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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정치 수업 - 이인미
‘인간 실종 시대’에 고민하는 ‘인간다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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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개인들은 서로를 위협하고
외로움이 공동체를 좀먹는 오늘날,
한나 아렌트의 사유로 깨우는
우리 안의 잠든 인간성
10여 년간 한나 아렌트를 연구하고, 평생 환경과 시민운동에 전념해온 성공회대학교 연구교수 이인미는 우리가 중요한 분기점에 섰다고 평가한다. 단순히 삶의 질이 하락하는 차원을 넘어, 인간성 자체가 위협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
저자는 이와 유사한 인식을 20세기의 정치사상가 아렌트에게서 찾는다. 제2차 세계대전을 몸소 겪은 아렌트는 원자폭탄이 투하된 1945년 이후를 “어두운 시대”로 보았다. 막강한 이기를 손에 넣고, 또 사용해본 인간은 그 힘에 취하거나 두려움을 느끼며 갈팡질팡했다. 무엇보다 서로가 서로를 ‘위협’으로 여긴 탓에 소통 불가능성이 뿌리내렸다.
이로써 ‘외로움’은 사회구조적 문제가 되었다.
저자가 보기에 아렌트가 살던 20세기 중반과 지금은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시대든 각자도생을 강요당한 사회에서 인간은 함께 있어도 외롭다. 소통할 인간을 잃은 ‘인간 실종 시대’에 우리는 스스로 고립을 택하거나, 타인에게 분노를 쏟아낼 뿐이다.
책은 《인간의 조건》부터 《전체주의의 기원》까지 아렌트의 대표 도서 15권을 따라 ‘인간’, ‘정치’, ‘공동체’, ‘이해’, ‘세계’에 눌어붙은 외로움의 폐해를 살핀다. 그 과정에서 독자는 초연결된 우리가 어째서 고립감에 시달리는지, 고립된 개인은 왜 폭력에 물드는지, 나쁜 정치는 어떻게 외로움을 악용하는지, 전체주의가 여전히 가능한 이유는 무엇인지 등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말할 수 있는가?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태어남)만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기적”이라고. 즉 우리는 우리의 희망이다. 모든 디스토피아적 전망을 넘어 저 희망에 가닿는 것, 그것이 다시 한번 아렌트를 읽는 이유다
"아렌트는 외로움의 문제를 무려 <비전체주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전체주의 지도자를 맞이할 자세를 갖추게 되는> 계기로 풀이한 바 있다. "
출판사서평
“인간다운 삶은 어떻게 흔들리는가”
무사유부터 전체주의까지, 외로움의 결과들
아렌트의 저서들을 붙박이별 삼아 외로움의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이 책은 ‘아렌트 내비게이션’이라 부를 만하다. 저자는 각각의 저서가 어떠한 사유와 개념을 통해 외로움을 경고하고, 또 극복의 실마리를 제시하는지 소개한다.
아렌트의 대표작 《인간의 조건》은 다른 존재들과 구별되는 인간의 조건으로 ‘행위’를 꼽는다. 행위란 생각을 나누는 활동이다. 일종의 소통인데, 단순한 교류와 다르다. SNS로 수많은 사람과 초연결되어 안부를 묻고 근황을 뽐낸다고 해 진정한 소통이라 부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보다는 자발적으로, 또 동등하게 서로의 관점을 드러내고 협의하며 토론하는 과정이 행위다. 마치 이상적인 정치와 비슷해 보이지 않는가? 실제로 아렌트는 행위를 ‘정치’로 정의했다. “행위는 정치”고, 따라서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25~27쪽, 45쪽).
