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의 삶 나의 불교 ] 이방의 삶 40년, 회향의 길목에서 / 김형희
아버지는 불교학자, 동생은 스님
우리 집안은 불교와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지닌 가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버지는 백성욱 박사와 함께 동국대학 인도철학과를 개설하였으며, 한국인 최초로 일본 와세다대학 인도철학과를 졸업한 능엄(能嚴) 김승권(金昇權) 거사이다. 그러나 교수 임용의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보성중고등학교 평교사로 생을 마감한 불운한 학자였다. 손위 언니와 남동생은 훗날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고, 여동생의 아들 또한 출가하였다. 이렇듯 우리 집안에는 현재 세 분의 스님이 있다.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은 자주 절을 찾아 법회에 참석하였으며 스님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여동생과 나는 경복궁 옆 법련사 청년회에서 활동했지만, 언니나 남동생처럼 스님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여동생은 평범한 결혼 생활을 원했고, 유목민적 성향이 강했던 나는 외국으로 자유롭게 살기를 갈망했다. 하지만 당시 젊은 여자가 홀로 외국에 나가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나의 고민에 해답을 준 것은 바로 책이었다. 많은 서적 중에서도 나의 운명을 정해 준 책은 카뮈의 《이방인》과 《화엄경》이었다.
젊은 시절 나는 문학과 철학, 여행에 관한 서적들을 탐독했다. 우연히 카뮈의 《이방인》을 접한 후 그의 작품을 원어로 읽고 싶어 프랑스어를 전공으로 택했다. 카뮈를 만난 이상, 내가 가야 할 곳은 프랑스였다. 부모님은 내가 결혼하여 평범하게 살기를 바라셨지만 나는 저항했다. 나에게 결혼이란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었기에 독립과 자유를 원했다. 경제적 자립을 위해 일자리를 구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 무렵 아버지는 《반야경》을 필사하고 계셨는데 나에게 《화엄경》을 필사할 것을 권하셨다. 마땅히 할 일이 없던 나는 《80권본 화엄경》을 필사했는데 그 공덕 덕분인지 좋은 직장에 취직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나는 더욱 많은 불교 서적을 탐독했다. 그 당시 내가 탐독했던 책은 탄허 스님이 번역한 《80권본 화엄경》과 이통현 장자의 《신화엄경론》을 합친 《신화엄경합론》(23권)이었다. 훗날 이 책들은 나의 박사학위 논문의 부분적인 주제가 되었다. 내친 김에 나는 동국대학원 불교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인 불교 공부를 시작했다. 김영태 교수님의 지도로 석사과정을 마쳤다. 논문의 주제는 부분적으로 전해지는 원효의 《화엄경찬소(華嚴經撰疏)》였다.
소르본으로 유학을 떠나다
법련사에서 프랑스 출신 혜행(慧行, 속명은 르노 누에) 스님과 미국 출신의 혜명(慧明, 속명은 로버트 버즈웰) 스님 등 외국인 스님들을 만났다. 향적 스님께서 법련사에 구산 스님의 외국인 제자 중 프랑스 스님이 왔다면서 소개해 주신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이를 계기로 미국 출신 현성 스님, 뉴질랜드 출신 함월 스님, 프랑스 비구니 성일 스님, 영국 비구니 수일 스님, 호주 비구니 지광 스님 등과도 교류하게 되었다. 나와 여동생은 고국을 떠나 수행하시는 이 스님들이 얼마나 빵이 그리울까 생각하며 빵 공양을 올리곤 했다.
이 가운데 혜행, 혜명 두 스님은 서양에서 손꼽히는 동양학자들로 중국어를 전공하여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에 능통했다. 혜행 스님은 일본 교토대학 정부 장학생으로 와서 공부하다 태국에서 출가했다. 혜명 스님도 태국에서 스님이 된 후 구산 스님 문하에서 공부하고자 한국을 찾은 분이었다. 두 스님은 후에 본국으로 돌아가 한국불교를 전파하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혜행 스님은 프랑스로 귀국해 구산 스님, 현호 스님과 함께 스위스 제네바에 불승사(佛乘寺, Buddhayāna-Vihāra)를 개원했고, 혜명 스님은 송광사에서 한국불교를 접하고 고려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을 연구하는 한국불교 학자가 되어 버클리대학 교수로서 활동했다.
