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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땀의 증거자’ 최양업 신부 묘소를 모신 배론 성지 - 1
<배론 성지>
배론성지(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배론성지길 296 - 구학리 644-1)는
우리나라 성지 중에서 손꼽히게 잘 조성된 곳이다.
치악산 동남 기슭에 우뚝 솟은 구학산과 백운산의 연봉이 둘러싼
험준한 산악 지대의 첩첩산중 골짜기에
청량한 계곡수의 좌우로 약속의 길, 광장, 성전, 조각공원, 그리고 사적지,
기억해야할 사제들의 조각상, 피정의 집들을 조화롭게 배치해 놓았다.
선배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오늘을 비춰 보는 좋은 거울에 들어서게 해 준다.
배론은 천주교도들의 오랜 교우촌으로서
신학을 배우러 해외로 떠난 최초의 유학생이자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가 된 최양업 신부의 묘소가 있는 곳이고,
우리나라 최초인 성 요셉 신학교가 세워졌으며
1801년 신유박해 때 황사영이, 당시의 박해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고
신앙의 자유와 교회의 재건을 요청하는 백서(帛書)를 집필한 땅이다.
가경자(可敬者 - ‘시복’후보자의 잠정 호칭)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1821~1861)는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崔京煥 1805∼1839)과
복자 이성례 마리아(李聖禮 1800~1840. 일성록-日省錄-에는 性禮로 기록됨) 부부의
장남으로, 충청도 다락골(일명 대래골. 현 충남 청양군 하성면 예암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로, 양업은 아명(兒名)이고 관명(冠名)은 정구(鼎九).
우리나라 사람 사제의 길을 개척한 최양업 김대건 두 신부의 종교사와 가족사는
‘내포의 사도’경주 이씨 이존창과 연결된다.
최 토마스의 증조부 최한일(崔漢馹)은 1787년 동생 최한기(崔漢驥)와 함께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의 권유로 서울 본가에서 세례를 받았다.
최한일은 경주 이씨와 혼인, 외아들 인주(仁柱)를 둔 채 사망했다.
인주는 이존창 집안의 딸인 이씨와 결혼해서 최경환을 낳았고,
최경환과 이존창의 5촌 조카딸 이성례 사이에서 최양업이 태어났다.
<대성당 앞의 최양업 토마스 신부>
한편 김대건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金震厚)는
이존창의 감화로 50세에 천주교에 입교했다.
그의 둘째 아들 택현(澤鉉)이 이존창의 딸 이 멜라니아와 혼인,
김제준 이냐시오(金濟俊) 성인이 탄생했고,
그와 고 우르술라와 사이의 장남이 김대건 성인이다.
이렇게 해서 최양업과 김대건은 이존창을 중심으로
숙질간도 되고 형제도 되는 깊은 관계가 맺어진 것이다.
이존창 - 4촌 누이 멜라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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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이멜라니아+김택현 조카딸 이성례마리아+최경환 이존창 집안 딸 + 최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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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준이냐시오+고우르술라 최양업 최경환+이성례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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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최양업의 집안은 본시 서울에서 살았는데 조부 때 박해를 피해 낙향,
당시 홍주(洪州) 땅인 다락골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이 출생하였다.
다락골에서 점차 생활이 넉넉해지고 신앙생활이 해이해지자
최경환은 보다 폭넓고 독실한 신앙생활을 영위하고자
형제들과 함께 서울로 이주했다.
그러나 3년 만에 천주교 집안인 것이 탄로되어
최경환은 과천의 수리산 뒤듬이로 피신했다.
최 성인은 담배를 경작하며 교우촌을 이끌었다.
<수리산 최경환 성인 고택 >
1836년 초 입국에 성공한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는
즉시 방인(邦人) 성직자 양성을 위해 신학생 선발에 착수했는데,
맨 먼저 최양업이 발탁되었고, 이어 최방제(崔方濟)와 김대건이 선발되었다.
모방 신부는 그들을 마카오로 보내 성직자로 양성할 계획이었다.
세 소년은 서울의 모방 신부 곁에서 라틴어를 배우며 출국을 기다렸다.
세 유학생은 그해 12월 3일 의주(義州)를 향해 떠났다.
정하상(丁夏祥), 조신철(趙信喆) 등 유지 교우들이 그들과 동행이었다.
이들은 세 소년을 변문(邊門)까지 인도하고
거기서 새 선교사를 맞아들이게 되어 있었다.
<변문은 조선의 국경 도시 평북 의주로부터 48㎞ 떨어진 지점
구련성(九連城)과 봉황성(鳳凰城)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한국인이 중국에 들어가는 관문이자 별정소(別定所)가 있어
의주 관리들이 파견돼 상주하던 곳이었다.
