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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머니가 돌아가신지도 49일째이다.
아내는 조석으로 상식을 올린다.
어디에서 들었는지 49일재를 지내느냐고 내게 물었을 때 나는 애매하게 말했다.
'글쎄 지내게 생겼으면 지내고, 안 지내게 생겼으면 안 지내고. 꼭 지내야 한다는 명분도 없다.
내가 불자 신자가 아니므로 특정 종교에서 지내는 49일재는 나한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일전에도, 어제에도 친인척들이 아내와 내게 은근슬쩍 전화를 걸어서 어머니의 49일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문의했다.
나는 49재를 안 지내고, 제사도 내가 알아서 한다고 대답했다. 그들로서는 나의 이런 불효막심한 처사에 속으로 비난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려면 어떠랴 싶다. 내 어머니에 관한 한, 아들이 혼자인 내가 알아서 처리하면 그뿐이다. 삶과 죽음이 동일하다고 보는 나로서는 자손들에게 겁을 주는 사이비 종교관들이 정말로 싫다. '살아 있을 때 잘 하지, 왜 죽은 뒤에서야 효성스럽다'는 듯이 시끌벅적하게 제사를 지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그런 제례의 법도를 나는 모르겠고, 설사 안다고 해서 지킬 의향은 없었다.
49재를 앞두고 친척과 인척들이 49제를 지내야 한다는 뜻으로 내게 말했으며, 어머니가 한 집안의 연장자인 어른이었기에 자신들이 49일 제사에 참가하겠다는 뜻을 은근히 내비치기도 했다. 천주교 신자인 아내는 며느리로서 어떻게 해야 될지 갈등을 겪으면서 내게 은근히 걱정을 했다.
나는 결론부터 내린다. 형식과 허례에 물든, 지나친 제례가 싫다. 또 겁이 난다. 혼백과 영이 있다면서 사후세계, 극락세계와 지옥, 연옥 등을 들먹거리면서 자손들을 겁 주다가도 자기네들이 무슨 처방을 하면 어떤 저주로부터 면제된다는 듯한 종교관과 제례의식들을 나는 극도로 싫어한다. 겁 주고 얼러주는 듯한 이중행태를 동시에 엿보기 때문이다. 나는 전통제례에 무의식적으로 길들여졌다고는 하나 49일째 되는 날에 제사를 지낸다는 소리는 아직 들어보지 않았다. 그런데도 몇몇은 그날 제사지내야 한다는 등의 말을 내게 건넸다.
1950년대를 살았던 내 어렷을 적의 경험이다. 시골집 똥수칸은 안마당과 바깥마당에 있었다. 그곳에서 똥을 누려면 늘 걱정이었다. 똥수칸에서 머리가 없는 귀신의 손이 불쑥 나와서 내 불알을 잡아당긴다는 말이 떠올랐다. 똥수칸에서는 늘 걱정과 무서움으로 오들거리며 떨어야 했다.
무서운 것은 또 있었다. 내 시골집에서 불과 100m도 안 떨어진 담부리(잡다한 돌맹이를 내다버리는 곳) 모퉁이에는 무덤이 두 개나 있는데 여기에 새알귀신이 나온다고 했다. 비 내리는 날이거나 밤중에 그곳을 지나려면 소름이 오싹오싹 끼쳐들었다. 눈 딱 감고는 뜀박질로 해서 그 무덤가를 얼른 벗어나야 했다.
먼 훗날 나는 그 담부리 땅을 샀으며 조 씨네 무덤들은 뒷산으로 이전해 갔다. 지금에는 그 담부리는 마을안길로 확장했다. 내 아이들은 그곳에 무덤이 있었으며, 새알귀신이 나온다는 괴기스러운 사실을 전혀 모른다. 내가 간담이 서늘한 야담을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며, 어린 시절의 요괴한 기억은 나 혼자만이 간직하다가 내가 죽으면 자연히 없어질 게다.
