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제일문, 맛과 멋의 고장 전주의 관문에 들어서면 벌써 시장기가 동한다. 전주에 가면 소소한 간식부터 떡 벌어진 한 상까지 하나같이 멋스럽고 조화로운 맛에 끌리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전주다운 한 끼를 꼽으라면 단연 전주비빔밥이다. 전주 8미로 꼽히는 전주콩나물과 황포묵이 들어가는 전주비빔밥은 개성탕반, 평양냉면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음식으로 손꼽히던 전통음식이다.
전주에는 시에서 맛과 품질을 보증하는 비빔밥 지정업소가 여러 군데 있지만 그중에서도 성미당(盛味堂)은 나름의 비법으로 한자리에서 오십 년 넘게 전주비빔밥의 맛과 멋을 지켜낸 비빔밥 명가(名家)다.
전주의 옛 번화가 중앙동, 웨딩거리 근처에 있는 성미당은 찾기가 쉽지 않다. 워낙 후미진 뒷골목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끼니 때만 되면 어김없이 손님들로 북적인다. 구식 스테인리스 간판만 봐도 오랜 향기가 느껴지는 성미당. 안쪽에선 고소한 음식 냄새가 풍겨 나와 군침을 돌게 한다.
이 집의 제일 잘나가는 메뉴는 ‘전주전통육회비빔밥’이다. 육회가 마땅찮은 손님은 고기를 볶아서 올려주는 ‘전주비빔밥’을 찾는다.
“뜨건게 조심혀요!” 이 집에선 뜨겁게 달군 놋그릇에 비빔밥을 담아낸다. 무거운 놋그릇만으로도 손이 많이 갈 텐데 정갈한 멋에 따뜻한 맛까지 담았으니 참 대단한 정성이다.
비빔밥을 들여다보면 한마디로 비비기가 아깝다. 고사리, 당근, 오이, 도라지 등 색 맞춰 돌려 담은 십여 가지의 나물과 노란 황포묵 가운데 빨간 육회와 탱글탱글한 달걀 노른자가 컬러풀한 자태를 뽐낸다. 그 위에 화룡점정으로 올린 대추말이까지 보는 눈이 마냥 즐겁다.
▲ 정영자씨(왼쪽)와 딸 고희선씨.
전직 대통령들의 입맛 사로잡아
이 집은 밥에 고추장이 미리 비벼져 있어 몇 번만 섞어주면 모든 재료가 쉽게 어우러진다. 콩나물국부터 한입 떠서 입안을 촉촉하게 적신 다음 비빔밥을 먹어 본다. 아삭한 나물과 부드럽고 씹을수록 단맛 나는 육회 등 갖은 재료가 무엇 하나 걸리는 것 없이 입안에서 맛있게 어우러진다. 매콤하면서 은은한 깊이가 느껴진다고 할까. 음미할수록 그 조화로운 맛에 감동이 밀려온다. 이 집에서 직접 끓인 달달한 계피향의 모주 한잔 곁들이면 금상첨화! 비빔밥 외에도 창업할 때부터 변함없이 이어온 깨죽, 잣죽과 더불어 삼계탕 또한 오랜 내공의 맛을 자랑한다.
창업주 이판례씨(2006년 85세로 작고)는 일곱 남매를 둔 평범한 주부였다. 남편 사업이 실패하자 평소 음식 솜씨가 좋았던 이씨는 식당을 내보라는 지인들의 응원에 힘을 얻어 지금의 자리에 희망의 불을 밝혔다. 이씨는 전주 음식을 잘하던 이모에게 비빔밥의 비법을 전수받고 여러 한식당을 다니며 자문을 구해 지금의 비빔밥 레시피를 직접 완성했다. 당시는 전주비빔밥이 유명해지기 전이었다. 손이 많이 가는 비빔밥은 고생스럽다는 주변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레 전주비빔밥을 메뉴에 올렸다.
“우리 어머니 참 대단하셨어요. 성미당은 결국 어머니의 고집이 지켜낸 맛이지요.”
