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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조식의 지리산과 신어산.2024.11.15.10~12.월봉고전아카데미
중종 | 25 | 1530 | 경인 | 嘉靖 | 9 | 30 | 어머니를 모시고 처가가 있는 金海 神魚山 아래 炭洞으로 移居하고, 山海亭을 짓다. ○ 成運, 李源, 申季誠, 李希顔이 來訪하다. |
명종 | 2 | 1547 | 정미 | 嘉靖 | 26 | 47 | 喪制를 마치고 三嘉縣 兎洞으로 옮겨 살다. ○ 宋麟壽를 哭하다. |
구암집(龜巖集) 이정(李楨)생년1512년(중종 7)몰년1571년(선조 4)자강이(剛而)호구암(龜巖)본관사천(泗川)특기사항송인수(宋麟壽), 이황(李滉)의 문인
龜巖先生文集卷之一 續集 / 七言絶句 / 寄南冥南冥時在三嘉雷龍舍
湖光似鏡元無勅。山色如孤更有梅。日曬胸中千萬卷。潛龍時復動鳴雷。
명종 | 16 | 1561 | 신유 | 嘉靖 | 40 | 61 | 智異山 德川洞으로 들어가서 山天齋를 짓다. ○ 〈神明舍銘〉을 짓다. ○ 藥圃 鄭琢, 雲岡 趙瑗이 와서 배우다. |
曺植 | 1501 | 1572 | 昌寧 | 楗仲 | 南冥, 南溟, 山海, 方丈老子, 方丈山人 | 文貞 |
신계성(申季誠) | 1499 | 1562 | 평산(平山) | 자송(子誠), 자함(子諴) | 송계(松溪), 석계(石溪) |
金宇顒 | 1540 | 1603 | 義城 | 肅夫 | 東岡, 直峯 | 文貞 |
무민당집(无悶堂集) 박인(朴絪)생년1583년(선조 16)몰년1640년(인조 18)자백화(伯和)호임헌(臨軒), 무민당(无悶堂)본관고령(高靈)특기사항정인홍(鄭仁弘)의 문인. 유진(柳袗), 조임도(趙任道), 임진부(林眞怤), 강대수(姜大遂) 등과 교유
无悶堂先生文集卷之五 / 南冥先生年譜
鄭仁弘 | 1536 | 1623 | 瑞山 | 德遠, 萊菴 | 來菴, 來庵, 萊菴 |
선조 | 9 | 1576 | 병자 | 萬曆 | 4 | - | ○ 崔永慶, 河沆, 孫天祐, 柳宗智 등이 德川洞 山天齋 옆에 德川書院을 세우다. ○ 盧欽, 宋希昌 등이 三嘉의 晦峴에 晦山書院을 세우다. |
神宗萬曆四年丙子
○創德川書院。先生歿後五年。崔守愚堂,河覺齋,孫天祐,柳宗智合議。創立書院于德川洞。在山天齋西三里許。萬曆壬辰。燬于倭賊。越十年壬寅。陳克敬,李瀞,河憕等重創。
○創晦山書院。盧欽,宋希昌。與多士共議。創立于晦峴。在三嘉縣西二十里許。萬曆壬辰。燬于倭賊。
河晉寶 | 1530 | 1585 | 자(字) 덕재(德哉) 호(號) 영모정(永慕亭) 1555년 병과 급제 서장관 정언 헌납 지평 장영 좌사관을 역임하고, 김해 밀양부사 안주 성주 목사 사도어사를 지냈다. | 晉州 | 德哉 |
來庵先生文集卷之十二 / 行狀司諫河公行錄 代作 丁丑(1577,선조10)除禮賓寺正。以推鞠敬差官。治忠淸道淫婦獄。入爲司藝。遷右通禮。以病遞。秋除金海府使。戊寅(1578,선조11)冬。以司諫召。中道辭病。 |
선조 | 11 | 1578 | 무인 | 萬曆 | 6 | - | 金海 府使 河晉寶가 鄕人들과 함께 金海의 山海亭 舊址에 新山書院을 세우다. |
六年戊寅○創新山書院。時河晉寶爲金海府使。倡起鄕人。創立書院于山海亭舊址。壬辰燬于倭賊。越十七年戊申。黃世烈,許景胤等重創。
선조 | 34 | 1601 | 신축 | 萬曆 | 29 | - | 宋希昌, 文景虎, 曺應仁 등이 倭賊에 훼손된 晦山書院을 香川으로 옮겨 세우고 龍巖書院이라 하다. |
二十九年辛丑○創龍巖書院。晦山舊址。在峽裏隘狹。多士會議。乃移建于香川。在陜川三嘉兩邑之界。宋希昌,文景虎,曺應仁等。相與悉心敦事。
三十六年戊申○二月 宣宗大王昇遐。
광해군 | 1 | 1609 | 기유 | 萬曆 | 37 | - | 德川書院, 新山書院, 龍巖書院이 賜額을 받다. ○ 문집을 追刻하다. |
三十七年己酉 光海元年賜德川,新山,龍巖三書院額。政院啓曰今聞晉州,三嘉,金海等處。皆已爲曺植重修書院云。若賜額以示褒崇之意。則可以聳動士氣。其於吾道後學。豈不幸甚。令該曹回啓。禮曹啓曰故贈大司諫曺植。藏修林下。篤學力行。其踐履造詣之功。可無愧於古人。鄕里後學。宗而師之。建立書院。以寓景慕之意。若自朝廷特 賜扁額以賁餙之。則其崇奬賢士之道。可謂盛矣。依允啓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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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川師友淵源錄(덕천사우연원록) 金在洙(未詳 ~ 未詳) 德川師友淵源錄卷之三
河晋寶
104 面
字善哉晋州人中宗庚寅生乙卯登第爲承文院正字 翰苑銀臺春坊騎曹霜臺柏府靡不歷敭 外知州府事者五 甞牧星州倉儲數十萬斛陳腐不可食公散二而收一 一州飮德國計亦不竭焉○公甞在柏府時論劾尹元衡 專權誤國之罪 先生致書稱奬
公又甞爲金海府使 與鄕人創立先生新山書院于山海亭舊址
자(字) 덕재(德哉) 호(號) 영모정(永慕亭) 1555년 병과 급제 서장관 정언 헌납 지평 장영 좌사관을 역임하고, 김해 밀양부사 안주 성주 목사 사도어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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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 사전전고(祀典典故) / 서원(書院)
경상도(慶尙道) 김해(金海)
신산서원(新山書院) 만력 무오년에 세웠는데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조식(曺植)ㆍ신계성(申季誠)
예암향현사(禮巖鄕賢祠) 무자년에 세웠다. : 조이추(曺爾樞) 호는 사우당(四友堂)이다.
