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손으로 교회 건축을 해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교회 건축이라는 말만 나오면 오히려 알러지 반응을 하는 목사였다.
그저 생명에 봉사하는 일이 목회의 전부라고 여겼다.
하지만 얼떨결에 제주도 중산간에 아름다운 교회를 건축했다.
가끔 되돌아보지만 그 기억만으로도 흥분된다.
본래 우리 교회는 제주도의 어도봉 오름 위에 위치해 있었다.
언덕이 가팔라서
교회 마당에 서면 발아래로 아랫집 지붕이 그대로 내려다보였다.
어느 날 아랫집 사모님이 올라오셔서 나를 자신의 집으로 끌고 내려가셨다.
내려가 보니 선생님 집으로 축대가 허물어져 내리고 있었다.
본래 교회 건물을 창고를 개조한 것이다.
옛적에 이 언덕 위에 창고를 지을 적에 든든하게 옹벽치고 지은 것이 아니었다.
선생님 댁 뒷마당에 서면 머리 위로 5-6m 위 그 곳이 교회 땅바닥이었다.
그 바닥까지 거의 직각을 이룬 담벼락 흙이 선생님 뒷마당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니 교회 사택 입구로 들어서는 시멘트 발판이
대나무와 함께 흘러내려서
10도에서 20도는 삐딱하게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나니 걱정이 앞섰다.
이 교회 건물이 무너져서 아랫집을 덮쳐버리면.......
그 뿐 아니다.
그 때까지는 교회와 마을 사이를 아름다운 오솔길이 가로 지르고 있었는데
그 입구에 간판이 하나 섰다.
경고 !
이 작은 오솔길을
차들이 사정없이 다니도록
마을 우회도로로 틀림없이 바꾸어 놓겠슴.
북제주 군수!
축대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안 것과 우회도로가 난다는 사실을 동시에 안 것이다.
나는 급하게 되어 건축을 하시는 교인들 중에 알아보니
족히 5-6m가 되는 축대를 몇 십 m 쌓는 일은
차라리 교회를 건축하는 경비보다 많이 든다는 것이다.
그 일은 그 일이고
할머니들이 교회 오시는 길을
차가 마구 달리는 마을 우회도로가 막을 판이다.
교회를 오시다가 사고라도 난다면 큰일이다.
걱정 중이었는데
교회 학교 아이들은 주일 학교 공과 시간에 기도문을 써서 작은 고사리 손마다 그것을 들었다.
교회가 무너지면 아랫집이 어떻게 되요.
하나님.
아이들은 자기가 쓴 기도문들을 들고서 어도봉을 한 바퀴 돌았다.
하나님께 데모를 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미국의 동생이 제안했다.
동생은 교회보다 사택이 무너질까 걱정했나보다.
오빠가 어머니를 모시고 있으니 어머니를 위해 집을 마련해 주겠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으신 곽 집사님이 그 돈을 주면 목사님 집을 나무로 지어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지불한 돈보다 몇 곱절로 좋은 집이 이 시골 마을에 지어지기 시작했다.
교인들에게 교회 건축 말을 꺼냈지만 나의 사전에 목적 헌금이란 없다.
우리에게 건축헌금 그런 명목은 없었다.
교인들에게 열심히 기도하시라고 말만 했다.
그 즈음 창순이가 우량아 대회를 나갔다.
그리고 북제주군 지역에서 일등 우량아가 되어 행운의 금열쇠를 받았다.
그 열쇠가 목사인 내 아들이 타온 거였으면 얼마나 아까워했을까?
하나님이 주신 거라고 길이길이 보존했을 것이다.
그런데 집사님은 창순이 손에 그것을 들게 하고 찍은 기념사진 한 장만 남기고는 그것을 그대로 건축 헌납했다.
그것이 첫 번째의 건축 헌물인 샘이다.
지금도 가물가물 기억이 난다.
그것이 헌금이어서 내가 설교 하다말고 돈 봉투를 흔들며 만 원짜리 몇 장이라고 공개했다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강대상에서 그 금열쇠 통을 열어 교인들에게 이것 보시라고
이것이 창순이가 타온 금열쇠라고 예배 시간에 교인들에게 보여주었다.
교인들은 박수를 치면서 함께 기뻐해주었다.
그렇게 되니 할머님들이 건축 헌금을 하시기 시작하셨다.
할머니들의 쌈지돈이 건축 헌금으로 나왔다.
그 즈음 100세를 내다보시는 집사님을 심방한 적이 있었다.
함께 방문하여 예배를 드리시던 바로 창순이 엄마 그 집사님의 말씀이
건축된 교회를 구경하시고 돌아가셔야지요 했다.
그 때 집사님의 말씀에 나는 깜짝 놀랐는데 정말 그 말씀은 예언이 되었다.
