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19일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고 그가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자, 눈을 떠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하고 말씀하셨다. (루가 18,35-43)
Jesus asked him, “What do you want me to do for you?” He replied, “Lord, please let me see.” Jesus told him, “Have sight; your faith has saved you.”
말씀의 초대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전한다. 이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알려 주신 것이다.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 곧 자기가 본 모든 것을 증언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예리코를 지나시다가 눈멀고 구걸하는 이의 청원을 들어주신다. 그는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청하고,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소원을 들어주신다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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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주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는 방법이 다양한 것처럼,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주님을 따라나서는 방법도 다양합니다. 오늘 예리코 근처에서 애타게 주님을 기다리던 눈먼 걸인도 마침내 주님을 따라나섭니다. 그는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주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큰 소리로 주님께 자비를 청합니다. 주님께서는 애타게 부르짖으며 당신께 자비를 구하는 그 눈먼 거지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청원을 기꺼이 들어주십니다. 그 거지는 주님만이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시고 병을 낫게 해 주실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소망대로 주님을 만나 뵌 그는 주님께 신앙 고백을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참된 신앙 고백에 그의 소원을 들어주셨고, 그는 곧바로 주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을 따라나섭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일상 속에서 언제든지 우리를 부르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알아듣고 우리의 신앙을 매순간 고백하고, 그분을 따라나서느냐 아니냐가 중요할 따름입니다.
미국에서 어떤 사람이 은행을 찾았다가 은행 강도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은행 강도에 의해서 목에 총상을 입게 되었지요.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고 상처도 잘 나았습니다. 그리고 석 달 뒤 퇴원을 하면서 이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나는 정말로 억세게 운이 좋아. 만약 조금만 비껴 맞았으면 죽었거나 최소한 반신불수가 되었을 텐데 말이야. 이렇게 살아서 웃고 떠들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즐거워.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야지.”
사실 이 사람의 상황을 가장 불운한 상황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은행에 갔다가 은행 강도를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또한 이 은행 강도에 의해서 총상을 입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접하기 힘든 불행의 확률이 자신에게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긍정적인 생각으로 오히려 행운의 사람임을 자처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세상은 항상 아름답고 좋은 것만을 내게 제공해주지 않습니다. 때로는 어둡고 힘든 일들로 나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모든 것이 나를 행복하게 만다는 도구로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긍정적인 마음이 바로 신앙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나와 항상 함께 해주신다는 믿음, 내게 늘 좋은 것만을 주신다는 믿음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리고의 소경을 보십시오.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라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먹고 살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지요. 분명 어렵고 힘든 상황이고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 말에 곧바로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큰 소리로 외칩니다.
의사도 고치지 못하는 병이기에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려니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예수님만은 나를 고쳐줄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잠자코 있으라고 방해를 하고 있어도 그는 이에 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분명히 앞을 볼 수 있다는 긍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믿음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시 보게 된 이 사람의 다음 행동입니다. 우리들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은 다음에는 곧바로 그 은혜를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그 믿음이 순간적인 것이 아님을 드러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매순간 주님께 매달릴 수 있는 믿음, 그리고 주님을 철저하게 따를 수 있는 믿음만이 어렵고 힘든 이 세상의 삶을 보다 더 풍요롭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지라도 내가 변하면 모든 것이 변한다(오노레드 발자크).
하느님 자비의 조건
-염철호 신부-
요즘 사람들은 하느님보다는 다른 것에 의지할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아플 때는 하느님보다 의사 선생님에게 가는 것이 더 낫기에 기도보다는 건강보험이 더 필요하다 여깁니다. 눈이 침침해지면 안경점에 가서 안경을 맞추면 되고, 다리가 불편해서 움직일 수 없으면 전동 휠체어를 사서 타면 되니까요. 물론 이런 걸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겠죠. 그래서 하느님보다는 돈을 모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여깁니다. 뿐만 아니라 돈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려면, 조금 더 쉬운 방법으로 안정된 삶을 살려면 하느님을 아는 것보다 사회적으로 힘 있는 이와 알고 지내는 것이 더 효과 있다 여깁니다. 그래서 우리 자녀들이 하느님을 아는 것보다 시험 성적을 올려 좋은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하느님은 모든 것보다 뒷전으로 밀려나 있고, 하느님의 자비는 별 필요 없는 것쯤으로 치부되곤 합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해 주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눈먼 이는 예수님께 자비를 간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진정 나를 살리는 것은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을 향한 나의 믿음임을, 그래서 나에게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자비가 참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
- 박경선-
살면서 거절의 경험이 많은 사람은 쉽게 다른 사람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게 됩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어려서부터 자주 눈 맞추며 이야기를 들어주고 많이 안아주고 부름에 적극적으로 응대해야 한다는 당부를 누누이 듣는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가진 장애 때문에, 다른 외모 때문에, 독특한 성격 때문에, 주위 환경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이런저런 방식으로 소외당하고 내쳐지는 경험은 비단 아이들의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 경우라면 쉽사리 좌절하고 포기하고 내 안에 숨어 들어가 안주하게 되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오늘 우리는 예리코의 소경에게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듣습니다. 예리코의 소경은 장애인일 뿐 아니라 걸인이고 당시 상황으로 비추어 죄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천대와 멸시와 동정이 아니고는 그이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중 삼중의 비참함 속에서 그는 그저 주저앉아 자기 앞에 떨어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서 보신 것은 이 나락의 상태가 그 인생에서 끝이 아니라는 믿음, 모두가 그를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하고 절망시켜도 예수라는 한 사람은 그를 돌아보고 그의 말을 들어줄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내 손을 잡아 주려면 적어도 내가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는 말을 소경도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 내가 지금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자신을 북돋우고 격려하는 일은 바로 내 몫일 것입니다. 오늘 내 무릎이 꺾일 일이 생겨도 다시 한 번 도움을 청하라고 그가 알려 줍니다.
지나가다와 지나치다
-김찬선신부-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지나가다와 지나치다는 같은 말 같지만 사실은 다른 말입니다. 지나가다는 어디를 거쳐 가는 것을 일반적으로 서술하는 말이지만 지나치다는 어디를 거쳐 가되 멈추지 않고 건너뛰어 가는 것을 조금 더 강조하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서울 역 광장을 지나가면서 노숙자들을 지나쳐서 매표소로 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멈추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는 것인데 누구를 일부로 피해서 지나치는 경우도 있고, 일부로 피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관심하여 지나치거나 나의 일에 너무 몰두하여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경우도 있지만 공통적인 것은 애정,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참 사랑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지나쳐왔는지. 과거의 저는 어디에 그리고 누구에게 머물지 않는 것이 수도생활을 잘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 번 떠난 본당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가지도 않고 떠난 사람은 전화도 잘 하지 않고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애착하고 집착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그러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애착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데 그때는 그러지 못하여 그렇게 바람처럼 다 지나쳐갔습니다.
