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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환의 명시감상
헐리다
김윤
언덕 아래 금오아파트가 절반쯤 헐린 채 덫에 친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다 등덜미에 노란 깃발을 꾹꾹 꽂은 채 눈꺼풀 가득 도깨비불을 품고 있는 놈
포크레인이 독수리 떼같이 달겨들어 갈기갈기 뜯을 때마다 헤엄치는 별들이 시멘트벽과 벽 사이에 숨었다가 토악질을 하며 쏟아졌다
누가 서랍 속에 두고 간 슬픔들이 저 혼자 꼬리가 돋은 거다 창살 선반 위 항아리 속 아직 붉게 삭고 있는 낭패와 남루의 이름들
수 백 개의 문과 문을 지나 기둥들이 노을을 받고 서 있는, 석면가루 지천으로 화산재처럼 날리는 저 유적지
여기 살던 그 많은 사람들 다른 개미굴 속에 들어앉아 가만히 TV를 켜겠다 제 속 수 십 채씩 헐지 못한 집이 있어서 무거운 저녁
텅 빈 주차장 건너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이 파랗게 얼었다 긴 등줄기 가득 죽은 회로들을 싣고 칠흑 같은 길이 어디로 가고 있다
----김윤, [헐리다]({애지}, 2008년 여름호) 전문
아브라함 링컨은 미합중국의 제16대 대통령이며, 미국의 역사상 남북전쟁을 통해서 ‘노예해방’을 이룩해낸 대통령으로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러나 아브라함 링컨은 문화적 지시와 선택의 탁월한 수행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미국의 북부는 공업지대였고, 미국의 남부는 농업지대였다. 미국의 북부는 대규모의 공업지대였던 만큼 더 많은 노동자들을 필요로 했던 것이고, 미국의 남부는 대규모의 농장지대였던 만큼 더 많은 노예들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 자본가들과 농부들과의 싸움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 것은 자본가들이었고, 따라서 ‘노예해방’은 더 많은 노동자들을 필요로 했던 자본가들이 그들의 무한한 억압과 착취를 은폐시킬 수가 있었던 사악한 이데올로기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요컨대 아브라함 링컨이 아니더라도 ‘노예해방’의 도도한 물결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가 없는 대세이었던 것이고, 아브라함 링컨은 그 문화적 명령을 충실하게 선택하고, 또, 그것을 실천했던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도시빈민들은 대부분이 이 해방된 노예들이었고, 그들은 진정한 인간으로서 문화적 생활을 향유하고 있기 보다는 더없이 열악하고 더러운 주거환경 속에서, 만성적인 영향결핍과 절대적인 빈곤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청이나 관청의 말단기능직, 최후의 인력시장에서의 일용잡급노동자, 파출부와 외판원, 환경미화원과 식당종업원, 아파트의 경비와 빌딩청소부, 목욕탕의 때밀이와 세탁소의 종업원, 대리운전과 택시기사 등----, 수많은 천역들이 이 해방된 노예들, 즉, 오늘날의 도시빈민들의 생계수단일 뿐인 것이며, 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국가로부터 그 어떠한 혜택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너희들을 구속했던 봉건적 긴박은 풀렸다. 너희들은 모두가 자유인이고, 너희들도 근검절약하면 얼마든지 부자가 될 수가 있다”라는 자본가들의 말은 달콤한 사탕발림의 말에 지나지 않았던것이고, 오히려, 거꾸로, 자본주의 사회는 ‘빈익빈/부익부’라는 양극화의 구조를 더욱 더 완강하고 견고하게 재생산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도 천국을 생각해 보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자본주의 사회는 풍요로운 사회이고, 오늘날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가능해지고 있는 사회이다. 국가와 국가 간의 경계도 허물어져 가고 있고, 인종차별과 성차별도 허물어져 가고 있다. 자유와 평등과 사랑이라는 ‘인도주의의 꽃’이 더없이 만발한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일는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이 풍요로운 사회의 이면에는 수십 억의 인류가 만성적인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전세계의 인류가 먹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생산이 남아돌지만 수십 억의 인류가 죽어가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고, 또한, 그토록 투자처를 찾지 못해서 돈이 남아돌고 있는데도 수많은 도시빈민들은 최저생계비조차도 벌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옛날의 노예들은 비록, 어렵고 힘든 노역에 시달리고 있었을지라도 먹고 살 걱정이 없었지만, 오늘날의 해방된 노예들, 즉, 도시빈민들은 그들의 자유로운 삶을 향유하기는 커녕, 만성적인 기아와 질병의 공포에서 헤어날 길이 없는 것이다.