여지도서(輿地圖書,1760년경 ) 慶尙道 金海都護府 壇廟
〔新增〕 龍祭峯。 在府西佛母山五十里。 置祈雨壇。
龍堂江。 在府北四十五里。 有祈雨壇。
新山書院。 在府東二十五里。 南冥曺植主享, 松溪申季誠竝享。 萬曆三十七年己酉賜額。
배대유(裵大維) | 1563 | 1632 | 김해(金海) | 자장(子張), 자장(子長) | 모정(慕亭) | 배영(裵瑛) |
參知裵大維記: “金海, 古駕洛國也。 地望之雄甲於嶺南, 而住府東最居上游, 爲一境隩區。 南冥先生聿來搆亭, 扁以山海, 莊修涵養三十年于玆, 蓋我國濂洛、雲谷也。
往在戊子, 鄕人請建書院,
方伯尹根壽、
邑宰梁思俊
議以克合, 卜基于亭之東麓下, 安正字憙尸其事。 事垂訖, 燹于凶鋒。 戊申春, 安君與黃世烈、許景胤兩秀才, 就亭之遺址爲肯搆計, 士庶協力。 越二年成, 上命賜新山額。 環拱皆山而必取新山者, 以其名最雅而獨爲宗也。 余嘗按事東萊, 聞院宇經始往造焉。 結搆甚宏緻, 位面淸壯, 三叉、七點, 巨野大海, 雄奇勝絶, 自成別界, 殆造物兒戲劇而慳秘之, 以有所待也。 噫! 先生之道, 繼往聖開來學, 參天地關盛衰。 彼名區之以先生顯, 數也, 爲亭爲院亦數也。 觀夫新山與德川、龍巖先後迭興, 東西鼎峙, 又有白雲密邇京師, 使四方萬世之士得有依歸之地。 彼天之不欲喪斯文, 果如何哉? 誠使爰處者志先生之志, 學先生之學, 爲忠臣, 爲孝子, 爲君子儒, 則於觀感興起之道得矣。 如或懵敬義之訓, 眛進修之方, 群居而荒嬉, 毁行趨利, 則豈但爲自暴之憂? 實吾黨之羞。 其可懼哉? 其可戒哉? 昔吾先祖從先生最早聯床咬菜,多在山海, 小子生晩, 將以未及門爲恨。 去歲忝寫先生神道遺碑, 祗謁德川廟庭。 第二郞次磨取李山立《龍巖院記》云余曰: ‘諸院必有記識顚末, 請以新山相屬。’ 余以蔑學辭。 今春又請, 又辭焉。 曺君旋至洛, 袖圖若誌, 請之冞勤, 余以三讓爲太刻。 仍念先生之德如摸天然, 固不敢贅一辭。 至如刱建之蹟, 余旣得其詳, 俾來者知作之所始, 遂爲之記。”
尹根壽 | 1537 | 1616 | 海平 | 子固 | 月汀 | 文貞 | 海平府院君 |
嘉善大夫慶尙道觀察使尹根壽。謹以淸酌庶羞之奠。敢告于近故弘文館典翰德溪吳公之靈。
象村稿卷之二十六 / 神道碑 六首 / 海平府院君月汀尹公神道碑銘 幷序
甲戌。以漢城右尹出按慶尙。崇儒禮士。過先賢祠宇。必操文祭之。乙亥。瓜代除同樞。道拜副提學。
선조 | 7 | 1574 | 갑술 | 萬曆 | 2 | 54 | 덕계.집의, 종부시 정, 사인 등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3월, 方伯 任說과 換鵝亭을 유람하다. ○ 7월 24일, 졸하다. ○ 10월, 先塋에 장사 지내다. |
선조 | 7 | 1574 | 갑술 | 萬曆 | 2 | 38 | 월정.慶尙道 觀察使가 되다. |
慕亭集(모정집) 裵大維(1563 ~ 1632) 慕亭集 卷之三 記 新山書院記 168 面 新山書院記 金海古駕洛國也地望之雄甲於嶺南而酒府洞最居 169 面 上流爲一境奧區南冥先生聿來搆亭扁以山海藏修 涵養三十年于玆蓋我東之濂洛雲谷也 往在戊子▩ 人請建書院 方伯 尹根壽 邑宰 河晉寶 議以克合卜基 于亭之東麓下安正字熹尸其事事垂訖燹干兇鋒戊申春安君與黃世烈許景胤兩秀才就亭之遺址爲肯 搆計士庶協力越二年成上命賜新山額環拱皆山而必 取新山者以其名最雅而獨爲宗也余嘗按事東萊聞 院宇經始試往造焉結搆宏緻位面淸壯三义七點鉅 野大悔雄奇勝絶自成別界殆造物兒戲劇而慳祕之 以有所待乎噫先生之道繼往聖開來學參天地關盛 170 面 衰彼名區之以先生顯數也爲亭爲院宇亦數也觀 夫新山與德川龍巖先後迭興東西鼎峙而又有白雲 密邇京師使四方萬世之士得有依歸之地吁天之不 欲喪斯文果如何哉誠使爰處者志先生之志學先生 之學爲忠臣爲孝子爲君子儒則於觀感興起之道得 矣如或懵敬義之訓昧進修之方群居以荒嬉毁行而 趨利則豈但爲自暴之憂實爲吾黨之羞其可懼哉 其可戒哉昔我先祖從先生最早連床咬菜多在山 海小子生晩長以未及門爲恨去歲忝寫先生神道 碑祗謁德川廟庭第二卽次磨取李山立龍岩院記 171 面 示余曰諸院必有記以識顚末請以新山相屬余以蔑 學辭今春又請又辭焉曹君旋至洛柚圖若誌請之冞 勤余以三讓爲太刻仍念先生之德如摹天然固不敢 贅一辭至如創建之跡余旣得其詳矣尙俾來者知作之所始遂爲之記 .................... 慕亭集序 丁未 1907 序 郭鍾錫 俛宇集 |
德川書院誌(덕천서원지) 德川書院(없음 ~ 없음)德川書院誌[誌] 創建事實
後六年戊子(1588,선조21)方伯尹根壽金海府使河晉寶亦與其鄕人議建 新山書院于山海亭東麓下
安正字憙幹其事
안희(安憙) | 1551 | 1613 | 순흥(順興) | 언우(彦優) | 죽계(竹溪) | 안공진(安公軫) |
[문과] 안희(安憙) 안희(安憙) 언우(彦優) 죽계(竹溪) 신해(辛亥) 1585 35 순흥(順興) 김해(金海) [진사] 안희(安憙) 안희(安憙) 언우(彦優) 죽계(竹溪) 신해(辛亥) 1576 26 순흥(順興) 김해(金海) |
壬辰亭與院 俱燬戊申安公與黃世烈許景胤重創于亭之舊址
記曰金海古駕洛國也地望之雄甲於嶺南而酒府洞最居游爲一 境隩區南冥先生聿來搆亭扁以山海藏修涵養三十年于 玆盖我東之濂洛雲谷也
往在戊子鄕人請建書院
方伯尹根壽
邑宰河晉寶
議以克合卜基于亭之東麓下安正字憙 尸其事事垂訖燹于兇鋒戊申春安君與黃世烈許景胤兩秀才就亭之舊址爲肯搆計士庶協力越二年成上命賜 新山額環拱皆山而必取新山者以其名最雅獨爲宗也余 甞按事東菜 萊 聞院宇經始往造焉結搆宏緻位面淸壯三叉 七點鉅野大海雄奇絶勝自成別界殆造物兒戱劇而慳秘 之以有所待也噫先生之繼往開來參天地之化關盛衰之 運彼名區之以先生顯數也爲亭爲院亦數也觀夫新山與 德川龍巖先後迭興東西幷峙而又有白雲密邇京師使四 方萬世之士得有依敀之地彼天之不欲喪斯文果如何哉 誠使爰處者志先生之志學先生之學爲忠臣爲孝子爲君 子儒則於觀感興起之道得矣如或懵敬義之訓昧進修之 方群居以荒嬉毁行而趨利則豈但爲自暴之憂實吾黨之 羞其可惧哉其可戒哉昔我先祖從先生最早連床咬菜多 在山海小子生晩長以未及門爲恨去歲忝寫先生神道碑 祇謁德川廟庭第二郞次磨取李山立龍岩院記示余曰諸院必有記以識顚末請以新山相屬余以蔑學辭今春又請 又辭焉曺君旋至洛袖圖若誌請之冞勤余以三讓爲太刻 仍念先生之德如摹天然固不敢贅一辭至以刱建之跡余 旣得其詳矣尙俾來者知作之所始遂爲之記
萬曆四十六年(무오,1618,광해군10)侍講院輔德裵大維撰
崇禎丙子(1636,인조14)後六十九年(갑신,1704,숙종30)仲秋上浣南平曺爾樞書
曺爾樞 | 1661 | 1707 | 南平 | 元卿 | 四友堂, 馴鶴亭 |
禮巖鄕賢祠。 在府東七里。 處士曺爾樞以行誼, 去戊子立祠享之。
[주-D040] 七 : 底本에는 “一”로 되어 있는데, 萬曆 31年은 癸卯이다. 《无悶堂集・南冥先生年譜》에 “三十七年己酉,【光海元年。】 賜德川、新山、龍巖三書院額。”이 있고, 《增補文獻備考・學校考》 新山書院 項目에 “光海己酉賜額。”이 있으므로 이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주-D041] 住府東 : 《金海府邑誌》 壇廟, 《慶尙道邑誌・金海》 學校, 《列邑院宇事蹟》에는 “酒府洞”으로 되어 있다.[주-D042] 梁思俊 : 《列邑院宇事蹟》에는 “河晉寶”로 되어 있다.[주-D043] 川 : 《金海府邑誌》 堤堰 및 《慶尙道邑誌・金海》 堤堰에는 “泉”으로 되어 있다.[주-D044] 酒 : 底本에는 “住”로 되어 있다. 《東覽・金海都護府》 橋梁 및 本書 本府 堤堰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사원】 신산서원(新山書院) 선조 병자년에 세웠고, 광해 을유년에 사액하였다. 조식(曹植) 진주 편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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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전집 제66권 / 행장(行狀) / 창원 부사 오한 손공 행장〔昌原府使聱漢孫公行狀〕
孫起陽 | 1559 | 1617 | 密陽 | 景徵 | 聱漢, 松磵 |