그에 비해 지금의 저는 애착하고 싶어도 애착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 에너지인 情이 약화되었습니다. 아기 보기로 치면 보는 것까지는 좋은데 씨름하기에는 힘이 부칩니다. 아 슬픕니다! 이제는 애착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데 어떤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잘 해보려 해도 힘이 부족하고 누구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려는 마음은 더 커졌는데 그 아픔을 견디는 힘이 많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문제를 제가 정면으로 떠안고 아픔을 제가 온전히 껴안지 못하고 슬쩍 들려 잠깐 머물다 살짝 떠나는 식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주님은 자비를 청하는 눈먼 이를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멈추시고 관심을 보이시고 무엇을 당신에게 원하는지 물으십니다.
주님의 이 사랑이 오늘 누가 요구할까봐 피하는 저의 작은 사랑을 추슬러 다시 사랑하도록 일으켜 세웁니다.
사랑 안에서 사랑으로 살아가자. -경규봉 신부-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사랑이다. 사도 바울로는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 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고린 13,1-3)라고 말한다.
그가 아무리 큰 능력을 받고 이적과 기적을 행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신비를 알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을 갖고,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오직 사랑만이 영원하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사랑이라는 가르침이다. 깊은 신앙은 사랑으로 표현되며, 사랑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라는 가르침이다.
요한은 묵시록을 기록했다. 이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계시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계시하신 바를 기록한 책이다. ‘계시’란 ‘본래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드러내 보인다.’는 뜻인데 성서에서는 ‘진리에 대한 통찰력’(에페 1,17)이나 ‘그리스도의 재림 때 하느님 또는 그리스도의 나타냄’(2테살 1,7; 1베드 1,7)을 뜻한다. 이 계시는 하느님의 섭리대로 성취될 것이다. 요한은 이 계시를 충실히 기록했는데,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실천함으로써 행복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
요한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모든 교회를 대표함)에 편지를 보냈다. 특히 당시 에페소 교회는 자칭 사도라 칭하는 거짓 예언자들이 그리스도를 부인할 뿐만 아니라 그릇된 교리를 통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였다(2고린 11,13.15; 12,11). 그러나 에페소 교회는 훌륭한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그들의 열매를 통하여(마태 7,20) 거짓을 분별하고 그들의 거짓을 드러냈다(1고린 14,29; 1테살 5,21; 1요한 4,1).
당시 교회는 로마황제를 신처럼 숭배하도록 강요받음으로써 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고, 그리스도의 육화를 부인하는 이단들의 내적 도전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에페소 교회는 그리스도께 대한 자신들의 신앙을 굳게 지켰다. 그러나 거짓 사도들을 분별하려고 형제를 의심하고 엄격하게 구별함으로써 형제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지 못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때문에 에페소 교우들은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사랑을 행하지 못했다. 이처럼 사랑을 상실한 에페소 교회를 질책하며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도록 하기 위하여 그 원인을 깊이 생각하고, 회개하여, 즉시 처음에 그리스도를 사랑했던 그 사랑으로 형제들을 사랑하라고 권고한다.
교회의 가르침을 순수하게 지키고, 영적 분별력을 가지며, 믿음을 깊이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대단히 소중한 일이다. 특히 교회의 지도자에게 있어서는 더욱 더 소중하다. 그러나 사랑을 잃는다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며,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왜냐하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사랑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이며, 사랑을 잃는 것은 곧 하느님을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랑을 잃지 않는 것이다. 교회의 가르침을 순수하게 지키기 위해서라도 결코 사랑을 잃어서는 안 된다. 사도 요한은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1요한 4,18) 하고 말한다.
오늘 하루도 혹시 사랑을 거스르는 삶을 행하지 않는가를 생각하며,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삶을 살도록 하자. 우리 마음속에 주님에 대한 사랑이 가득하여, 그 사랑으로 살도록 기도하자..............◆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 김수만 신부-
아무리 아름다운 경치가 있어도 제 눈으로 보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찬란한 태양빛이 비친다 해도 보지 못하는 사람한테는 그 빛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봄에 꽃이 피고, 푸른 잎이 돋아나는 것을 볼 수 없다면 얼마나 기가 막힌 노릇입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어떤 눈 먼 이가 큰 소리로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소경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의 부르짖음이 예수님께 들려야 했기 때문에 체면도 자존심도 상관하지 않고, 예수님을 향해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너무나 간절하고 절박한 요청입니다. 만일 소경이 사람들의 이목을 생각하거나 다른 사람의 꾸짖음과 나무람에 위축되어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혹시 예수님이 아닌 다른 그 어떤 것에 매달려 눈을 뜨고자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일 그랬다면 그 소경은 눈을 뜰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하느님께서 빛을 비추어 주셔야 진리를 제대로 보고, 듣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사람이 어두운 상태에서 밝은 상태로, 모르던 자리에서 아는 자리로,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보게 되는 신앙으로 나아갈 때는 우리의 믿음과 노력,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진실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외적인 눈에만 집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외적인 육신의 눈만 아니라 내적이고 영적인 눈을 뜰 수 있도록 간절히 청하고 또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저는 큰 소리로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에게 당신을 온전히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언젠가 이 삶이 지나가면>
-양승국신부-
때 이른 추위 앞에 수도원 마당에서 살아가는 강아지들이며, 닭들이며, 칠면조들, 거위들도 꽤나 당황스런 얼굴들입니다. 불어오는 세찬 바람에 수많은 나뭇잎들은 오랫동안 의지해왔던 나무와 아쉬운 작별을 합니다.
새빨갛게 물든 단풍잎을 하나 주워들었습니다. 찬찬히 바라보고 있노라니 잎새 하나에도 우주의 이치, 세상의 원칙이 들어있네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지닌 특징 하나, 때가 되면 떠나야한다는, 언젠가 소멸의 순간을 맞이해야 한다는 불변의 진리 말입니다.
나이 들어갈수록 조금씩 더 노력해야 할 부분이 한 가지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을 향한 새로운 눈을 뜨려는 노력 말입니다. 인간을 향한 새로운 시각을 지니려는 노력 말입니다. 삶에 대해, 인생에 대해,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려는 노력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리코의 시각장애우가 청했던 바로 그 노력 말입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곰곰이 살펴보니 여러 측면에서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비록 눈을 뜨고 있었지만, 정작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소중한 것들, 아름다운 것들, 정말 봐야할 것들을 보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우리네 인생 수백 수천 번 되풀이 되는 윤회의 삶이 아니라 단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 금 쪽 같이 소중한 인생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는 눈을 청해야겠습니다.
오늘 내가 이렇게 당당하게, 떵떵거리며, 자신만만하게 살아가지만, 사실은 잠시 머물다 사라져가는 뜬구름 같은 존재임을, 이 보잘 것 없고 유한한 존재의 실체를 볼 수 있는 눈을 볼 수 있는 눈을 청해야겠습니다.
