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에 이민을 온 일본인들은 1910년 17만명에서 1930년에는 50만명 그리고 1935년에는 60만명으로 증가하는데 당시 조선의 도시인구의 비율과 숫자는 지금과 비교했을 때 1/20도 안 되었다.
서울이 44만명, 부산이 18만, 평양이 18만, 대구 10만 7천명 인천이 8만3천,목포 6만, 원산6만, 개성5만6천, 청진 5만 6천, 진남포 5만, 함흥 5만7천 ,신의주 5만 8천, 광주5만, 군산 4만2천, 나진 3만1천등 주요도시의 인구를 보면 서울을 빼면 지금의 중소도시 인구로 도시규모는 크지 않다.
주목할 것은 신의주 옆의 의주는 1만명 정도이며 전통적으로 조선의 지방 중심이었던 공주나 청주 춘천, 진주, 해주의 인구를 보면 오늘날 읍인구 수준이며 이는 산업화와 도시화가 느리고 전통도시 보다는 무역항이나 군항 (나진3만1천, 진해 2만명, ) 철도교통의 요지 그리고 국경도시(웅기, 회령)나 공업이 발달한 곳의 성장(겸이포)이 두드러 진다고 보여진다.
도시화에 많은 영향을 준 이들은 일본에서 이민을 온 사람들인데 말 그대로 식민(사람들을 이식)정책을 추진한 결과이며 이들을 위한 행정관청과 학교, 편의시설이 만들어 진다.
때문에 개항장이나 철도분기점 (대전 3만9천)이나 종착점이자 국경(신의주 5만8천)도시의 성장은 기존 도시였던 공주나 의주에 대비가 된다.
일본인들이 건너온 지역 또한 일본의 큐슈나 관서지역인데 조선과의 거리가 가까운 점도 있고 바다의 교통이 일본의 관동지방에 비해 수월하고 외부로 나가려는 요인이 더 많고 과거 개항을 주도한 이들의 출신 그리고 멀리는 임진왜란 시기나 그전 왜구들이 중국이나 한반도에 유입된 사례와도 비슷한 유형이 아닐까? 보여진다.
60만명의 일본인이 우리나라에 이주를 하고 이에 따른 변화는 우리생활과 문화에 많은 영향과 다양한 변화를 주었고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크게 하고 이는 근대화라는 듣기 좋고 보기 좋은 이름 보다 준비가 덜 된 이농현상과 함께 만주나 일본으로의 이민을 가속화 시키고 일부는 성공을 보장하기도 하겠지만 교육기회의 부족과 의사소통 능력의 부족( 서울과 일부지역을 제외하고 일본어의 보급이 낮아 일본으로 이민을 갔을 경우 어려움이 있었고 만주로 갔을 경우 중국어 소통의 어려워 집단으로 거주 )으로 하층 노동자로 고통을 받고 차별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여러가지 이유(분단과 전쟁 그리고 이념대립등)로 다시 고향으로 못 돌아오는 현상이 발생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