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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용추계곡 입구에 조성된 물레방아. 사진 왼쪽은 연암 동상. |
- 당쟁 싫어 과거 단념했던 박지원
- 산간벽지 수령으로 백성 구제 나서
- 국내 첫 도입 물레방아·돌확 남아
- 관아 앞 광풍루와 서당에도 발자취
- 농사·양잠 기술에도 관심 기울여
"한마디로 선비와 벼슬아치들의 죄다." 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 잔치를 축하하는 사절단에 끼어 중국에 다녀온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은 '열하일기'에서 조선에 수레가 다니지 못하는 책임을 관리와 지식인 등 사회지도층에 돌린다. 사대부들의 필독서인 '주례(周禮)'에 수레와 관련된 여러 용어가 나오지만, 입으로만 외울 뿐 정작 수레제조법과 작동기술에 대한 연구는 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권력 유지·강화에 골몰하며 고루한 인습에 얽매여 민생은 등한히 했던 기득권층에 날리는 통렬한 비판이다.
연암의 이 비판은 지금도 유효하다. 비정규직의 증가, 빈부격차의 심화 등 사회구조적 병폐가 고질화하면서 나라의 기초가 갈수록 허약해지고 있지만, 기득권층의 행태는 연암 생존 당시와 별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급기야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통해 '역사 사유화' 움직임까지 보여 국론만 분열시키고 있다. 연암이 살아 돌아온다면 오늘날 기득권층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당쟁이 싫어 과거를 단념했지만 관심은 늘 어려운 백성들에 가 있었던 애민지사, 청나라에서 배운 선진문물을 활용해 민생을 일으켰던 경세가, 풍자와 유머가 가득한 유려한 문체로 백성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던 민족문학의 으뜸 문장가. 현실이 암울해질수록 실천적 지식인 연암에 쏠리는 그리움은 커진다. 연암은 1792년부터 1796년까지 안의(현 경남 함양) 현감을 지냈다. 직접 민생 구제에 나선 첫 목민관 생활이었다.
연암의 안의 시절로 기행을 떠난다. 혹여 난마처럼 꼬여가는 우리의 당면 문제들을 풀 지혜를 구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에서다.
■"농상·부역·호구가 급선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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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
1792년(정조 16년) 정월, 안의현에 부임한 연암은 관아 앞에 세워진 광풍루(光風樓)에 올라 깊은 생각에 잠긴다. 1412년 건립된 이 누각의 당초 이름은 선화루(宣化樓)였으나, 1425년 지금의 자리(안의면 금천리)로 옮겨진 뒤 1494년 당시 현감이었던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1450~1504)이 중건하면서 광풍루로 개명했다. 지난 10일 현지에 가 보니 주위에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선 데다 하천 개발로 인해 옛 모습을 잃어버렸지만, 연암 재직 당시에는 화림동 계곡에서 발원한 금호강이 누각 앞으로 흘러 풍광이 자못 수려했을 것으로 보였다.
연암은 누각에 서서 흠모했던 일두를 떠올리며 산간벽지라 다른 지역에 비해 민생이 더 고달픈 안의현을 어떻게 다스려 나갈지 고민한다. 그 고민의 결과는 '함양군 흥학재기(興學齋記)'에서 엿볼 수 있다. "무엇을 급히 해야 할 것인가? 농상(農桑)과 부역(賦役)과 호구(戶口)다." 목민관의 최고 임무는 ▷농업과 양잠을 성하게 하고 ▷호구를 늘리고 ▷학교를 흥하게 하고 ▷군정을 닦고 ▷부역을 고르게 하고 ▷소송이 드물어지게 하고 ▷간사하고 교활한 인정(간활)을 사라지게 하는 것인데, 이 중 연암은 농상·부역·호구를 급선무로 꼽은 것이다.
