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 70년, 피란수도 부산] ⑬ 격동기 삶의 터전 국제시장
연합뉴스 2023-06-25
'도떼기시장'으로 출발, 전쟁 중 전국구 시장으로 급부상
1950년 8월 20일 국제시장 모습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부산=연합뉴스) 차근호 기자 = "해방 이후 비교적 조용했던 이 시장은 6·25전쟁이 나자 불과 6개월 사이에 활동 인구가 수 배로 늘어나 성시를 이루었다. 다시 1년 사이 이곳은 일약 한국 경제의 중추 시장으로 변모해 부산과 경남은 물론 전국의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2003년 국제시장 번영회가 발간한 '국제시장의 발자취' 책 속 시장의 역사를 구술한 대목이다. 1천만 관객을 동원한 동명의 영화로 잘 알려진 부산 '국제시장'은 6·25전쟁 때 피란민의 생계를 떠받치는 곳이었다. 영화 속 덕수(황정민) 가족이 함경남도 흥남 부두에서 피란 와 친척이 운영하는 국제시장의 '꽃분이네'를 찾아가 의탁하고 생계를 유지한 배경이 된 공간이기도 하다.
25일 부산시에 따르면 국제시장은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한 뒤 귀환 동포들이 일본에서 가져온 물건을 내다 파는 '일명 도떼기시장'으로 출발했다. 당시 '도떼기시장'은 내용물을 일일이 확인하지 않고 보따리째 거래를 하던 시장을 일컬었다. 해방 직후에는 현재의 국제시장 자리가 공터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이 미군의 폭격에 대비해 화재가 도시 전체로 확산하지 못하도록 일정 구역에 공터인 '소개지'를 조성했는데, 난민들이 공터인 이곳에서 물건을 팔기 시작하면서 점차 시장으로 발전했다. 국제시장은 1946년 처음 상인회가 결성될 때만 해도 200여개 점포가 있었다. 하지만 6·25전쟁으로 피란민이 급격하게 몰리면서 1950년 초에는 점포 수가 1천300개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졌다.
1953년 국제시장에서 대형 불이 났는데 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발표된 피해액은 14억300만원, 이재민이 1만명에 이른다. 14억300만원이라는 피해액은 1952년 한국 정부의 세출 결산액인 206억원의 7%에 달하는 규모다.
1951년 국제시장 주변 모습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국제시장의 발자취'라는 서적에는 "처음에는 피란민들이 미군용 통조림류, 모포, 군복, 군화 양담배 등 군수품을 팔아서 재미를 봤다"면서 "재미를 본 난민 상인은 1952년 초부터 오늘의 중구 대청동 백성사세탁소 옆 골목길에서부터 옛 동아극장까지 두세 갈래로 좌판을 깔고 전을 벌여 오늘의 국제시장 형태를 자리 잡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상인 중 70%는 피란민이었고, 이 가운데도 40%는 이북 출신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서적에는 "삶의 고난이 골수에 맺힌 그들(피란민)은 원주민들의 사고방식을 뛰어넘는 비상한 상술로 상권을 거머쥐게 되었고, 피란 1년도 못가 주객이 뒤바뀌었다"면서 "전쟁 물자, 양품 경기를 타고 한 밑천을 잡은 사람들 대부분은 어제까지 고생하던 피란민들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국제시장에는 미군 군수품이 엄청난 양으로 거래되자 1951년 5월 미 헌병이 대대적인 단속을 벌였다는 기록도 있다. 전국 최대 상권에서 이권을 차지하려고 주먹다짐, 칼부림, 폭력이 난무하기도 했고 사기꾼·날치기·들치기·소매치기, 가짜 기관원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상인들을 들볶아대 상인들은 보호장치 마련을 위해 부산지구 초대 헌병 대장을 상인회 조합장으로 추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은 "국제시장은 광복 이후와 6.25전쟁 격동기 피란민들에게 삶의 터전이 됐고,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생필품을 전국으로 공급해 주는 구심점이 된 곳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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