산업혁명과 기술혁명에 의해서 봉건제적인 생산양식은 붕괴될 수밖에 없었고, 모든 농민들은 그들의 삶의 터전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도시빈민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는 데, 왜냐하면 그들의 유일한 재산인 노동력을 아주 값싼 헐값에 처분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값싼 임금과 값비싼 생활비, 그리고, 언제, 어느 때나 피곤하고 지친 육체는 그들의 삼위일체를 이루고, 그들의 주거공간에서는 온갖 전염병과 매독과 피부병들이 범람을 하게 된다. 상스러운말과 험한 욕설이 오고 가는 것도 보통이고, 십대 여성들의 성적 타락과 사생아들이 범람하게 되는 것도 보통이다. 도시빈민들에게는 결코 의식주를 해결한다는 것 도 쉽지가 않고, 살인이나 강도, 또는 도둑질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도 결코 쉽지가 않다.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산비탈의 더럽고 추한 판잣집이나 서민아파트에서 살아가며, 날이면 날마다 생존경쟁이라는 싸움의 장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는 패배만을 기록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사회는 농촌공동체 사회를 와해시켰고, 대규모의 공업단지를 통해서, 마치, 공룡과도 같은 거대한 도시들을 탄생시켰다.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며, 정치,경제, 문화의 중심지이고, 이미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진 대도시이다. 모든 국민들이 날이면 날마다 서울로 몰려오고 있고, 대한민국의 50%에 가까운 인구가 수도권에 몰려 들어와서 살아가고 있다. 물가와 주택가격이 날이면 날마다 치솟고 있고, 도시의 빈민들은 산비탈의 달동네에서 살아가고 있거나, 점점 더 서울의 외곽지역, 즉, 변두리로, 변두리로 밀려나가고 있는 실정이기도 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토해양부의 주택정책은 분당과 일산, 그리고 평촌과 판교 등을 통해서 주택의 공급량을 늘려왔었지만, 이제는 한강 이북지역의 재개발을 통해서, 그 주택의 공급을 늘려가고자 하고 있었던 것이다. ‘뉴타운 대사기극’이란 세간의 혹평이 바로 이 후자의 유형의 실패를 가장 첨예하게 증명해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강 이북의 지역은 대부분이 도시빈민들이 살고 있는 곳이고, 그들은 ‘뉴타운 정책의 시혜’를 전혀 입지 못하고, 점점 더, 오히려, 거꾸로, 수도권의 외곽으로 밀려나버리는 처량한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왜냐하면 도시빈민들은 그 비싼 중, 대형의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는 돈이 없었던 것이고, 대부분의 부동산 투기꾼들에게 그 뉴타운 정책의 시혜를 다 빼앗겨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부자는 더욱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더 가난한 자가 된다. 풍요로운 사회는 그 풍요로움에 반하여, 점점 더 빈곤을 재생산해놓고 있는 사회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김윤 시인은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고, 숙명여자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고, 첫시집, {지붕 위를 걷다}를 출간한 바가 있다. 김윤 시인의 [헐리다]라는 시는 철거민들의 삶과 그 미래를 떠올려 보고 있는 시이며, 밝은 미래의 희망보다는 그 어떠한 희망도 없는 좌절감만을 노래해놓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왜, 김윤 시인은 “언덕 아래 금오아파트가 절반쯤 헐린 채 덫에 친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다”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며, 왜, 또한, 그는 “등덜미에 노란 깃발을 꾹꾹 꽂은 채 눈꺼풀 가득 도깨비불을 품고 있는 놈”이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일까? 