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도선 車道善(1863 ~ 1939)】
「 "1907년 의병부대를 조직, 홍범도 의병부대와 연합 무장항일투쟁 전개」
1863년 1월 29일 함경남도 북청군(北靑郡)에서 태어났다. 함께 활동한 의병 차도순(車道淳)의 형이다. 금광의 광부로 일하였으며, 대한제국 진위대에 입대해 하사로 복무하였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高宗)이 강제로 퇴위되고 대한제국 군대도 해산당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해 8월 태양욱(太陽郁)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후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11월 16일 약 70명의 의병을 이끌고 당시 일진회(一進會) 회원이자 북청군 안산면(安山面) 면장인 주도익(朱道翼)을 처단하였다. 주도익은 당시 주민들에게 단발을 강요하고 각종 세금을 거두어 사취하면서 일진회에 강제로 가입시키는 등 갖은 방법으로 매국적 행동을 하고 있었다. 이처럼 친일세력 등을 처단함으로써 지역민들의 큰 호응을 얻은 의병부대가 후치령(厚峙嶺) 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하자, 각지의 산포수들이 동참하며 부대원이 6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 무렵 의병을 일으킨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의병부대와 합류해 연합부대를 조직하면서 부대원은 약 1,000명으로 늘어났다. 이때 홍범도와 더불어 연합의병부대의 부독(副督)을 각각 맡았고, 총대장직인 도독(都督)에는 안산사(案山社) 포계(砲契)의 계장이었던 연장자 임창근(林昌根)을 예우해 비워두었다. 의병부대는 총 68명의 간부 아래 7개 분대로 병력을 나누어 체계적으로 조직하였다.
같은 해 11월 22월 연합의병부대는 일본군과 4일 동안 이어진 후치령전투를 시작으로 치열하게 무장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1월 23일 북청에서 혜산진(惠山鎭)으로 향하던 일본군을 신야(新谷) 소위와 병사 2명, 우편마차 호위병 등을 급습해 처단하고 무기를 노획하였다. 11월 24일에는 북청수비대로부터 파견되어 오는 미야베(宮部) 대위와 57명의 일본군을 후치령에서 처단하였다. 12월 중순 북청수비대에서 파견된 아오토(靑砥) 대위와 50여 명의 일본군과 교전해 승리하였고, 삼수군(三水郡) 남쪽에 있는 중평장(仲坪場)에서 함흥수비대로부터 파견된 우에츠키(上月) 소위와 기병 16기를 격퇴하기도 하였다.
연합의병부대의 활약이 두드러지자, 같은 해 12월 말 일본군은 각지의 수비대들을 모아 연합의병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삼수성(三水城)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이때 400여 명의 대원들을 지휘하며 성벽에 의지해 3~4시간에 걸쳐 방어전을 펼친 결과 일본군을 혜산진으로 물러나도록 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야음을 틈타 퇴각해야 했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패배 소식을 접한 동부수비관구 사령관 마루이(丸井) 소장은 1908년 1월 초 북청에 있던 일본군 보병 제50연대 제3대대장 미키(三木) 소좌에게 200명의 병력으로 재차 연합부대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자 연합의병부대는 삼수 지역을 포기하고 후퇴하였지만, 대신 수비가 약해진 갑산수비대를 공격하고 귤별리(橘別里)에서 일본군을 격퇴하는 등 항일투쟁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일본군의 추적이 계속되면서 점점 전투를 지속하기가 어려워졌고, 같은 해 2월부터는 일본군이 갑산군수 등 관리들을 활용해 치밀한 귀순공작을 펼치며 회유하려고 하였다.
1908년 3월 6일 의병부대 대원 250여 명을 이끌고 일본군 수비대가 있는 신풍리(新豊里)로 가서 주둔시킨 후, 일본군과의 회담을 통해 명단을 제출하는 대신 면죄증을 발급받기로 하였다. 하지만 귀순한 부대원들과 함께 일본군으로부터 무장해제를 당하였고, 그 과정에서 저항하던 태양욱이 총격에 맞아 사망하였다. 이후 구속된 상태로 있다가, 1908년 5월 7일 갑산헌병분견소를 탈출하였다. 그리고 황수원(黃水院)으로 가서 다시 의병을 모집하고, 홍범도와 연합해 항일무장투쟁을 이어갔다. 그해 10월 21일 8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함흥군에서 일본군 토벌대와 교전하였고, 11월 10일 30여 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함흥군 기곡면(岐谷面)을 급습하는 등 소규모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09년 초 국내에서 더이상 의병활동을 지속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후,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다시 노령으로 들어가 오랫동안 함께 활동했던 홍범도와 만나 부대를 재건하고 다시 국내로 진공할 준비를 하였다.
1919년 4월에는 신봉황(申鳳荒)과 함께 충의사(忠義士)를 조직하고, 지린성(吉林省) 어무현(額穆縣)의 황국보(黃菊甫) 등과 연락해 200명의 독립군을 모집한 뒤 훈련시켜 국내로 진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해 9월 푸쑹현(撫松縣)에서 약 500명의 독립군을 모집해 훈련시키는 등 무장항일투쟁 노선을 견지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