비빔밥부터 단팥죽, 약식까지 이씨는 주방에서 남편과 함께 모든 음식을 직접 만들었고 손님맞이는 딸들이 맡았다. 음식점이 흔치 않던 그 시절 주로 화가, 문인 등 예술문화계 인사들이 찾아들었다. 이씨 가족은 단골손님인 이들에게 열과 성을 다 쏟아부었다. 다녀가는 손님들마다 이모집이나 고모집에서 정성껏 차려준 한 상 같다며 음식 칭찬이 자자했다. 그렇게 온가족의 정성으로 성미당은 입소문이 났고 신문과 방송까지 타면서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다.
스무 살부터 가게에 나와 이씨를 돕던 딸 정영자(70)씨는 1980년대 초 성미당을 물려받아 어머니의 메뉴와 맛을 오롯이 지켜냈다. 정씨는 2009년 다시 딸 고희선(47)씨에게 성미당 열쇠를 넘겨줬다. 모녀 3대가 전주비빔밥에 인생을 건 셈이다. 대학 시절부터 일손을 거들던 고씨는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야무진 손맛까지 그대로 물려받았다. 평소엔 카운터를 보다가도 주방에 손이 모자라면 언제든 자신 있게 앞치마를 두른다.
3대에 걸친 대물림에도 손님들은 예나 지금이나 비빔밥 맛이 비슷하다고 한다. “비빔밥은 고추장 맛이지요.”
정씨는 딸에게 가게를 물려준 뒤에도 50년 전에 그녀의 어머니가 담갔던 방식 그대로 찹쌀고추장을 담근다. 해마다 찹쌀 다섯 가마, 고추 천 근이 들어간다. 스무 개의 장독에 꽉 차는 양의 고추장은 반년간 숙성시킨 뒤 1년 안에 다 소비한다. 시판 제품에 비해 달지 않고 칼칼한 맛이 좋아 이참에 아예 성미당표 고추장 제품이라도 만들라고 주변에서 성화지만 대량생산으로는 지금의 맛을 내기 어렵다며 고사하고 있다. 프랜차이즈 문의와 함께 얼마 전엔 서울의 유명 백화점에서까지 러브콜을 받았지만 엄두를 못 냈던 이유도 고추장을 댈 재간이 없어서였다고 한다.
이 집 비빔밥엔 남다른 비법이 숨어 있다. 손님상에 내기 전에 초벌 비빔을 하는 것이다. 밥을 고슬고슬하게 지어 찹쌀고추장과 직접 짠 참기름, 연하고 고소한 전주콩나물을 넣고 뜨거운 팬에 치대면서 비벼주면 고추장과 참기름이 밥에 알알이 배어들어 매운맛이 부드러워지고 고소하고 깊은 맛이 더해진다.
“미리 비벼놓으면 밥이 푸석해져요. 먹기 바로 직전에 비벼야 하니 단체손님이라도 오면 환장하지요.”
하루면 수백 그릇, 전주에 행사라도 있는 날이면 천 그릇 이상을 일일이 비벼 놋그릇에 담고 나물과 육회 등을 정성스레 올려낸다. 초벌 비빔에 대한 성미당의 고집은 여러 일화를 남겼다. 2003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전주의 한 호텔에서 리셉션을 할 때였다. 350인분의 점심을 맡았는데 문제가 생겼다. 호텔 측에서 주방을 외부인에게 공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초벌 비빔을 해야 하는 성미당 비빔밥의 진수를 선보이기 위해 정씨는 호텔 측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결국 성미당 전 직원이 호텔 주방을 점령하고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힘들지만 정성으로 비벼내는 성미당의 비빔밥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등 전직 대통령들의 발길을 끌어모았고 한옥마을을 찾는 여행자들의 입맛까지 사로잡았다. “멀리 객지에서 오셔서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면 보약이라도 먹은 듯 기운이 나요.”
비빔밥은 더 이상 우리만의 먹거리가 아니다. 성미당에서는 매콤한 비빔밥을 맛있게 먹는 외국인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맛과 영양, 멋까지 고루 갖춘 전주비빔밥은 전 국민의 사랑을 받으며 한식 세계화를 이끌고 있다. 성미당의 3대 쥔장 고희선씨는 이러한 자부심으로 오늘도 성미당에 열성을 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