또 있었다. 시골 초등학교 다닐 때 행길 옆에는 움막이 있었다. 상여를 보관하는 집이었다. 그곳을 지나가려면 은근히 겁이 났다. 날씨가 궂은 날에는 귀신이 나와서 사람들을 놀래킬 것 같은 망상으로 어린 가슴은 떨어야 했다.
나는 기억한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인 50여 년 전의 일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누런 굴건을 머리에 쓰고 누런 삼베옷을 입었던, 이상한 복장을 한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어머니와 숱한 친척과 인척들을 기억한다. 또 중학교 때 할아버지의 장례식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울긋불긋한 만장이 안사랑방을 가득 매워서 가뜩이나 기괴했던 기억이 난다.
내 어머니는 시골에서, 며느리로서 시조부, 시모, 시부, 남편의 제사를 혼자서 지냈다. 1년 뒤에 지내는 소상과 대상을 치루자면 꼬박 2년 동안 조석으로 상식을 올리고, 보름과 초하루 삭망마다 닭을 잡아서 제사를 지냈다. 안사랑방에 혼백상자를 올려놓고 상식 올리고 절을 하던 어머니였다. 혼자서 상식을 올리려면 무서움이 왜 없었겠는가? 나는 초상과 소상, 대상 때의 곡소리에는 지금도 전률한다.
나는 기억한다. 내 젊은 시절에 동네에는 무당들이 있었다. 쌍둥이 동생이었던 인환이가 22살에 뱀 물려 죽은 뒤 원한 서린 영혼을 달래준다면서 무당이 자주 들락거렸다. 밤새토록 전율할 것 같은 푸닥거리가 섬뜻했다. 그 이후로도 나는 무당의 푸닥거리를 종종 보았으며, 동네 안에 있는 무당집의 지붕 너머로 요상한 헝겁들이 바람에 펄럭이는 것을 늘 보았다. 내가 그당시 왜그리 겁을 냈는지 그때나 지금이나 나한테는 그 요기스러운, 사악한 느낌은 변함이 없었다.
지난해 어떤 전원주택을 방문했다. 산속의 집 이층에 설치한 불당에서 천도제를 지내고 있었다. 스님 몇 명이 바라를 치고, 목탁 두들기며 독송하고, 상제들과 친인척의 사람들이 앉아서 49일재를 지내고 있었다. 평소에도 스님 복장을 한 지인이기에 그냥 방문 차 무심코 들렀는데 그날 마침 천도재를 지내고 있었다. 지인의 이모이며, 내 동네 사람의 이모되는 그 분이 망인이란다.
붉은 가사를 입은 스님들이 북 치고, 괭과리 두들기고, 소 불고, 바라 치며, 춤 추는 장면이 참으로 나한테 경이롭고 괴시스럽고 두렵기도 했다. 고개가 절로 흔들어지는 현상이었다. 꿈에 이런 현상이 재현될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다행히도 내 꿈에 천도재를 지내는 악몽은 아직은 꾸지 않았다.
내 조상들의 제사를 숱하게 지냈던 종가집 자부였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의 나의 처신은?
내가 예순여덟 살이어서 무서움증이 완전히 가셨을까? 전혀 아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도 무서움은 그다지 가시지 않았다. 무서움증이란 인간이 고의적으로 만든 어떤 규칙과 제례에서 자연발생하는 자기착각, 자기기망으로 본다. 그런 해괴하고 요상한 짓거리를 보지도 듣지도 않으면, 사전에 교육이 되지 않으면 무서움증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내 경험과 철학이었다.
얼마 전 나는 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냥 형식적으로 제사를 지냈다. 정말로 기형적인 제사였다. 내가 우리말로 축문을 작성해서 읽거나 사촌동생이 읽도록 부탁했다. 어린 아이들도 이해하는 우리말로 쉽도록 제문을 지어서 제사를 지냈다.
