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야곱은 혼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동이 틀 때까지 야곱과
씨름을 하였다. 그는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그래서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다 엉덩이뼈를 다치게 되었다. 그가 "동이 트려고 하니 나를
놓아 다오." 하고 말하였지만, 야곱은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25~27)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간의 삶을 청산하고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한다.
말하자면 지금은 타향 생활 20년만에 드디어 다시 고향길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야곱이
집에 돌아가는 것을 생각할 때에 제일 장애가 되는 것이 자신의 형 에사우를 만나는
두려움이다.
사실 지금까지의 야곱의 삶을 보면, 그가 한번 마음 먹은 것은 안되는 일이 없었다.
치사한 방법으로 기어이 장자의 권한도, 아버지 이사악의 축복도 독차지했고, 마음에
둔 여인도 끝까지 참아서 결국에는 아내로 맞이했었다.
야곱은 목표를 한번 정해 놓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목표를 반드시
관철시키는 불패의 삶을 살았다.
그런데 이제 귀향을 앞두고, 장애와 자기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야곱은 형 에사우가 복수의 칼을 들고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형 에사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소위 '뇌물'을 준비하여(창세32,14~23)
미리 보낸다.
야곱은 밤에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이끌어 야뽁 강을 건네 보낸 다음,
자기에게 딸린 모든 것도 건네 보낸 뒤(창세32,24) 이제 혼자 남게 되는 것이다.
야곱은 제일 먼저 형 에사우에게 전령을 보내어 상황을 파악하고, 형 에사우의 마음을
떠 본다(창세32,4~6). 형 에사우가 장정 사백명을 거느리고 마중 나온다니까
야곱은 겁을 내어 살려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한 뒤, 인간적인 방법으로 형을 만날 준비를
한다(창세32,10~22).
형 에사우에게 바치는 뇌물의 양이 많음을 드러냄과 동시에 여차하면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여 도망갈 준비까지 갖춘다.
뇌물을 종들의 손에 한 떼씩 나누어 들게 하는데, 그것을 거리를 두어 행렬지어 가게
하고, 레아보다도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아내 라헬과 아들 요셉을 제일 뒤에, 야곱의
자신의 곁에 배치하여 가게끔 해놓는다.
그렇게 해놓고는, 이제 야뽁 강가에 혼자 남게 되는 것이다.
야곱은 분명히 형 에사우를 만날 생각에 불안과 초조에 떨며 고민도 하고, 기도도
했을 것이다.
바로 이 순간, 야곱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상태에 있게 되었을 때에,
자신의 당면 문제 뿐만 아니라 자신 안의 근본적인 내면의 문제까지 정직하게 들여다
보게 되면서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 순간을 준비하셨고 기대하셨으며, 이 순간을 놓치지 않으신다.
'어떤 사람이'라고 번역된 '이쉬'(ish)는 '한 사람' 혹은 '어떤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것은 야곱이 그 사람에 대하여 어떤한 정보도 갖고 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씨름을 하였다'로 번역된 '와예아베크'(wayeabeq)의 어근 '아바크'(abaq)는
본래 '먼지에 쌓이다', '붙잡다'는 뜻이다.
이것은 땅에서 먼지가 일어나 쌓일 정도로 서로 붙잡고 격렬하게 싸우는 모습을
묘사하는 말로써 '씨름하다', '맞붙어 싸우다'라는 뜻을 지녔다.
원문에서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은 야곱과 하느님의 천사와의 씨름이 매우 격렬했음을
보여준다.
야곱이 엉덩이뼈(환도뼈)가 실제로 다치게 된 것과(창세32,26) 호세아 예언자의 말을
종합해 볼 때(호세12,2~4) 실제로 하느님의 사자와 야곱이 씨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씨름은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었고, 야곱이 하느님의 사자에게 매달려
울부짖으며 처절하게 간구하는 기도까지 포함된 씨름인 것이다.
야곱은 처음에는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사자인지 몰랐으나, 그가 곧 하느님의
사자임을 알게 되었고(창세32,27), 자신의 생애 최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하느님께 복을 간구했던 것이다.