집사님은 교회를 다 구경하시고 그 곳에서 예배도 드리시고 돌아가셨다.
세상 사업으로 낭패를 보시고 40에 우리 마을에 오셔서 교회에 첫발을 디디신 교우님이 성령이 충만하셨다.
지금은 장로님이 되신 교우님의 간증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목사님, 제가 서귀포를 향해 낚시줄을 싣고 가다가 산업도로 길 옆에 차를 세우고 지는 해를 보면서 한참 울다가 갔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길을 열어주시다니.......
나는 교우님이 들려주신 간증에 은혜를 받곤했다.
그 분이 제안하셨다.
목사님 제가 교회 사택을 사겠습니다.
그러면 그 돈으로 제가 눈여겨 보아두었던 마을 입구의 밭을 사세요.
그래서 은행 융자를 조금 더해 턱하니 마을 입구의 약 500평 밭을 사게 되었다.
이 교우님은 교회 사택 자리에 자신의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 때에 교회는 교회 건축을 위한 위원을 뽑았다.
집사님이랑 교인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는데 그들의 의견은 일치했다.
목사님은 건축 일을 모르니 초신자 교우님이 건축위원장을 맡아야한다는 것이다.
나도 옳다고 했다.
건축위원장도 세웠다.
그리고 나니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목사 사례비도 못 챙기는 시골 교회에서 건축을 한다고 대들었으니 큰일이다.
일생에 돈을 처음 빌려보니 나는 방정맞은 생각도 했다.
이러다 감옥가는 거 아냐?
하지만 내 방침대로 봉성 교회 사전에 목적헌금이란 없었다.
여러분 기도만 하십시오.
그 일이 헌금하는 일보다 큽니다.
융자 얻어 땅만 멀거니 쳐다보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이 마을 우회 도로 공사장이 급히 나를 찾아왔다.
목사님 도로 공사는 급하고 이 많은 흙을 빨리 처리해야 합니다.
교회 터에 이것을 퍼부어도 되겠습니까?
우리가 돈을 주고 흙을 사서 돋우어야할 판에 거꾸로 그 사람이 나에게 사정을 했다.
그럼은요 말이 떨어지자
8톤의 대형 트럭들이 줄을 지어서 흙을 싣고 교회 터를 돋우기 시작했다.
그 때 건축 위원장 교우님은 하나님의 손이 움직이시는 것을 생전 처음 보고는
나에게 고백했다.
몰려오는 트럭들을 보면서 하나님 무서운 생각이 들었어요. 목사님!
그 순간 사모가 건축위원장님 옆에 서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사모도 똑같은 소리다.
10여 대의 대형트럭들이 줄줄이 교회 땅으로 들어섰을 때
하나님이 나도 너무 두려웠어요.......
그 말을 듣고 보니 하나님 두려운 생각이 나에게도 들었다.
교회 마당에 대형트럭이 쏟아놓은 흙이 쌓인 얼마 후였다.
우리 마을의 귤나무를 벌목을 하시던 카톨릭 신자 한 분이 목사님 어디 계시냐면서 나를 찾아오셨다.
마을길을 지나다가 우연히 우리 교회터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 분이 내게 말씀하셨다.
이 시골 교회 건축을 위해 나도 무슨 일인가 하고 싶습니다.
그는 자신의 포크레인을 끌고 오셨다.
그 많은 흙들을 무료로 평탄작업을 해주셨다.
건축 위원들이 모여서 기름값만은 받으시라고 그 분에게 맡겨 드렸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 일 후에 그 분에게 제대로 감사조차 못했다.
그 카톨릭 신자분의 성함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너무 죄송하다.
하지만 물 한 잔의 봉사조차 기억하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수고를 기억하실 것이다.
그러던 얼마 후다.
곽 집사님이 건축 위원장 교우님을 통해 나에게 말씀을 전해 주셨다.
곽 집사님께서 교회를 건축해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사님과 통화를 했다.
목사님, 내가 건축 사업을 하지만 돈은 없습니다.
9채를 건축했으니 한 채는 교회 건물로 십일조를 하겠습니다.
교회를 지어드리겠습니다.
곽 집사님은 일본에서 귀국하신 후 처소를 찾을 때까지 처가집에 머무시며 우리 교회를 몇 달간 다니셨던 분이시다.
그래서 우리 교회와 인연을 맺으신 분이시다.
나는 얼른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집사님이 우리 교회를 다 지어버리면 우리 봉성 교인들은 어떻게 합니까?
우리 교인들도 우리 교회를 세우는 일에 한 몫을 해야 합니다.
전기 시설과 교회 온돌 바닥까는 일만큼은 우리 교인들이 감당 하겠습니다.
우리는 허락을 받았다.
교회 측량을 하고 건축이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이 조용한 산간 마을에
갑자기 거대한 3채의 집이 동시에 건축이 되올라간 것이다.