그 이유를 연암은 이렇게 설명한다. "'서경'에 이르기를 부유하게 살아야 착하게 행동한다'고 했으니, 무릇 농상이 성하지 못하면 학교를 일으킬 수 없고, 부역이 고르지 못하면 호구를 늘릴 수 없고, 호구가 늘지 않으면 군정을 닦을 수 없다. 진실로 농상을 성하게 하고 부역을 고르게 하면, 떠돌아다니던 백성들이 본업으로 돌아와 호구가 저절로 늘게 될 것이니 어찌 군정이 닦이지 않음을 걱정하겠는가. 그렇게 되면 번거롭게 형벌을 쓰지 않아도 소송과 간활이 확실히 드물어지고 사라질 것이다."
■국내 최초 물레방아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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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레방아를 찧던 돌확. |
이 글은 당시 안의현의 이웃 고을인 함양군의 윤광석(尹光碩) 군수가 현 함양읍 구룡리 서계의 산기슭에 자리한 선산 김 씨 가문의 '이요정(二樂亭)'을 서당으로 활용하기 위해 녹봉을 털어 학전(學田)을 마련하고 서적을 비치해 '흥학재'라고 이름 지은 뒤 연암에게 부탁해 작성된 것이다. 함양문화원 김윤수 부원장은 "흥학재는 중급교육기관인 향교나 서원보다 낮은 수준의 초급교육기관이었다"며 "2003년까지 5차례 보수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고 말했다. 연암은 흥학재기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농상과 부역, 호구, 소송, 간활은 백성들을 설득하고 권면할 따름이지 수령이 몸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연암은 농상 진흥에 직접 나선다. 청나라에 가서 제작기술과 작동방법을 배워 온 물레방아를 기백산과 황석산 사이 용추계곡이 흐르는 현 안의면 안심마을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설치한 것이다. 물레방아는 쏟아지는 물이 나무바퀴를 돌리면 중심축에 끼어놓은 축대가 돌아 방앗공이가 아래위로 움직이며 절구 모양의 확 속에 담긴 곡식을 찧고 빻아 도정하는 기계다. 디딜방아는 사람이 방앗다리를 밟아 방앗공이를 놀려야 해 노동 부하가 큰 반면 생산성은 낮지만, 물의 낙차를 이용해 위치 에너지를 운동 에너지로 바꾸는 원리로 가동되는 물레방아는 인력이 투입되지 않으면서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다. 물레방아 설치 후 '함양 산천 물레방아는 물을 안고 돌고/우리 집 서방님은 나를 안고 돈다'는 민요가 불릴 정도로 물레방아는 함양이 낳은 전국적 명물로 자리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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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읍 구룡리 서계에 자리한 이요정. 흥학재가 있던 곳이다. |
함양군은 용추계곡 입구에 물레방아를 복원해 놓았다. 지름 10m에 물을 담는 물레 홈의 너비가 2m에 달하는 거대한 기계다. 군은 또 연암의 물레방아 설치를 기념해 매년 10월 물레방아 축제를 열고 있다. 용추계곡 아래 안심마을 지우천가에는 물레방아를 찧었던 돌확이 남아 있다. 연암이 물레방아를 설치한 때로부터 40여 년 지난 1836년께 운영되기 시작한 정미소에서 100년간 사용해오다 1936년 홍수로 떠내려 갔던 돌확을 발굴한 것이다. 화강석 재질의 이 돌확은 안지름 60㎝, 바깥지름 80㎝에 높이는 1m에 이른다.
■"백성 위해선 오랑캐도 본받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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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의면 금호강변의 광풍루. |
연암이 청나라에서 배워 온 선진문물은 물레방아만이 아니다. 도르래를 이용해 우물 긷기, 벽돌로 집 짓기, 구들장 만들기, 누에고치 켜는 소차(繅車), 불 끄는 수총차(水銃車) 등등 다양하다. 그의 온 신경은 선진문물 습득에 쏠려 있었다. 열하일기에 기록된 벽돌집 건축법을 한번 보자. "집은 오로지 흙으로 구워 만든 벽돌로만 짓는다. 길이는 한 자, 폭은 다섯 치이고, 가지런히 포개면 네모반듯하고 두께는 두 치이다.(…)벽돌을 쌓는 법은 한 번은 세로로 한 번은 가로로 배열하여, 마치 주역의 감괘(坎卦)와 이괘(離卦) 모양을 저절로 이루고, 그 사이 간격은 석회를 종이처럼 얇게 하여 겨우 붙을 정도로만 때워서 봉합한 흔적이 실처럼 얇다."