옛 사신들이 압록강을 건너 명이나 청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처음 만나는 관문이다.
목책을 둘러쳐서 경계를 삼았다고 해서 책문(柵門)이라고도 하고,
변경에 있는 문이라 해서 변문(邊門)이라고 부른다.
병자호란 때 잡혀간 고려인들이 살던 곳이라 고려문으로 부르기도 한다.
-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 만주편.>
12월 28일 변문에 도착한 세 소년은 중국인 안내원을 따라 중국 땅을 종단,
이듬해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했다.
마카오 주재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경리부 책임자 르그레즈와(Legregeois) 신부는
경리부 안에 임시로 조선신학교를 세우고
주로 경리부 차장 리브와(Libois) 신부에게 교육을 담당시켰다.
조선 선교사로 부임하는 메스트르(Maistre)와 베르뇌(Berneux) 신부처럼
선교사들이 마카오에 체류하는 동안 그들의 교육을 돕기도 했다.
최양업과 김대건은 아편전쟁을 전후해 현지에서 일어난 민란(民亂)으로
두 번이나 마닐라로 피난해야 했고, 최방제와 1년 여 만에 사별(死別)하는 등
유학생활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으나, 1842년까지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롤롬보이의 김대건 신부 동상 : 두 유학생은 민란을 피해 두 차례나 마닐라 인근의
롤롬보이 마을에 유숙했다. 그 곳 집 주인 할머니는 어렸을 때 조부모로부터
두 분 신부의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김수환 추기경과 오기선 신부의 노력으로
이곳을 찾아냈고, 할머니가 땅 일부를 기증하고 일부를 한국 교구에서 구입,
성역화가 시작됐다. 1986년 한국에서 김대건 신부 동상을 제작,
봉관명의 형 봉두완 평신도협의회 회장이 모셔왔고, 윤 마르띠나가 동상의 제호를 썼다.>
아편전쟁의 종말이 가까워지자 프랑스 정부는
군함 2척, 즉 에리곤호와 파보리트호를 한국에 파견키로 했다.
함대의 요청에 따라 두 유학생이 통역으로 동행하게 되어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가 1842년 2월 15일 에리곤호로 출항했다.
최양업은 파보리트호의 입항이 늦어져 7월 17일에야
요동(遼東)교구 선교사 브뤼니에르(Bruniere) 신부와 함께
마카오를 떠나 8월 23일 상해 오송(吳淞) 항에 이르러 김대건과 만났다.
그러나 8월 29일 남경조약으로 아편전쟁이 끝나고
조선 원정 계획도 중단돼, 두 학생은 다른 배를 얻어
10월 2일 귀국길에 올라 10월 23일 요동에 도착했다.
김대건은 그 곳으로부터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고,
최양업은 몽고땅 팔가자(八家子)로 가서 페레올(Ferreol, 高) 신부와 합류한 뒤
소팔자가(小八家子) 교우촌에서 신학공부를 계속했다.
입국에 실패해 돌아온 김대건과, 최양업은 1844년 신학과정을 마치고,
1843년 제3대 조선교구장이 된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았으나
교회법이 요구하는(만 24세) 연령 미달로 사제품은 받지 못했다.
최양업 부제는 계속 소팔가자에 남아 있었고
김대건 부제는 페레올 주교와 함께 입국을 시도한 끝에 성공하지만
주교는 입국하지 못했다.
<최양업 신부 조각공원 : 최 신부의 일생이 조각돼 있다.>
최양업은 4번 실패한 뒤 마침내 5번째 시도 만에 입국하기에 이르렀다.
1 차 : 1846년 초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두만강을 통해 입국 시도 실패.
2 차 : 1846년 말 변문을 통해 입국을 시도했으나 또 실패.
이때 김대건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들었다.
3 차 : 육로를 단념하고 해로(海路) 입국을 시도코자 홍콩 경리부로 갔다.
그간 경리부는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이전되어 있었다.
드디어 입국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조선으로 떠나는 2척의 라피에르(Lapierre) 함대에 올라
1847년 7월 28일 마카오를 떠났다.
그러나 두 군함은 고군산도(古群山島)에 이르러 완전히 난파하였다.
상해로부터 구조선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최양업은 육지로 잠입하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부득이 구조선을 타고 상해로 돌아갔다.
4 차 : 1849년 백령도를 통해 입국을 시도했으나 또 실패.
사제품 : 4월 15일 강남교구장 마레스카(Maresca)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고
김대건에 이어 두 번째 한국인 신부가 되었다.
5 차 : 5월 요동으로 가서 7개월 동안 베르뇌 부주교를 도와 사목하고,
12월 드디어 변문을 통한 입국에 성공했다.
입국 길에 오른 지 7년 6개월만의 4전5기였다.
