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서 꽃점
이혜미
능소화로 붉어지는 낯빛을 가져 내 여자는 농담을 잘했다 뜨거운 담장 위를 기어오르듯 홧홧해진 양 볼을 감싸면
모든 일이 칠월의 장난 같았다 봉숭아 물든 손톱이 저승길을 밝힌대, 마주 댄 입술이 주름지도록 깨물며 내 여자는
고백했다 멍의 빛깔로 기억되는 한때가 있었다고 가장 아프게 하는 사람을 사랑하기로 결심한 적도 싸대기 맞듯 번쩍
붉어지던 시간도 있었다고 능소화가 여름 한복판을 찢어발기며 피어나듯 산 채로 활활 타올라도 도무지 창피한 일은
아니었다고 편관에 역마, 도화에 비견까지 너 앞으로 어떻게 살래? 여덟 개의 꽃잎을 펼쳐보며 고개를 내젓던 여자 도
통 울 줄도 모르던 내 여자는 얼룩진 봉숭아 손끝을 흔들며 소리쳤다 점 보게 하는 씨발 것은 갖다 버려! 그렇지 선명한
것들엔 설명이 필요 없지 우리 그냥 같이 살까? 염천 더위처럼 내 여자의 귓불이 한껏 달아오를 때 농담이야, 그래도 우
리 죽으면 꼭 팔짱 끼고 저무는 황천으로 가자 석양이 타오를 때 세계는 온통 만개한 능소화 속이니까 눈멀고 귀먹어도
손끝을 타고 기어오르는 꽃송이를 등불 삼아 가자, 내중내 꿈꿔오던 사랑스런 지옥불 속으로
이혜미
경기 안양 출생. 2006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으로 시 등단.
시집 『보라의 바깥』 『뜻밖의 바닐라』 『빛의 자격을 얻어』 『흉터 쿠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