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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르라
□ 본문 : 요한복음 21장 18-19절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예수님께,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18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절입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19절의 상반절 그러니까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는 내용은, 18절의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요한 사도의 설명입니다. 요한 사도의 설명이 예수님 말씀 중간에 들어간 것입니다. 요한 사도의 설명을 빼면 베드로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와 같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 나를 따르라.”
15절부터 17절까지의 예수님의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의 결론은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 개인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동시에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6장24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하나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지만 예수님을 따라가지는 못하겠습니다.’ 이런 말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가 설령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할지라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아닙니다.
찬송가 260장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려 주 예수 십자가 지셨으니
기쁘게 부르세 할렐루야 나 구원 얻었네
찬송하세 찬송하게 주님 나를 구하셨네
찬송하세 찬송하가 주가 구원하셨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없습니다. 어떤 상황, 어떤 형편 속에서도 구원받은 것 하나만으로도 할렐루야 찬양할 수 있습니다.
※ 김선희 성도님이 한국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아니 앞으로도 잊혀 지지 않을 것 같은 귀한 고백을 들었습니다.
귀국을 앞두고 필요한 것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는데, 기도 가운데 주님께서 김 성도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구원했는데 무엇을 더 바라느냐?’ 주님의 음성을 듣고 김 성도님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신 것보다 더 큰 복이 없는데, 구원받은 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할 수밖에 없는데, 어느새 구원받은 복은 잊어버리고 이것저것 구하면서 왜 주님은 나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느냐고 불평했던 죄를 회개했다고 합니다.
20년 일본 생활에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이 최고의 복이라고, 이 복을 받았으니 자신은 감사할 것 밖에 없다고 고백하시는 김 성도님의 모습을 보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너무나 힘든 일을 만나면 구원의 복을 잠시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성령님께서 십자가의 구원을 생각나게 하실 때 김 성도님처럼 반응하게 됩니다. ‘내가 지금 무엇 때문에 이렇게 불평하고 낙심하고 있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셨는데, 이 놀라운 축복을 받은 내가 왜 이렇게 세상 것 때문에 불평하고 낙심하고 있었지? 도대체 지금 내가 뭐하고 있는 거지?’ 하고 말입니다.
죄를 지으면 구원의 기쁨과 감격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정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성령님께서 우리의 죄를 책망하실 때 회개하게 됩니다. ‘주님, 주님은 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온갖 수치와 고통을 당하시고 생명까지 주셨는데, 나는 주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내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주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주님보다 사람을 더 의지했습니다. 주님, 저를 용서해 주세요.’ 하고 말입니다. 회개를 통해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고 할렐루야 기쁨으로 찬양하게 됩니다. 이것이 정말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찬송가 260장 4절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떠날 때에 예수의 손목을 굳게 잡고
영원히 즐거운 천국에서 주 함께 살겠네
천국을 믿습니까? 지옥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절대 다른 것 붙잡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붙잡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따라갑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한눈을 팔고, 그래서 예수님 아닌 다른 것을 붙잡고 있음을 깨닫고 나면 얼른 회개하고 다시 예수님을 붙잡게 됩니다. 예수님 아닌 다른 것을 붙잡고 살면, 예수님 아닌 다른 것을 따라가면 지옥에 간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붙잡고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목사님, 아직은 제가 살아갈 날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즐거움 누리다가 늙어서 예수님을 따라가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교인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히 다룰 시간은 없지만 간단하게라도 언급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①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까지 주셨는데, 이토록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이신데, 어떻게 예수님을 놔두고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을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물론 우리 안에 여전히 육신의 소욕이 남아 있어서 때때로 세상을 바라보기도 하고, 또 세상 유혹에 넘어지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 예수님 따라가는 것을 포기하거나 뒤로 미룰 수 있겠습니까?
