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안의 정자와 누각을 찾아서 2009. 6. 7(일)
<광풍루>
<광풍루와 제월당>
안의면에 들러 늦은 점심을 들기 위해 식당을 찾으니 갈비탕 집이 눈에 띈다. 안이 갈비찜이 유명하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고 탕을 시켰는데 의외로 살코기도 많고 맛있다. 조금 늦었으면 갈비탕마저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인기였다. 안의에서는 팔정팔담을 최고로 멋있는 경치로 불리는데 여덟 정자로는 농월정, 동호정, 거연정, 심원정, 영사정, 능허정, 낙수정, 도계정이고, 팔담은 율림담, 종담, 월연담, 차일담, 심원담, 학담, 구연담, 분설담이다. 점심을 들고 금호강변에 서있는 광풍루를 둘러본다. 고색창연한 광풍루는 규모와 구조가 우람하고 건축 양식이 조선을 대표한다. 조선 태종 12년(1412)에 처음 짓고 선화루라 이름 지었던 것을 세종 7년(1425)에 지금의 자리에 옮겨지었으며, 그 후 성종 25년(1494)에 정여창이 다시 짓고 광풍루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정유재란(1597)으로 불탄 것을 선조 34년(1601)에 복원하였고, 숙종 9년(1683)에 다시 지었다. 오랜 세월동안 많이 퇴락한 것을 1980년에 정비하였다. 앞면 5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광풍루(光風樓)! 빛을 바람에 실어 전국으로 나른다" "그러니까 광풍루(光風樓)라고 부르는 게 아니겠는가." 태종 12년(1412년)에 이안 현감(利安縣監) 전우(全遇)가 처음 이 누각을 세웠을 때에는 베풀어 화합한다는 뜻의 선화루(宣化樓)라고 불렀다. "선화루라고 부를 때에는 누각이 이곳에 있지 않았다. 이 누각은 세종 7년(1425)에 김홍의(金洪毅)가 옮겨 세운 거라고 한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건축양식을 완벽하게 간직하고 있다는 광풍루는 성종 25년(1494)에 이곳 현감으로 임명된 정여창(鄭汝昌)이 중수한 뒤부터 '광풍루'라고 고쳐 불렀다고 한다.
<광풍루 현판>
안의 현감을 역임한 장세남의 題詠(광풍루를 주제로 읊은 시)에 보면
三洞名區別有天 세 골짜기가 빼어난 이 지역은 신선이 사는 곳(삼동은 화림동 심진동 원학동을 말함) 一樓風月浩無邊 여기 한 누각이 있어 그 정취가 호탕하기 한이 없어라. 漠漠田間飛白鷺 끝없는 한 들 사이로 백로는 비상하고 璘璘石上瀉晴川 옥같이 고운 돌 위로 해맑은 시내가 흐르네. 西園竹樹宜疎雨 서쪽 뜨락의 대나무는 장대비가 내리는 듯 東嶺山嵐和暮煙 동쪽 산마루의 파란 남기에 화답하듯 저녁밥 연기 피어오르네. 杜翁去後今吾至 일두 선생 가신 이후 내가 오늘 여기 올라보니 此樂廖廖二百年 이러한 즐거움이 이백년이 지나도록 끊임없어라
# 감상: 장세남은 아마 모내기가 끝난 오뉴월에 광풍루에 올라 안의 골짜기를 조망했을 것이다. 시기적으론 지금의 광풍루를 대대적으로 수축한 숙종 때에 당시 선비들의 추앙을 한 몸에 받아온 일두 정여창의 족적을 더듬는 의미를 더하고 있다. 누에 올라 펼쳐진 풍경을 한들에서 금호강으로 대밭산 쪽으로 그리고 봉산너머 산봉우리로 시선을 옮겨가며 그려낸 풍경은 우리에게 사실감을 더해주고 있다. 한들 논 위로 비상하는 해오라기 금호강의 하얀 돌밭위로 흐르는 맑은 물 장대비같이 욱욱하게 자라는 대밭산의 대나무들 그리고 일두 정여창을 기리는 용문서원 주위의 봉산 마을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그리하여 이 광풍루를 지금의 위치에 옮겨 짓고 광풍루라는 이름을 지은 일두 정여창도 똑같이 이런 풍경을 즐겼으리라는 대리만족으로 시를 끝내고 있다. * 장세남은 숙종조에 안의 현감으로 내려와 지금의 광풍루를 크게 수축했다 .
광풍루는 정면5칸 측면2칸짜리 2층 누각으로, 태종12년(1412) 안의현감 전우가 객사의 누각으로 초창하여 선화루라 하였던 것을, 세종 7년(1425) 김홍의가 현재 자리로 이전하였으며, 성종 25년(1494) 정여창이 현감으로 부임한 뒤 중건하여 광풍루로 이름을 고쳤다. 이후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선조34년(1601)에 복구하였고, 숙종9년(1683)에 중건하였다. 영조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중 인물화에서는 당대 제1인자였던 조영석(관아재,1686-1761)이 안음현감 시절에 중수하고 현판도 그의 글씨이다.