이번 생이 너무나 막막하고 힘겹더라도 잘 견디고 넘겨, 언젠가 이 삶이 지나가면 그림같이 아늑하고 따뜻한 하느님의 집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미리 볼 줄 아는 눈을 청해야겠습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남의 허물이 아니라 내 허물을 먼저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남의 부족함이 아니라 내 부족함을 먼저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남의 한계가 아니라 내 한계를 먼저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남의 죄가 아니라 내 죄를 먼저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다시 보아라
-안문기 신부-
가난한 자는 잠이 부족하고 부유한 자는 돈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은 순수함이 돋보이고, 다른 한 사람은 욕심이 묻어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소경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막무가내로 외칩니다. 창피함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보이지는 않지만 힘이 솟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그를 막지 못했습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의 간청은 순수했고 다른 욕심이 없었지요. 예수님만이 자신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분임을 믿고 간청했을 뿐입니다. 예리코의 소경은 ‘초자연적인 신앙 감각’으로 치유를 확신했습니다. 소경의 그런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마지막 구절이 참 중요합니다. 소경은 눈을 뜬 후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고 했습니다. 육체적인 눈과 더불어 영적인 눈도 뜨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치유된 후 남을 위한 봉사와 복음 전파에 앞장설 수 있었습니다.
진짜 불쌍한 사람.
-김찬선신부-
매우 역설적이지만 언제부터인가 불쌍한 사람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자신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래서 불쌍하면서도 행복한 사람이 정말 부럽습니다.
얼마 전 저는 어떤 분에게 부럽다고 조심스레 말한 적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매우 불쌍한 사람, 아주 중한 알콜 중독자입니다. 의지가 박약하고 술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알콜 중독자임을 인정하고 지금은 단주 모임에도 나가고 주님께 자비를 청하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도 알콜 중독자입니다. 저도 그 분과 같이 알콜 중독자임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저는 주변 사람들에게 알콜 중독자라고 얘기하고, 이 말을 듣는 많은 분들이 깜짝 놀랍니다. 저도 그렇고 그분들도 그것은 애주가 수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심하지 않고 정상적인 생활에 문제없기에 다른 사람들도 모르고 저도 끊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도가 약해도 중독은 중독이니 (단주 클럽에서는 술을 먹고 싶어만 해도 중독의 시작입니다.) 이를 심각히 여기고 고쳐야 하는데 고치려 하지도 않고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그분과 제가 다른 점이고, 그래서 사실은 제가 더 불쌍하고, 그분이 부럽다고 얘기한 이유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불쌍한지를 모르는 사람,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이 진짜 불쌍한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으로 치면 육신의 눈이 멀어 자신의 불행을 직시한 사람은 주님의 자비를 간절히 그리고 용감히 청하여 자비를 입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영적인 눈이 멀어 더 불행한데도 자신이 얼마나 불쌍한지를 모르는, 그래서 자비를 청하지 않는 진짜 불쌍한 사람입니다.
은총과 인연
?전삼용신부-
어떤 사람이 아직 동이 채 뜨기 전 강가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어둠 속에서 강가를 거닐던 중 그는 무언가 자루 같은 것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넘어진 채로 자세히 보니 그건 가방이었습니다. 호기심에 그 가방을 열어 보니 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심심하던 차에 그는 강가에 앉아서 그 가방 속의 돌들을 하나씩 꺼내어 강 속으로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던질 때마다 어둠 속에서 ‘첨벙 첨벙’ 들려오는 물소리를 즐기며 그는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한 개의 돌을 무심코 던지려는 순간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손에 들고 있는 돌멩이가 떠오르는 태양 빛에 반짝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놀란 그는 돌을 들여다보고서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마침 아침 산보객들이 모여들어 묻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누가 강물에 빠져 죽었습니까?” 그가 통곡을 하다 말고 대답을 합니다. “여보시오. 이게 뭔지 아시오? 다이아몬드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가방 속에 수백 개의 다이아몬드가 들어 있었소. 그런데 나는 그게 다이아몬드인 줄도 모르고 거의 한 시간이 넘도록 강물 속에 다 던져 버렸단 말이요 그래서 이젠 한 개밖에 남지 않았소.” 그는 계속 통곡하더랍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수많은 은총의 기회가 오는데도 잡지 못하고 그냥 흘려보내는 경우가 많을 수 있습니다. 그 은총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서는 눈을 부릅뜨고 이것이 혹 주님께서 주시는 기회는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선 그냥 스쳐지나갈 뻔 했던 은총을 확 낚아챘던 예리고에 살던 소경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분이 자신 앞을 언제 지나가실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꾸준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혹시 예수님이 지나가시지 않느냐고 물어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짜증을 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분은 이곳을 지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하며 낙심을 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소경은 그 분은 소망이 있는 곳이면 반드시 그 곳을 지나치시면서 원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실 분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자신도 믿음으로 눈을 뜨기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자신에게도 기회가 올 것임을 믿었습니다.
결국 어떤 사람에게 그 분이 혹 지나가시느냐고 물었더니 정말 지나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는 금방이라도 눈이 떠질 것 같은 기분으로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소리소리 지릅니다.
다른 사람들은 소경이 그렇게도 기다려오던 분이 지나가셔서, 그리고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온 힘을 다해 소리 지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오히려 조용히 하라고 소경을 꾸짖습니다.
그러나 소경은 멈출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기다려왔는데!’
예수님은 드디어 그 소경의 음성을 듣고 눈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해 주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당신이 지나가실 때 당신께 소리소리 지르며 무엇을 원한다고 말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원하지 않는 사람에겐 아무 것도 주실 수 없습니다. 그런 은총은 교만만 키우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운전을 하고 산길을 갈 때였습니다. 기름이 다 떨어진지 한참이 되었지만 주유소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주유소가 있는 곳을 내비게이션으로 찾기 위해 어떤 집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는 네비를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 쪽에 하나 있기는 했는데 20킬로가 넘게 남아서 거기까지는 갈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집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께서 외출을 하기 위해 나오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 차 문을 두드리고 왜 당신 집 앞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저희는 기름이 다 떨어져서 그런다고 말씀드렸더니 당신이 가까운 주유소 있는 곳까지 안내 할 테니 당신 차를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간신히 기름을 다시 채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 집 앞에서 섰고 또 마침 그 집에서 아주머니가 나오셨습니다. 그냥 스쳐지나갈 수도 있으셨겠지만 저희에게 호의를 베푸셨습니다. 인연치고는 참 고마운 인연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희에게 꼭 필요한 사람을 제 때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렇게 해서 만나는 소중한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주님께서 보내주신 은총들입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다 은총임을 깨닫는다면 오늘의 소경처럼 주님을 더 찬미하게 될 것입니다.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만 은총이 아닙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도 은총입니다. 나를 성숙시키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한 사람이라도 의미 없이 대하게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참 소중한 인연을 통해 주시는 주님의 은총을 잘 깨닫고 얻어내는 지혜의 눈을 청하도록 합시다.