<조각공원 앞에서 최양업 신부와>
귀국한 최 신부는 휴식을 취할 겨를도 없이 5개 도를 두루 다니며,
그것도 외부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산간벽지만을 찾아서
교우들을 심방하고 성사를 집전하였다.
1년 간 7천여 리를 걸어 4,000여명의 고해를 들었다.
건강한 편인 그로서도 너무나 벅찬 여정이었다.
철종 연간(1850∼1863)은 천주교가 묵인되던 때여서 정식 박해는 없었으나
소위 사군난(私窘難)은 그칠 날이 없었다.
<사군난 : 사적(私的) 박해(迫害)를 지칭하는 옛말로,
공권력에 의한 공식적 박해가 아니라 적의를 품은 한 개인이나
집단의 월권적 행동에서 유발되는 박해를 의미한다. -가톨릭대사전.>
최 신부는 외교인들의 습격을 받으며 체포될 뻔도 했고,
추방되고, 관가에 고발되는 등 도처에서 중대한 위험을 겪었다.
그러나 말 할 수 없는 어려움과 궁핍 가운데서도
많은 개종자와 용감한 입교자들 앞에서 위로와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최양업은 이토록 바쁜 전교 활동 중에서도
신학생을 선발하여 페낭 신학교로 보냈고, 선교사들의 입국을 주선했으며
순교자들에 관한 증언과 자료를 수집하는 등 지칠 줄 모르는 열성을 보였다.
혼자만도 1,000여 명의 예비자를 맞이함으로써 개종 운동이 절정에 달했을 때
1859년 말 뜻밖에도 경신박해(庚申迫害)가 일어났다.
1839년(헌종 5)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천주교도 색출에 공을 세운
금위대장 임성고(任聖皐)의 아들 좌포도대장 임태영(任泰瑛)이 주동이 되어
조정의 명령도 없이 우포도대장과 짜고 사사로이 일으킨 박해로
포도대장의 탐욕과 천주교에 대한 개인적 적개심,
포졸들을 먹여 살릴 경제적 방편 등이 그 주된 원인이었다.
<두산백과>
이 박해로 최 신부는 경상도의 죽림공소에서
여러 달 동안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채 갇혀 지내야 했다.
그러나 박해는 다행히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안동 김씨 세도가의 대표적 인물 김병기(金炳冀)가
어전회의에서 임태영 등을 규탄하고,
철종이 이를 받아들여 음력 8월 임 대장을 사퇴시키고
투옥된 천주교도를 모두 석방함으로써 박해는 종식되었다.
<최양업 토마스 묘소>
최 토마스는 중단되었던 전교활동을 다시 시작함에
박해로 밀린 교무와 공소 증설 사업을 너무 무리하게 추진시켰다.
하루에 80리 내지 100리를 걸었고,
밤에 고해성사를 주고 날이 새기 전에 다른 공소로 떠났다.
한 달 동안 나흘 밤 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1861년 6월 성사 집전을 끝낸 그는 주교에게 보고 차 상경하던 중
경상도 문경(충청도 진천이라는 설도 있다)에서 과로로 쓰러져
보름 만에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최 신부 집안의 구전에 의하면 식중독으로 사망했다고 하는데
식중독에 겹친 과로로 합병증을 일으켜 장티푸스로 사망한 것 같다.
최 신부는 이렇게 사목 활동 12년 만에 기진맥진한 끝에 순직하였다.
<가톨릭 사전 등>
시신은 선종지에 가매장되었다가 배론으로 옮겨져
배론 신학교에서 베르뇌 주교의 집전으로
선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장엄하게 거행되었고,
신학교 산기슭에 매장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피의 증거(순교)로 성인에 올랐으나
최양업 신부는 ‘땀의 증거자’였고 ‘길 위의 사제’였다.
최양업 신부는 순직이었기 때문에 시성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그 후에 '땀의 순교자'라는 호칭이 그에게 붙여졌으며,
2004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최양업 신부와
124명 순교자들의 시복을 교황청에 청원해 놓고 있다.
로마교황청은 2016년 5월 8일 최양업을 가경자로 인준하였다.
<최양업신부 기념 성당 대성전>
- 최경환 성인의 탄생지 : 가톨릭 대사전에는 '化成面 禮岩里' 로, 다른 글에는
'하성면 예암리'로도 돼 있으나 '대전교구 청양 다락골 성지' '청양 다락골성지' 등의
홈페이지에 의하면 최 성인과 최양업 가경자 부자의 탄생지는
'화성면 농암리 化成面 農岩里'로 나와 있고, 필자도 2021. 4. 현지에서 확인하였으므로, '농암리'로 바로습니다. 2021. 5. 25. 마정.
- 55. '다락골 성지' 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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