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욱 洪鍾煜(1892 ~ 1968)】 "1919년 용인군 포곡면 만세운동」
1892년 5월 19일 경기도 용인군(龍仁郡) 포곡면(蒲谷面) 금어리(金魚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한제국의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한 항일운동가 홍재설(洪在卨)이고, 동생은 독립운동가 홍종엽(洪鍾熀)이다. 양반 신분으로 일찍이 기독교를 수용하고 장로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일대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서울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이 용인으로 전파되면서 용인지역 만세운동은 3월 21일 원삼면(遠三面) 횃불시위를 기점으로 일어나 4월 초까지 지속되었다. 포곡면 일대에서는 3월 28일 오전 7시 초지리(草芝里) 사람들로부터 인근 모현면(慕賢面)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한학자 권종목(權鍾穆)·김병선(金秉善)·권홍규(權洪圭)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권종목 등은 삼계리(三溪里)에 거주 중이었는데, 곧바로 동리 사람 200명을 지휘·인솔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면사무소 소재지인 둔전리(屯田里)를 향해 행진하기 시작하였다.
권종목이 시위대를 이끌고 찾아와 태극기를 교부하며 “당신 동리에서도 만세를 부르라”라고 권유하자, 동생 홍종엽과 함께 참여하였다. 나아가 옆집에 거주하는 학생 이인봉(李仁鳳) 등 마을 사람들을 만세시위에 동참시켜 합류하게 하였다. 삼계리 사람들이 둔전리로 향할 때, 수여면(水餘面) 김량장리(金良場里) 방면으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당일은 김량장리에서 대규모 장이 서는 날이기 때문에 이를 활용해 만세시위를 확산시킬 계획이었다. 오전 10시 30분경 대대리(大垈里)에 이르자 평소 알고 지냈던 김치현(金致賢)의 집을 찾았다. 때마침 김치현도 시위 확산을 목적으로 태극기를 제작 중이었다. 동생과 함께 태극기 색칠을 돕고 완성품을 면민들에게 배포하였다. 하지만 시위대와 함께 김량장리로 가는 길목인 햇골에 도착하자 이곳에서 방어선을 치고 있던 일제 헌병으로부터 무자비한 탄압을 받고 결국 해산하였다.
이 일로 곧바로 붙잡혀 용인경찰서에 구금되었다. 1919년 5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같은 해 양형 부당으로 항소하였으나 6월 28일 경성복심에서 기각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다가, 1920년 4월 28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