공은 마음가짐이 관대하고 사람을 대할 때에는 온후하였으나 시비를 가릴 때에는 늠름하여 그 뜻을 빼앗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金先生)을 헐뜯고 심지어 서원(書院)에서 배향하는 것을 배척하기까지 하니, 공이 선생의 억울함을 밝히는 글을 지어서 사림(士林)에게 두루 알리자 사설(邪說)이 곧 종식되었다.부용당(芙蓉堂) 성공(成公)이 흉도(凶徒)의 무함에 빠졌는데 공은 포의(布衣)로 있을 때에 이 소식을 듣고 곧바로 달려가서 혼자서 죄 없음을 증명하여 마침내 화(禍)를 일으킨 자가 처형을 당하도록 하였다.
송계(松溪) 신공 계성(申公季誠)은 조남명(曺南冥)이 마음을 터놓고 지내던 벗인데, 공이 또 그의 아름다운 덕행을 드러내 밝혀서 마침내 서원에 배향될 수 있게 하였으니, 그 정교(正敎)를 붙들어 세운 공이 이와 같았다.
松溪申公季誠。曹南冥之心交也。公又闡揚德輝。卒能躋享禮院。其扶植正敎之力如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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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顯光 | 1554 | 1637 | 仁同 | 德晦 | 旅軒 | 文康 |
趙任道 | 1585 | 1664 | 咸安 | 德勇, 致遠 | 澗松 |
鄭蘊 | 1569 | 1641 | 草溪 | 輝遠 | 桐溪, 鼓鼓 | 文簡 |
여헌선생속집 제9권 / 부록(附錄) / 취정록(就正錄)-문인(門人) 조임도(趙任道)
임도가 여쭙기를,
“소생(小生)이 사우(師友)들의 망녕된 추대를 받아 신산서원(新山書院) 원장(院長)의 임무를 맡았사온바, 김동강(金東岡 김우옹(金宇顒)을 가리킴)을 서원에 배향(配享)하고자 하오며, 또 《경연강의(經筵講義)》 등의 책을 간행(刊行)하여 반포해서 우리 도학(道學)의 우익(羽翼)이 되게 하고자 하오니, 이것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선생은 대답하시기를,
“매우 좋다, 매우 좋다.”
하였다. 임도가 또다시 여쭙기를,
“동강(東岡)은 남명(南冥)에게 문인이 되기를 가장 먼저 하였고 또 손자 사위가 되어서 범연히 출입한 다른 분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오니, 한 사당에 배향하는 것이 예(禮)에 또한 마땅할 것입니다.
다만 생각하옵건대 신송계(申松溪 신계성(申季誠)을 가리킴)가 연향(聯享)하는 위치에 있사온데, 만약 선비들의 의논이 ‘동강은 남명에게 있어 손자 사위이고 문인이니 배향하여 모시는 것이 당연하나, 송계가 동강에 대하여 홀로 편안히 임할 수가 있는가.’라고 한다면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선생은 대답하시기를,
“이는 그렇지 않다. 신산서원은 본래 남명을 위하여 만든 것이니, 송계는 객(客)일 뿐이다. 또한 어찌 해롭겠는가. 나의 생각에는 송계가 왼쪽에 계시면 동강은 서쪽 귀퉁이에 모시고, 송계가 오른쪽에 계시면 동강은 동쪽 귀퉁이에 모시는 것이 무방(無妨)할 듯하다.”
하였다.
주: 취정(就正)은 스승을 찾아가 학문의 옳고 그름을 질정(質正)하는 것으로, 곧 ‘스승에게 질문한 기록’이란 뜻이다. 공자(孔子)는 “군자가 일을 민첩하게 하고 말을 삼가고 도가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 질정하면 배움을 좋아한다고 이를 만하다.[君子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 하였다. 《論語 學而》
간송집 연보 / 간송 선생 연보〔澗松先生年譜〕 [미상(未詳)]
7년(1634, 인조12) 갑술 선생 50세
○ 겨울. 천거로 공릉(恭陵)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병 때문에 부임하지 않았다. 선산(善山)에 성묘하였다. 부지암에서 여헌 선생을 배알하였다. - 신산서원(新山書院)은 김해(金海)에 있는데 남명 선생을 제사 지낸다. 당시 선생이 원장으로 있었는데, 동강 김우옹 선생을 신산서원에 배향하려는 생각으로 동강의 《경연강의(經筵講義)》를 간행하여 배포하려고 여헌에게 아뢰었더니 여헌이 아주 장려하면서 격려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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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집 제3권 / 서(書)
상공 정동계에게 보내는 편지 을해년(1635, 인조13) 〔與鄭桐溪相公 乙亥〕
새해에 봄기운이 발동하는데, 영감의 건강과 기거가 두루 평안하시리가 생각됩니다. 예전에 용암서원(龍巖書院)에서 모였을 때 여러 날 따르면서 모시려던 소원을 조금 풀었습니다. 그러나 늙고 병들었으며 게을러서 다시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을 수 없으니 이 한을 어찌 다하겠습니까. 몇 해 전에 사우를 통해서 상공께서 함양(咸陽)에서 모욕을 당했다고 들었는데, 사람의 마음을 편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영감의 덕에 있어서는 영향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세상 사람들의 진정이 없는 시비를 보니, 바르면서 이기는 사람은 항상 적고 바르지 않으면서 이기는 사람은 항상 많습니다. 이것이 고금의 보편적 병통이니 화를 얽는 단서가 이것으로 말미암아 일어나 점차 유림이 살륙당하지 않을 줄 어찌 알겠습니까. 진실로 작은 걱정이 아니니 상공 또한 이것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年前。因士友傳聞相公受侮於天嶺。令人意思不佳。此於令德。無所加損。而第觀世人無眞是非。正而勝者常少。不正而勝者常多。此古今通患。安知構禍之端不因此惹起。爲儒林斬伐之漸也。誠非細憂。未知相公亦念及此否乎。就悚。
드릴 말씀은, 산해정(山海亭)은 동강(東岡) 김 선생(金先生)이 스승을 따라 강학한 곳이니, 다른 급문한 제자들이 범범하게 출입한 것에 비할 곳이 아닙니다. 저의 생각에, 의당 동강을 신산서원에 종향해야 한다고 해서 여헌 선생을 뵙고 아뢰었더니 선생은 기뻐서 허락하셨고, 사우 사이의 논의 또한 그것과 합치되었습니다. 제가 이미 원임(院任)을 사퇴할 수 없으니 춘향(春享) 때 의례를 거행하려고 합니다. 다만 어르신에게 여쭈어 정하지 못하여 이에 감히 아뢰니, 삼가 청하건대 가부를 가르쳐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山海亭乃東岡金先生從師講學之所。非他門弟泛泛往來出入之比。愚意宜以東岡從享新山。面稟于旅軒先生。先生喜而許之。士友間論議亦有與之克合者。生旣不得辭避院任。則欲及春享擧儀。但未及稟定于座下。茲敢及之。伏請以示可否如何。
노파(蘆坡)의 행록(行錄) 가운데 의당 잘못을 따져 빼거나 고쳐야 할 것이 있어 일찍이 영감의 가르침을 받았으나, 또한 고쳐 비평하고 바로잡거나 혹은 쪽지를 붙여 돌려주시고, 고쳐 바로잡기를 허용하여 온전한 문장을 이루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외에 나라를 위해 더욱 몸조심하십시오. 을해년(1635, 인조13)
蘆坡行錄中有宜刪改處。曾受令敎。亦望痛施雌黃。點抹增損。或貼標還擲。容其筆削。俾成全文。至祝至祝。自餘爲國加愛。 乙亥
간송집 연보 / 간송 선생 연보〔澗松先生年譜〕 [미상(未詳)]
7년(1634, 인조12) 갑술 선생 50세