우리집
건축 위원장 교우님댁
교회
그러던 어느 날이다.
제주시의 베델 교회 집사님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자신은 이 우회 도로 공사의 상하수도를 책임 맡은 책임자라고 소개 하셨다.
제주도는 관광지이며 섬이기 때문에 하수 처리 문제는 엄격했다.
바다의 오염을 막기 위한 것이다.
모든 하수를 썩힌 후 땅으로 버리면 안 된다.
그것을 하수관으로 흘려보내 다시 재처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장 100-200여m의 땅을 포크레인으로 파서
한 길가의 하수도까지 하수관을 묻고 훼손된 아스팔트는 다시 깔고 원래대로 복구 해두어야 했다.
그런데 벧엘 교회 집사님의 말씀은 지금 도로 공사 중에 상하수관 매설 공사를 하고 있으니 얼른 하수관만 사오라는 것이다.
내가 하수관을 사온 것도 아니다.
급하게 하수관 값만 지불했다.
우리 교회 하수관이 그 곳에 함께 묻혀버렸다.
그 일도 해결되었다.
그러다보니 교회는 다 건축되었다.
마지막으로 트레일러에 교회 종탑이 실려 왔다.
그것을 거대한 기중기가 들어서 교회 옆에 세울 때 나는 정말 아이처럼 흥분했다.
우리는 무쇠 종 2개를 서울에 주문했다.
예배 시간이면 빠짐없이 30년 동안 울려왔던 교회 종은
이미 금이 가서 텅 텅 맥빠진 소리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곽 집사님의 개척 교회에 하나를 선물하고 우리 교회에 종을 달았다.
어느 날 건축 위원장님이 한림을 가시다가 폐기하는 도로 보도블럭을 보시고
그것을 운반비만 내고 몇 트럭을 교회 마당에 쏟아 놓았다.
그 때 나도 깨끗한 돌들을 모아서 교회 주위에 깔면서 집사님들과 몇 판 사진도 찍었다.
마침 미술을 하는 젊은 부부가 있어서 자기로 구워서 교회 간판을 만들었다.
그 간판을 내가 갔다 붙였다.
그 일은 목사의 생색이 나는 일이었다.
그 때 간판을 달기 위해 사다리에 올라서서 나는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면서 사진도 찍었다.
이제 모든 공사가 다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교회 건축 일은 계속되었다.
우리 마을 이름난 술꾼이 술냄새를 퍽퍽 풍기면서 교회 사택을 찾아왔다.
그의 직업은 조경이었다.
아니 목사님 교회가 이 모양입니까?
그리고 사택 마루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조경이 엉망 아닙니까?
만약에 목사님이 이 교회를 떠나도 이 목사가 조경을 이렇게 .......
종잡을 수 없는 말을 하더니
목사님, 우리 밭에서 나무 파다 심으세요.
나는 나무는 주는데 심는 것은 목사님 몫입니다.
나무 파다가 심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그 때 처음 알았다.
조경을 하는 것으로 일단 교회 건축을 마쳤다.
교회를 건축했으니 마을 잔치를 했다.
노인회 회장님도 오시고
초등학교 선생님들도 오시고
마을 사람들이 오셔서 축하해주셨다.
그 때 태풍으로 피해가 심했는데
모인 축하금은 봉성 마을 이름으로 방송국에 성금 했다.
도대체 이 건축을 위해 내가 한 일이 무언가?
처음에 경비를 걱정한 일.
집사님이 교회를 다 맡아 지으시려는 것을 말려서
간신히 방바닥과 전기 시설을 우리 교인 몫으로 챙긴 것.
새참 준비한 일.
운반비들을 낸 일
우왕좌왕 한 일 .......
얼마 후였다.
제주도문화 회관에서 한 장의 엽서가 날라 왔다.
제주의 아름다운 교회 사진전이 있는데 오라는 초청장이었다.
누구인지 모르겠다.
우리 교회를 사진을 찍어갔는데 우리 교회 사진이 제주의 아름다운 교회로 뽑혀서 그곳에 전시된 모양이었다.
그래서 봉성 교회 목사 이름으로 초청장이 온 것이다.
우리 식구들은 덕분에 제주시 문화회관에 전시된 우리 교회 사진을 구경하러 갔다.
이 봉성 교회 건축의 일에
하나님께서 예고 없이 마구 개입하시는 통에 아직도 그 일들이 내 머리에 정리가 잘 안 된다.
아마 영원히 정리가 안 될 것 같다.
그리고 2년 후 미국으로 왔다.
지금도 봉성 교회에 돌아가서 내가 깔았던 붉은 보도 블록까지 교회 건물을 하나 하나 다시 돌아보고 싶다.
봉성 교회 건축은 나의 일생에 가장 아름다운 추억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