<하루 하루가 얼마나 기쁜지?>
양승국신부-
최근 실명한 한 자매와 나눈 대화가 제 기억 속에서 잊혀지지 않습니다.
너무도 안타깝고 안쓰러웠던 저는 무어라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하다가 겨우 겨우 운을 뗐습니다.
"얼마나 고생이 많으세요? 많이 답답하시지요?" 그러면서 제가 농담조로 그랬습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이렇게 천사 같은 분의 눈을 감기시다니!"
한 순간 엉겁결에 나온 말을 제대로 수습하지도 못하고 당황해하면서 혹시라도 제 말에 상처라도 받지 않으셨을까 걱정하면서 자매님의 얼굴을 살폈습니다.
그러나 웬걸!
자매님은 지극히 평화로운 얼굴로(제 세속에 찌든 삭은 얼굴과는 비교가 안 되는 부처님 같은 얼굴) 해맑게 웃으시면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정 반대예요. 요즘 하루 하루가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요즘 제 육체의 눈은 감겼지만, 영혼의 눈이 떠졌다는 것 아세요? 물론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하루 온종일 평화방송 라디오를 들으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도하면서 즐겁게 지내고 있답니다. 요즘 저는 오히려 육체의 눈을 감겨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 드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회심을 하신 분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큰마음을 지닌 분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진정 영혼의 눈을 뜨신 분, 이미 천국을, 구원을 살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신앙의 연륜이 더해가면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노력이 바로 육의 눈을 조금씩 감는 노력입니다. 그리고 천천히 영의 눈을 뜨려는 노력입니다.
우리가 영의 눈을 뜨기 시작할 때, 장담컨대 새 세상이 반드시 열립니다. 영의 눈을 뜨는 순간 신천지가 눈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영의 눈으로 바라볼 때 진정 새 인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영의 눈을 뜨기 시작할 때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육신적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영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을 뜬다는 것은 한 인간을 외모로만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결과로만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것입니다. 그가 지니고 있는 깊은 상처를 헤아려준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리고의 소경은 간절하게 예수님께 부탁드립니다.
"주님,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오늘 하루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제 영혼의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제 영혼의 불구를 간절히 청하오니 고쳐주십시오."
"매사를, 이웃을 영의 눈으로 바라보고 영의 눈으로 식별하게 도와주십시오."
어떤 사람이 병원으로 작은 수술을 받으러 갔다가 그만 수술 도중에 도망쳤다는 것입니다. 친구는 그 이야기를 듣고는 무슨 이유로 수술 도중에 도망쳤냐고 물었지요. 이 사람은 수술을 시작하면서 간호사가 했던 말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간호사가 한 말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간단한 수술이니까 긴장 말고 맘 푹 놓으세요.”
친구는 “그게 왜? 이 말은 간호사들이 늘 하는 말이잖아.”라면서 친구의 경솔함에 대해서 꾸짖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정색을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말이 나한테 하는 말이면 상관없겠지만, 간호사가 의사한테 그렇게 말하더라니까. 그 말을 듣고서 어떻게 수술을 하겠니? 그래서 도망쳤지.”
이 사람이 도망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 선생님에 대한 믿음 부족 때문이지요. 이 사람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의사 선생님의 실력이 뛰어나서 많은 사람들을 고쳤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면 도망칠까요? 그럴 리가 없지요. 간호사의 말에 의사 선생님의 실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이렇게 믿지 못하니 그 자리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천년 전 예수님께서 그토록 놀라운 기적과 좋은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섰지만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았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믿음의 부족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주님께서 제시하고 있는 길인 사랑의 길을 제대로 따르고 있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사랑하라고 그래야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셨지만, 우리들은 그 길을 제대로 따르고 있지 않습니다. 역시 믿음의 부족 때문입니다. 정말로 나를 구원으로 이끌어주신다는, 정말로 참된 행복의 길로 이끌어 주신다는 믿음의 부족 때문에 그 길을 제대로 따르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리코의 소경을 치유해 주십니다. 이 소경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는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습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웠으면 사람들이 그에게 잠자코 좀 있으라고 꾸짖지요. 그러나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예수님께 청을 합니다.
그가 이렇게 예수님께 청을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만이 자기를 고쳐주실 수 있다는 강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을 보시고는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시고는 그가 다시 볼 수 있도록 하십니다.
혹시 예수님께 대한 믿음 부족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그 사랑의 길에서 도망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제는 우리의 믿음을 다시금 키워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사랑의 길을 벗어나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구원은 이 길에서만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으세요. 믿음은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만듭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양승국신부-
<참혹하다. 사는 게 너무나 참혹해>
매일 와 닿던 육체적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던지, 어떤 분은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너무 염세주의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자신이 체험한 세상살이의 고달픈 실상을 솔직히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참혹하다. 사는 게 너무나 참혹해. 영혼이란 것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우리가 육신을 버리고 후생에서 영혼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인가?”
충분히 이해가 가는 표현이지요. 때로 하루를 산다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길 수 있겠지만, 어떤 사람에게 있어 그 하루를 살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루를 견뎌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상처와 굴욕, 좌절과 눈물이 요구되는지 모릅니다.
인간이 하늘이기에 인간은 이 세상 피조물 가운데 가장 소중하다. 인간은 생명이 붙어 있는 한 그 자체로 가장 존귀하며 사랑받아야 한다는 진리를 잘 알고 있지만, 현실이 어디 그런가요?
끝도 없는 지루한 일상과 맞서야 하고, ‘나’와 철저하게도 다른 ‘너’란 존재를 견뎌내야 합니다. 나란 존재의 비참함도 참아내야 합니다. 때로 가식과 위선, 모순과 폭력으로 둘러싸인 구조 안에서 그저 바보처럼 웃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리고의 소경이 그러했습니다. 한 평생을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온 예리고의 소경이었습니다.
아직 미흡한 점이 많지만, 요즘은 장애우들에 대한 의식전환이 조금씩이나마 이루어지고 있지요. 아직 갈 길이 요원하지만, 장애우들을 위한 공동체적, 사회적 배려가 미비하나마 조금씩 눈에 띄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 장애우들을 위한 그런 마인드나 배려를 전혀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리고의 소경, 그는 자신이 지닌 시각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아무런 노력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그 답답함을 견디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이가 점점 들어갔지만, 우선 목구멍이 포도청인 관계로 결혼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유일한 의지가지였던 부모마저 세상을 떠나고 나니, 가족 친지, 친구들마저도 등을 돌렸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이 제대로 가동도 안 되던 시절, 예리고의 소경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구걸’뿐이었습니다.