서양 스님들은 본국으로 귀국하면 대부분 승려 생활을 그만두고 재가불자로 생활한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외국으로 나갈 방법을 찾고 있던 나는 이 두 스님에게 귀국하면 유학에 관한 정보를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한국인이 유학 비자를 얻기 위해서는 해당 나라의 정부 장학생이 되어야 했고, 정부 장학생이 되지 못해 자비로 유학을 떠날 경우에는 현지 교수의 초청장이 필요했다. 지금도 그러하듯이 영미권의 대학은 학비가 엄청나게 비쌌지만, 다행히 유럽의 대학은 학비가 거의 없었다. 나는 프랑스 유학을 위해 당시 소르본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한 호진 스님을 찾아가 자문을 구했다. 스님은 여자의 몸으로 타국 생활을 하며 공부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고생을 각오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자유로울 수가 있겠는가!
나는 비자를 얻기 위해 프랑스문화원에서 정보를 얻어 파리 문과대학(1대학부터 10대학까지 있다) 중에 파리 3대학과 4대학(소르본대학)의 교수 두 분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카뮈 문학에 나오는 인물들과 대승불교 보살들의 유사한 점들을 발견하고, 실존주의와 대승불교 두 사상을 비교 연구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고, 유학을 떠나기 위해 초청장이 필요하다고 간곡하게 호소했다. 다행히 논문의 주제가 흥미로웠던지, 두 교수께서 모두 답장과 대학 초청장을 보내주었다. 그때가 1982년, 나는 꿈에 그리던 유학생 비자를 얻어 한국을 떠날 수 있었다. 이는 자유로운 사유와 여행, 글쓰기를 갈망하던 나에게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프랑스에 도착한 나는 파리에 사는 친구의 도움으로 무사히 정착했다. 또한 박사과정을 끝내고 논문을 준비 중이던 법경 스님을 만나 도움을 얻기도 했다. 파리 3대학과 4대학을 왕래하며 청강했는데 두 대학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4대학(소르본)은 전통을 중시하는 근엄한 분위기였던 반면, 3대학은 학생들이 담배를 피우며 교수의 강의를 듣고 교수도 격의 없이 학생들에게 질문하며 토론하는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나는 곧 파리 생활에 익숙해졌고, 파리의 서점과 카페를 드나들면서 자유를 만끽했다. 라틴 구역(Quartier Latin)의 서점들, 센강 가에 늘어선 중고 서점에서 저렴하게 살 수 있는 서적들, 밖이 훤히 보이는 카페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 이것은 훗날 내 파리 생활의 노스탤지어가 되었다.
프랑스로 귀국, 재가불자로 돌아간 혜행 스님은 1981년 6월에 스위스 제네바에 불승사를 세우는 한편, 아시아 여행을 전문으로 하는 제네바 여행사에서 근무하며 동양 언어 학원도 개원했다. 동양 언어 학원에서는 아시아의 각종 언어(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티베트어, 몽골어, 태국어)를 강의했고, 때때로 아시아 문화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세미나를 열었다. 제네바는 유엔 기구가 많은 국제적인 도시로서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일하는 곳이기에, 그들에게 불교를 전파하기에 이상적인 도시였다.
