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과거를 본 뒤 음서를 기다려 보아라. 나와 정리가 두터운 분이 전형위원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할 수 있으련만 그렇지 않다면 너를 위해 분주히 권세가들에게 애걸할 수는 없다." 아들 준에게 퇴계 이황이 보낸 편지다. 나이는 먹어가고 공부는 더딘 아들이 과거에 붙을 가망이 없자 퇴계는 음서를 통해 관직에 나가는 방도를 찾아보자는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대유학자 퇴계조차도 아둔한 아들 앞에서는 어찌할 수 없는 아비다.
음서(蔭敍)는 고려 목종이 5품 이상 관직을 지낸 관리의 아들에게 벼슬을 내리는 제도를 시행하면서 시작됐다. 문음, 남행, 백골남행, 음사, 음직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조선시대 들어 경국대전 '음자제조(蔭子弟條)' 규정에 따르면 2품 이상관의 아들 손자 사위 동생 조카로 범위를 축소했다. 조선 후기 공신 혹은 현직 당상관의 자제로 과거에 응하지 않고 등용된 음관을 기록한 음보(蔭譜)에 1235명이 등장하는 걸 보면 잘 난 조상을 둔 덕에 벼슬살이를 한 사람이 수두룩했음을 알 수 있다.
일자리 세습 욕망은 지금도 사그라들 줄 모른다. 고용노동부가 최근 노조가 있는 매출 10조 원 이상 30대 기업의 단체협약을 분석했더니 조합원 자녀, 퇴직자 등의 직계가족 우선 채용 규정을 명시한 기업이 11곳이나 됐다. 일반인의 직업선택권과 평등권을 침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2010년엔 유명환 외교부 장관의 딸이 외교부에 특채됐다 발각돼 장관직에서 사퇴한 일도 있었다.
새정치민주연합 윤후덕 의원과 새누리당 김태원 의원의 자녀 취업 특혜 의혹이 제기되면서 '현대판 음서제' '신(新)음서제' 논란이 일고 있다. 논란의 중심에는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법조인 코스가 자리하고 있다. 로스쿨 1년 등록금만 국립대 1000만 원, 사립대 2000만 원이 넘어 서민은 입학 자체를 엄두도 못낸다. 변호사시험에 합격해도 높은 문턱이 또 기다린다. 소위 '빽 없는 자식들'은 오갈데가 없다. 상대적으로 전·현직 국회의원, 법조인, 고위공직자 자녀는 대형 로펌이나 로클럭을 거쳐 법관으로 임용된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학벌, 집안, 돈이 없으면 로스쿨을 갈 수도, 출세할 수도 없다'는 말은 헛말이 아니다. 음서를 한자로 표기할 때 단순히 햇볕이 비추지 않는다는 뜻의 '그늘 음(陰)'을 쓰지 않고 큰 나무가 태양을 가려 줘 그 풍성한 그늘 밑에서 풀이 자랄 수 있는 '덮을 음(蔭)'자를 쓴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첫댓글 "빽 없는 자식들"
카카
머잖아 취업전선에 나아 갈 자식이 저희집에도....
온실안 화초나 빽있는 자제나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근데 음서제의 '음'자가 덮을 음蔭자인 줄 몰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