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생애(젊은 세대를 위한 바른 역사서) 안병훈
(1) 문명의 전환기에 태어나다
-출생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에서 태어났다. 1877년 만 두살에 서울로 이주 했다. 철이 들기 전부터 서울에서 생활했으므로 나중에 대통령이 된후 지역을 초월해 인재를 등용했다. 이승만은 열다섯 살(1891?) 때 부모가 간택한 동갑나기 박씨와 결혼했으나 심한 성격 불화 등으로 이승만이 미국에서 돌아온 1912년 경 이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재학당 입학 아펜젤러는 1885년 한국에 도착하여 한국선교회를 창설하고 배재학당을 설립하였다. 언더우드와 함께 성경의 한국어 번역에 힘써 마태복음, 마가복음, 고린도전후서의 번역을 마쳤다. 개신교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유,공평,민권 등의 근대적 정치이념을 깨우쳤다.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지인 매일신문을 한글과 영문으로 발간했다.
-긴 옥살이 이승만의 스승이라고 할 서재필은 갑신정변 주역의 한 사람으로 쿠데타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해 한국인 최초의 의학박사가 된 개화파 지식인이었다. 서재필은 1896년 4월 한글과 영어로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7월에는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한국인들에게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불어넣으려 했다. 독립협회는 법률에 의해 생명과 재산이 보장되고 국민이 정치적인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권리가 인정되며 대외적으로 자주독립하는 근대국가 건설을 목표로 했다.
-기독교로의 개종 기독교로 개종 후 감옥에서 한국 개신교 역사상 처음으로 40여 명의 양반 출신 관료와 지식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영한사전만들다가 문명개화를 위해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였고 독립정신을 1910년 3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출간하였다.
-서른 나이에 조지 워싱턴대학 편입 워싱턴에 도착한 이승만은 이 추천장들을 손에 쥐고 코베넌트 장로교회의 햄린 목사를 찾아가 세례와 유학지도를 함께 부탁했다 목회 장학금 받고 필요 생활비를 위해 이승만은 여러도시의 YMCA와 교회를 돌면서 강연을 했고 인기가 있었다 (아들을 필라델피아의 미국인 가정에 맡겼으나 어린 나이에 디프테리아로 죽었다.) 어려운 과정을 거쳐 1907년 6월 5일 학사학위를 수여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 만 32세 였다.
-2년 반 만에 하버드 석사 , 프린스턴 박사(한국인으로서는 이승만이 최초 일 뿐 아니라 미국인중에서도 극히 드물었다.) 미국 감리교 선교부는 이승만이 한국으로 돌아가 선교활동에 헌신하기를 바랐다. 이 때 한국인이 일본의 조선 침략을 찬양하고 다니던 미국인 스트븐스를 권총으로 살해했다 스티븐스는 일본정부가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으로 임명한 친일적 인물로서 루스벨트 대통령의 친구였기에 한국인의 미국내 입지가 안좋아 졌으나 이승만이 바로잡으려 노력했고 성공했다 서울에서 사귀었던 북장로교 선교사 홀이 프린스턴신학교 기숙사인 칼빈클럽에서 무료로 생활할 수 있는 혜택을 베풀어 주었다. 졸업 후인 1912년 1월 프린스턴대학 출판부에서 발간
-서울 기독청년회(YMCA)로부터 연락 이승만은 런던,파리,베를린,모스크바를 거쳐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만주에 도착해서 압록강 다리를 건너 한반도로 들어왔고 입국 심사를 일본인으로 부터 받았다. 서울 YMCA에서 이승만은 성경과 만국공법을 가르쳤다. 이승만은 당시 최고 학력의 지식인이었으므로 강연을 듣기 위해 수많은 청년이 모여 들었다. 그러나 일제의 박해로 한국을 떠나야 했다 75세의 부친은 힘겹게 문 앞까지 배웅을 나왔으나 아들의 얼굴을 외면한 채 손만 흔들었다. 이것이 이들 부자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이승만이 처음 호놀룰루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미국 감리교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한인기숙학교가 있었다. 이 학교는 하와이 각 지역에서 모여든 남학생 60여 명에게 기숙의 편의를 제공하고 한국어를 가르치는 초급학교였고 교장이 되었다. 1952년 하와이 한인 이민 50주년을 맞아 현지 교민들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의 뜻을 받들어 한인기독학원의 토지와 재산을 매각하여 15만 달러를 조성했다.(인하대)
-임시정부 1919년 9월에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세워지게 됬다. 임시대통령에는 이승만이 추대되었다. 이승만은 중국에서 여운형의 소개로 프랑스 조계 내에 있던 미국인 안식교 선교사 크로푸트 목사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프란체스카와의 만남 이승만은 헌신적인 아내가 될 프란체스카 도너를 만난다. 그녀의 가정은 가톨릭을 믿는 보수 중산층이다. (이승만 58세, 프란체스카 33세) 한국인의 거부감을 누그러뜨린 프란체스카 그 비결은 김치와 고추장을 담그고 한복을 입고 한국의 습속을 한국인보다 더 사랑한 것이외에 딴 것이 없다.