이때의 금오아파트는 철거민들의 상징이 되고, 그 가엾고 힘없는 철거민들은 두 번 다시 되돌아 올 수 없는 발걸음을 옮겨 갔는지도 모른다. 그 떠나감은 쫓겨남이며, 그 쫓겨남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영원한 탈락을 의미하게 된다. 조세희의{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준다. 난장이인 아버지, 어머니와영수, 그리고 영호와 영희는 하루살이의 도시빈민들이지만, 그러나 그들의 실낱같은 희망마저도 어느 날 ‘재개발 철거계고장’과 함께 사라져가 버리게 되고 만다. 그들의 손에는 아파트의 입주권이 주어지지만, 그들은 그 입주비가 없어서 은아부동산의 투기꾼에게 그 입주권을 팔아버리게 되고 만다. 그들이 백만 원도 더 들여서 지은 판잣집이 철거반원들에게 무자비하게 헐리고, 그들이 그들의 입주권을 팔아서 손에 쥔 돈은 영희네 전세비를 제외하고 단돈 십일 만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머나 먼 우주여행을 꿈꾸던 난장이는 결국 벽돌공장의 굴뚝에서 투신자살을 해버리고,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은강시로 떠나와서 자동차 회사 등의 노동자 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나, 은아부동산의 젊은 투기꾼은 아파트 입주권을 시세보다 사 만원씩이나 더 비싸게 사서, 그 싹쓸이하다시피한 입주권들을 단숨에 이십만원씩의 시세차익을 올리고 되팔아 버리게 된다. 강북의 뉴타운 사업도 원주민의 입주비율이 20%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고, 대부분의 부동산 투기꾼들에게 그 입주권이 분양되고 말았던 것이다. 부자는 천국을 생각할 필요가 없지만, 가난한 자들은 늘 천국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자는 지옥에서 살 필요가 없지만, 가난한 자들은 늘 천국을 생각하면서도 그 지옥과도 같은 자본주의의 함정(덫)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덫에 친 짐승’은 자본주의의 함정에 빠진 도시빈민이 되고, “등덜미에 노란 깃발을 꾹꾹 꽂은 채 눈꺼풀 가득 도깨비불을 품고 있는 놈”은 자본주의의 덫을 설치한 부자가 된다.
도깨비란 무엇인가? 도깨비란 허주虛主와 독각귀獨脚鬼라고도 불리우고, 또한 망량魍魎과 이매魑魅로 불리우기도 한다. 원시신앙에 의해서 형성된 잡신雜神이기는 하지만, 음귀陰鬼로서의 귀신과는 매우 다르다고 한다. 도깨비는 사람이 죽은 후에 탄생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일상생활의 도구로 쓰다가 버린 물체에서 생성된다고 한다. 헌 빗자루, 짚신, 부지깽이, 오래된 가구들이 바로 그것이고, 그 도깨비들은 정체불명의 도깨비불을 켜고 나타나는 것이 그 특징적이라고 할 수가 있다({백과사전} 참조). 도깨비는, 그러나 정체불명의 괴물이며, 우리 인간들을 이롭게 하기 보다는 수많은 피해를 입히는 괴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 도깨비 놀음은 이상야릇한 놀음이며, 그 갈피를 종잡을 수 없는 놀음을 뜻한다. 도깨비가 나타나면 인간 사회가 더없이 혼탁해지고 그 모든 인간 관계가 파탄을 맞이하게 된다. 자본가들은 시간과 공간마저도 분할하여 그것마저도 돈으로 만들어낸 도깨비들이며, 오직, 더 많은 돈을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생존권을 박탈해버린 도깨비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집은 단순히 거주의 공간이지, 재화의 공간이 아니다. 집 한 채는 한 가정이 살 수 있는 공간이며, 따라서 그의 가정이 살 수 있는 집이 있으면 더 이상의 집은 아무런 소용도 없게 된다. 하지만 부유한 자는 더 많은 집을 소유하면서 도시빈민들로부터 값비싼 임대수익을 올리고, 또, 그리고, 그 이익을 위하여 대부분의 재개발지역에 더 많은 투기를 일 삼게 된다. “등덜미에 노란 깃발을 꾹꾹” 꽂았다는 것은 그 도깨비--자본가들이 설정해놓은 경계이고, “눈꺼풀 가득 도깨비불을 품고 있는 놈”은 다시는 그 도시빈민들이 되돌아오지 못하도록 보초를 서는 파수꾼에 지나지 않게 된다.