여기에 외로움이 끼어들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외로운 인간은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는 외톨이, 심지어 자기 자신과도 접촉하지 않는 외톨이”다. 소통(접촉)하지 않으니, 생각을 나눌 수 없고, 종국에는 생각하는 능력 자체를 잃는다. 검토하고 비판하지 않으므로 옳고 그름을 가리지 못한다. 단지 시키는 대로 따를 뿐이다. 거리를 가득 매운 각종 ‘○○○부대’를 떠올려보라. 《전체주의의 기원》은 이들 “성난 개인”이야말로 “전체주의 지배의 이상적인 신하”라고 꼬집는다(100쪽). 누군가와 강하게 동일시하면서도 그 누군가를 감히 평가하지 않는 이들, 자기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구호를 공격적으로 내뱉는 이들, 그래서 아무 논리 없이 오직 공포로만 지배하거나 지배받는 이들이 출몰한다면 경계해야 한다(104~109쪽). 그들이 정치를 질식시킨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개할 방법으로 《공화국의 위기》는 ‘시민불복종’을 제안한다(170~171쪽). 건강한 시민은 공동체를 향한 위협에 순순히 복종하지 않으며, 때로는 국가권력에 맞설 정도로 강력히 연대한다. 실제로 우리는 불과 몇 년 전에 부정한 권력을 평화적으로 몰아낸 경험이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짙은 위기감에도 왜 연대하지 못하는가? 문제는 역시 외로움이다. ‘우리’라는 개념 자체가 실종된 탓에, 모두가 똑같이 문제의식을 느껴도, 아무도 손잡지 않는다. 외로움에 잠식당한 사회에서 연대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여전히 만날 수 있다”
이해의 불가능성과 사랑의 가능성
우리는 어떻게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 저자는 그 실마리를 《라헬 파른하겐》에서 언급된 ‘이해’에서 찾는다. 아렌트는 이해를 “동의와 동조와 동감 없이” 상대의 처지에 서보는 일로 이해했다. 상대를 무조건 포용하자는 말이 아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판단을 미루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는 것이다(232쪽). 동시에 아렌트는 인간의 마음속엔 도저히 파악되지 않는 부분이 있음을 일찍이 인정했다. 쉽게 말해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것이다(49~50쪽). 그런즉 이해란 판단할 수 없음과 알 수 없음을 상정한, 겸허한 다가섬이다.
따라서 이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행위다. 온갖 불가능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해하려는 시도와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 이러한 이해는 오롯이 내 의지에 달린 만큼 쉽지 않다. 하지만 그렇기에 생면부지의 상대와 ‘동행’할 기회가 된다(216~219쪽). 바로 이 지점에서 외로움은 힘을 잃는다. 그렇게 함께하게 된 이들이 세상을 바꾼다. 비근한 예로 오늘날 우리가 당연히 누리는 민주주의는 수많은 이가 동행하며 피를 쏟은 결과다.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한발 더 나아가 이해의 끝에서 우리가 ‘세계’와 만난다고 설명한다. 인간은 모두 나름의 방식대로 세계를 경험한다. 그러므로 상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상대가 경험한 세계와 만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세계의 지평이 확장됨은 물론이고, 상대 또한 나와 별다르지 않게 세계를 살아가는 “숙명의 동반자”임을 알게 된다(294~297쪽). 아렌트는 이러한 깨달음에서 “이웃(세계)사랑”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외로운 인간은 이해와 사랑을 통해 이웃에게 나아가고, 그럼으로써 세계와 만난다(299~300쪽).
“다시 시작할 용기를 건네다”
정치에 대한 오해와 진정한 정치적 인간
아렌트의 관점에서 본다면, 현실의 모든 문제는 정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정치를 행위로 이해한 아렌트는 어떤 절차와 규칙, 목적과 결과보다도 각자의 생각을 나누는 과정 자체에 초점을 맞췄다. 즉 정치가 “선거운동, 공천, 투표, 자금, 정쟁 그리고 정권 창출을 위한 다툼이나 국회에서 고성이 오가는 장면”을 넘어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길 바랐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 이해는 여전히 경직되고 협소하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가나 정당이 선거에서 이겨 권력을 차지하기만 하면 세상이 좀 더 나아질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래서 정말 세상은 나아졌는가? 누구도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하지 못할 것이다.
