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역사의 길
차(茶)의 메카인 비봉루(飛鳳樓)의 비사(祕史) 5
오성다도 (五性茶道)
아인 선생의 오민교육은 정서적 불안정에 있는 학생들에게 정서적 안정을 찾게 하는 일이었다. 중고등학생들의 정서적 불안은 자기의 정체성과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불 확신 속에 나타나는 불안과 고민에서 오는 것이다. 이런 불안한 심리 상태의 청소년들에게 자기 존재의식을 심어주고 그들이 가야 할 방향을 찾게 해준다면 그들은 정서적 안정을 찾게 되고 자신들이 발견한 방향을 향해 나아감으로 성실하고 열정적인 사람으로 변화하게 된다. 아인 선생은 이점을 차 문화를 통해 깨닫게 되고 이를 오민교육으로 승화시켜 대성공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차 문화가 민족성 개조의 대안 문화이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차 문화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오민교육의 오민의 사상은 앞에서 말 한대로 손문의 삼민주의(三民主義)와 남명 조식의 반구실천(反軀實踐)에서 찾았고 이를 차에 적용하여 오성다도(五性茶道, 五性:기쁨,노여움,욕심,두려움,근심)라 하게 된 것이다.
아인 선생의 이러한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은 박군자 오성다도 관장이다. 서예가 은초 정명수 선생의 며느리인 관장은 "차는 건강이요 벗이며, 풍류요 예술이자, 행복이다"라면서 차에 대한 애정을 말한다.
비봉산 아래 있는 비봉루는 고려 말·조선 초 대유학자인 포은 정몽주가 안렴사(按廉使)로 진주에 다녀갈 때 잠시 머물렀던 누각으로, 포은의 17대손인 봉은 정상진이 1939년 복원해 지었고(수산물 유통 등으로 재산을 모은 진주의 대부호였다) 2003년 4월 17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29호로 지정되었다.
서예가 은초 정명수는 봉은의 장남이다. 그는 당대 최고 서예가였던 성파 하동주 선생 아래서 추사체를 익혀 추사체의 명맥을 이은 한국 서예계의 거목이 되었다. 박군자 관장은 그런 은초 선생의 며느리로 당시 은초 선생을 만나러 비봉루에는 문학가와 시인, 서예가와 한학자, 언론인, 학교 재단 이사장들이 오전 9~10시가 되면 두루 모여들었고 한국 다도 입문서인 <한국의 차도>를 쓴 효당 최범술 스님, 개천예술제를 창시한 시인 설창수, 진주 소싸움을 보고 소를 그렸다는 화가 이중섭 등 비봉루를 찾는 사람들과 대하면서 차를 즐겼던 시아버지 은초 선생의 영향으로 차에 입문하게 되었단다.
“어느 날 아버님께서 너도 차 좀 마셔보라 시더군요. 그렇게 한 잔 마시고 나니 또 부어 주셨고, 두 잔을 마시니 다시 부어 주셨습니다. 석 잔째 주실 때 ‘아버님 차는 항상 많이 마셔야 합니까.’ 그랬더니 ‘첫 잔은 차 색이고 다음 잔은 차 맛이며, 숨을 코로 내쉴 때 그때 비로소 차향을 느낀다.’ 차의 색·미·향을 느끼기 위해선 석 잔 이상 마셔야 한다고 하셨습니다.”고 그때를 그리워하는 박 관장은 차를 알게 해준 분은 은초 선생이었지만 차를 깨닫게 해준 이는 아인 박종한선생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