-끝까지 무국적자로 남다.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은 편의상 중국 국적이나 미국국적을 가졌으나 무국적 망명객 신분으로 살았고 미국인으로 구성된 한미협회를 내세워 미국정부와 교섭했다.
(2) 대한민국을 세우다
-한반도로 남한에 진주한 미군이 38선 이남의 유일한 합법적 통치기구는 미군정임을 선포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기존의 모든 정치 세력들의 대표성을 부인 이승만은 한국에 돌아와 환영회 연설에서 "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신탁통치 가장 먼저 반대한 이승만 미.영.소 3개국 외상회의가 한반도의 신탁통치에 합의 했다. 미국은 사생결단으로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이승만을 제거할 음모까지 꾸몄다. 공산당에 어두운 직업 군인인 하지는 무턱대고 남한 정치인들을 모아 좌우합작만을 추진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지는 미국정책에 사사건건 반대하는 이승만은 영원히 권력을 잡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한국문제는 곡절 끝에 유엔으로 넘겨졌고 1948년 5월에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민주적 총선거가 실시되기에 이른다.
-대한민국의 건설이 시작되다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총선거가 남한 단독으로 실시되었다.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적 의의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로서 민주공화국으로 성립하였다. 지난 60년간의 세계사는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을 존중하고 그것을 국가체제의 기본원리로 채택한 자유민주주의와 사장경제체제가 인간의 물질적 복지와 정신적 행복을 증진하는 올바른 방향이었음을 보여주었다. 공산주의 이상은 자유와 합리적이기심이라는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았다. 반면에 북한은 일본제국주의가 심어놓았다는 이유로 인간의 인격권과 재산권을 보장한 민법을 폐지하였다. 사유재산제도가 폐지되면서 이후 성립한 공산주의 체제에서 사람들은 자유로운 인격의 주체로서 자립할 수 없엇다.
(3) 6.25 전쟁 불굴의 의지로 나라를 지키다.
-6.25전쟁 1950.6.25 새벽에 북한이 침입해서 오전 9시에 개성을 함락하였다. 이승만은 참지 못하고 6월26일 새벽3시에 도쿄의 SCAP(연합군최고사령부)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자는 맥아더를 깨웠다. 맥아더는 즉시 도쿄 사령부의 무기담당 히키장군에게 명해 무스탕 전투기 10대, 105mm 곡사포36문, 155m 곡사포 36문 그리고 바주카포를 긴급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승만은 조종사 10명을 보내 단기훈련을 받고 나서 무스탕을 몰고 오게 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 후 미의회가 승인하고 트루먼 대통령이 결재한 2천만 달러 무기지원에 관해 주미대사 장면에게 전화했다고 한다.