아버지 장례식 때에는 나는 두건 쓰고, 무릎에 행전 치고, 죽장 집고서 곡소리를 냈는데도 이번 어머니 장례식 때에는 허례의 복장을 전혀 하지도 않았거니와 곡소리를 전혀 내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적 들었던 그 곡소리가 소름이 끼치도록 짜증이 났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서, 이번 어머니 영정 앞에서는 나는 일체 가식적인 울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어제 나는 아내와 함께 서울에 다시 올라 왔다.
인터넷으로 49재를 검색했더니만 왜그리 겁을 주는,요사스러운 용어들이 많은지 모르겠다. 또 불교인들은 귀신, 영과 혼의 내력을 어찌그리 소상하게 잘도 아는지를 모르겠다. 49재를 지내는데 제수비용이 적게는 몇십 만 원에서 많게는 몇백 만 원어치의 제물을 준비해야 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자손들에게 효성과 겁을 동시에 주어서 절에서 제사(천도재)를 지내도록 유도하고, 재물을 갈취하려는 고약한 짓거리로 해석되기도 했다. 좋은 의미가 곡해되는 현실이기도 하다.
천주교는 어떠한가? 어떤 천주교에서는 49일제가 아닌 100일제를 지내야 한다는 글을 읽었다.
우리나라는 불교, 천주교, 기독교, 천도교, 원불교, 유교 등과 종교와 또한 기타 미신과 잡신, 토속민간 신앙들이 숱하게 많다. 지나치게 표현하자면 일종의 종교국가로도 여겨진다. 비신자인 일반사람조차 알게 모르게 이들의 삶에 종교관에 짙게 물들어 있다고 본다.
나는 나는 가난한 집안의 종가집 아들이었다. 어렷을 적부터 그 숱한 제사들을 직접 보았으나 나이들수록 이런 것들이 사라져야 할 못된 유산으로 여겨졌다. 심약한 나로서는 공상소설과 같은 귀신, 조상신과 악령들의 이야기에는 이제도 경기가 날만큼 신물이 났다.
내 어머니는 종교가 없이 살았다가 죽어서는 그냥 땅 속에 묻혔다. 그것으로써 어머니의 모든 삶은 끝난 것이지, 어떻게 해서 어머니의 영혼이 되살아서 저 너머의 세상에서 머문다는 상상은 전혀 할 수가 없었다. 허망한 공상가, 몽환자로 추락한 이상심리로, 허구로 지어낸 망상에 불과하다. 내 어머니가 죽은 뒤에는 귀신(조상신 등)이 되었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든다. 한번 죽으면 그것으로서 끝나는 일이지 어떻게 영혼이 되살아난다는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나한테는 단 1%도 안 된다.
내 어머니의 시신은 아버지의 묘에 합장을 했다. 삼십여 년 전인 1982년 돌아가신 아버지의 무덤에는 그 흔해빠진 石物이 한 점도 없다. 내 할아버지, 작은할아버지, 내 아버지와 숙부, 외숙부, 이모네 등 숱하게 친척과 인척들과 향리의 사람들이 돌에 관련된 사업을 했기에 나는 아주 어렷을적부터 돌이 무엇인지를 보았다. 돌로 된 석물을 산의 무덤에서 보노라면 친밀감이 든다는 느낌보다는 귀신들이 구렁이처럼 얼키설키었다는 무서움증이 먼저 들었다. 따라서 삼십 여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소에는 석물 하나도 내가 설치하지 않았다. 선대 조상의 산소마다 조부, 아버지, 숙부, 종조부들은 조상님께 다 석물로 치장했는데 내가 관리하는 아버지의 산소만 석물이 없다. 앞으로도 내 부모에 대한 석물 치장은 극히 제한될 것이다. 종손인 내가 죽은 뒤 그게 누구의 무덤인가를 확인이 가능하도록 아버지의 이름과 어머니의 이름을 한글로 새긴 작은 표지석(와비) 하나만을 세울 것이다. 무덤에 호화스러운 석물로 장식하는 괴기스러운 짓거리는 하지 않을 게다.
