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 많은 독립투사가 옥고를 치르며 갖은 형벌을 받다가 순직한 곳, 서대문 형무소 근처에 있는 서대문 독립공원에 있는 유관순 열사 동상을 보며 동상에 새겨진 열사의 기록을 소개하고자 한다.
유관순 열사
유관순 열사는 1902년12월16일(음력11월17일) 충남 옥천군 이동면 지령리(현주소: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유관순 생가길18-2)에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재 사이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19년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이던 유관순 열사는 서명학, 김복순, 김희자, 국현숙과 함께 5인 결사대를 결성하여 3월1일 탑골공원 만세운동과 3월5일 대한문 앞에서 망곡(望哭)을 한 뒤 남대문역(현 서울역) 시위에 참여하였다.
3월10일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으로 내려온 유 열사는 학교와 교회, 그리고 유림등을 방문하여 만세운동을 협의하고 4월1일 아우내 장터에서 3,000여 관중에게 직접 제작한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시위를 평화적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일본 헌병대에 의해 이날 시위 현장에서 유 열사의 부모님을 비롯하여 19명이 피살되고, 30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유 열사는 시위 주동자로 체포되었다.
유관순 열사는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공주 지방 법원에서 5년 징역형을 받고, 경성복심법원에서 당시 소요죄의 최고형인 3년 형을 선고받았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중에도 끊임없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자 지하 감방에 가두고 모진 고문을 하였지만,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유 열사는 체포 당시 당한 부상과 계속되는 고문으로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서대문 형무소의 어두운 감방에서 순국했다.
유 열사의 유해는 1920년 10월 14일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36년 이태원 공동묘지가 군사시설 및 주택지로 이장과정에서 무연고 분묘로 화장 후 현재 망우리 공원에 합장되어 있다.
1962년 3월1일 건국훈장단장(서훈 3등급)에서 2019년 3월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서훈 1등급)으로 승격 추서하였다.
유관순 열사 어록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코와 귀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을 참을 수 있사오나
내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를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나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 열사 마지막 유언)
시니어 기자 조동순
첫댓글 유관순 열사의 어록에
마음뭉클합니다.
지나다닐때마다
느끼지요^^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라를 빼앗겼을시 헌신.희생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선 겨레의 숭고한 정신적인 지주 유관순 열사..
유관순 열사의 조국을 사랑하는 정신 영혼에 대하여 많은것을 새롭게 인식하게한 기사네요 조국독립 역사를 교훈삼아 통일조국 이루어질날 고대해 봅니다.
애국심 함양에 동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유관순 열사의 유언'을 읽으며...
유구무언입니다.
서대문 독립공원 앞을 지나가게 되면 숙연한 마음이 저절로 들지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유관순 열사를 비롯해 많은 분들이
옥고를 치르다 순국한 이곳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잘봤습니다~!
유관순 열사 글 잘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