심각한 문제가 또 있다. 《과거와 미래 사이》는 정치가 쪼그라들어 제 역할을 못하는 틈에 ‘거짓’이 싹튼다고 경고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정치(행위)의 핵심은 생각과 소통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정치적인 인간은 각종 사안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그 견해를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이를 그만두는 순간 “사실적 진리를 거짓말들로 교체”하는 일이 발생해도 알 수 없다. 이는 가짜뉴스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72~73쪽).
결국 우리를 괴롭게 하는 각종 문제는 스스로 ‘정치’를 포기하고, 소위 ‘현실정치’에만 기대를 걸고 있는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되는지 모른다. 이러한 책임 전가의 이면에도 외로움이 도사리고 있다. 외로운 인간은 축구 경기 보듯 정치를 대한다. 자신이 필드(공적 영역)에 나가 함께 뛸 생각은 하지 않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무조건적인 상찬과 비난에만 열을 올린다. 오늘날 우리가 생생히 경험하듯이, 이 경기에는 승자가 없다. 단지 정치혐오만이 남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것은 결국 정치의 회복뿐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국회의원 배지 따위가 아니다. “설득력 있게 내 의견을 발언하고, 신중하게 남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바로 그때 정치는 정치다워지고, 인간은 외로움의 장막을 걷어낸다(57~58쪽). 그 첫걸음을 내디딜 용기를 건네는 것, 이것이 ‘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정치 수업’의 진짜 목적이다.
책 속으로
가짜뉴스를 만드는 사람들은 실제 세계에서 의미를 읽어내는 감각을 이미 상실한 것일 수 있다. 그들이 가짜뉴스를 내게 전하며 자기처럼 의미를 읽어내는 감각을 잃어버리자고 제안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당당히 거부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거부하지 않는(못하는) 사람도 더러 있는 것 같다.
_ 72~73쪽 〈1장│정치에도 연습이 필요해〉 중에서
전체주의 운동이 유독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초록은 동색이야’, ‘오십보백보니까’, ‘우리가 남이가’ 같은 사고방식에 물든 사람들이다. 이들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 (…) 한마디로 사실과 허구(경험의 진실)의 차이, 참과 거짓(사유의 표준)의 차이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간주하는 사람들이 바로 “전체주의 지배의 이상적인 신하”다.
_ 87쪽 〈2장│‘답정너’ 사회의 전체주의〉 중에서
인간의 본성과 환경은 매 순간 상호 작용한다. 따라서 우리는 본성이 주도하는 길만도 아니고 환경이 주관하는 길만도 아닌, 제3의 길을 개척한다.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도 그리 살았다.
_ 87쪽 〈2장│어둠 속에서 나 자신이 되어가는 여정〉 중에서
나는 내가 속한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와 목표에 동조하는 주류를 소망하는가(동화). 아니면 사회에서 혼자 동떨어지더라도 더 높고 이상적인 가치와 목표를 별도로 설정하는 비주류를 추구하는가(게토).
_ 140쪽 〈2장│정체성을 찾아서〉 중에서
아렌트에 따르면 혁명은 인간적인 것 같기도 하고 인간적인 것 너머의 것 같기도 하다. (…) 실제로 프랑스혁명은 이미 진행되는 와중에 인간적인 것, 인간이 계획해 만들어내고자 하는 사회의 모습 ‘너머’를 지향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조절할 수 없는 지점으로 나아가버린 것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렌트는 혁명이 정치적 영역에서의 시작과 탄생을 의미하며, 그것이 자유를 지시한다고 강조한다.
_ 150~151쪽 〈3장│인간적인 것 너머의 것을 만드는 자유〉 중에서
아렌트에 따르면 시민불복종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공화국의 시민들이 자기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고, 정치적 의미에서 제대로 기능하려고 발버둥질하는 반응 중 하나다. 제대로 기능하는 공화국이라면 ‘자발적 결사’의 꼴로 얼마든지 자유롭게 나타날 시민의 행위!