내가 사는 충남 보령지방에는 전국에서 알아주는 채석지역과 이를 가공하는 석물단지가 즐비하다. 전국 최고의 질을 자랑하는 보령오석이 생산되는 지역이기에 오래 전부터 석공예 가공기술이 발달되었고, 지금도 숱한 석물공장에서 가공한 장례 석물과 석공예품들이 곳곳에 대량으로 진열되어 있다. 국내산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중국에서 대량수입한 조악스러운 석물까지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는 팔리기를 기다린다. 나는 이곳을 지날 때마다 장례 석물이 주는 무서움, 두려움, 혐오스러운 감정이 먼저 일어난다.
제례석물이 아닌 예술품 그 자체로서의 인체와 사물의 형상을 지닌 석공예품은 그런대로 예술적 존재가치를 인정하기는 한다.
오늘은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49일째 되는 날이다.
나한테는 그냥 평범한 일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무심한 아들을 두었다고 어머니가 나를 탓하지는 않을 게다. 어머니는 젊은날 시할아버지, 시부모, 남편의 삼년상을 꼬박 혼자서 지내야 했던 어려움을 알고 있기에 , 당신이 죽으면 '사흘째 되는 날 탈상하라'고 내게 일렀다. 그러나 나는 탈상 그 자체도 하지 않았다. 탈상이라는 용어 자체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도 나에게는 섬뜩했다. 어쩌면 삼우제가 끝난 날에 탈상햇을 것 같다. 장례식장에서 검정상복을 임대해서 입었던 나는 삼우제가 끝난 뒤 상복을 벗어서 장례식장에 다시 되돌려 주었기에 자연스럽게 탈상을 했다는 뜻이다.
지금껏 아내가 조석으로 올리는 상식을 앞으로는 언제부터 그만 두어야 할 지는 내가 판단해서 정할 게다. 아무 때나 그만 두면 된다. 요상한 격식, 허례허식들을 혐오하는 나로서는 내가 편한 시간에 편리한 방편으로 날짜를 정해서 어머니에 대한 상식을 그만 올리도록 해야겠다. 땅 속에 묻힌 내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안다면, '아직도 상식 올리느냐'며 나를 혼구녕 냈을 게다
아내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조석으로 상식을 올린다. 마치 살아 계신 것처럼. 그러나 이것도 조만간 그만 두도록 내가 말해야겠다. 나도 아내도 어머니에 대한 예의도 이쯤에서 접고는 일상으로 돌아가야겠다. 천주교 신자이면서도 시어머니의 상식을 올리고, 자랑자랑 이야기를 꺼내는 아내에게 나는 고맙게 생각한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대하는 고부간의 정이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여긴다.
무서움과 두려움을 안겨주는 불교식의 49일재, 49일 제사를 나는 전혀 지내지 않았다. 내가 불교 신자도 아니고, 그 어떤 종교인도 아니고, 또 우리의 옛 전통제례이라는 유교사상에 심취한 것도 아니다. 미신과 종교를 떠나서 20세기 중반과 21세기 초기의 최첨단 과학시대를 살아가기에 제례에 관한 한 내가 정한 방식대로, 편리한 생각으로써 돌아가신 어른들을 살아 있는 것처럼 대하고 싶다.
내가 만들면 그게 제도이고 법이다. 내 가정사의 제례에 이렇다 저렇다 할 하등의 간섭이나 종용을 거부한다.
오늘, 불교 제례에서 행하는 49재는 나는 지내지 않았다.
2.
전문적인 종교인이 아닌 보통사람, 일반사람은 49재와 49제를 혼동하고 있었다.
일전 불교 신자인 친인척조차도 49일째 되는 날에 제사를 지내지 않으냐고 내게 물어 왔다. 나는 귀가 어두어서 불교신자인 그분이 말하는 것이 49재인지 49제인지를 명확히 듣지 못했다.
49재(齋)는 불교에서 쓰는 용어이고, 49제(祭) 전통유교제례에서 쓰는 용어다. 이들의 차이를 음성적으로 명확히 구분하여 발음하고, 또 명확히 듣기에도 어렵다. 그런데도 그 분은 제사를 어떻게 지낼 것이냐고 내게 물었다. 또 몇 사람도 그날 제사를 지내느냐고 물었다. 나는 49일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말했다.