-맥아더 한강으로가다 이승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미국의 참전이었다. 미국의 참전은 곧 유엔의 참전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구름이 낀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음에도 맥아더는 전용기 바탄호에 몸을 실었다. 두 사람이 수원 비행장에서 가까이 서로 다가섰을 때 역사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유엔 창설이래 최초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미국군 최고사령관과 한국의 통치자가 전쟁터에서 첫 인사를 나누었다. 맥아더는 즉시 워싱턴에 지상군 부대의 투입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트루먼 지상군 파병을 승인하다 회의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공산권의 세력확장은 그것이 한국이든 어디든 간에 더 이상 허용될 수 없다. 한국군 작전 지휘권 이양
-7월 17일 작전권 이양 "용감무쌍한 대한민국 국군을 나의 지휘하에 두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 맥아더 작전 지휘권과 유엔기가 전달되었다. 정일권은 회고록에서 " 그 후 40여년간 말도 많고 곡절도 많았던 이 작전 지휘권이양으로 인해 온갖 곡해를 견디어야 했으나 나는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대한민국이 당면했던 위기 속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내린 결정을 비범한 영단이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인천상륙작전 이승만 대통령의 바람대로 추수전에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 인천상륙작전은 해군과 해병대가 주도 하고 있기 때문에 워커장군도 몰랐고 부산의 국군도 몰랐다.
-서울 탈환과 환도식 1950년 9월 28일 중앙청에는 태극기가 펄럭이기 시작했다. 89일만에 서울의 태극기였다. 대통령은 비행기 트랩을 내린 다음 맥아더 장군과 악수를 나누며 감격적으로 껴안았다. 이어 맥아더 장군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서 나에게 자기 부인의 안부인사를 전했다. 맥아더 장군의 부인은 아주 매력있는 주부이고 남편의 지위 때문에 티를 내는 일이 없는 겸손한 아내였다. 맥아더의 부인은 늘 검소했으며 사치나 낭비를 죄악으로 생각하는 절제있고 조용한 내조자였다. 맥아더 장군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동양인을 제대로 이해하며 존경하는 겸허한 인품과 솔직한 태도 때문에 대통령은 무척 그를 좋아했다.
-대한민국의 자유와 존엄성 회복 38선을 넘어 북진하라 38선은 이미 김일성에 의해 사라졌으니 북진하자. 1950년 10월 1일 강원도 양양전선에서 국군 3사단 23연대가 38선을 돌파했다. 이 날을 기념하여 한국에서는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하여 해마다 축하 행사가 베풀어지게 되었다.
-미국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의 휴전공약 1952년 미국 대선에서 휴전을 공약한 아이젠 하워가 당선되었다. 이승만은 가만히 있지 않고 미국의 휴전협상에 사사건건 반대했다. 당시 미군은 이승만 체포와 남한을 다시 미군정하에 두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중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기사를 실었다. 아이크 , 한국에 오다. 아이젠하워는 서울에 오자 그의 외아들 존 소령을 찾았다.(6.25전쟁에 참전하고 있었다.)
-휴전협정 (닉슨) "나는 한국인의 용기와 인내심 , 그리고 이승만의 힘과 지혜에 깊은 감동을 받고 떠났다. 나는 이 대통령이 공산주의자를 상대할 때는 예측 불가능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통찰력 있는 충고를 한 데 대해 많은 생각을 해 보았다.
...이승만은 정복되지 않았다. 그는 결코 정복할 수 없는 인물이다. .... 현재 대한민국 국민만큼 반공정신이 투철한 사람들은 지구상에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 이승만은 정복되지 않았다."
(유엔사령관 클라크) " 본관은 이 순간에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이 휴전이야말로 인류의 이익을 위해 보답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할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휴전협정은 전쟁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전쟁의 준비행위이고 더 많은 고난과 파괴를 의미한다. 전쟁과 내란에 의한 공산당의 더 많은 침략행위의 서막이 된다는 확신 때문에 나는 휴전협정의 서명에 반대해 왔다."