스위스는 작은 나라이지만 3개 국어(불어, 독어, 이태리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중립 연방공화국으로서 불교와 인연이 깊다. 특히 티베트 망명 정부의 수장인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한 후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티베트 난민을 받아들인 국가다. 스님들을 포함한 티베트 난민들은 스위스 취리히 교외에 정착하여 최초로 티베트 사원을 개원했다. 달라이 라마는 유럽에 올 때마다 항상 이곳을 찾는다. 티베트 스님들이 유럽에 정착한 후, 주로 학문적 영역에 국한되었던 유럽 불교는 비로소 수행과 실천을 중시하는 종교로 변모했다. 유럽 곳곳에 불교사원이 세워지고 특히 젊은 세대들이 불교 수행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여기서의 불교 수행은 남방불교(小乘)의 위빠사나, 동아시아 불교(大乘)의 참선, 티베트불교(金剛乘)의 밀교 관법을 뜻한다.
자크 메 교수와 운명적 만남
1983년 10월, 본가가 파리에 있던 혜행 처사는 나를 제네바 불승사로 초대했다. 그는 내가 파리에 오기 전, 스위스 로잔대학교의 인도불교 중관학 대가인 자크 메(Jacques May) 교수와 친분을 맺고 나를 제자로 받아달라고 부탁해 둔 상태였다. 자크 메 교수는 나를 만나보겠다며 자택으로 초대했다. 혜행 처사는 나에게 이 기회에 중관학을 연구해 보라고 조언했다. 중관학은 나에게 매력 있는 학문이었다. 더욱이 중관학의 소의경전은 아버지가 매일 필사하시던 《반야경》이며, 우리가 매일 독송하는 《반야심경》 《금강경》이 아니던가.
나는 제네바 불승사에 오기 전에는 로잔이라는 도시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조차 몰랐으며 스위스라는 나라 자체에도 관심이 없었으나, 우연한 인연으로 이곳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이다. 로잔은 제네바에서 60km 떨어진 곳으로, 레만호를 따라 기차로 30~40분이면 닿는다. 바다처럼 넓은 호수를 바라보는 경사진 배산임수의 아름다운 도시이다. 자크 메 교수는 나의 학력을 물으며 석사논문은 무엇을 썼는지 궁금해했고, 직접 보고 싶다고 했다.
당시 스위스의 대학 제도는 유럽의 다른 대학들과 달랐다. 석사 과정 없이 대학 과정을 4~6년 동안 전공 한 과목, 부전공 두 과목을 섭렵한 후, 전공 논문이 통과되면 곧바로 박사 과정에 들어가게 했다. 즉 석사 과정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국 학생은 해당 대학에서 동등한 자격을 인정받아야 했다. 이런 이유로 나는 파리 4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다시 해야 했고, 3대학에서는 석사와 박사 과정 중간 단계인 DEA 과정을 거쳐야 했다. 따라서 만일 로잔대학에서 나의 학사와 석사 과정이 온전히 인정된다면 곧장 박사 과정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학사부터 다시 시작하거나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나의 학사, 석사 과정이 모두 인정되어 나는 로잔대학에서 자크 메 교수의 지도를 받는 박사 과정에 입학하게 되었다. 나는 2년 만에 파리대학에 작별을 고하고 로잔대학의 동양문화학과로 학적을 옮겼다.
