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접하는 부동산투기, 탈세, 금융사기, 주가조작 등의 보도는 더 많은 부를 축척하기 위해 안면수심의 위법을 서슴지 않고 있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법정 스님의 아무것도 갖지 말라는《무소유》는 책 제목 자체부터가 역설적이다.
《무소유》(이하 책)는 범우사에 1976년 4월 15일 초판이 발행된 이후 재판이 거듭돼 밀리언셀러가 된 책이며 이 책을 통해 비로소 ‘무소유’라는 말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 같다. 선택한 가난인 청빈의 삶을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가장 순수한 영혼의 한분으로 꼽히는 법정 (이하 스님)이 말하는 진정한 '무소유‘의 삶을 스님의 책을 통해 들여다보고자 한다.
책에는 스님의 주옥같은 수필 35편이 실려 있다. 한편 한편이 스님의 치열한 구도과정에서 건져 올린 명징한 삶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지만, 이 글에서는 책 제목에 걸 맞는 <무소유>에 대한 내용들 위주로 얘기해보고자 한다.
<회심기>에서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다는 이 말이 떠오른 순간 가슴에 맺혔던 멍울이 삽시간에 술술 풀리었다. 그렇지! 본래 한물건도 없는 거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이 세상을 하직할 때 가져 가는 것도 아니다. 인연 따라 있었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고 마는 거다. 언젠가 이 몸뚱이도 버리고 갈 것인데…….”라며, 본래 인간은 아무것도 없었음을 일러준다.
<잊을 수 없는 사람>에서는 “버스 안에서였다. 그는(수연 스님) 호주머니에서 주머니칼을 꺼내더니 창틀에서 빠지려는 나사못 두 개를 죄어 놓았다. 무심히 보고 있던 나는 속으로 감동했다. 그는 이렇듯 사소한 일로 나를 흔들어 놓았다. 그에게는 내 것이네 남의 것이네 하는 분별이 없는 것 같았다. 어쩌면 모든 것을 자기 것이라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하나도 자기 소유가 아니다. 그는 실로 이 세상의 주인이 될 만한 사람이었다.”며, 진정한 소유는 내 소유가 아무것도 없을 때 오히려 모든 것을 소유한다는 역설적 진리를 일깨워 준다.
<나의 애송시> 서두에는 청마 유치환의 <심산>이라는 시가 실려 있다. “심심 산골에는/산울림 영감이/바위에 앉아/나같이 이나 잡고/홀로 살더라.” 스님은 이 시를 읽으며 “혼자이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얽어매지 못할 것이다. 홀로 있다는 것은 순수한 내가 있는 것. 자유는 홀로 있음을 뜻한다. 아,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어디에도 거리낄 것 없이 산울림 영감처럼 살고 싶네. 태고의 정적 속에서 산신령처럼 무료히 지내고 싶다”는 스님의 소박한 마음을 드러냈다.
<불교의 평화관>에서는 승자나 패자나 모두 패자일 수밖에 없는 참혹한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정신적 방법을 제시한다. “근본적인 노력은 (전쟁을 하고자 하는)그들의 마음에서부터 탐욕과 분노와 무지를 씻어 버리는 일이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함께 살고 있는 이웃에게 자비와 지혜를 베푸는 일이어야 한다. 국제간의 경제적인 균등한 분배 없이는 그 어떠한 평화도 없다. 과거 평화를 깨트린 원인들을 상기해 볼 때 절대 다수의 뜻에서가 아니라 소수 지배 계층의 행동양식이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더구나 핵무기가 등장한 현대전의 결과는 어느 쪽에도 승리란 있을 수 없게 됐다. 인간에게 지혜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 전쟁은 아무리 옳다고 해도 그것은 평화를 지키기 위한 명분이 될 수 없다.
이 책의 압권은 역시 <무소유>란 글이 아닐까 싶다. 이 글에서 스님이 정성들여 기른 난을 햇볕 비추는 뜰에 그냥 놓고 출타했다가 불현듯 햇볕에 시들 난을 생각하다가 허둥지둥 돌아오고 나서 깨친 한 생각을 들려준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다짐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이 구절은 마치 도덕경의 “도의 길은 매일 매일 하나씩 버리는 것”이라는 ‘위도일손(爲道日損)’을 생각나게 한다.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 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하면서, 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이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번쯤 생각해 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무소유의 또 다른 의미이다.”는 무소유에 대한 탁견이다.
이 책에 바쳐진 헌사도 무소유의 철학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 책이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고, 도올 김용옥은 “법정 스님의 명언을 빌어 설파되는 무소유의 지혜”라고, 철학자 윤구병은 “무소유는 공동 소유의 다른 이름이다. 나눔과 섬김의 바탕은 무소유에 있다. 나무 한 그루 베어 내어 아깝지 않은 책으로 나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들겠다.”고 각각 말했다.
<무소유>를 읽다보니 간디의 “무소유란 오늘 우리에게 필요 없는 것을 지니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는 말이 떠오른다. <무소유>의 글에서도 1931년 런던에서 열린 제2차 원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에 마르세유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보이면서 간디가 말했던.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는 평판, 이것뿐이오.”가 인용돼 있다.
오늘날 무소유를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 사실 무소유는 쉽고 단순한 말 같아 실천하기도 쉬울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보라. 세상은 거침없이 욕망의 극대화로 치닫고 있어 소유욕을 덜어낸다는 무소유의 실천은 이룰 수 없는 꿈같게만 여겨진다. 결국 무소유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라”는 사전 풀이는 보다는 “내게 필요치 않는 물건을 갖지 않는 게 올바른 실천 방법" 이라 생각 된다. 즉 내가 덜 소유한 만큼의 무소유가 상대방의 소유로 돌려질 수 있다는 얘기다. 그 말을 깊이 들여다보면 덜어내는 소유가 곧 나눔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내내 가슴을 울리는 구절이 있다. “국제간의 경제적인 균등한 분배 없이는 그 어떠한 평화도 없다.”는. 무소유는 결국 나눔의 다른 표현이며 비움과 나눔이 종교의 핵심이라고 역설했던 어느 신학자의 말도 <무소유>의 다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