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최장순
산허리가 시원하다. 강을 끼고 바라보는 전경이다. 하늘과 맞닿은 산은 강 깊숙이 제 그림자를 새기고, 건너편 산자락에 깃든 마을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느릿한 철새들 뒤를 잔잔한 파문이 따라간다. 거실 창으로 여유로운 화폭이 전개된다.
산과 마을과 강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집을 짓고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발코니의 화분이 눈에 드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집안에 자연을 끌어들이고 싶은 인간의 욕망과는 달리, 자연이 그리운 화초들은 모두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다.
집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다.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상상력 안에 여러 색깔과 냄새와 모양으로 살아있는 친숙하고도 안락한 공간’이다. 잠을 자고, 밥을 먹고, 휴식을 취하는 하나의 독립된 세계를 만들어 쉼과 행복을 누리려 집을 짓는다. 그러나 일상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 생활방식의 확장과 다양한 주거형태로 인해 정주定住하는 사람보다 빈번히 이주移住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집은 정말 안락한 보금자리이자 친밀한 환대의 공간일까.
집에서 태어나 자라고 집에서 시집가고 장가들고 집에서 병들어 간호받다 죽어간 과거와 달리, 산부인과에서 태어나 예식장에서 결혼하고 병원에서 치료받고 요양 받다가 장례식장에서 이별한다. 모든 것을 집에서 해결하던 때와 달리 거주의 의미는 축소되었다. 집은 더 이상 태어나서 성장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공간이 아니다. ‘나’라는 존재가 만들어지고 내가 살았던 시절의 흔적들이 있어 나의 추억을 느끼게 해주지 못한다.
집을 세움으로 안과 밖이 나뉘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안락한 공간이 만들어진다. 집은 인간에게 언제나 우호적이지만은 않은 ‘자연으로부터 도피’를 가능하게 해 준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연을 집안으로 끌어들여 소통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자연의 일부로 갖는 본성을 벗어날 수 없음이다. 자연과 사회의 관계망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본질이 아파트라는 벽 안에 갇힐 때, 단절된 사적 공간은 고립될 수밖에 없다. 제한된 공간이지만 최대한 확장해 정원을 만들고 화분을 놓거나 휴식공간을 만드는 것도 고립으로부터 탈출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도심의 집들은 경쟁하듯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있다. 높이를 km 단위로 쓰는 빌딩도 등장했다. 모든 게 그 안에서 해결되는 수직의 도시. 허공에 지은 공중도시가 현실화되고 있다. 단순히 땅의 부족으로 인해 건물이 솟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자고 나면 불쑥불쑥 솟는 고층을 보면,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인간의 오만함이 쌓은 바벨탑이 떠오른다. 높이 오르려는 인간의 욕망에 문명의 끝을 보려는 ‘부富의 발광發狂’이 더해진 결과가 아닐까. 지상과 단절된 공간, 그 그림자가 뒤덮고 있는 거리에는 높이에서 낙오된 우울함이 깔려있다. 도시의 주인인 시민의 삶과는 동떨어진 모래성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허공의 끝에서 내려다보는 실망감이라니. 높이에 끼어든 ‘고공증’은 우울함과 낭패감의 다른 말일 것이다. 차라리 저지대의 삶이 위안이 될지도 모른다.
교통수단의 발달은 세계 어디에나 갈 수 있게 지경을 넓혀 놓았다. 하늘과 가까워지려는 수직의 영역은 물론 수평적 확장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높고 넓어진 만큼 심리적 공간은 상대적으로 좁아졌다. 욕망의 무한한 확장이 오히려 인간을 왜소한 존재로 가두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위축된 마음의 공간, 의식의 공간을 넓히려는 욕구가 주거공간의 형태에 따라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다.
발코니, 베란다, 테라스는 각각의 주거형태에 따라 확장한 서비스 공간이다. 휴식, 조망, 축소된 정원, 다용도실 등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차이점은 크기와 위치에 따라 구별된다. ‘큰 창문’이라 일컫는 발코니는 방으로부터 확장된 공간이고, 베란다는 건물 위층과 아래층의 바닥면적 차이로 생긴 조금 넓은 공간이며, ‘땅’이란 말에서 유래된 테라스는 건물 높은 층의 비교적 넓은 가든 형태를 취한다.
이 모두는 집의 안과 밖을 연결하는 완충공간으로 자연에 더 가까이 가려는 심리적 계산을 품고 있다. 어쩌면 땅이 부족하고 마당이 없는 도시에서 허공이라도 확장하고 품을 넓히려는 궁여지책이 아닐까. 하늘 높이 솟은 집이든 축구장만큼 넓게 차지한 집이든 인간은 결국 땅 위에 있는 존재다. 문밖을 나서면 모든 풍경이 내 것인 것을. 크고 작은 수많은 봉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에베레스트산은 스스로 자랑스럽기만 할까. 잠실벌에 홀로 우뚝 솟은 거대한 빌딩을 보면 왠지 친밀함과는 거리가 멀다.
생은 난간欄干에 기대서는 일이라 했다. 뙈기밭이어도 마음이 풍족하면 비옥한 전답이다. 몇 걸음 떨어져 들여다보면 소박한 쉼들이 있다. 졸아든 가슴을 펴던 침대, 미처 소화 시키지 못한 책들이 쌓였어도, 햇살 무늬를 새긴 거실엔 텔레비전 드라마가 흐른다. 주방에는 안주인의 손길이 분주하다. 뒤돌아선 바깥, 고운 하늘빛 아래 드러난 숲이 바람에 제 몸을 흔들고, 이제 막 꽃봉오리를 밀어 올리는 목련 나뭇가지에 찾아든 새들과 놀이터 아이들의 활기찬 소리가 정겹다. 잠시 난간의 시간이 만들어 내는 소소한 일상이다.
정든 옛집은 노래 속에 남았다. 어머니의 품이 그립듯 고향집이 그리운 것은, 가족 중심의 단순하고 소박한 삶의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한 하우스house가 아니라 3대가 함께하며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준 눈물겨운 홈home이라서 그렇다. ‘주거와 생산과 제례’의 공간에서 멀어진 지금 우리는 집은 있되 집 없는 실향민처럼 살고 있다. 거주를 통해 얻는 친밀한 환대의 공간이 아니라 모두 홈리스처럼 살고 있지는 않은가.
아이들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어른이 되어 어린 시절의 고향으로 애정을 느낄 수 있는 집은 아득히 먼, 돌이킬 수 없는 소망일까.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집이 앓고, 울고, 웃는 표정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벌컥 화내는 소리와 꾸짖는 소리, 기도하는 소리와 집이 나를 부르는 소리를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