내 어린 시절부터의 기억은 49일 제사를 보지도 못했으며, 전통 유교제례에서도 49일 제사라는 용어를 보지 않았다. 예전에는 초상을 치루고도 앞으로의 소상과 대상을 치루려면 2~3년의 상례일이 걱정이었다. 그러나 바쁜 현대인들은 구시대의 제례문화인 소상과 대상을 앞당겨서 일찍 처리하려고 한다. 그 방편의 하나가 49일재(제)로 탈상하고 제례행사를 약식으로 끝내려는 경향이 짙어진다. 심지어는 30일, 7일, 3일(삼우제)로 더욱 단축시키는 경향도 엿보인다. 이런 약식 제례절차의 추이로 보면, 소상과 대상의 기간을 줄여서 불교에서 행하는 49재의 숫자인 49을 49일 째의 제사로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혼용해서 받아들인다고 본다.
나는 효도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이 내 생활의 편리한 잇점으로 해석해서 어머니의 제사를 내 형편껏, 내 생각대로, 약식으로 지내려고 한다. 제사를 지내거나 말거나에 대해서 누가 나를 크게 탓할 수는 없다고 본다. 특히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의 제사를 주관하는데 누가 무어라고 간섭할 수는 없을 게다. 혹시라도 내게 간섭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게다.
'조상들에게 그렇게 효심이 지극정성하다면 네가 알아서 제사 지내, 나는 내 방식대로 할 거여'.
탈상?
나한테는 그런 것조차도 할 수 없게 생겼다. 장례식장에서 검은양복을 돈 주고 빌려 입었다. 돌아가신지 삼일째인 날 아침에 묘소에서 삼우제를 지내고는 이내 검은양복을 벗어서 다음날에 장례식장에 돌려주었다. 나는 자동적으로 탈상을 한 셈이고, 아내 역시 검정치마저고리를 벗어서 불 태웠으니 그도 자연스럽게 탈상한 셈이다.
옛 전통의 괴기한 상복도 아닌 서양옷인 양복 그것도 검정색 양복을 입는 문화로 변화되었으며, 검정상복이 상복으로 대용되었기에 장례식장에서 돈 주고 빌려 입었다. 삼우제가 끝나면 이내 되돌려 주어야 할 터. 어째거나 나와 아내는 상복이 없으니 저절로 탈상한 셈이다. 탈상하는 제사도 지낼 수도 없게 생겼다. 어쩌면 잘된 결과로도 해석된다.
나는 이래저래 막된 놈, 불효자로 추락하고 있다. 전통 제례절차에 극도로 어긋나는데도 내 방식대로 일을 처리하고 있으니 누가 무어라고 탓해도 나는 할 말이 없게 생겼다. 타인조차도 어머니의 49일재(제)를 물어왔는데도 하나뿐인 아들, 상주였던 나는 전혀 재(제)를 지내지 않았으니, 나는 할말이 없게 생겼다.
이 글을 쓰는 내 등 뒤에는 영정사진으로 썼던 어머니의 사진이 있다. 극도로 노쇠한 시기에 영정용 사진으로 박은 탓인지 사진 속의 어머니의 용태는 참으로 늙었다. 사진사의 지시대로 합죽이 된 입술을 옹서물고는 억지로 웃는 모습이 무척이나 어설프다. 그런 웃음으로 내 등 뒤를 바라보고 계시다.
어머니, 미안해요. 어쩌면 내 생각이 곧 어머니의 생각일 거예요. 모든 절차를 간소하고 약식으로 처리해서 돈을 아끼고, 시간을 아껴서 살아 가는 데에만 신경 쓰라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나는 실천하고 있다고요. 허례허식을 떠나서 본질적으로 실용주의자로 되어가는 나, 하나뿐인 아들를 그냥 지켜보시라고요.
엄니...