시간도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재화가 되었고, 공간도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재화가 되었다. 특권이란 힘이며, 그 힘은 포크레인이 된다. 포크레인은 가장 날카롭고 사나운 발톱과 부리를 지닌 독수리가 되고, 그 독수리들이 “달겨들어 갈기갈기 뜯을 때마다” “헤엄치는 별들”, 즉, 이 도시의 빈민들은 “시멘트벽과 벽 사이에 숨었다가 토악질을 하며” 쓰러져 가게 된다. 더 이상 갈 곳도, 돌아갈 곳도 없는 철거민들이 온몸으로 몸져눕거나 저항을 하게 되면, 그들은 경찰기동대와 수천, 또는 수백 명의 철거반원들과 함께, 또, 그리고, 담당공무원들과 중장비들을 동원하여, 그야말로 인정사정없이 강제철거집행을 강행하게 된다. 김윤 시인의 [헐리다]는 그 강제철거가 집행된 “언덕 아래 금오아파트”를 노래하고 있는 시이며, 그 살풍경한 광경들 앞에서 참을 수 없는 좌절감을 노래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누가 서랍 속에 두고 간 슬픔들이 저 혼자 꼬리가 돋은 거다 창살 선반 위 항아리 속 아직 붉게 삭고 있는 낭패와 남루의 이름들”이 바로 그것을 말해주고, 또한, “수백 개의 문과 문을 지나 기둥들이 노을을 받고 서 있는, 석면가루 지천으로 화산재처럼 날리는 저 유적지”가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이때의 ‘헐리다’라는 동사는 ‘집이 헐리다’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좀더 깊이 있게, 그 “낭패와 남루의 이름들”을 생각해본다면,
1, 집이 헐리다;
2, 몸과 마음이 헐리다;
3, 꿈이 헐리다;
4, 삶(생명)이 헐리다;
라는, 여러 뜻으로도 그 의미 영역을 넓혀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도깨비(자본)의 힘은 위대하고, 또, 위대하다. 그들은 도덕과 법과 질서를 그들의 손아귀에 넣고, 그 무소불위의 힘으로 시간과 공간마저도 제멋대로 재단해낸다. 시간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고, 공간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다. 물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고, 맑은 공기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다. 우리 인간들은 도깨비에게 고용된 노예이며, 그 도깨비들을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들의 몸마저도 인육人肉으로 바치는 충신忠臣들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집을 헐리고 있는 사람들, 오늘도 몸과 마음이 헐리고 있는 사람들, 오늘도 만인의 평등과 자유와 인간의 행복에 대한 꿈이 헐리고 있는 사람들, 오늘도 끝끝내는 마치, 이 지구와 우주의 종말처럼, “석면가루가 지천으로 날리는 저 유적지”를 바라보며, 그토록 불결하고 비위생적인 주거환경 속에서 자기 자신의 삶과 생명이 헐리고 있는 사람들----.
도깨비의 시대는 너무나도 사악하고, 또, 사악하다. 그들은 그들의 이익을 위하여 “텅 빈 주차장 건너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이 파랗게 얼었다 긴 등줄기 가득 죽은 회로들을 싣고 칠흑 같은 길이 어디로 가고 있다”라는 시구에서처럼, 타인들의 지상낙원을 불모지대의 동토로 연출해냈지만, 그러나 그들의 삶마저도 최후의 종말을 향해가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엘리뇨와 라니냐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북극과 남극과 알프스와 킬리만자로와 히말리야의 만년설과 빙산들이 녹아내리고 있으며, 이상고온과 이상저온, 그리고 대형홍수와 대형폭설 등의 자연의 재앙 앞에서 그 도깨비들의 마법의 힘은 더 이상의 그 신통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김윤 시인의 [헐리다]라는 시는 도깨비(자본가)들의 집과 몸과 마음과, 그리고, 그들의 꿈과 삶과 삶의 터전(지구)도 ‘헐리고 있다’라는 뜻으로도 읽어야 하며,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가장 날카롭고 예리한 문명비판의 시로도 읽어야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