_ 160쪽 〈3장│시민불복종의 조건: 개인의 도덕성은 중요한가〉 중에서
공공성은 공익에 대조되거나 심지어 대립한다. 공공성은 특정한 공익을 괘념치 않는다. 공공성은 공익이든 사익이든 이익의 문제를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그리고 공개적으로 검토받는 것이 공공성의 기초다.
_ 177쪽 〈3장│공익과 공공성, 편파적이거나 공정한거나〉 중에서
그 익명의 지도자는 유대인들이 가스를 통해 편안하게 죽음을 맞는다고 믿었다! 물론 아이히만도 그렇게 생각했다. 나치에서 차곡차곡 승진한 대부분의 관료는 타인에게 편안한 죽음을 제공하는 일에 나름의 ‘배려’가 깃들어 있다고 느꼈다. (…) 배려를 느끼는 쪽으로 양심의 진로가 정해진다면, 가책을 느낄 이유도, 필요도 없다.
_ 201쪽 〈4장│아이히만에게도 양심은 있었다〉 중에서
아렌트에게서 느껴지는 위로의 기운은 사실 약간 서늘하다. 이 위로는 자기 비하와 열등의식에 맞서 스스로 싸울 힘을 내게 한다. 스스로 싸울 힘이다. 그 힘은 모든 사람이 갖추고자 노력하는, 아니 갖춰야 마땅한 ‘주체성(subjectivity)’을 지향한다. (…) 건강한 주체성은 건강한 자기 정체성 파악(identify)과 궤를 같이한다.
_ 223쪽 〈4장│나를 이해하는 일에서 시작하기〉 중에서
아렌트에 따르면 사유는 홀로 있되 동료 한 명이 끝내 떠나지 않은 채 같이 있으므로 일어날 수 있는 정신 활동이다. 그 동료란 타인일 수도 있지만, 바로 나 자신일수도 있다. 그리하여 사유는 ‘홀로 있으면서 나 자신과 접촉하는’ 것이다.
_ 270~271쪽 〈5장│외로움에서 벗어날 실마리 ‘하나 속의 둘’〉 중에서
아렌트는 나와 이웃이 같이 있는 세계를 정치적 공간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이 세계란 이웃만 있고 내가 없는 곳도 아니며, 나만 있고 이웃이 없는 곳도 아니다. 아렌트는 이 세계에서 인간들이 저마다 다른 개인으로서, 또 동등하고 든든한 동료로서 이웃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다고 믿은 듯하다.
_ 300쪽 〈5장│인간의 조건과 세계사랑의 시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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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론적인 천착으론 이런식으루 말하지요
현실은 또 다른건데 태극기부대는 나라의 수장이라는 것의 권위를 무시해도 된다는 커다란 메세지를 주기도 했지요
윤통을 윤씨로부르든 윤세끼라 부르든 아무도 머라안해 ㅎㅎ
먼저 존중하지 않으믄 존중받지 못하는 시대라서리
권위주의로 회귀하면서, 욕해도 뭐라고는 안하는데 조사 받으러 나오라고는 하는 것 같습니다. 윤석열차 사건도 그렇고 풍자라는 것을 이해해주지 않습니다.
태극기부대가 주는 메세지가 그런게 또 있었군요 ㅎㅎㅎㅎ
아렌트 책은 꼭 읽어봐야 겠습니다 ^^
홍범도 흉상 철거 한다고 난리칠때 어느 고등학생이 한말이라고 뉴스기사에 나온게 참 인상깊었습니다.
"When they go low, we go high!(그들은 저급하게 가도, 우리는 품위 있게 가자)"
@리리 그렇지요 그들이 권위를 추락시키는 동기가 불순해서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죠 그 효과가 저렇게 나타나니까요
동기가 어떤지는 그래서 중요하구요
그러면서 한건 한거라고 기록되니 그로인해 벌어진 것에 대해선 거스를수 없는 것이 되기도 하구요 서로 다른 구분이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