시각장애로 인한 불편함은 그런대로 습관이 되어 견딜 만 했습니다. 걸을 때는 발에 의지하고 걸었습니다. 물건을 잡을 때는 손에 의지했습니다. 소리가 날 때는 귀에 의지해 소리를 듣고 세상을 보았습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은 몸이 피로한 것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물건의 모양과 빛깔은 꿈으로 보았습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때운다고 그는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불편함을 참고 그럭저럭 살았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로 부터 ‘무가치한 존재’로 인식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늘 남들의 조롱거리가 되는 것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왔으니,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뭔가 세상에 기여를 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본능적인 욕구 못지않게 중요한 것입니다. 나는 별 의미 없는 존재라고 여겨질 때, 그것처럼 견디기 힘든 일도 없습니다.
예리고의 소경 역시 비록 장애를 지녔지만 뭔가 좋은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내 코가 석자인데, 내 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데, 도대체 무얼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저 구걸해서 하루를 연명하는 일, 도움의 손을 펼치는 일,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이런 삶의 역사와 배경을 지니고 살아왔던 예리고의 소경이기에 예수님을 만나는 데 있어 각오는 남달랐습니다. 잠시 후 있게 될 예수님과의 만남을 자신에게 찾아온 마지막 기회로 여겼습니다. 지금까지의 삶을 일단락 짓는 기회, 자신의 삶을 180도 완전히 반전시킬 유일한 기회로 삼았습니다. 나름대로의 각본도 짰습니다. 이렇게 나오면 이렇게 대응한다는 마음의 준비도 했을 것입니다.
이런 예리고의 소경의 철저한 준비, 절박한 상황, 간절한 심정, 지난 아픈 과거를 예수님께서 놓칠 리가 없습니다.
젖 먹던 힘까지 보탠 그 간절한 외침, 자신 안에 남아있던 모든 에너지를 다 바쳐서 외치는 그 절박한 목소리를 예수님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드디어 꿈이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눈여겨보십니다. 그를 당신 가까이 부르십니다. 가난과 서러움, 눈물과 상처뿐인 그의 인생을 굽어보십니다. 마침내 그에게 새 삶을 부여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자비 앞에 예리고의 소경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너무나 감사했던 그는 치유 받은 즉시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예수님의 공동체에 편입됩니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우리 역시 절박한 심정으로, 그 옛날 예리고의 소경의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길 바랍니다.
영적인 눈을 한번 눈을 떠보십시오. 지금까지의 삶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입니다.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가치관과 행동양식, 새로운 몸가짐과 마음가짐이 우리에게 부여될 것입니다. 그 삶이 곧 영적인 눈을 뜨는 삶입니다. 그 삶은 바로 회개의 삶이요, 주님 안에서의 삶입니다.
눈을 뜨는 사람
-김찬선신부- 지금은 책 제목도 생각나지 않지만 옛날 어느 목사님이 쓴 자서전적 소설에서 실명하여 세상 것들은 보지 못하게 되었지만 덕분에 영적인 눈이 뜨여 하느님을 보게 되고, 그래서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고 마침내는 목사님이 된다는 내용을 감동적으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도 읽은 것이 너무 오래 되어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앙드레 지드의 전원 교양곡은 그 반대로 장님이었던 소녀가 눈을 뜨게 되지만 오히려 더 불행해진다는 내용입니다. 볼 수 없었을 때 목사의 사랑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보지만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인간 사회의 탐욕과 부조리를 보게 된다는 거지요. 그러니 눈을 뜨건, 눈이 멀건 희망, 구원, 행복은 영적인 눈이 하느님을 바라보고 영적인 감수성이 하느님의 사랑을 현현(顯現)하는 것들 안에서 현재적으로 볼 때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복음의 눈 먼 이는 눈을 뜸과 동시에 영적인 눈도 뜬 구원 받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연민을 넘어서는 어떤 것?
- 임영인 신부-
거리에서 만나는 노숙인은 대부분 ‘불쾌한’ 모습입니다. 잔뜩 술에 취해 아무 곳에나 드러누워 자거나 불결한 손을 내밀며 적선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행패를 부리고 욕설을 하는 노숙인을 마주친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신앙인의 선행에 대한 ‘의무감’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을 느꼈을 것입니다. 어느 교우가 노숙인 사목을 하는 저를 의식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걸을 하는 노숙인을 돕고 싶은데 구걸한 돈으로 술을 마신다고 하니 돕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냉정하게 뿌리쳤지만 죄를 지은 것 같고 마음 한구석이 여간 찜찜한 것이 아니네요.” 저는 그분에게 말했습니다. “돕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면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고 돕는 것이 좋습니다. 세상은 알코올 중독자 노숙인이 술 한 잔을 더 마실 수 있을 만큼 어수룩한 구석도 있어야 하니까요. 그러나 구걸한 돈으로 술을 마시는 노숙인에 대해 마음이 단단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냉정해도 됩니다. 그것도 그 사람을 위한 것이니까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노숙인이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아닐까요?” 함께 살아가는 사회는 ‘연민’과 ‘동정’에서 출발합니다. 연민과 동정이 없는 사회를 어떻게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회가 조금 더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연민’과 ‘동정’을 넘어선 어떤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노숙인도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일이 아닐까요? 그것이 예수님께서 ‘걸인(노숙인)을 눈뜨게 하신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는 말씀이 아닐까요?
보이십니까?
- 장재봉 신부-
예수님께서 지나시던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걸인은
눈먼 장님이었습니다.
그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는 주님의 물음에
지체 없이
“다시 불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린 것으로 보아
그는 태생소경이 아니라
어느 날 시력을 잃게 된 것이라 짐작하게 됩니다.
처음부터 보지 못하던 사람보다
볼 수 있었던 사람이
보지 못하게 될 때 그 고통은
훨씬 힘들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
주님을 믿고 따르면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면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그분께서 쉼 없이 이르시고
경고하시며
물으시는 모습을 보십니까?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보았던’ 주님의 사랑
그분의 백성이 되어서 ‘보았던’ 그분의 영광,
그 벅찬 감동의 시력을
지니고 있습니까?
맹인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 뛰고
중풍병자가 일어나며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는 주님의 표적은
인간에게 보여주시는
하느님 사랑의 싸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보아라’ 이르십니다.
첫 사랑의 마음을 되살리고
어두워진 시력을 회복하라 하십니다.
하느님을 보고 찬미하며
세상을 보고 사랑하며
천국을 보고 희망하라 하십니다.
그 찬미와 사랑과 희망을 위해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물으십니다.
과연 무엇을 청하십니까?
+++
볼 수 없는 하느님을
삶으로 보여주셨던 주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보았던’ 사도요한은
묵시록을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사도요한이 보여준 하느님 나라는
사랑만을 살아낸 자신의 온 삶이었기에
볼 수 없는 우리에게 설득력을 갖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느님을 보고
그 사랑을 살아가는 신앙인이 된다면
세상은 우리를 보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느낄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사랑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이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라’고 권하는 이유입니다.
무엇이 보이십니까?