혜행 처사 덕분에 제네바 불승사에서 신세를 지던 나는 다시 로잔으로 이사했다. 당시 불승사는 송광사에서 온 스님과 혜행 처사가 스위스, 프랑스 등 다국적 불자들과 단체를 만들어 선(禪)수행을 하고 있었다. 유럽에 오기 전 형제들과 송담(松潭) 스님을 친견하고 무주성(無住性)이라는 법명과 ‘이뭣꼬(是甚麽)’ 화두를 받은 인연이 있는 나도 자연스럽게 이 단체에서 참선을 하게 되었다. 제네바 불승사는 혜행 처사의 활동으로 명상에 관심을 가진 다국적 사람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스님, 친구, 지인들도 많이 오갔다. 불승사는 마치 옛날 실크로드 시대,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여행자 사원처럼 항상 북적거렸다. 이러한 대중들 가운데서도 십 년 이상의 선수행을 한 몇 명의 고수 보살들이 있어, 이들을 주축으로 불승사는 순조롭게 운영되었다. 불승사에 온 한국 스님들은 유럽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운 탓인지 얼마 동안 머물다 곧 떠나곤 했다. 혜행 처사가 가이드로 여행을 떠나 부재 시에는 본의 아니게 내가 신도들을 위해 입승 노릇을 했다. 이때 하게 된 선수행은 게으른 성향의 나를 바꾸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나는 불승사에서 참선 수행을 하며 제네바와 로잔을 왕래했다. 그리고 여러 다른 불교센터에서 수행하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 만나 교류하고, 대학에서는 인도불교학을 청강하며 논문을 준비했다. 그러는 사이 많은 선지식을 만나고 수행하면서 진정한 불자가 되어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시아와는 다른 유럽의 대학에서 배우는 불교는 나에게 새로운 불교의 발견이었다. 강의와 함께 산스끄리뜨어를 배우고, 불교 서적을 깊이 있게 읽기 위해 산스끄리뜨어와 불어, 영어로 된 서적들을 많이 읽었다. 가능한 한 암기하고 중요한 부분은 노트에 옮기면서 논문을 준비했다. 불어로 된 서적 중, 라 발레 푸생의 《아비달마구사론》, 라모트의 《대지도론》, 은사인 자크 메의 《뿌라산나빠다》 등은 불교학 방법론에 대해 새로운 시야를 열어 준 책이었다. 나는 경론의 문장을 한문, 산스끄리뜨어, 불어, 영어로 대조하면서 그 의미가 언어에 따라 어떻게 달리 표현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용수의 《십주비바사론》을 중심으로 보살도(菩薩道)에 대한 연구를 논문 주제로 택했다. 지도교수인 자크 메 교수는 1985년 학기부터 5년 동안 용수의 《중론송》을 강의했고 나는 이를 열심히 청강했다. 이 강의는 나에게 정신적인 혁명을 일으켰으며 내가 원하던 자유가 무엇인지 해답을 주었다. 중관학의 공(空) 철학은 공중에 매달린 것 같은 아찔한 현기증을 유발하면서도, 동시에 공중을 비상하는 가루다(금시조)와 같은 자유로움에서 오는 환희심을 불러일으켰다.
어느덧 7, 8년의 세월이 흘렀다. 유럽의 자유로운 생활에 익숙해진 나는 하고 싶은 공부도 충분히 했기에 귀국할 생각을 했다. 유럽 대학의 박사 과정은 빠르면 5년, 길게는 10년 내지 15년에 걸쳐 공부할 수 있다. 1989년, 나는 지도교수에게 학위를 얻고 귀국해야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사정을 말했다. 그러자 교수는 뜬금없이, 만일 학위를 받지 못하고 귀국하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나는 비구니가 된 언니가 생각나서 즉흥적으로 ‘아마도 비구니가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교수는 웃으며 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내 논문 주제인 용수의 《십주비바사론》은 이미 일본에 본부를 둔 불교 경전 번역재단에서 영어로 번역 중이며, 용수는 유럽, 미국에서 충분히 연구되었으니 미개척 분야인 《화엄경》을 주제로 논문을 쓰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자크 메 교수는 7년 동안 일본에 체류한 경험이 있어 일본과 한국의 불교에 밝았고, 한국에서 《화엄경》 연구가 활발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특히 내 석사 논문이 《화엄경》에 관한 것임을 알고 내가 불어로 《화엄경》에 대한 논문을 쓴다면 서구 불교학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스위스 정부 장학금도 주선해 주겠다고 했다. 