○ 겨울. 천거로 공릉(恭陵)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병 때문에 부임하지 않았다. 선산(善山)에 성묘하였다. 부지암에서 여헌 선생을 배알하였다. - 신산서원(新山書院)은 김해(金海)에 있는데 남명 선생을 제사 지낸다. 당시 선생이 원장으로 있었는데, 동강 김우옹 선생을 신산서원에 배향하려는 생각으로 동강의 《경연강의(經筵講義)》를 간행하여 배포하려고 여헌에게 아뢰었더니 여헌이 아주 장려하면서 격려하였다. -
동계의 답장을 붙임 [정온(鄭蘊)]
근래에 보내주신 편지를 받고 초봄에 학문하는 기거가 봄과 함께 새로움을 삼가 알았으니, 제가 기뻐 위안이 됨은 어찌 보통에 그치겠습니까. 그때 마침 매우 바빴기 때문에 답장을 보낼 수 없었습니다. 생각건대 형 또한 의아하였을 것이니 매우 죄송합니다. 저는 스스로를 업신여김으로써 다른 사람이 업신여겨 온갖 비방이 모이니 오직 자신을 반성해야지 오히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다만 못난 저 때문에 선현에게 치욕이 미치고 사적으로 위차(位次)를 강등시키고도 거리끼는 바가 없는데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한 고을 한 사람의 분함이겠습니까. 매번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원통함이 뼈에 깊이 사무쳐서 아마 저도 모르게 지나치게 성이 난 것 같습니다. 다행히 사림의 공의(公議)에 힘입어 거의 될 만한 희망이 조금 있지만, 공의가 과연 끝까지 떨쳐서 중간에 그치지 않을까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형 같은 이가 있어 공정한 논의로 뜻을 같이하는 사람을 이끌어 나가지 않으면 중간에 그만두어 선현의 강등된 관직을 복구하는 데 이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제가 형에게 바라는 것이 적지 않습니다. 형도 이러한 뜻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뒷날 살륙당하는 화는 단지 하늘에 맡겨야지 어찌 마음에 둘 수 있겠습니까.
신산서원(新山書院)에 종향하는 논의는 금시초문인데, 우리 형이 현인을 존경하고 도를 숭상하는 깊은 뜻에 매우 감동하였습니다. 사론(士論)이 이미 정해졌으면 저와 같이 미천한 사람이 또한 어찌 감히 그 사이에 다른 의견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형께서 이미 저를 사람 축에 끼워 물었으니, 저 또한 어찌 감히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마음속 생각을 다 말씀드리지 않겠습니까.
新山從享之議。今始聞之。深感吾兄尊賢尙道之盛意也。士論已定則如僕賤末。亦何敢有異議於其間乎。然兄旣以僕齒諸人而問之。則僕亦何敢自疏外。而不盡懷乎。
한강(寒岡)과 동강(東岡) 두 선생은 모두 남명 문하에서 수학한 분입니다. 한강은 놔두고 유독 동강을 받드는 것은 무슨 의리입니까? 장차 한강을 높이려고 하면서 배향하는 위치에 두려고 하지 않는 것은 성산(星山)의 논의와 같은 것입니까? 아니면 동강이 친히 가르침을 받아 훈도된 깊이가 한강보다 더해서 동강만 취한 것입니까? 이것은 고루한 제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바탕 시끄러워지는 단서가 될까 두렵습니다.
寒岡,東岡兩先生皆受業於南冥門下者也。舍寒岡而獨擧東岡者。以何義歟。將高寒岡而不欲置之配位。如星山之議乎。抑以東岡親炙之切有加於寒岡。而獨取之歟。此非孤陋所能知。而恐有一場紛紛之端也。
하물며 세 서원은 모두 사액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국학(國學)입니다. 국학에 종사(從祀)하는 일은 선비들이 멋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소를 올려 허가한다는 비답을 기다린 뒤에 할 수 있습니다. 형의 견해도 이런 데까지 미쳤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니면 장차 소를 올려 요청하려고 하지만 아직 하지 못하였습니까? 간혹 다른 의론이 있으니, 세 서원의 사액은 모두 이이첨(李爾瞻)이 다른 사람의 명망과 지위를 빌려 자기 비중을 높이려는 계책에서 나왔으니 사액으로 칠 수 없다고 하는데,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남명 선생에게 시호를 추증할 수 없다고 여기고 세 서원이 사액을 받을 수 없다고 여기면 또한 소를 올려 시호를 거두고 사액을 거두게 한 그런 뒤에라야 사사로이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항상 이이첨이 명망을 빌려 자기를 높이려고 한 것이라고 핑계대면서 사학(私學)으로 보고자 하는데, 저는 그런 것에서 옳은 것을 볼 수 없습니다.
況聞三書院皆已賜額云。則乃國學也。國學從祀之事。非士子所自擅便。必陳疏待敎。可然後乃可爲之。未審兄之見亦及此耶。抑將疏請而未及爲之耶。或有一種議論。三書院賜額皆出於爾瞻借重之計。不可以賜額處之。愚意竊以爲不然。以南冥先生爲不足以贈諡。三書院爲不足以賜額。則亦當陳疏削諡收額。然後可自私之。不然而常諉於爾瞻之借重。而欲以私學視之。愚未見其可也。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란 칭호는 이민족 왕조인 원(元)나라 때 처음으로 만들었지만 지금 천하에서 감히 고칠 수 없고, 오현(五賢)을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혼미한 광해군 때 이루어졌으나 온 나라 선비들은 감히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조월천(趙月川)을 도산서원(陶山書院)에 종향(從享)하는 논의는 이이첨 무리들에게서 나왔지만, 강좌(江左)의 유림 사이에서 퇴출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유독 세 서원에 있어서는 이이첨이라는 것 때문에 국학으로 여기지 않는단 말입니까. 그대는 어떻다고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형에게 감히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바라건대 다시 당상(堂上)의 사람과 상세히 상의하고 자세히 토론한 뒤, 진정(陳情)하여 청하거나 사적으로 편한 대로 하는데 있어 좋은 점을 좇아 선처하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大成至聖文宣王之號。創於胡元。而至今天下無敢改。五賢從祀文廟。成於廢朝。而一國士子不敢有異議。趙月川從享陶山之議。出於爾瞻之輩。而江左儒士未聞有退黜之擧。獨於三書院。以爾瞻之故。而不國學之乎。不審高明以爲何如。然非僕之於兄不敢有此言。幸願更與堂上之人詳議而熟講之。或陳請或私便。從長善處。千萬之幸也。
노파(蘆坡)의 행장은 그대의 부탁을 어기기 어려워, 감히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을 표하여 돌려보내니 다시 고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떨어져 있어 한자리에 같이 앉아 강론할 수 없으니 그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蘆坡行狀。重違尊敎。敢標其有無之不足爲輕重者而還之。更加筆削如何。山川間之。未得合席講劘。不堪悠悠。
간송집 연보 / 간송 선생 연보〔澗松先生年譜〕 [미상(未詳)]
8년(1635, 인조13) 을해 선생 51세
○ 동계 정온 선생께 서신을 보내 신산서원의 배향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 동계의 답서는 문집에 보인다. -
○ 봄. 신산서원의 향례를 행하였다.