새벽을 열며
두 사람의 짧은 대화입니다. “아이를 데리고 도움을 요청한 저 여인을 우리 집에 묵게 해주려고요.”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뭐죠?” “그들 모자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
내 이웃은 과연 어떤 존재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요? 내 이웃은 이용해먹고 지배하기 위해서 내 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애정 가득한 시선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자기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지요. 그러다보니 ‘나’ 외의 것에서는 의미를 전혀 찾지를 못합니다. 즉, 자기를 넘어서는 의미를 찾지 못하면서 마치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살 뿐입니다.
위의 대화에서 모자를 자기 집에 묵게 하려는 여인은 ‘자신을 넘어서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지요. 이 여자는 도움을 요청하는 낯선 사람의 사정을 이해하고 도움을 베풀고 싶어 합니다. 이 여자는 자신이 낯선 모자에게 받을 어떤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 모자의 존재 자체에만 관심이 있어 하지요.
그렇다면 누가 행복할까요?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는 책을 지은 스티븐 코비 박사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습관을 연구한 뒤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먼저 타인을 이해한 후에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
자신을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은 것은 물론, 사회적으로 이야기하는 성공도 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리코 근처에서 구걸하던 소경이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면서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르짖음이 엄청나게 컸나 봅니다. 즉,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 정도로 큰 소리를 지른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앞서가던 사람들이 그를 꾸짖으며 떠들지 말라고 했다고 하지요. 이 사람들은 왜 이 소경을 꾸짖었을까요? 단순히 시끄럽다고? 예수님 피곤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을 못 만나도록 방해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도록 방해할 때가 많습니다. 성당 대문 앞에 서서 성당에 못 들어오도록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모습을 보고서 과연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했었는지 반성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알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끔 하려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처럼 남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했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나’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에서 머물러서 ‘나’만 잘 못되고 있습니다.
사랑의 실천은 결국 남이 잘 되는 길이 아니라, 바로 내가 잘되는 길입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자기를 넘어서는 사랑을 실천하는 오늘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타인을 이해한 후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도록 하십시오.
빠다킹신부
자신에 대한 인식
-서현승 신부-
수도원을 찾아오는 많은 신자분들이 면담을 통해 자신의 문제나 어려움들을 토로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냥 들어주기만 해도 마음속에 응어리졌던 아픔들이 조금은 풀어지는 듯합니다. 또 어떤 경우,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내다 스스로 실타래처럼 얽힌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곤 합니다. 저로선 아무것도 한 일이 없지만 참으로 보람과 기쁨이 느껴지곤 합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지요. 자신의 처지를 올바로 인식할 때에 구원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대해 실망하며 마냥 슬퍼하고 아파하는 것으로 그치지만, 더 나아가 하느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자각할 수 있다면 진실한 기도가 시작되는 출발점입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 즉 자기의 힘으로 어찌해볼 수 없는 것을 통감하며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고백할 수 있을 때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기 시작합니다. 참된 신앙이 싹트는 순간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내 스스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는 ‘오래된 착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테지요.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애원하는 예리고 소경의 바람을 예수님이 모르셨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당신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는 예수님은 소경이 자신의 처지를 올바로 인식하고, 눈을 뜨고자 하는 의지를 불러일으키게 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선배들의 잦은 방해
-이인옥-
교리교사의 보람은 새 신자를 배출할 때 절정을 이룬다. 하지만 세례를 받은 지 얼마 안 되어 쉬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마음이 아프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신앙선배들의 방해도 한몫한다. 그들은 갓 난 신자들에게 무안을 주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대개 교회 안에서 지켜야 할 절차와 규칙에 관한 것이다. 이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며 툭툭 던지는 선배들의 말마디에 그들은 위축되기 십상이다. 도대체 기다려 줄 줄 모른다. 심한 경우, 예비신자들을 보고도 사사건건 지적하는 선배도 있다. 그것도 모자라 교사에게 쫓아와 기본부터 잘 가르쳐 달라는 열성선배도 있다. 기본이 무엇인가? 교리는 그리스도인이, 또 천주교인이 무엇을 믿는 사람들인지, 그 믿음을 바탕으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것을 안내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지켜야 할 자잘한 행동 수칙은 교리의 일부분일 뿐, 그것도 차차 알아가도록 진도가 짜여 있다. 모든 것이 단계가 있다는 말이다. 나는 예비신자나 새 신자들이 신앙 안에서 가장 먼저 기쁨과 자유를 느꼈으면 좋겠다. 기쁜 신앙생활 중에 행동 수칙은 차차 익혔으면 좋겠다. 자기 눈으로 보고 자발적으로 느껴 고쳐나갔으면 좋겠다. 선배들은 성급하게 어린 싹을 잡아당기지 말고, 자신들의 올챙이 적 시절을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다른 이의 티를 흠잡기보다 자신의 들보를 먼저 빼냈으면 좋겠다. 함께하고 싶은 화목한 단체를 만들어 예비신자와 새 신자를 초대했으면 좋겠다. 그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신앙의 참 맛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진정 그들을 돕는 신앙선배들의 자세일 것이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 윤명기 신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하느님을 만난 체험을 한 사람들을 간혹 보게 됩니다. 평범하고 별 시련 없이 살아온 사람에게 있어서 어느날 갑자기 하느님이란 존재를 알고나서 변화하게 된 경우들, 혹은 현실적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좌절과 실의에 빠져있을 때나 현세적인 가치들을 포기해버리고 인간 본연의 빈 마음으로 돌아왔을 때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의 순간을 체험하게 되는 경우들을 봅니다.
오늘 복음의 감동적인 이야기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옛 국경선 남쪽에 위치해 있었던 도시 예리고. 많은 사람들이 붐비던 예리고의 거리를 구걸하던 한 소경. 아마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던져주는 것으로 끼니를 채워야만 했고, 자신의 죄의 결과로 소경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당시 사람들의 인식으로 인해 멸시당하고 죄인으로 손가락질 받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그가 살아온 삶이 어떠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통과 좌절, 실의에 빠져있던 그에게는 삶 자체가 고역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시며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과 함께 병자를 낫게 하시고 죽은 이를 살리시며 어린이와 죄인들을 사랑하고 용서하신다는 그분의 소문은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이 소경에게도 들려왔을 것입니다.
삶에 대한 고통과 체념에 빠져있던 그는 나자렛 예수님을 가까이서 접할 수 있는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아마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필사적으로 외칩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주위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예수님을 반드시 만나고 말겠다는 그의 절박함과 비장함은 주위 사람들의 어떠한 말도 그를 제어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의 이런 애원을 들으신 예수께서는 그를 부르시고 묻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 소경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빛이신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이 기적이야기는 단순히 어떤 권능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표지로서, 어째서 모든 이가 그리스도 안에서 빛을 필요로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소경이 다시 찾은 시력은 우리 모두가 항상 새롭게 예수님께 청해야 하는 신앙의 빛을 의미합니다.