당시 불어권에서 《화엄경》 연구자는 매우 드물었다.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최상의 조건이었다. 1990년부터 받기 시작한 그 장학금은 당시 한국의 교수 월급보다도 많았다. 나는 고학생에서 형편 넉넉한 금수저 학생이 되어 내가 좋아하는 공부를 하며 부모님에게도 충분한 용돈을 드릴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강의 외에는 주로 대학 식당과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화엄경》과 법장 스님의 《탐현기(探玄記)》, 이통현 장자의 《신화엄경론》에서 보살도에 관련된 부분을 발췌하여 불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매진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 했던가. 1992년 마지막 학기 도중 자크 메 교수에게 갑자기 병마가 찾아왔다. 그는 《법화경》 강의를 마지막으로 6월에 학기가 끝나면 은퇴하고, 명예교수로서 내 논문 지도에 집중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은퇴 두 달 전 4월에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것이다. 마침 그때 화엄 자료 수집차 한국에 있던 나는 갑작스러운 소식을 듣고 스위스로 돌아갔다. 다행히도 그는 재활병원에서 빠른 회복을 보였다. 주치의가 진찰 중에 심근경색이 왔기 때문에 응급치료를 할 수 있었다고 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심장병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우선 담배를 완전히 끊고 식이요법이 필수적이었다. 그는 지독한 애연가였지만 과감하게 담배를 끊었다. 하지만 식이요법은 누군가가 도와주어야 했다. 그때까지 독신이었던 그는 매일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해 오던 터였다. 식이요법을 해 줄 근처의 식당을 찾아보았으나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마침 교수의 아파트와 도보로 5분 정도 걸리는 가까운 곳에 살고 있던 내가 점심 한 끼를 우리 집에서 식이요법으로 제공하겠다고 제의했다. 교수는 반갑게 허락했고, 식이요법 리스트를 나에게 전달했다. 그렇게 나의 아파트에서 집밥을 먹기 시작한 덕분에 교수의 건강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비혼주의자들의 결혼
은퇴 후 어느 날, 자크 메 교수는 모든 여행을 나와 함께하고 싶다고 했다. 여행이 취미였던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나는 교수의 아파트로 이사를 한 뒤, 한국의 부모님께 허락을 구했다. 부친은 조용히 살라며 격려해 주셨다. 나는 송담 스님께도 사진으로 교수를 소개하고 우리의 결혼을 알리면서 교수의 불명(佛名)과 화두를 부탁드렸다. 스님은 “무주성이 한국에 와서 교수가 될 줄 알았는데 인연이 따로 있었군.” 하며 웃으셨다. 그리고 자크 메 교수를 세계적인 석학이라고 하시면서 ‘본공(本空)’이라는 불명과 화두, 그리고 직접 그린 달마도와 게송을 선물로 주셨다. 이렇게 해서 비혼주의자였던 우리는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유럽에서는 결혼식을 두 번 한다. 시청에서 시장의 주례로 하는 법적 결혼식과 성당이나 교회에서 하는 종교 예식이다. 식이 끝난 후에는 손님들을 식사에 초대한다. 무종교자는 법적 결혼식이 끝난 후 식사에 초대하든가 안 하든가는 자유다. 우리는 시청에서 법적 결혼식을 마친 후, 좋은 날을 택하여 친지, 친구,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즐기며 우리의 새로운 시작을 자축했다.
우리는 독서, 여행, 글쓰기라는 취미가 비슷했다. 같은 분야의 학문을 하기 때문인지 우리의 생활은 독립적이면서 서로를 돕는 관계로 이어졌다. 그는 나의 논문 주제인 화엄학의 경론을 숙지하기 위해 한문을 열심히 공부했다. 특히 이통현 장자의 사상에 매료되었고, 이통현 장자를 신비로운 중관학자라고 평했다. 나는 중관학과 《반야경》에 대한 열정이 있어 내 박사 논문을 잠시 제쳐 두고, 그의 중관학 강의를 한글로 번역하기로 결심, 5년에 걸쳐 완성했다. 결국 우리는 전공을 바꾸어 공부한 셈이 되었다.