연암은 농사 다음으로 중요시한 양잠 관련 기술에도 세심한 관심을 기울인다. "우리나라에서 고치를 켜는 법은 오직 손으로 당겨서 홀치는 것만 알지, 수레를 사용할 줄은 모른다. 명주실이 사람의 손을 타므로 이미 실로써 천연적이고 자연스러운 품새가 없어지고, 실을 빼는 속도가 일정치 않아 실끼리 부딪치거나 맞닿을 때면 실과 고치가 안정되지 못하고 제멋대로 날뛰고 함께 나아가 고치판에 쌓이기도 한다."
선진문물에 대한 그의 이런 관심은 편리한 기구를 개발해 백성들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려는 이용후생(利用厚生) 사상에서 기인한다. "천하를 통치하는 사람은 진실로 인민에게 이롭고 나라를 두텁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비록 그 법이 오랑캐에게서 나왔다 하더라도 본받아야 한다.(…)밭 갈고 누에 치고 질그릇 굽고 쇠 녹이는 풀무질에서부터 공업을 고루 보급하고 장사의 혜택을 넓게 하는 데 이르기까지 그들에게 배우지 못할 것이 없다."
연암은 자신의 말대로 청나라에서 배운 것들을 안의현에서 실행에 옮겨 민생을 진흥하는 한편 이를 글로 남겨 다른 목민관들이 참고하도록 한다. 백성들은 그런 그에게서 적당히 임기를 채운 뒤 반강제적으로 선정비 하나 세우고 떠나는 수령들과는 전혀 다른 어버이 같은 목민관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신뢰로 보답한다.
# 옛 안의현 신라부터 존재, 100년 전 함양에 편입…객사 터엔 고교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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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되기 전의 안의현 객사.그 자리에는 지금 안의고교가 들어서 있다. |
안의현은 신라 때부터 현으로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473년(조선 태종 7년) 감음현에서 안음현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이웃 고을인 함양군과 함께 경상우도 진주진에 소속됐다. 1728년(영조 4년) 안음현에서 정희량(鄭希亮)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영조의 왕위 계승에 얽힌 당파 싸움과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1535~1623) 이후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의 학통을 계승한 경상남도 지방의 소외된 사림들의 불평이 겹쳐서 발생했다.
이 반란 이후 노론 정부는 영남 지방의 골수 남인들을 회유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이를 거부해 이곳은 반역향으로 취급당했다. 마침내 대구감영 앞에 '평영남비(平嶺南碑)'를 세워 50해 동안 이 지방 사람들에게 과거에 응시할 수도 없게 해 경상우도의 조식 문인들은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을 접어야 했다. 정희량의 난으로 안음현은 폐지됐다가 1736년(영조 12년) 현의 지위를 회복한 뒤 1767년(영조 43년) 안의현으로 개칭됐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대면과 초점면, 황곡면 일부를 병합해 안의면이 되면서 함양군에 편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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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의현 관아 부속건물로 추정되는 법인사. |
현재 안의면 소재지에는 관아가 없다. 남아 있는 건물은 광풍루와 안의면사무소 맞은편에 자리한 법인사(法印寺)뿐이다. 이 절은 형태가 사찰이 아닌 관아 건축양식인 점을 미루어 부속건물로 추정된다. 절에는 연암이 안의 현감으로 재직할 당시에도 존재했을 것으로 보이는 수령 500년 된 높이 13m짜리 느티나무가 있다. 안의고등학교 터에 안의현 객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철거되고 없다. 함양군청 정대훈 문화관광과장은 "법인사는 건축양식상 관아 부속건물인 것 같고, 객사는 안의고교가 건축되면서 사라진 것으로 짐작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