광풍이란 말은 중국 초나라의 초사(楚辭)에서 전해내려 온 말로 ‘해가 떠오르자 바람이 불어서 풀과 나무들이 광색이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온갖 식물들이 고은 생기를 띄고 있는 모양을 표현한 것이며, 제월(霽月)이란 말은 비가 그치고 나온 달을 뜻하므로, 밤에 비가 그치고 난 뒤에 하늘에 떠 있는 께끗하고 오염되지 않은 상태를 표현한다. 우암 송시열은 광풍루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이것은 외부로부터 느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공경과 방종, 바른 것과 어긋나는 것의 분별을 명확하게 판별하여 도(道)의 본원에 통달하는 공부가 쇄락하여 털끝만한 인욕의 속박도 없이 태극을 마음에 간직한 뒤에야 기대할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그의 두 아들에게 편지로 광풍제월을 강조한 글도 있다. “사대부의 마음가짐은 광풍제월과 같아 털끝만큼도 가려진 곳이 없어야 한다. 하늘과 사람에게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으면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윤택하여 생기가 나온다.”
<제월당>
여기 포탈에 적힌 누각의 특징과 제월광풍을 해석하여 정자를 지은 연유를 해석한 글을 옮겨 적는다.
“이러한 자연에 몸을 담고자 한 것의 대표적인 건축물이 누정이다. 전국의 모든 누정은 아름다운 자연 속에 그림처럼 자리하고 있는 까닭이 바로 이러한 철학성을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동지역 많은 누정 역시 자연 속에 있다. 그러나 조금 다른 점 안동문화권만의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자연을 자신의 삶속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이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안동지역에는 집 안에 누정을 짓는다. 누정을 집 안에 는 까닭은 자신의 살아가고 있는 생활현장이 바로 자연이며 자연스러움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자건물이 지향하는 바가 바로 마음의 자연에 있기 때문에 정자에 들면 마음이 맑아진다. 정자의 이러한 철학성은 현판에 집약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 중에서도 제월광풍(霽月光風) 글귀가 생각난다. 중국 유학사에서 마음의 문제를 특히 고민했던 주렴계의 문장이다. 광풍이란 비갠 뒤 햇볕이 맑게 비추면서 부는 바람이란 뜻이며, 제월은 비개인 밤하늘에 내려앉는 맑은 달빛이란 뜻이다.
세파를 부딪히는 사람 마음은 언제나 먼지에 쌓여 있다. 자연의 먼지가 비가 오면서 정리가 되는 것을 비유한 것처럼 세파에 휘감기며 끼인 먼지가 수양을 통해 청소되어 그 본래의 깨끗함이 드러날 때의 청명함은 가히 존재 그 근원부터 시원해져옴을 느끼게 하여 줄 것이다. 광풍제월은 바로 그러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광풍제월이란 현판을 부착한 대표적인 안동의 정자는 옥연정과 광풍정 서후면 제월당등이다. 옥연정은 서애선생의 정자로 하회마을 건너편 부용대 오른쪽에 위치한 정자로 마루 안쪽에 이 글씨가 걸려있다. 광풍정은 학봉의 학맥을 이어가는 경당 장흥효 선생의 정자인데 서후면 검제에 위치한 정자이다. 광풍정의 위쪽에 제월대가 자리하고 있다. 경당선생 당시에는 제월대에는 단지 바위로 만들어진 대(臺)만 있어 여기에서 거문고와 노래를 불렀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 여기에 정자를 지었다. 일견하기에는 정자의 풍모는 있어 보이나 광풍정을 산 아래에 짓고 제월대를 단지 암석으로만 두고 명칭만 붙인 경당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 같아 마뜩찮다.
경당 선생의 광풍정 제월대와 비슷한 양상의 정자 구조를 가진 곳이 바로 전라남도 담양군에 유명한 소쇄원이다. 소쇄원은 조광조의 제자인 양산보가 은거하기 위하여 지은 곳은 냇물이 흐르는 일종의 위락공간에는 광풍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내원인 별원에는 제월대를 지었다. 바로 경당선생의 제월광풍정과 같은 구조로 만들어진 곳이다. 자연을 향하는 마음은 지역을 벗어난 본연의 마음인가 보다.
<제월당 옛 주춧돌과 기반석>
광풍제월(光風霽月), 마음의 먼지, 고뇌, 번뇌, 고민을 털어낸 본래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그 푸르름이 벅차게 다가오는 것은 어떤 마음일까. 비갠 뒤의 맑은 바람, 비가 걷힌후 내리는 맑은 달빛 한번 쯤 이 복잡하고, 대상에 대한 공연한 분노가 생기는 지금, 자신의 위치에서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이 이름지었다는 광풍루(光風樓)다. 일두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연산군 때 무오사화(戊午士禍)로 목숨을 잃고 부관참시(剖棺斬屍)까지 당한 인물이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광풍루기(光風樓記)'에 따르면 이 근처 어딘가에 제월당(霽月堂)도 있다고 했는데 천변을 따라 만들어진 오리숲 건너 절벽에 새로 지은 정자가 제월당이다. 제월당이란 정자 이름은 황정견(黃庭堅)이 주렴계(周濂溪)의 기상을 노래했다는 그 유명한 구절, `광풍제월(光風霽月)'에서 딴 이름이다. 우암은 일두가 상수(象數)에 밝았다는 것 때문에 그의 학문적 정통성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광풍루와 제월당이라는 이름을 보고서 그런 의심이 얼음 녹듯이 풀렸다고 한다. 일두는 이 누각에 서서 주렴계의 기상을 그리며 도학(道學)을 꿈꾸었을 것이다. 누각 바로 앞을 흐르는 경호강(鏡湖江) 너머로 안의를 가로 지르는 신작로 공사가 한창이다. 제월당 중수기에 의하면 성종 25년(1494)에 일두 정여창이 안의 현감을 할 때 처음 세웠는데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으며, 인조 22년(1644)에 박장원이 제월대 옛터에 세우기 시작하여 이듬해 김극혜가 완성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 후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는데 경호강이 바라보이며, 안의를 아우를 수 있어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