그 성과는 서울의 경서원에서 출판되었다. 경서원의 이규택 거사는 ‘중론’의 중요성을 알아보고 1천 부를 인쇄했다. 한글 번역판인 이 책의 제목을 나는 ‘중관학 개론’으로 제의했으나 이규택 거사는 김성철 교수와 상의한 끝에 《중관학 연구(中觀學 硏究)》로 결정해 출판했다. 이 책은 2000년과 2006년 두 번에 걸쳐 간행되었는데, 내 생애에서 큰 역할을 한 듯해 무척 뿌듯한 순간이었다. 중관학과 반야 사상에 대한 이해는 공중누각 같은 화엄 사상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반야경》이 뿌리라면 《화엄경》은 꽃이다. 보이지 않는 뿌리를 알면 보이는 줄기, 잎, 꽃, 열매는 자연히 알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계속해서 경서원을 통해 반야 사상에 관한 서적, 《반야경의 출세간법》(2006), 《반야경의 십팔공법(十八空法)》(2008)을 출판했다. 철학적으로 다소 건조하고 지루할 수 있는 이 책들을 읽을 독자가 많지 않으리라는 점은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단 몇 명이라도 이 책을 통해 지적 공유를 하고 발보리심(發菩提心)할 수 있다면 그 노력이 헛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한편 자크 메는 《화엄경》을 공부하면서 나의 엉성한 프랑스어 번역을 마치 언어의 마술사처럼 세련되고 명료한 문장으로 바꾸어 놓았다. 나의 화엄학에 관한 논문에 대해 말하자면, 내가 거친 광석을 캐내면 그는 그것을 제련하고 미세하게 세공하는 연금술사 역할을 해주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공동 작업은 2010년에 결실을 보았고, 나는 드디어 박사 논문 공개 심사를 통과해 학위를 받았다. 논문 제목은 〈화엄경의 보살도(La carrière du Bodhisattva dans l’Avataṃsaka-sūtra)〉이며, 이 논문은 2013년에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유럽에서는 전통적으로 친구, 지인들을 집으로 초대한다. 우리는 은둔적인 생활을 좋아하지만 인간적인 친분을 위해 자주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은 일종의 동양학 동아리가 되어 아시아 문화에 대해 심도 있게 토론하는 모임이 되었다. 또한 인도, 일본, 한국에서도 많은 지인이 우리를 방문했다. 나는 거실에 인도 불상을 모셔 놓고 훗날 선원을 설립하기 원했다. 우리는 그 선원의 이름을 ‘니르바나 비하라(Nirvāṇa Vihāra, 寂明庵)’라고 불렀다. 불교 공부 외에도 여행과 문학, 음악 등 문화 생활을 함께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여행은 그가 일곱 살 때부터 꿈꾸었다는 칠레의 마젤란 해협을 거쳐 남극까지 갔던 여정이다. 또 내가 사춘기 때 집시에 대한 로망이 있어 방문한 집시촌이 있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그라나다, 알메리아, 론다 등도 기억에 남는 여행지였다.
이별은 언제나 슬프다
그렇게 세월은 빠르게 흘러, 우리가 함께 생활한 25년, 사반세기가 꿈처럼 지나갔다. 그는 2018년 어느 봄날 아침, 침실에서 조용히 이 세상을 떠났다. 그가 반평생을 지내며 항상 좋아했던 고풍스러운 높은 천장 아래로 레만호가 한눈에 보이는 꼭대기 층 아파트에서였다. 나는 곁에서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홀로 장례식을 준비해야만 했다. 의사와 장의사를 부르고 신문사에 부고를 냈으며, 친척과 지인들에게 급히 연락을 취했다. 장의사는 그의 시신을 시내의 작은 샤펠(Chapelle, 예배당)로 운구했다. 검은 양복을 입은 그가 관 속에서 얌전히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 채 누워 있었다. 관 주위는 꽃으로 장식되었다. 나는 《금강반야바라밀경》의 글자로 그려진 ‘탑다라니’를 관에 넣고 《반야심경》을 낭송했다. 곁에 있던 조카딸이 눈물을 흘렸다. 관은 지인들의 마지막 인사를 위해 며칠 동안 샤펠에 머물렀다.