'그는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여기서 '이길'에 해당하는 '야콜'(yakol)은 '승리를 얻다', '해내다'(1사무26,25)
라는 뜻 뿐만 아니라 '능력이 있다'(창세13,6), '우세하다', '성공하다'(1열왕22,22)
라는 의미도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사자가 야곱에게 패배를 당했다는 말이 아니라 야곱이 매달리는 것을
꺽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백성이 필사적으로 매어 달리며 간구할 때 하느님께서 외면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해 주는 말이기도 하다.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원문은 '와익가 뻬카프 예리코'(yaigga bekap yereko)로서, 직역하면 '그러자 그는
그의 넓적다리 바닥을 쳤다'이다.
여기서 '넓적다리'에 해당하는 '야레크'(yarek)는 '넓적다리'(창세24,2.9: '샅';
탈출28,42; 민수5,22: '허벅지')외에 '허리'(탈출32,27; 시편45,4)로도 번역된다.
허리나 넓적다리는 다같이 인간의 생식기관과 관련된 부분이며, 생(生)의 원천을
상징한다(히브7,5).
또한 손바닥으로 치는 것은 깊은 슬픔과 수치와 애절한 회개의 표시였고
(예례31,19;에제21,12), 서약을 행할 때에는 넓적 다리 아래에 손을 넣고 서약함으로써
서약에 대한 보증과 신실성을 표현했다(창세24,2; 47,29).
그리고 '바닥'에 해당하는 '카프'(kap)는 '우묵한 곳', '바닥', '구멍'을 뜻하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넓적다리의 우묵한 부분'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의 엉덩이뼈(환도뼈)의 정확한 부위는 둔부 아래쪽에 있는 좌골(坐骨)로
엉덩이의 골반을 형성하는 좌우 한 쌍의 뼈(창세24,2)이다.
한편 '쳤다'에 해당하는 '나가'(naga)는 '닿다', '만지다'(창세3,3; 레위5,3;다니8,5),
'건드리다'(잠언6,29)라는 뜻으로서 본문에서는 하느님의 사자가 야곱을 때린 것이
아니라 단지 만지기만 하셨음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사자가 만지기만 했는데도 야곱이 무기력하게 된 것은 하느님의 능력의
위대성을 보여준 것임과 동시에 인간의 무능과 한계를 다시 한 번 보여준 것이다.
'다치게 되었다'
'다치게 되었다'에 해당하는 '왓테카'(watheqa)의 어근 '야카'(yaqa)의
기본 의미는 '찢어지다', '탈골되다'라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이것은 뼈가 살을 찢고 빠져 나가 탈골된 상태나 뼈가 부러진 상태라고 볼 수도
있다.
하느님께서 야곱의 엉덩이뼈를 다치게 하신 이유는 육신을 믿고 살아온 야곱에게
육신의 나약함을 일깨워 주기 위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야곱이 하느님을 상대로
씨름할 때 버텨진 힘의 근원을 치심으로써, 더 이상 하느님을 경쟁자로 여기지
못하게 하셨고, 꺾인 다리를 통해 그가 붙들고 의지해야 할 대상은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신 것이다.
또한 생식과 관련된 엉덩이뼈를 다치게 한 것은 앞으로 태어날 야곱의 후손들,
즉 계약의 자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하느님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동이 트려고 하니 나를 놓아 다오'
'나를 놓아 다오'라고 번역된 '샬레헤니'(shalleheni; let me go)는 직역하면
'너는 나를 가게 하라'는 뜻이 있는 '샬라흐'(shallah)의 강조 능동 명령형이다.
하느님의 사자가 야곱에게 자신을 보내 달라고 부탁한 것이 아니라 강력하게
명령한 것이다.
하느님의 사자가 얼마든지 야곱을 뿌리치고 떠나갈 수 있음에도 굳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육신이 망가진 야곱이 과연 하느님을 의지하고 있는지 시험하시고자 함이다.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로 번역된 '로 아샬레하카'(lo ashallehaka)는 '절대 당신을
보내지 않겠다'는 뜻인데, 강한 금지를 나타내는 '로'(lo)와 '샬라흐'(shallah)의
강조형 능동 미완료가 사용된 사실이 그것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야곱은 축복하여 주지 않는 한, 결코 보낼 수 없다는 자신의 의지를 강조하여
전달한 것이다.
이러한 야곱의 억지에 가까운 요구는 자신과 씨름한 상대가 하느님의 사자이며, 하느님의
사자의 축복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