응답에도 기뻐하시며 그보다 더 좋은 것을 놀랍도록 선물해주십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복음 19장 11ㄴ-28절)
<더 얹어주시는 주님>
가끔 주일학교 친구들의 소식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누구는 성가정을 꾸려서 온 가족이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누구는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친구는 냉담교우로 살고 있고, 심지어는 아예 다른 종교로 개종한 친구도 있습니다. 한때는 주일마다 성당에 모여 함께 미사를 드리고 여름 캠프도 함께 했었는데,
지금은 각자 신앙의 모습이 다르니 아쉬운 마음입니다.
‘언제 어느 순간부터 나뉘었을까?’ 많은 고비들이 있었을 텐데,주어진 신앙을 간직하고 더 키워낸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그 차이가 점점 벌어져 오늘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는 말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 충실할수록 더 많은 은총을 체험하고 그 과정에서 신앙은 더 깊어집니다. 반면, 하느님 말씀에 무관심하면 이미 받은 것마저 잃어버리고 말지요.
다시 한 번, 지금 누리고 있는 은총을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선물해주셨고 그에 열심히 응답하려 했으며 거기에다 더욱 얹어서 채워주신 하느님 섭리의 결과입니다. 앞으로 계속 다가올 갈림길에서도 하느님을 선택한다면, 지금보다 더욱 가까이 그분 편에 선 신앙인이 될 수 있으리라 희망합니다.
(생활성서 2019년 11월호 '소금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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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삶의 태도>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루카 19, 21)
주인이 종들에게 일을 시킬때
종의 능력과 수준을 보고 맡깁니다.
주인에 대한 신뢰심이 없는 종은
주인이 시키는 일을 기쁘게도 열심히도
하지 않고 방치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열심히 하면 성과가 납니다.
게으르고 꼼짝하기 싫어 일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성찰하지 않고 꼭 남 탓을 합니다.
성과도 없고 기쁨도 없는 종의 모습은
주인이 보기에 안타깝고 정신 상태가 빵!
순수한 마음을 지니고 사는 종은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주인의 뜻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헌신합니다.
집에, 서랍에, 신발장에 쌓아두고 있는것들,
활용하지도 나누지도 않고 쟁여둔 물건들,
주님이 보시면 꾸짖으실 것입니다.
"꺼내서 활용하고 기꺼이 나눠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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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잘하였다, 착한 종아!"(루카 19, 17)
착하고 성실한
삶이 무엇인지를
이 위령성월에 다시
묵상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하느님께로
돌아가야할지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주신
생명의 미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맡기신
소중한 시간입니다.
맡기셨다는 것은
우리를 신뢰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헌신적인 사랑을
당신 삶으로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모든 시간은
우리를 위한
선물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한
일상을 살아가길
바라십니다.
일상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일상에
성실한 우리의
삶입니다.
십자가의 미나로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은총의 위령성월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아는 것을
실천하고
믿는 것을
펼쳐 나가는
멋진 여정 되십시오.
나와 너
우리 모두를
풍요롭게 하는
삶이 바로
미나를 늘리는
성실할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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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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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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