[주-D001] 정동계(鄭桐溪) : 정온(鄭蘊, 1569~1641)으로,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이다. 1610년(광해군2) 문과에 급제하고, 1614년(광해군6) 부사직(副司直)으로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이 인륜에 어긋남을 상소하여 그 가해자인 강화 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을 참수하라고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10년 간 제주도 대정(大靜)에서 귀양살이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석방되어 헌납(獻納)으로 등용되고, 1636년(인조14) 병자호란 때 이조 참판으로서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하고, 이듬해 화의(和議)가 이루어지자 벼슬을 단념하고 덕유산(德裕山)에 들어가 세상을 마쳤다. 저술로 《동계집》 등이 있다.[주-D002] 영감(令監) : 정삼품과 종이품의 관원을 일컫던 말이다.[주-D003] 산해정(山海亭) :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에 있는 정자이다. 조식(曺植)이 지어 강학하였는데, 뒤에 정자 동쪽에 신산서원(新山書院)을 세워 봉사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폐철된 것을 1818년(순조18) 김해 부사 이석하(李錫夏)가 지방 유림과 힘을 모아 재건하였다.[주-D004] 동강(東岡) 김 선생(金先生) : 김우옹(金宇顒)으로,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567년(명종22)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성, 대사헌, 이조 참판 등을 지냈다. 저술로 《동강집》, 《속자치통감강목(續資治通鑑綱目)》 등이 있다.[주-D005] 노파(蘆坡) : 이흘(李屹, 1557~1627)로,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산립(山立), 호는 노파이다. 조식의 문인인 이희생(李喜生)에게 수학하였다. 저술로 《노파집》이 있다.[주-D006] 이이첨(李爾瞻) : 1560(명종15)~1623(인조1).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득여(得輿), 호는 관송(觀松)이다. 1594년(선조28) 문과에 급제하고, 1608년 문과 중시에 장원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권세를 장악한 그는 정인홍과 함께 심복을 끌어들여 대북의 세력을 강화하는 한편, 임해군(臨海君)과 유영경을 사사되게 하는 등 소북 일파를 숙청하였다. 1612년(광해군4)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을 일으켰고, 이듬해 강도죄로 잡힌 박응서(朴應犀) 등을 사주, 그로 하여금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고 무고하게 하여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켜 강화에 안치시키고 김제남(金悌男) 등을 사사시켰다. 이듬해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1617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을 발의해 이듬 해 대비를 서궁(西宮 경운궁(慶運宮))에 유폐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참형되었다.[주-D007]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란 …… 만들었지만 : 원(元)나라 무종(武宗) 때 처음으로 이 칭호를 정했다.[주-D008] 오현(五賢) : 다섯 명의 유현(儒賢)으로, 여기에서는 조선조의 유학자인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가리킨다.[주-D009] 조월천(趙月川) : 조목(趙穆, 1524~1606)으로, 본관은 횡성(橫城), 자는 사경(士敬), 호는 월천으로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94년(선조27)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로서 일본과의 강화를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고, 벼슬이 공조 참판에 이르렀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예천(醴泉)의 정산서원(鼎山書院), 예안(禮安)의 도산서원(陶山書院), 봉화의 문암서원(文巖書院) 등에 제향 되었다. 저술로《월천집》, 《곤지잡록(困知雜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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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암집 제12권 / 기(記) / 환아정 시판 중수기〔換鵝亭詩板重修記〕
관포(灌圃) 어공(魚公)은 이름난 인물이다. 문장과 덕행이 빼어난 것이 한 세대에 으뜸이 되었다. 공은 모 연호 몇 년의 경인년(1470, 성종1)에 태어나 대과에 합격해 외직에 보임되어 현감을 지냈는데, 그때가 27세였다.
고(故) 사간(司諫) 하진보(河晉寶)는 본관이 진주인데 관포의 외손자이다. 외손자는 모 연호 몇 년의 경인년(1530, 중종25)에 태어났는데, 대과에 합격한 때의 나이가 또한 27세였다. 나의 손자 정릉(鄭棱)은 특별한 은혜로 현감에 제수되었는데, 또한 만력(萬曆) 경인년(1590, 선조23)에 태어났고 나이가 또한 27세였다.
아! 관포로부터 릉에 이르기까지 1백여 년이 지났는데 모두 경인년에 태어났고, 현감에 제수되었을 때의 나이가 모두 27세였다. 문과에 합격한 것과 은혜롭게 관직에 제수된 것이 같지 않지만, 그 사이가 1백 년이나 되는데 대략 서로 부합되니, 우연이 아닌 것이 있는 듯하다.
관포가 현감이 되었을 적에 정자를 환아(換鵝)라고 명명하고, 그 나머지 경치가 맑고 빼어난 곳도 모두 그 이름을 바꿔 한 번 새롭게 하고서, 절구 12수를 지어 그 처마 밑에 매달아 빛나게 하였다. 정자의 빼어남을 읊은 문사(文詞)가 남쪽 지역에서 으뜸이었으나, 불행히도 왜적이 갑자기 쳐들어와 흉한 난리가 온 나라에 두루 미쳐 정자 또한 그 재앙을 면하지 못하였다. 관포의 시판과 여러 이름난 공들이 지은 시편들이 완전히 없어져 다시는 존재하지 않았다.
관포의 외증손 상사(上舍) 하징(河憕)이 문집에서 절구 12수를 찾아 릉으로 하여금 목판에 새겨 다시 걸게 하였는데, 릉이 나에게 그 대략을 기록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래서 감회가 없을 수 없어 이 기문을 짓고, 인하여 권면하기를 “관포공의 시판이 다시 만들어져 오래된 정자가 거듭 빛날 것이니, 이는 진실로 하나의 큰 일이 된다. 몸은 고을의 수령이 되었으니, 정사를 거듭 새롭게 하고 고을의 백성에게 덕을 맛보게 하라. 고을을 위해서는 덕이 불어나기를 힘쓰고, 조정을 위해서는 근본을 힘쓰라. 그런 뒤에야 거의 조정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이니, 이는 조상을 거듭 빛내는 실질적인 일이다.……”라고 하였다.