②천국을 믿는 사람, 천국에서 주님께서 주실 상이 있음을 믿는 사람은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 이 세상의 부귀영화도 헛된 것인데, 하물며 이 세상 즐거움을 위해 사는 인생이겠습니까! 천국을 믿는 사람은 더 이상 헛된 것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아니 살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주실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믿기 때문입니다.(벧전5:4)
③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사람은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신데, 어느 누가 살아갈 날이 많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신데, 어느 누가 죽음이 먼 훗날의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밤이라도 부르시면 하나님 앞에 가야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계획은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늘 밤이라도 우리의 생명을 취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부끄러움 없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살 수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헛된 것을 위해, 육신의 소욕을 위해 살지 마십시오.
④우리의 연약함을 믿는 사람은, 우리가 죄인임을 믿는 사람은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세상 즐거움을 위해 살고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과연 지금의 마음이 그때에도 남아 있을까요? 일평생 세상을 따라가던 사람이 죽음의 순간에 예수님을 붙잡을 수 있을까요? 과연 그럴 수 있는 믿음이 남아 있을까요?
교인들 가운데 시험에 들어서 교회생활을 당분간 쉬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것도 아니고, 영원히 교회를 떠나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안정될 때까지 잠시만 교회를 쉬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면 이런 생각까지 하겠습니까?
‘목사님, 3개월만 쉬겠습니다. 딱 3개월입니다. 그러면 마음도 안정이 될 것이고, 그 후에 다시 교회에 나오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이 한 가지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3개월 후에도 과연 교회에 다시 나오겠다는 마음이 남아 있을까요? 3개월이 10년이 되고 20년이 되고 30년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도 30년 뒤에라도 세상을 떠나 다시 예수님을 붙잡고 예수님을 따라가면 다행입니다. 실재로 그런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보세요. 그 분도 오랫동안 예수님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잖아요. 그러니까 저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십니까? 다시 돌아오는 사람보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정말 연약합니다. 그러니 자신의 믿음을 장담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정말 믿는다면 우리의 목적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정말 믿는다면 이제부터 우리가 걸어갈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좁은 길입니다. 예수님만 따라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인생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인생입니다. 18절 말씀처럼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던 인생입니다. 후반부는 주님의 뜻대로 살았던 인생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인생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당연하겠지요.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16장24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또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아이고, 성경은 이것이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3) 예수님을 믿기 전에 우리 모두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냈습니다.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그것이 죄인 줄도 모르고, 그렇게 사는 것이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2:2) 마귀의 지배를 받는 것인지도 모르고 내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던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자기 마음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곧 마귀를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코하마영광교회 창립20주년 감사예배시간에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유기성 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귀가 나타나서 여러분의 손을 붙잡고 함께 가자고 한다면 따라갈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곳이 아무리 좋은 곳이라고 해도 따라가겠습니까? 아무도 따라가지 않을 것입니다.
마귀가 끝내주는 곳이 있다고 하면 따라가겠습니까? 마귀가 죽여주는 곳이 있다고 하면 따라가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따라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재로는 적지 않은 교인들이 마귀를 따라갑니다.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할 때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 역사해서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도록 유혹합니다.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음성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육신의 소욕을 따라가지 말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19부터 21절까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명령입니다. 반드시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예수님을 따르라고 명령하십니까?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육체를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21절 말씀처럼 육체를 따라가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소욕은 생각보다 강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육신의 소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육신의 소욕은 끝까지 우리를 유혹할 것입니다. 이 육신의 소욕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만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축복의 길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베드로의 인생은 아무것도 잡지 못했던 빈 그물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물고기, 손에 잡히는 물고기를 많이 잡았다 할지라도 결국은 썩어져버릴 것들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아서 이 세상을 손에 넣었다 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결국은 아침안개처럼 사라져버릴 것들입니다. 마지막 날,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인생은 헛되고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인생은 헛되지 않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라갔던 베드로는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는 복된 인생을 살았습니다. 요한복음이 끝나면 사도행전이 시작됩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을 통해 주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구원의 역사입니다. 사도행전은 그중에서도 특별히 두 인물을 중심으로 복음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입니다. 예루살렘교회를 중심으로 한 베드로의 복음사역과 안디옥교회를 중심으로 한 바울의 복음사역입니다.