장례식은 로잔시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시립 묘지의 장례식장에서 치러졌다. 예식은 그의 제자인 스위스 현지 스님에 의해 불교식으로 진행되었다. 제단(祭壇) 뒤에는 화장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유럽의 장례식에서는 음악을 들려주는데, 조문객을 기다리면서 식이 시작되기 전에 한 번, 식이 끝난 후 한 번 들려준다. 이 음악은 그가 죽기 몇 년 전 미리 선택해 나에게 부탁해둔 것이었다. 첫 번째 음악은 조문객이 그를 추억하면서 슬픔에 젖을 수 있도록 슈베르트의 현악 사중주를 3분간 들려달라고 했고, 식이 끝난 후 두 번째 음악은 그를 즐겁게 보내주기 위해 모짜르트의 밝고 명랑한 콘체르트 25번을 5분간 들려달라고 했었다. 장례식은 후계자이자 제자인 교수의 추모사로 시작되었다. 제자인 스위스 스님과 나를 포함한 조문객들은 그에게 향(香) 공양을 올렸다. 스위스 스님은 일본식 발음으로 《반야심경》을, 스리랑카 스님은 빨리어로 경전을 낭송했다. 식이 끝나고 두 번째 음악이 흐를 때 조문객들은 가족 앞을 지나면서 목례했다. 장례식이 끝난 다음 나는 조문객들을 우리가 결혼 파티를 했던 호텔로 초대했다. 호텔의 이름은 평화(Paix)였다. 그렇게 장례식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마지막으로 그와 내가 이별하는 순간이 왔다. 그의 유골을 레만호에 뿌리는 날이었다. 로잔 옆의 오래된 작은 포도 마을인 뤼트리(Lutry) 부둣가. 젊은 장의사가 황금색 보자기에 싸인 그의 유골함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여섯 명의 우리 일행은 통통배를 타고 호수 중앙으로 나아갔다. 계단식으로 세워진 로잔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배가 호수 가운데에 다다르자, 스위스 스님이 불경을 낭송하기 시작했다. 뱃사공은 나에게 재를 뿌릴 장소를 일러 달라고 했다. 내가 우리 아파트가 보이는 곳을 가리키자 배는 그곳으로 향했고, 엔진을 껐다. 나는 멀리 아파트를 바라보며 스님이 낭송하는 불경을 들으면서 뼛가루를 호수에 뿌렸다.
그날, 호수의 봄날은 부드러웠으며 하늘에서는 천녀들의 옷 색깔 같은 하얀 구름이 태양과 함께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내생으로 향하는 여행을 떠났으며, 생활의 동반자, 지적 동반자로서 우리가 함께한 금생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작별은 역시 슬프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에 몰두하는 것이다. 그는 살아생전에 당신이 죽으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나는 아마도 스위스와 한국을 오가는 철새처럼 살 것이라고 대답했었다. 덧붙여 참선 센터인 적명암(寂明庵)을 세우고, 《중관학 연구》의 원본인 불어판을 출판하겠다고 했다. 나는 이 일을 그가 살아 있을 때 완성하길 바랐으나 그는 거절하면서 당신이 떠난 후에 하라고 했다.