(이승만) "... 그러나 한편 나는 노예 상태의 북한 동포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평화적 방법으로, 하지만 필요하다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통일을 성취하는 것이 지도자로서 나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공산학정속에 당분간 그대로 남아 있게 되는 우리의 불쌍한 동포들에게... 절망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결코 당신들을 잊지 않을 것이며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잃어버린 이북 5도와 북한의 우리 동포들을 다치 찾고 구출하려는 한국국민의 근본목표는 과거와 같이 장차에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휴전후 이승만대통령 성명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성립됨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조약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번영을 누릴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이번 공동 조치는 외부침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함으로써 우리의 안보를 확보해 줄 것이다."
-독도를 지킨 평화선 선포 평화선은 우리의 해양주권을 처음으로 대외에 선포한 것이며 어업자원을 보호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일본이 독도 탈취를 꾀하는 것은 한국에 대한 재침략을 의미하는 것이다." - 이승만
제4부 불멸의 역사로 남은 거인
-1953년 7월 27일 휴전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의 반일적인 태도를 싫어했지만 그의 반공의식을 높이샀다. 미국이 군사원조 4억 2천만 달라, 경제원조 2억 8천만 달러 등 도합 7억달러의 원조 나중에 1억이 추가되어 8억달러의 원조를 아이젠하워 대통령으로 부터 받았다.
-전쟁 중에도 선거를 치르고 학교문을 열다. 직선제로 바뀐 제2대 대통령 선거(1952년 8월 5일)를 실시하여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다. 부산정치파동으로 명명된 발췌개헌이 대표적인 정쟁의 산물이며 그것은 1954년 11월의 사사오입 개헌으로 이어졌다. 한편으로 북한과 사투를 벌이는 전쟁 상황에서 학교의 문을 닫지 않았다는 것 재학중엔 병역을 면제 또는 유예조치까지 취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이처럼 이승만이 교육, 특히 대학에 쏟은 열정의 결과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교육기적을 낳았다. 이러한 기적은 그후 우리나라의 산업화와 민주화의 토대를 놓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승만 자신은 기독교 신자였지만 종교계 인사들은 교파를 가리지 않고 두루 만나 대화를 나누는 광경역시 돋보였다. 문화예술과 스포츠 분야 등에도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원자력의 효용에 일찌감치 눈뜨다. 원자력에 관해 일찌감치 그 효용가치를 파악했고 이승만의 선구적인 이해와 집착으로 1959년 원자력 연구소가 문을 열었던 것이다.
-4.19 학생혁명으로 하야 1960년 3월 15일 치러진 선거에서 이기봉이 노골적인 부정을 저지르며 부통령에 뽑힌 것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어 집권자유당에 대해 4월 19일 항거 혁명이 일었났다. 이승만은 " 젊은이들이 분노하지 않으면 젊은이가 아니다." 라고 하며 4.19를 비난하지 않았고 4월 26일에는 "시민들을 다치게 하지 말라는 명령을 냈다. 이승만의 하야(4월29일 옛집 이화장에 돌아옴)가 발표된 이틀 뒤 이기붕 일가 4명의 권총 자살소식일 알려졌다.
-하와이 휴양 이승만의 하와이 행은 휴양을 위한 여행이었다. 병은 악화되었다. 태평양 주둔 미국 총사령관인 화이트 대장, 주한 유엔군사령관을 지내고 당시에 합참의장으로 있던 램니처, 국방장관을 지낸 로버트 맥나마라, 맥아더 장군, 밴플리트 장군도 이승만을 만나러 하와이에 들렀다. 이 때 이승만 본인과 상관없이 귀국의도로 만든 사과성명이 작성되기도 했으나 한국에서는 이승만의 귀국을 거부했다. 1965년 6월 20일 이승만은 피를 토하고 위내출혈이 있어 났다. 1965년 7월 19일 0시 35분 임종하였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독립운동으로 건국을 선취해 냈고 전쟁으로부터 민족을 구원해내며 전 생애를 아낌 없이 불살랐던 위대한 한국인 이승만. 그는 이역만리 하와이 섬에서 고국을 그리다 너무나도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