[주-D001] 환아정(換鵝亭) :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리에 있었던 정자이다. 1395년(태조4) 산음 현감인 심린(沈潾)이 건립하였다. 환아정은 주변의 경호강과 함께 산수가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했으며 조선 중기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이었다. 1950년 3월 10일 화재로 불타버렸다.[주-D002] 관포(灌圃) 어공(魚公) : 어득강(魚得江, 1470~1550)이다.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자순(子舜), 호는 자유(子游)ㆍ관포당(灌圃堂)ㆍ혼돈산인(渾沌山人)이다. 1492년(성종23) 진사가 되고 1495년(연산군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곡강 군수(曲江郡守), 산음 현감 등 외관직을 거쳐 장령, 대사간 등을 지냈다. 진주에 은거하였다. 저술로 《동주집(東洲集)》이 있다.[주-D003] 모 연호 몇 년 : 성화(成化) 6년이다.[주-D004]
하진보(河晉寶) : 1530~1580.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덕재(德哉), 호는 영모정(永慕亭)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고, 정인홍과는 사돈 관계이다. 1555년(명종10)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 예조 좌랑, 장령 등을 지냈고, 외직으로 선산 부사, 성주 목사, 김해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조식의 신산서원(新山書院)을 산해정(山海亭)에 세웠다.[주-D005] 모 연호 몇 년 : 가정(嘉靖) 9년이다.[주-D006] 손자 …… 제수되었는데 : 《광해군일기》 광해 8년(1616) 4월 30일 조를 보면, 정릉에게 산음 현감을 제수하여 조부인 정인홍을 봉양하게 하였다.[주-D007] 하징(河憕) : 1563~1624.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평(子平), 호는 창주(滄州)이다. 아버지는 성균 생원(成均生員)인 하위보(河魏寶)이며, 숙부 하국보(河國寶)에게 입양되었다. 1591년(선조24)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고 고향에서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저술로 《창주집》이 있다.
ⓒ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 | 김익재 양기석 정현섭 (공역)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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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전집 제62권 / 묘갈명(墓碣銘) / 예빈시 직장 죽암 허공 묘갈명 병서 〔禮賓寺直長竹庵許公墓碣銘 幷序〕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능히 행하지 못한다면 읽지 않은 것과 같다. 책을 읽고서 능히 행한다면 비록 한마디 말만 배워도 괜찮다. 김해부(金海府)에 죽암 선생 허공이 계셨다. 7세에 그 부친에게 여쭙기를, “사람의 도리는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 하니, 부친이 말하기를, “충효가 우선이다.” 하였다. 또 여쭙기를, “무엇으로 말미암아 충효에 이릅니까?” 하니, 부친이 “학문하는 데에 있다.” 하였다. 공이 학문을 가르쳐 주기를 청하니, 부친이 《소학》을 가르쳐 주었다. 얼마 후에 부친을 여의었는데 거상을 예대로 잘하였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임진왜란을 당해 어머니를 모시고 함양(咸陽)과 운봉(雲峯) 사이로 피란하였다. 왜구가 수로왕릉(首露王陵)을 도굴했다는 말을 듣고 남쪽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 장사(壯士) 100여 인을 모집하여 밤을 틈타 달려가서 부중 사람들과 힘을 합쳐 보수하고, 체찰사(體察使) 오리(梧里) 이공(李公)에게 청하여 조정에 보고하여 망제(望祭)의 예를 행하도록 하였다. 난리가 평정되자 옛날 살던 곳으로 돌아왔다. 또 본도의 관찰사에게 글을 올려 조정에 보고하여 봉분을 만들도록 하였다.
외재(畏齋) 이후경(李厚慶)과 조은(釣隱) 한몽삼(韓夢參)과 서로 종유하며 경서의 뜻을 강하며 연구하였다. 그때에 정인홍(鄭仁弘)이 남쪽 지방에서 훌륭하다는 명성을 얻고 있어서 많은 사류들이 추종하여 빌붙었는데, 공은 두문불출하며 홀로 지냈다. 정인홍이 그 문도를 시켜 편지를 보내 은근한 정을 표하자 공은 그가 선현을 무함한 것을 지척(指斥)하였는데, 말이 매우 단호하였다. 폐모(廢母)의 논의가 일어나자, 공이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삼강(三綱)이 끊어졌구나.” 하며, 시를 지어 슬퍼하였다.
병자년(1636, 인조14)에 적이 쳐들어오자 아들 빈(瀕)을 시켜 창의(倡義)하여 근왕(勤王)하게 하였다. 빈이 맹약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오니, 매우 분해하며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인사(人事)를 끊고는 죽암(竹庵)이라 호하였다.
공은 어린 나이에 충효에 대해 묻고는 종신토록 행하며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이분이야말로 잘 배웠다고 이를 만하다.
전에 남명(南冥) 선생을 모신 신산서원(新山書院)이 왜적에게 훼손되었는데, 무신년(1608, 선조41)에 황공 세열(黃公世烈)과 함께 발의하여 중건하였다. 군자가 말하기를,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으면 공이 반드시 한다.” 하였다.
만년에는 명망이 더욱 중해져 추천으로 순릉 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되었는데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가 반정하자 등급을 뛰어넘어 예빈시 직장에 제수되었는데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공의 휘는 경윤(景胤)이고, 자는 사술(士述)이다. 먼 조상의 휘는 징(澄)인데 고려 때 상경(上卿)을 지냈다. 8세조의 휘는 언룡(彥龍)으로, 본조(本朝)에 들어와 예조 판서를 지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증조의 휘는 인수(仁壽)로, 훈도(訓導)를 지냈다. 조부의 휘는 국정(國楨)으로, 진사이다. 선고의 휘는 세돈(世敦)으로, 참봉을 지냈다. 선비는 함종 어씨(咸從魚氏)로 응성(應星)의 따님이다. 공은 참봉을 지낸 숙부 휘 세절(世節)에게 출계하였으니, 선비는 강릉 김씨(江陵金氏)로 선(璿)의 따님이다.
