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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불과 반세기 전엔 사면초가 격으로 포위당한 빨치산 수백명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곳이기도 하다.빨치산 토벌작전이 한창이던 1952년 1월 중순의 이야기를 담은 ‘남도빨치산’에서 정관호는 “대성골 전투에서 발생한 희생은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라고 했다.‘빨치산의 딸’을 쓴 정지아는 “적어도 1000명의 빨치산이 대성골로 모인 것은 국군이 전 빨치산을 대성골로 몰아넣기 위해 이 길목만 터놓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그이의 표현대로라면 계곡물이 몇날며칠 핏빛으로 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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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산길I 다리품 팔아야 닿는 마을
그 붉은,이제는 잘 익은 감과 때늦은 단풍으로 붉은 대성골 안에 민가라곤 딱 두 채뿐인 대성마을이 있다.의신에서 대략 2.5㎞.차가 다닐 수 없는 산길을 따라 적어도 1시간쯤 다리품을 팔아야 닿을 수 있다.‘화개면지’는 대성에 있었다는 ‘대승암’이란 암자 이름에 기인해 원래 지명을 ‘대승’으로 보고 있다.등산로가 폐쇄된 대성교와 의신마을에서 각각 오르면 흔히 ‘절터’라고 부르는 곳에서 만나게 되는데 그 절터가 대승암인지,아니면 곳곳에 산재한 다른 절터인지는 아직 확인할 길이 없다.
한때는 화전민들로 붐볐지만 박정희 정권 때 시행된 독가촌 정리로 대다수 집들이 산을 떠났고,현재는 임성우(62세)씨가 터줏대감 역할을 도맡고 있다.세상을 떠난 임씨의 아버지 임봉출옹이 대성에 터를 잡은 건 이 일대 빨치산이 어느 정도 잦아든 1950년대 초반.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훨씬 전이어서 땅을 구입할 수 있었다.임옹은 아들 성우씨와 함께 돈벌이가 될 것이라 믿었던 후박나무 8000그루를 심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언젠가 후손들은 혜택을 입지 않겠습니까? 돈을 떠나서 우리가 심은 나무가 곧고 튼튼하게 자라주니 고맙죠.”
● 빨치산 토벌로 1000명 이상 죽음 맞아
국립공원에 묶여 재산권 행사를 할 수 없다는 임씨는 내심 마을까지 소로가 나길 바라고 있다.차는커녕 경운기도 오갈 수 없어 냉장고나 세탁기 같은 대형 가전제품까지 지게로 운반해야 하는 등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자녀 교육도 문제였다.부모가 동행이 되고,이후엔 형제가 동행이 되고,그 후엔 옆집이 생기면서 이웃이 동행이 되어 학교를 다녔다.전기는 10년 전에 들어왔는데 전봇대 하나에 여섯 명씩 팀을 이뤄 일일이 손으로 파고 묻었다고 한다.그 전까지 아이들은 촛불을 켜고 숙제를 했다.폭우로 물이 넘치거나 폭설로 길이 끊긴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4남매 중 첫째를 뺀 셋이 6년 개근상을 받았다고.
임씨의 마루 한쪽엔 알몸으로 누운 감들이 그득하다.이곳의 감들은 굳이 약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제 스스로 성장해 가을마다 살진 열매를 맺는다.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어서 그저 수확량이 많으면 껍질을 깎아 곶감을 만들고 수확량이 적으면 적은 대로 한 해를 보내기도 한다.배추,무,도라지,더덕,고추,상추,참나물,파 등 기본적인 채소는 계곡 옆 채마밭에서 수확해 충당한다.두 집 모두 봄에는 고로쇠,여름과 가을엔 등산객을 상대로 민박을 해 생계를 잇는다.김장까지 마치고 나면 마을은 그야말로 휴식기.겨울이라고 해서 등산객이 뚝 끊기는 건 아니지만 찻길과 한참이나 떨어진 이곳은 그야말로 산중의 섬이 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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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
경남 하동군 화개면까지는 서울 서초동 남부터미널과 부산 사상 서부터미널을 이용한다.자가용은 호남고속도로 전주 나들목,대전~통영간고속도로 장수 나들목,88고속도로 지리산 나들목,남해고속도로 하동 나들목에서 19번 국도를 따른다.이후 화개장터 삼거리에서 쌍계사 이정표를 보고 도로가 끝나는 곳까지 달리면 의신마을에 닿고,의신마을 ‘벽소령민박’ 마당을 가로질러 산길로 2.5㎞쯤 올라야 한다.걸어서 1시간가량 걸리는데 다행히 급경사가 거의 없어 오르는 데 부담은 없다.대성골 민박은 하룻밤 3만원,큰방은 5만원,닭백숙은 4만원이다.
글 사진 황소영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