사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그 빛을 잃어버립니다. 그 빛은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이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그 빛을 청해야 합니다. 이 소경은 필사적으로 예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분이 약속된 구세주이심을 많은 사람들이 듣는 가운데 큰 소리로 고백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서도 그 분의 참된 본성을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이 소경은 영적인 통찰력으로 그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런 그의 간청과 믿음으로 그는 빛이신 분을 만났고 빛을 얻었습니다. 그는 육신의 눈을 뜬 것뿐 아니라 영혼의 눈, 믿음의 눈까지 뜨게 되었습니다.
신앙은 나와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우리가 온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고 부를 때에 그분은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이 소경처럼 그렇게 절박하게 예수님을 만날 필요를 느끼고 있는지, 이 소경처럼 그분을 만나고야 말겠다는 비장함이, 모든 인간적인 체면과 이목과 위신까지도 포기하며 그분께 필사적으로 매달릴 용기가 우리에게 있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많은 이들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더 나은 삶으로의 변화를 원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위해서 요구되는 것들은 수행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 위로부터 오는 더 높은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때로는 이러한 인간적인 체면과 위신, 사람들의 이목까지도 과감히 견딜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함으로써 소중한 은총의 기회를 종종 잃어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진정 빛을 원하고 영혼의 눈을 뜨기를 원한다면 하느님이 들어올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자아를 없애는 참된 겸손의 상태에 이른다면 우리는 빛을 발견할 것이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진정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진정 하느님을 갈망합니까?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고 사랑하기를 진정 원합니까? 진정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갈망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만날 것입니다. 예리고의 소경처럼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데 까지 우리가 내려가서 그 빈 마음으로 필사적으로 예수님을 부른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거지와 십자가
-임종심-
언젠가 강론에서 들었던 이야기다. 어느 성당 앞에 거지 둘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십자가를 손에 들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염주를 손에 들고 있었다. 성당에서 나온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염주를 손에 든 거지를 째려보며 십자가를 들고 있는 거지에게 돈을 주고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십자가를 들었던 거지의 깡통은 가득 찼고, 염주를 손에 든 거지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만 받았을 뿐 한푼도 얻지 못했다. 그 광경을 본 신부가 염주를 손에 든 거지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것 보시오, 여긴 성당 앞이오. 당신은 여기 1년 내내 앉아 있어 봐야 한푼도 벌지 못할 것이오.” 신부가 가고 주변이 조용해지자 염주를 들고 있던 거지가 십자가를 들고 있는 거지에게 말했다. “이봐, 저 신부가 우리 사업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 거야?” 그러자 십자가를 들고 있던 거지가 대답했다. “글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 아무튼 이제 사람들이 다 나온 것 같으니까 일어나서 저쪽 절 앞으로 가자고.” 이 이야기를 들으며 ‘거지들도 돈을 벌기 위해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지조차도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하는데, 나는 과연 주님의 관심을 끌 만한 일을 하고 있는가? 혹시 ‘주님께서 알아서 해주시겠지’, ‘이런 것까지 주님께 청할 순 없지’라는 안이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마음을 가지고는 주님께 사랑과 은총을 받을 수 없다. 예리코의 소경처럼 남의 이목에 아랑곳하지 않고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큰소리로 외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용기를 통해 우리는 주님께 “주님,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우리의 소원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자, 눈을 떠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이회진신부-
때로 루가 복음을 읽다보면 마치 한 장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오늘 예리고의 소경을 고치시는 복음처럼 복음의 여러 장면에서
루가 복음 사가는 살아 움직이는 그림을 그리듯
예수님과 다른 이들의 삶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곤 합니다.
머리속으로 예수님이 예리고의 군중들 사이를 지나가는 그림을 그리며
이 복음을 묵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랍비들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줄 때,
먼지 나는 길을 천천히 걸으며 가르치곤 했습니다.
아직 큰소리로 연설하는 것이 통용되지 않던 시대이기에
거리에서의 랍비들 혹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모두 다 잘 알아듣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한 눈먼 거지가 소리치는 것에 대해 화를 내는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 당시에는 “눈이 먼 사람” 즉 소경은
자신의 죄 혹은 부모나 다른 가족의 죄로 인해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은 것이라 생각하였기에
그를 불쌍히 여겨 도와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죄인이 예수님이 사람들을 가르치는 행렬에 끼여 예수님을 부르다 못해
소리소리 지르게 되었으니 사람들이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였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천천히 길을 걸으며 가르침을 주시는 것을 들어야 하는데
옆에서 다른 잡소리가 들려 그것을 들을 수 없다니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하다못해 TV를 보다가도 옆에서 아이들이 떠들면
“조용해 못해! 시끄러워서 도대체 무슨 말인지 들을 수가 없잖아.
다른데 가서 놀던지, 방에 들어가 공부나 해!”
하며 아이를 야단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물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며 걷는 그 길을 방해하는 눈먼 죄인은
사람들의 마음을 짜증과 화를 불러 일으켰을 것입니다.
신앙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은 어떨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며 살아간다는 우리는,
예수님께 귀 기울이며 그분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걸어간다는 우리도 역시
예수님께 너무 집중하다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 지 묻고 싶습니다.
성당에는 열심히 다니면서, 기도는 열심히 하면서도
가까이 있는 가족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따라가지만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는 의미는 다른 말로
예수님의 마음이 자신 안에 머무르게 한다는 초대와 방문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찾아오는 곳, 예수님의 마음이 머무르는 곳.
그곳은 예수님이 마음이 있는 곳, 하느님의 사랑이 필요한 곳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필요한 곳에 우리의 마음과 눈을 또한 둘 때
우리는 예수님이 그곳에 우리 자신과 함께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한다면 그분과 함께 걸을 수는 있지만
그분의 발걸음이 여러분 안에 머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살아갈 때
비로소 예수님은 여러분 안에 머무르시며
구원의 은총과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해 줄 것입니다.
주님께 귀 기울이듯 다른 이의 아픔과 마음의 소리에도 귀 기울이십시오.
화부터 내지 마시고…
“주님, 입으로조차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용기없는 저를 이끌어주시어, 오늘은 ‘사랑한다’고 말하게 하시고, 내일은 그 사랑을 표현할 수 있게 하시며, 마침내는 서로의 사랑을 이해하고 당신과 함께 나누게 하소서. 아멘.”
내 혼에 불을 지르는 일을....