베드로가 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한 것은 오직 하나,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뿐입니다. 주님은 그 베드로를 통하여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연약해도 괜찮습니다. 실패했어도 괜찮습니다. 다시 일어나서 순종하면 됩니다. 이제부터 예수님만 따라가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우리를 통해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이보다 더 의미 있고 복된 인생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생명의 길이요, 축복의 길입니다.
2.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18)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19)
로마의 의한 기독교 박해가 극에 달하고 로마 당국이 초대교회의 지도자였던 베드로를 잡으려고 하자, 로마교회의 성도들은 베드로에게 로마를 떠나 피신할 것을 권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로마를 떠나 아피아(Appia)로 도망을 갑니다. 그 길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66권 성경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초대교회 때 기록된 문서들 가운데 신앙생활에 유익이 되는 중요한 문서들을 따로 엮어서 외경이라고 합니다. 그 외경 안에는 베드로행전이 있습니다. 베드로행전 35장을 보면 핍박을 피해 아피아로 가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을 나옵니다.
베드로가 성문에 다다랐을 때에 베드로는 주님께서 로마로 들어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향해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로마로 들어간단다.”
베드로가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주님께서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실 작정이란 말입니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단다. 베드로야, 내가 또 십자가에 못 박힐 수밖에 없구나.”
그 때 베드로는 정신이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크게 기뻐하며 주님을 찬미하면서 로마로 되돌아갔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바로 베드로 자신에게 일어나야 할 일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재철, 요한과 더불어 10, 홍성사, p,302에서 재인용)
바로 이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은 폴란드 작가 헨리크 솅키에비치가 소설 쿼바디스를 써서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던 죄인이 예수님과 똑같이 죽을 수 없다고 해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기를 청했다고 합니다. 사도 요한의 설명처럼 베드로는 두 팔을 벌리고 순교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5)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죽는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그리고 초대교회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처럼 순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는 일은 지금 이 시간에도 이 땅 어디에선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죽으면 삽니다.
일본이나 한국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순교라는 단어가 멀리 느껴집니다. 그래서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이미 장사지낸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3,4)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장사된 자들입니다. 우리는 죽은 자들입니다.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죽었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이제는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주인이십니다.
이미 예수님과 함께 죽었는데 육신의 죽음이 왜 두렵겠습니까? 물론 육신을 입고 있기에 죽음의 고통과 슬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뛰어넘는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었는데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라면 왜 죽음을 피하겠습니까? 기꺼이 순교의 길도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순교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영광은 없습니다.
한 번 죽습니다. 죽음을 피해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자신을 위해 살다가 세상을 위해 살다가 부끄럽고 후회스럽게 두려움 가운데 죽느냐, 아니면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영광스럽게 죽느냐 하는 것입니다.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위해 죽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1)
일본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는 베드로처럼, 초대교회의 수많은 순교자들처럼,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성도들처럼 예수님을 따르다가 죽는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죄악 많은 이 세상을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죽기를 각오하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믿음은, 죽기를 각오하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믿음은, 순교자들에게만 필요한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가 천국 가는 그날까지, 죄악 많은 이 세상에서 승리하며 구원의 믿음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믿음입니다.
핍박을 피해 로마를 빠져나가던 베드로가 로마를 향해 가시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Domine?)”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가고 있다면, 사명의 자리를 떠나 내가 살 길을 찾아 가고 있다면, 예수님께서 찾아오실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이 바로 그 시간이라고 믿습니다. 베드로처럼 환상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모두는 말씀가운데서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처럼 예수님께 물어야 합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Domine?)” 그리고 “나는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로마로 들어간단다.”하신 예수님의 대답이 바로 우리의 대답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가 바로 내가 지어야 할 십자가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고,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아니 이미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장사지낸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죽었기에 더 이상 세상의 미련은 없습니다. 죽었기에 더 이상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걱정하며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크게 기뻐하며 찬양하며 십자가를 지기 위해 다시 로마로 돌아갔던 베드로처럼, 우리도 기뻐하며 찬양하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갑시다.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