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의 등장 삿3:7~11절 2024.11.10. 주일오전 말씀
* 하나님에 대한 무지
오늘 본문에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죄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7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고 합니다. 도대체 얼마나 무지하면 하나님만 섬겨야 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은 고의로 '이제부터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자'라고 작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몰라 이방신을 섬긴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한 무지로 이방 신을 섬기는 진노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렸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해서 가나안 땅에 살게 되었는지를 잊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기 위해서 가나안 열국을 남겨 놓았을 때 그들과 혼인하여 한 짝이 되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어떤 언약을 하셨는지, 하나님이 가나안에 대해서 어떻게 하라고 지시하셨는지의 차원에서 가나안 열국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의 유익을 위해서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모르는 무지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여호와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말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생각아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 주변에 놓여 있는 모든 것들, 즉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는 신앙의 차원에서 모든 일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일어나는 무수히 많은 사건들을 내 삶의 편안함이라는 차원이 아니라 진리의 차원에서 바라보고 이해하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 집안에 어려운 문제가 발생할 때, 그 문제해결을 위해서만 집착하지 말고 진리의 차원에서 그 문제를 생각하는 십자가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정말 무지에 빠지면 문제 해결를 위해 신앙도 잠깐 뒤로 미룰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이스라엘과 같은 무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고 아는 사람이라면,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보이는 일인가?'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즉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고 편안해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을 통해서 내 배후에서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증언되고 그리스도가 보여질 수 있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자로 사는 선택받은 자의 삶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성도는 어떤 문제에서든 신앙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고 내가 편안해지는 것보다도 내 배후에서 나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증언되어지고 그리스도로 살아가는데 더 큰 비중을 두게 될 것입니다.
* 여호와의 영이 임한 자
이스라엘은 진리 중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니 말씀이니 이런 것들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관심은 오직 자신들의 인생이었습니다. 좀 더 좋은 삶을 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세라와 바알을 섬겼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은 조치를취합니다. 그것은 8절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을 섬겼더니"라는 말씀대로 이스라엘을 이방인의 손에 붙여서 8년 간을 그들을 섬기며 살아가도록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8년 간의 고생을 하면서 여호와께 부르짖게 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옷니엘이라는 사사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십니다. 9~10절에 여기 보면 옷니엘을 가리켜서 구원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옷니엘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만한 힘있는 용사가 아닙니다. 10절에 보면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했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 이스라엘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옷니엘이란 사사의 등장은 누구 때문입니까? 지난 시간에 말한 대로 이스라엘 안에 사사가 등장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결국 옷니엘이란 사사가 등장 한 것은 이스라엘이 바른 길로 가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직접 그들을 억압하고 있는 이방인과 싸우라고 하지 않고 옷니엘이라는 사사를 세워서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사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자체적으로 신앙의 바른 길을 찾아 갈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옷니엘이라고 해서 스스로 신앙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옷니엘도 그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했기에 구원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옷니엘이 메소보다미아 왕과 싸울 때도 여호와께서 구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셨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하시고자 하십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바른 신앙의 길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종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제대로 된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증언하기 위한 삶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시고 사사를 등장시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부르짖게 된 것은 이방인의 손에 그들을 붙이신 하나님의 징계의 결과입니다. 여호와께 부르짖도록 만드시고, 사사를 세우시고, 사사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하게 하시고, 이방인을 사사의 손에 붙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갈 자질이 없습니다. 인간이 사는 길은 오직 여호와의 영이 그들에게 임하는 것뿐입니다.
* 피의 은혜로만 산다는 증언자로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인간의 본성 그대로 살아가도록 그냥 놔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이기에 구원자를 세워서 그들을 바른 신앙의 길로 되돌려 세우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사사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이방신을 섬겼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고, 그들이 하나님을 부르는 자가 되었다면 그것도 역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중요함을 깨닫고 그 은혜를 증거 하는 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가나안 땅은 돈이 필요 없는 땅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던 땅이고 그 약속을 이루심으로서 들어오게 된 땅이기 때문에 가나안에서의 삶의 방식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은혜만이 살 수 있는 땅이며, 이스라엘은 그러한 가나안 땅에서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산다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의 삶에 눈을 돌리고 스스로 살길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은혜보다는 육신적으로 사는데 필요한 것에 눈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이 가야 할 길로 되돌리기 위해서 징계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부르짖도록 하시고 영이 임한 자를 구원자로 세워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속에 영이 임한 자는 사사입니다. 영이 임했다는 것은 진리를 중심으로 사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라도 진리를 중심으로 살아가지 않을 때 그를 책망하고 나무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우리 앞에는 여호와의 영이 임하셨던 구원자가 서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은 우리가 이스라엘처럼 진리로 살지 않고 자신을 중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분이 우리 앞에서 진리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임을 증언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마다 진리로 살지 않는 우리의 허물을 발견해야 합니다.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관심을 두고 자랑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요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성도는 이미 돈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으로 살아가는 세계 속에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한 자로서 구원을 보여주는 증언자로 부름을 입은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영이 임한 성도는 피의 가치를 모르고 진리를 중심으로 살지 않은 자들에게 책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가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가지 못할 때 하나님은 그를 징계해서라도 성도의 길을 가도록 하시고 증언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