속으로 나직히 불러봅니다.
2015.4.14.화요일.
아쉽다. 글은 처음 쓸 때와 시간 날 때마다 고쳐 쓰는 내용은 사뭇 다르다.
처음 쓸 때에는 주제가 뚜렷하지만 쉬었다가 나중에 고쳐 쓰다보면 처음의 의도와는 내용이 사뭇 다르게 변질된 것을 발견한다.
이 글도 그렇다. 고쳐 쓸 적마다 한 소리를 거듭 반복하고 있다. 과감히 잘라내야 하는데도 오히려 늘어난다. 특히 pc로 글 쓰면 전체 문맥이 잘 안 보인다. 프린트로 출력해서 지면을 읽으면 쉽게 전체의 모습이 눈에 잡히나 pc 모니터로서는 전체가 안 보인다. 그러니 답답하다. 손 대서 잘라내야 하는데도 손을 대면 오히려 어린 아해의 그것처럼 자꾸만 발기되어서 쓸데없는 문장의 길이만 늘어나는 꼬라지다.
'언제 상식을 그만 두어야 하나요'를 아내가 묻기도 전에 나는 말했다.
'49일 째 되는 날에 상식을 끝내면 그게 곧 불교에서 말하는 49재일 터. 그러나 당분간 더 상식을 올리다가 어느날 그만 둡시다. 당분간 더 상식을 올리소라'
고 나는 부언설명을 했다.
50일째인 오늘 아침에도 아내는 평소처럼 상식을 올렸다.
개인적인 제례는 스스로가 정하면 된다. 무슨 격식과 규율이 정해진 바가 없으니 내 방식대로, 생각대로 할 작정이다.
2015.4.15.수요일.
이런 잡글은 등산과 자연생물을 주제로 한 이 카페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올립니다. 맨날 텃밭이야기만 하는 나도 이따금 식물 이외의 잡글도 쓴다는 사실을 증거로 삼으려고요.
그냥 읽는 체해 주시면 감사.

첫댓글 긴 글 한자도 뛰어넘지 않고 꼼꼼히 잘 읽었소, 그래도 이렇게 읽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야겠기에 댓글을 쓰오,상식을 올린다는 의미는 지금도 돌아가신 모친의 혼령과 동거한다고 여기는 것과 같은 의미이니 탈상하지 않았다는 것과 같겠소,
아마 요즈음 도시인들은 상식을 올리는 이가 있기는 할까요? 나는 장자가 아니라서 잘은 모르나 이미 대부분 간소화 되었고 상식 올리는 것도 사라진 듯 싶네. 그러니 최형도 이제 그만 중단 하시는 게 어떠한가요?
돌아가시기 전에 충분히 효도하신 것을 내가 잘 아오, 사후에 제사 잘 지내고 묘지 치장 한다고 효는 아니지요
다만 제삿날이나마 형제들이 얼굴을 보게 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여기지요,
요즘 사촌이나 손주들은 제삿날 참여를 안하더라구요 ㅎ
영정을 등지고 마음으로 하는 촤형의 독백 그게 정답인 듯 싶소
@정희태 맞소. 조석으로 상식 올리는 거. 어쩌면 의미가 없소. 그저 나한테는 어머니가 살아계신 것만 같아서 나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그래 본 것이오. 그것마저도 없으면 내가 울 것 같소.
오늘도 서점에 나가서 농업에 관한 책, 논리와 비판, 세월호에 관한 여러 책들, 노년건강에 관한 책, 식물학에 관한 글을 조금만 읽다가 귀가했소. 허리가 시원찮으니 장기간 서서 책 보기에도 힘이 들고. 나한테는 효도한 게 없소. 그냥 당연히 해야 하는 것 이외에는.
정형의 말대로 곧 상식을 그만 두어야 할 때가 된 것 같소.
따스한 댓글 고맙소.
그리고 지겨운 장문을 읽어 주었다니 감사하오.
뻔한 이야기라서... 나도 이런 글쓰기가 힘이 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