공은 목릉(穆陵 선조(宣祖)) 계유년(1573, 선조6)에 태어나 장릉(長陵 인조(仁祖)) 병술년(1646, 인조24)에 졸하였으니, 향년 74세였다. 김해부 동쪽의 중산(中山) 곤좌(坤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영산 신씨(靈山辛氏)로 현감 갑(𥑐)의 딸이다. 김해부 서쪽의 농소(農所) 간좌(艮坐)에 장사 지냈다. 아들 둘을 두었으니 호(灝)와 빈(瀕)이고, 딸 셋을 두었으니 사위는 이중경(李重慶), 유석빈(柳昔玭), 윤규(尹圭)이다. 손자 시흥(時興)은 호의 아들이고, 시창(時昌)과 시형(時亨)은 빈의 아들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선조의 능묘를 수리한 것은 효성의 영원함이요 / 修祖陵孝之永
국가의 난리에 달려간 것은 충성의 성대함이네 / 急國難忠之盛
어릴 때부터 시작하여 / 孩提伊始
죽을 때까지 올발랐으니 / 斃而正
하늘이 부여한 성품이지만 / 天與之性
그 선고가 명한 것이기도 하다네 / 而厥考亦嘗有命也
[주-D001] 이후경(李厚慶) : 1558~1630.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여무(汝懋), 호는 외재(畏齋)이다. 저서로는 《외재집(畏齋集)》이 있다.[주-D002] 한몽삼(韓夢參) : 1589~1662.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변(子變), 호는 조은(釣隱)ㆍ적암조은(適巖釣隱)이다. 팔분체(八分體)에 능하였다. 저서로는 《조은집(釣隱集)》이 있다. 《順菴集 卷21 自如道察訪贈通訓大夫司憲府執義釣隱韓公墓碣銘》[주-D003] 죽을 때까지 올발랐으니 : 숨을 거둘 때까지 바른 도리를 잃지 않았다는 말이다. 증자(曾子)가 병이 위독하자 대부가 사용하는 화려한 자리를 바꾸게 하고, “내가 무엇을 구하겠는가. 내가 바른 도리를 얻고 죽으면 그뿐이다.〔吾何求哉 吾得正而斃焉 斯已矣〕”라고 한 말에서 연유하였다. 《禮記 檀弓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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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재집(克齋集) 노필연(盧佖淵)생년1827년(순조 27)몰년1885년(고종 22)자한약(漢若)호극재(克齋)본관광주(光州)특기사항허전(許傳)의 문인. 정현석(鄭顯奭), 허익(許𨙒), 남수명(南守明) 등과 교유. 두 아들 大訥 盧相益, 小訥 盧相稷(파리장서서명옥고)
克齋集卷之六 / 傳 / 金海鄕社七贒列傳
金係錦本府人。永樂乙酉生。端廟甲戌。以司憲府持平。出爲義城縣令。明年端廟遜位。乃棄官歸鄕里。築室生林江上。扁曰西岡亭。指亭後山曰吾西山。作歌戒子規。又有吊陵詩。俱載莊陵史補。弘治癸丑卒。葬治西外龍山。薇蕨生塋域。鄕人名其山曰蕨峴。又名其祠曰薇陽。
宋賓西原人。有膽略。嘗至能州。與地倅對話。忽有倭寇掠港口。倅遑劫欲閉門。公曰莫若洞闢。示寇無懼。倅依其言。寇疑而退。壬辰府使徐禮元書以要之。授中軍之任。居數日。賊乘天黑。刈麥塡壕。踰城攔入。乃口呼一絶。示金得器,李大亨曰。人之仗忠人何勸。二子如今任自量。報國殉身吾已決。北向再拜辭吾王。因與賊力戰而死。贈吏曹參判。純廟朝遣官賜祭于松潭書院。
李大亨載寧人號觀川。棄擧業究義理之學。壬辰府使徐禮元以有姻婭之誼。請與守城。乃募丁壯百餘人。馳赴城中。與宋賓,金得器,柳湜諸公同日殉節。 贈戶曹參判。享松潭書院。
金得器義城人。親癠灌指血獲效。待人恭敬少戲。居家壼範嚴肅。登武第不樂仕宦。退伏田里。壬辰以衣髮付子侃曰以此合葬汝母。卽促鞭入府。受守東門之任。城陷矢盡力竆而死。贈戶曹參判。享松潭書院。
許景胤本府人。字士述號竹庵。以儒行薦拜禮賓直長。壬辰倭寇掘始祖王陵。募壯士百餘人。實土成墳。亂靖議同志重修新山書院。與李畏齋,韓釣隱講性理之學。築書室。壁揭敬義二字。朝夕觀省。丙子後謝絶世事。杜門以終。享龜川書院。
曺爾樞昌寧人字元卿號四友堂。未成童。遭父母喪。執喪如成人。稍長遊心弓馬。一日喟然曰人自有實地底工夫。卽棄觖拾之具。取性理書讀之。手寫陶山十圖揭屛障。又書前輩嘉言善行。以自警省。晨昏拜家廟。出入必告。倣文公社倉。別殖金糓周貧竆。定鄕約十四條。春秋集衆講行。築室三叉江上。畜二鶴。名曰馴鶴亭。列植梅竹松菊。扁以四友。年四十七歿。朞年而禮巖書院成。
曺九齡昌寧人字仁叟號酊翁。父小字磐石。故或遊戲溪澗而遇磐石不敢坐其上。七歲父除魚饌以嚼。母諫之父曰此烏哺中一事。公問烏哺何義。父詳言之。異日見隣兒捕烏。止之曰孝鳥不可擒。自是得魚果。必懷而進父母。十八著大學三綱八條圖。自序以警。弱冠風儀敷榮。村有少女瞰公獨處邀之。公厲色責之。女慙而歸。避痘龍田村舍。適有羣盜發火鼓譟。逼所留之屋。屋主大呼曰曺處士在此。盜相戒而退。書宗規家法遺子孫。修書訣親戚朋友。正席就枕而卒。享勿峯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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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溪先生文集(죽계선생문집)安憙(1551 ~ 1613)竹溪先生文集卷之三雜著新山書院重建通文 戊申(1608,2월광해군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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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山書院重建通文 戊申 天心悔禍文運還亨兵燹祠宇在在皆新山海一院 尙未重修難免鄙夷愧孰加焉或者謂金海賊路初 頭也禍朝夕難測立祠宇何益云此則鳴鼓之論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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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道之行廢實由於天運之通塞運之塞也不獨禍 我金海運之通也可以保萬年無事況元氣公論無 時可泯存一日則扶一日之脈存萬世則扶萬世之 脈秦火之所不灰孔壁之所不蠧豈可以一時凶變 摧挫我元氣毁滅我公論甘爲荒茫之域哉惟我本 府文獻所徵有自來矣至於先生修養薰陶之功宛 承警咳於今日遺址依然道路興嗟豈可後鳳之香 川晉之德山而醜虜久屯蕩析尤甚區區士友還集 後人旣無相顧之力又無主張之者加之以孑遺殘 氓日月奔遑於戰艦之役赴藉窮生朝夕或拘於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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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之任迄未建宇其勢則然可憫而不可悲也壬辰 初變多少士友起兵萬死之地如非露峴之拒賊則 元沖甲不獨專美於前矣此雖由於朝家二百年 敎養之化而先生成就之效爲如何哉憙于今十七 年猶在流泊中聞之道路飽審士友之欲構而力未 能也玆者始還舊址結幕之前先發此議則皆其蓄 願不謀而同時値大無海役又煩難可擧羸秋而爲 期忽然更思則憙之去就雖不得爲有無而以吾從 士子之後亦可參於議末而名忝仕版五月將發洛 行爲會葬也一鄕士友有幾人也而其間疾病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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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又不可豫知深恐事勢掣肘莫或憤發自致淹延 徒心未成則反不及潮人之立韓碑而自招外人之 云云然後竭三义之水何足以洗無窮之恥乎噫我 友雖窮人百其力則至誠之下無事不成一夫愚公 且欲移山凡我士友不可自畵自校中將此文先通 于都約正面約正曁鄕中諸員於開月初六日除萬 故齊會于校中先達明府分定有司具由仰稟於 缺 先生而後告諸方伯謀語吾黨庶不至虧簣不勝幸 甚如有觀望而不顧者不須與之同事吁可懼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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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庵先生逸集(죽암선생일집)許景胤(1573 ~ 1646)竹庵先生逸集卷之一雜著名堂齋總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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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堂齋總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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始南冥曹先生愛金官山水之勝構亭於神魚 山下扁以山海藏修涵養三十年于玆先生易 簀之後吾林有識咸以先生講道之所久闕妥 靈之儀爲惜歲萬曆戊子方伯月汀尹相國根 壽知府河侯晉寶可其鄕人之請卜基於亭之 東麓下數弓之地董其事者安竹溪憙也不幸 事遂訖而燹于龍蛇之訌祠宇堂齋鞠爲茂草 瓦礫荊榛翳于荒邱余嘗周覽古蹟喟然而歎 曰前賢講學之所乃廢弛若是豈非吾徒之責 哉於是議于黃世烈甫以爲之倡昔之經始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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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獨竹溪丈在亦聞風而至相與協力圖成郡 邑之樂是擧者或出資費或助力役剗穢除荒 鳩材僦工先作祠宇神門次作正堂夾以兩齋 齋下建正門以及養賢廚所凡爲屋若干間
興事於戊申之春
訖工於己酉之春
視昔加宏壯矣山川改觀輪煥盡美郡邑士民莫不興嘆余然後諗于衆曰曹先生卓越之學眞不可尙已 顧吾輩何人敢贊一辭輕揭廟號乎此則留俟 後之君子可也自院以下堂室齋門不可無名 號題額景胤不揆僭妄私竊有所論著敢以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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爲獻可乎院曰新山則日新之義著焉堂曰中 正則明誠之工盡焉敬爲直內之工義爲方外 之工故內外交養譬如鳥之兩翼相搏而飛人 之兩脚相推而行則敬義之扁於東西室者然 也喚醒爲持敬之方有爲爲集義之勇故持集 互資所以常用惺惺照管道理直前奮迅眞實 力行則喚醒有爲之揭之東西齋者然也門曰 進德而終之則得其門而入者孰不知進德修 業之必由有爲之勇喚醒之工而後至於敬義 夾持知行兩進以至於太中至正之域而爲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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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之盛德也哉恭惟我曹先生稟得壁立之氣 濟以高明之見剛健篤實體大易之純粹眞積 力久合中庸之擇執敬義偕立聖賢同歸眞所 謂百世以俟而不惑者也凡吾林之入是院而 學先生之學者苟能顧名思義俛焉孜孜死而 後已方可謂盡居業之道而庶不負曹先生所 望於來後者也衆皆無異辭遂以所次者定爲 堂齋之顔輯其說而著之篇云爾萬曆三十七 年己酉仲夏後學盆城許景胤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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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庵先生逸集卷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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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友堂先生文集(사우당선생문집)曺爾樞(1661 ~ 1707)元卿(원경)四友堂(사우당)南平(남평)
