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 관세음의 노래 / 서정주
그리움으로 여기 섰노라
조수와 같은 그리움으로,
이 싸늘한 돌과 돌 사이
얼크러지는 칡넝쿨 밑에
푸른 숨결은 내것이로다.
세월이 아조 나를 못쓰는 티끌로서
허공에, 허공에, 돌리기까지는
부풀어 오르는 가슴 속에 파도와
이 사랑은 내것이로다.
오고 가는 바람 속에 지새는 나날이여,
땅 속에 파묻힌 찬란한 서라벌.
땅 속에 파묻힌 꽃 같은 남녀들이여.
오ㅡ 생겨 났으면, 생겨 났으면,
나보다도 더 '나'를 사랑하는 이
천년을, 천년을, 사랑하는 이
새로 햇볕에 생겨 났으면
새로 햇볕에 생겨 나와서
어둠속에 날 가게 했으면,
사랑한다고...사랑한다고...
이 한 마디 말 임께 아뢰고, 나도,
인제는 바다에 돌아갔으면!
하나 나는 여기 섰노라.
앉아계시는 석가의 곁에
허리에 쬐그만 香囊(향낭)을 차고
이 싸늘한 바윗속에서
날이 날마다 들이쉬고 내쉬는
푸른 숨결은
아, 아직도 내것이로다.
치자꽃 설화
박규리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각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문 하나만 열어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꽃이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소리만 저홀로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가랑비 엷게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 가는 것이 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와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 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것 같았습니다
한 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 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 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여승 / 송수권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종일 방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집 처마 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 발치로 바리때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 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 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을 뒤돌아 뛰어 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 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 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 흐르기를 기도하며 시를 쓴다
선암사 / 정호승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승무(僧舞) / 조지훈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 없이 녹는 밤에
오동(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 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운문사 /서연정
흰 고무신 코에 쓰인
볼 見자
흰 고무신 코에 그려진
돛단배
단정하게 저녁 마당 지나다가도
푸른 물너울 일으키며 법고가 울면
따라 우는 제 마음
가락에 얹어 염불을 왼다
날개에 묻어 있는 물기를 말리기 위해
마당 가득 휘몰아치는 검은 잠자리
어디서 묻혀 오는지 모르지만
언제나 안쪽이 젖어 있는
내 목숨의 날개도 덩달아 휘몰아칠 때
다정하고 씩씩하게 내려 쌓이는 울울창창 땅거미
흰 개미 질끈 감긴
볼 見자 위로
흰 개미 발가락에 매인
돛단배 위로
삼각산 진관사 /潤疇 목필균
사악한 손길 피해
왕의 목숨을 구한 진관대사가 창건한
천 년 고찰
나라 잃은 불심이 무슨 소용일까
칠성각 깊숙이 숨겨둔 얼룩진 태극기에 새겨진
백초월 스님의 호국 불심은
진관사 입구에서 일주문까지 길을 열었다
백초월길 따라 들어가다 보면
극락문 열겠다는 중생들
살아온 마음길이 정직했는지
들여다 보는 아미타부처님
바위에 새겨진 연화대에 앉아 있고
해탈문 지나면 극락일까
대웅전 뜰을 붉게 물들이는
연꽃이 합장하며 올리는 예불이
평안히 흘러가는데
진관대사, 백초월 스님이 치는 죽비는
물불은 계곡물 소리로
삼각산 도량을 지키고 있다
겨울 동학사에서 /김시천
겨울 동학사에 눈이 내린다
세상 인연 끊고 사는 산사에도
눈은 내려 쌓이고
저녁 예불 소리 더욱 적막한데
돌아보면 까마득한 하늘 모퉁이
아, 그래 여기도 사람이 살아
산 너머 구름으로나 떠 있던 세상 소식들이
눈이 되어 내리는구나
여기도 사람이 살아
굴뚝에 저녁 연기 피어 오르고
세상 인연 아직 남아 있어
먼 곳의 그리움 더욱 간절하구나
하나 둘 등불도 타오르는구나
밤새 독경 소리 그치지 않는구나
사람 사는 일이란 이렇듯 간절한 것이었구나
간간이 들리는 노스님 기침 소리에
바람마저 숨을 죽인
겨울 동학사에 눈이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