나는 그의 49재를 한국에서 지내고, 100재는 스위스 스님과 친구, 제자들과 함께 스위스에서 지냈다. 그리고 기념 사업으로 참선센터 니르바나 비하라(Nirvana Vihara, 적명암, 결국 寂明禪院으로 명명했다) 창설을 제안하고 도와줄 후원자를 찾았다. 다행히 명상을 수행하는 옛 제자 한 사람이 후원자로 나서 주었다. 우리는 선원으로 적당한 샬레(Chalet, 알프스 산악 지방의 가옥)를 물색하기 위해 알프스 지방을 샅샅이 뒤졌다. 은사의 영혼이 도왔는지 그가 태어난 에글(Aigle)시에서 산악기차를 타고 올라가는 해발 1,400미터의 산마을 레젱(Leysin)에서 돌부처 같은 석상이 서 있는 한 샬레를 발견했다. 우리는 단번에 그곳을 선택했다. 이 샬레는 두 동의 아파트로 되어 있어서 한 동은 살림채로, 한 동은 도서관과 선방을 갖춘 선원으로 꾸몄다. 장소가 결정되자, 로잔의 아파트 매매와 이사, 책과 가구 정리, 등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2019년, 은사가 떠난 지 일 년 만에 ‘적명선원협회(Association de Nirvana-Vihara)’라는 사단법인을 만들어 선원을 개원하고 나는 로잔을 떠났다. 그 해 동안거에는 조카인 지광(智光) 스님과 그의 도반, 그리고 스위스 불자들과 함께 참선 수행에 정진했다. 불행히도 2020년부터 3년 동안 지속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하여 선원 활동이 활발하지는 못했지만, 내게는 특별한 경험의 시간이기도 했다.
사람의 왕래가 금지된 기간, 나는 본의 아니게 해발 1,400미터 고지에 감금된 셈이었다. 그러나 이는 감금이 아니라 3,000미터 높이의 설산과 침묵하며 함께하는 고독한 수행이자 자유였다. 그러한 시간이 찾아온 것은 복된 행운이었고, 덕분에 깊은 정신적 평안을 얻었다.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동안거에는 지광 스님과 그의 도반이 적명선원에 와서 불자들과 함께 보냈다. 나는 지광 스님과 함께 선원을 운영하고자 했으나 그는 유럽 생활이 체질에 맞지 않는다면서 거절했다. 외국 생활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며, 모든 일에는 인연이 맞아야 함을 깨달았다. 오히려 그는 내가 고희를 맞았으니 귀국하여 가족들과 함께 지낼 것을 제안했다. 나는 숙고한 끝에 40년의 유럽 생활을 접고 귀국하기로 했다. 적명선원은 친구와 제자들에게 인계하고, 아울러 은사의 《중관학 연구》 불어판 출판을 부탁했다.
나는 2022년, 한국으로 돌아왔고, 영민한 두 제자의 노력으로 《중관학 연구》의 불어판이 2024년에 출판되었다. 불어 제목은 Les vers didactiques fondamentaux sur la doctrine de la voie du milieu(中道 敎理에 관한 근본 게송)이다. 두 가지 큰 불사를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와준 동양학 동아리의 스위스 친구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유럽에서 보낸 세월이 한국에서의 시간보다 더 길었던 탓에 귀국 후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그렇지만 삶이란 목숨이 다할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며, 무엇인가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내가 택한 일은 글을 쓰는 것이다. 귀국 후 나는 2019년에 출판했던 불어판 《불교심리학(Psycho logie-bouddhique)》을 《윤회의 세계와 해탈》(2023)로 제목을 바꾸어 우리출판사에서 펴냈다. 또한 은사의 5주기(2023)를 맞이하여 그가 번역한 아리야데바와 짠드라끼르띠의 《사백론(四百論)》 중 〈파상품(破常品)〉을 한글로 번역하고, 불어와 한글을 함께 엮어 법보시로 출판했다. 공부하는 것이 습관인지라 아직도 여전히 책을 붙들고 있지만, 조만간 나는 새로운 ‘대여행’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날을 담담히 기다려 본다. ■
김형희 kimmujusong@gmail.com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 졸업.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석사, 스위스 로잔 문과대학 동양언어문화학과 박사. 옮긴 책으로 자크 메 지음 《중관학 연구: 나가르주나의 중론송에 대한 강의》가 있고, 역주서로 《반야경의 십팔공법》이 있다. 저서로 《반야경의 출세간법》 《윤회의 세계와 해탈》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