四友堂先生文集(사우당선생문집)曺爾樞(1661 ~ 1707)四友堂先生文集卷之二書答新山書院士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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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新山書院士林
方想得高會講磨之好遙切起仰意襮拜耑使下存 感荷實深第還安重禮非失路人所知而僉尊以不恥下問之義問道於盲實未知仰答盛問之意方握筆趑趄適荷林進士丈來過得國學所行者雖無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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攷之文字卽是目擊例規略具于左或可採用耶祭物移安時官旣備行獨不能備於還安時耶此則官必備送不必私設明矣祭則當設於還安之後而其告辭不過隨事製爲之如何耳抑有權宜一道丑前 五刻當行享禮未前子夜行還安告辭於移安所還安後行享事似不大剌謬未知高明以爲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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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산서원 (新山書院)
김해 신산서원 전경
유적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에 있었던 조선후기 조식과 신계성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에 있었던 조선후기 조식과 신계성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내용
1609년(광해군 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식(曺植)과 신계성(申季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같은 해에 ‘신산(新山)’이라고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1616년(광해군 8)에는 신계성(申秀誠)을 추가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서원은 복원하지 못하였다. 이후 사림의 공의로 조식이 제자들과 강학하던 곳인 산해정(山海亭)만 중건하였다. 산해정은 1985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으며, 정면 5칸, 측면 2칸의 목조와가로 되어 있다.
1999년 김해시에서 신산서원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문헌
『전고대방(典故大方)』
『태학지(太學志)』
『조두록(俎豆錄)』
『열읍원우사적(列邑院宇事蹟)』
『경상남도지』(경상남도, 1978)
집필자
이동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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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이칭/별칭분야유형지역시대집필자
申季誠 |
Shin Gye-seong |
자함(子諴),석계(石溪),송계(松溪),송계선생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인물/문인·학자 |
경상남도 밀양시 |
조선/조선 전기 |
김영우 |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몰년 시기/일시특기 사항 시기/일시출생지묘소|단소사당|배향지사당|배향지성격성별본관
1499년 11월 27일 - 신계성 출생 |
1562년 5월 21일 - 신계성 사망 |
1815년 - 신계성 『송계선생실기』 간행 |
후사포리 -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 |
장선리 - 경상남도 밀양시 동촌 장선리 |
신산서원 -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대동로269번안길 115[주동리 737] |
예림서원 -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예림서원로 128[후사포리 179] |
유학자 |
남성 |
평산(平山) |
[정의]
조선 전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유학자.
[가계]
신계성(申季誠)[1499~1562]의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자는 자함(子諴), 호는 석계(石溪), 송계(松溪)이고, 후세에 학자들이 송계선생이라 하였다. 1499년 11월 27일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에서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는 신윤원(申允元)이고, 할아버지는 신승준(申承濬)이며, 아버지는 신탁(申倬)이다. 외할아버지는 손순무(孫筍茂)이고, 장인은 이철수(李鐵壽)이다.
[활동 사항]
신계성은 어려서부터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고 과거 공부는 하지 않았으며, 육경(六經)의 글에 침잠하고 『소학(小學)』의 내용을 실천하기에 힘썼다. 경(敬)을 마음을 가다듬는 요체로 삼았으며, 성(誠)을 경을 지키는 근본으로 여겼다. 송당(松堂) 박영(朴英)을 좇아 함께 지냈으며, 청도의 김대유(金大有), 김해의 조식과 사귀었다. 신계성이 항상 잊지 않았다는 고확(顧確)과 경의(敬義) 공부는 남명의 경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신계성은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처사로 살았다. 1562년(명종 17) 5월 21일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신계성의 개인 저술은 없으며 1815년 유문과 행적을 모아 『송계선생실기(松溪先生實記)』 상하 단책(單冊)으로 간행하였다.
[묘소]
신계성의 묘소는 경상남도 밀양시 장선리(長善里)에 있다. 당시 밀양부사 약봉(藥峰) 김극일(金克一)이 비문을 지어 여표비(閭表碑)를 세웠다.
[상훈과 추모]
신계성은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에 있는 신산서원에 배향되었고, 밀양 예림서원에 김종직의 배향위(配享位)에 입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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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서원 (龍岩書院)
유적
경상남도 합천군 용주면에 있었던 조선후기 조식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정의
경상남도 합천군 용주면에 있었던 조선후기 조식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내용
1603년(선조 3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식(曺植)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09년(광해군 1)에 ‘용암(龍巖)’이라 사액되었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뒤 서원은 복원하지 못하고 유림에 의하여 서원터에 조식의 비석을 새겼으며, 주위에는 건물지(建物址)가 남아 있다.
참고문헌
『전고대방(典故大方)』
『경상남도지』(경상남도, 1978)
『문화유적총람』(문화재관리국, 1977)
집필자
한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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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서원 (德川書院)
산청 덕천서원 시정문 정면
유적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에 있는 조선전기 조식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정의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에 있는 조선전기 조식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내용
1576년(선조 9)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식(曺植)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09년(광해군 1) ‘德川(덕천)’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그 뒤 최영경(崔永慶)을 추가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0년(고종 7)에 훼철되었다가 1920년대 지방유림이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숭덕사(崇德祠) · 경의당(敬義堂) · 동재(東齋) · 서재(西齋) · 신문(神門) · 대문(大門) · 세심정(洗心亭) · 산천재(山天齋) · 상실(橡室) · 장판각(藏板閣) · 별묘(別廟) · 문루(門樓) · 재실(齋室) · 고사(庫舍) 등이 있고, 신도비(神道碑)도 있다.
숭덕사는 3칸으로 된 사우(祠宇)로서, 조식의 위패와 최영경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경의당은 5칸으로 된 강당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된다. 동서 양재는 유생들이 공부하며 거처하는 곳이고, 고사는 향례 때 제수(祭需)를 장만하며 보관하는 곳이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초정(初丁 : 첫 번째 丁日)과 9월 초정에 향사를 지내며, 양력 8월 10일 남명제(南冥祭)를 행하고 있다. 제품은 4변(籩) 4두(豆)이다. 이 서원은 1974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으며, 유물로는 조식의 수묘사성현병풍(手描四聖賢屛風) 외 문집 약간이 있다. 재산으로는 전답 900평, 임야 10정보 등이 있다.
참고문헌
『전고대방(典故大方)』
『덕천서원지(德川書院誌)』
『경상남도지』(경상남도, 1978)
집필자
이동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