-석찬귀 신부 -
지난 주간에는 학교 뒷산으로 올라갔더니 바람도 불지 않는데, 나뭇잎들이 눈을 감듯이 조용히 지고 있었습니다. 그 날 저는 겨울을 앞두고 나뭇잎이 시들고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때가 되면 제 몸도 시들고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고 말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제 욕심을 버리는 일을 소흘히 하다가는 제 마지막 날에는 제 영혼?갈 곳을 찾지 못해 영영 방황할지도 모르겠다 싶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리코는 너무 따스해서 옛날부터 휴양도시로 알려진 곳입니다. 그래서 이곳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쉬는 곳이었고, 거기엔 순례자들의 도움을 구하려는 거지들이 득실거렸다고 합니다. 예수님 일행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다가 잠시 에리코에 쉬었다가 떠날 무렵, 한 소동이 벌어졌는데, 그것은 맹인이며 거지였던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만나려고 달려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멸시와 학대를 받으며 살아야 했던 바르티매오는 예수께서 소경의 눈을 열어준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 분의 따스한 손길이 자기에게도 닿게 되기를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의 그 뜨거운 희망이 바로 눈앞에서 이뤄질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니 그가 예수님을 향해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건 당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주위 사람들은 온갖 장애물을 만들어 방해를 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구애되지 않고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제가 볼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외쳐댔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바르티매오를 자비로운 손길로 잡아주면서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복음은 우리 영혼이 참으로 머물만한 곳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들어있는 눈 먼 아집과 위선, 폐쇄적인 사고방식을 훌훌 태워버리는 일에 마음을 모으라는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울로 사도에 따르면 우리 안에는 두 가지 인간이 있는데, 하나는 겉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속사람을 말합니다. 여기서 겉 사람은 우리 안에서 시들어 버리고 없어져 버릴 몸을 말합니다 그러나 속사람은 겉 사람이 사라지고 힘이 없어질수록 더 새로워지면서 힘을 발휘하는 주님의 생명을 말합니다(2 고린 4,7-12)
사실 우리 인간은 우리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자랄 때만 누구도 줄 수 없고, 무엇도 줄 수 없는 평화와 기쁨으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16-18). 그리스도인은 순간순간마다 자기를 비워내는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학생들과 공동기도를 바치려고 하니까 힘들 때가 너무 많고, 새벽에 기상 벨 소리가 들리면 또 죽었구나 싶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실 성당에 갈 때마다 저는 또 죽으려 가는구나 싶습니다.
흔히 세상에서는 돈 벌고 돈을 모으기 위해서 움직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돈을 내고 쓰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또 세상에서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정신없이 뛰어다닙니다. 그러나 성당에 오면 시간 아까운 줄 모르고 시간을 소비합니다. 또 세상에서는 제 잘난 맛에 살고 저마다 자기주장을 하기에 바쁩니다. 그러나 교회에 나오면 나 죽었다는 맘으로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우리 안에서 겉 사람이 죽으면 죽을수록 우리 안에서는 예수님의 생명이 쑥쑥 자라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제아무리 주님께 자녀를 바치고 교회에서 많은 일을 한다 해도 우리 안에서 주님의 생명이 자라지 않으면 그것은 겉치장에 불과합니다. 또 우리가 제아무리 선교를 많이 하고 봉사활동을 한다 해도 우리가 하는 일이 주님의 생명을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면 그것을 일종의 허영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나뭇잎이 지고 있는 이 늦가을에 우리가 정말 할 일은 우리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어두운 겉치장들을 훌훌 태워 버리는 것이라고 외치는 듯 했습니다. 아멘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강영구 신부 -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고 그가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자, 눈을 떠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대에게
거지 소경에게는 아쉬운 것이 많습니다. 돈도 필요하고 옷도 필요하고, 먹을 것과 잠자리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그가 보기를 원한 것이 무엇일까요? 돈을 버는 길, 출세하는 길, 부귀영화를 누리는 길을 보기를 원했을까요? 그가 보기를 원한 것은 나자렛 사람 예수입니다. 그는 눈을 뜨자 예수님을 보았고 하느님께 감사하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14,6)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 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8,12) 거지 소경은 눈을 뜨고 환한 빛 속에서 생명의 길을 걷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뜨게 된 거지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뜬 눈(目)을 가졌다고 다 보는 것은 아닙니다. 눈 뜬 장님이 많습니다. 탐욕과 오만, 독선과 아집, 증오와 원망에 사로잡히면 눈멀게 됩니다. 하님을 볼 수 없고 이웃과 형제를 볼 수 없게 됩니다. 사랑의 길,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보지 못하고 밝은 대낮에도 어둠 속에 머물게 됩니다.
오늘도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뜨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참으로 ‘보는 자’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예리고의 소경에게 광명을 주신 기적사화를 들려준다. 예수님의 일행이 그럭저럭 예리고(예루살렘 북동쪽 36Km 지점)에 당도했다. 예수님의 당도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며, 길에서 구걸을 하던 소경 한 사람도 그 소식을 듣게 된다. 마르코는 이 소경의 이름을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마르 10,46)라고 밝히고 있다. 소경을 앞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나자렛 예수가 왔다는 말만 듣고 일단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는 사람들의 조용히 하라는 꾸짖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큰소리를 질렀다. 소경의 부르짖음이 예수님의 귀에 도달했다.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이미 마음으로 예수를 믿고 있었던 소경은 결국 자신의 믿음으로 광명을 찾는다.(42절)
오늘 예리고의 소경 치유사화를 다른 많은 기적사화 중의 하나로 보기엔 너무 아깝다. 그 이유는 이 기적사화가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에 행하신 마지막 기적이라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소경의 치유기적은 공관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것도 복음서 전체의 구조에서 같은 자리인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마태 20,29-34; 마르 10,46-52; 루가 18,35-43)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 예리고 소경의 치유는 단순한 치유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예수께서는 더 이상 기적을 행하지 않으실 것이다. 만약 행하신다면 그것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질 기적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마지막 공식적 기적으로서의 소경 치유기적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이 기적의 의미를 잘 알기 위해서는 앞서간 복음, 즉 예수께서 예리고에 당도하기 전에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복음마다 다소 차이는 있으나, 공통된 내용, 그것은 바로 ‘수난에 대한 세 번째 예고’와 ‘추종의 의미와 섬김의 자세’이다. 마태오와 마르코복음은 ‘수난에 대한 세 번째 예고’에 이어 즉각 ‘추종과 섬김’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제자들의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사실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루가복음에는 ‘수난에 대한 세 번째 예고’ 다음에 오늘 복음인 예리고 소경의 치유사화를 배치하였다. 루가가 ‘추종과 섬김’의 언급을 다루지 않은 이유는 예고의 끝 부분에 마태오와 마르코에 없는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도 조금도 깨닫지 못하였다. 이 말씀의 뜻이 그들에게는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지 못하였던 것이다.”(루가 18,34) 라는 말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종합하여 보면, 제자들은 두 눈을 뜨고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었다. 그들은 인자(人子)의 본질적인 부분인 수난과 죽음, 추종과 섬김은 눈을 가지고도 보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난 기적과 권위, 자리와 보상만 보려했다. 이러한 제자들에 비하여 예리고의 소경은 장님의 처지에서 예수님의 본질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소경이면서도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제대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가 믿음의 눈으로 보고 있었던 것을 실제로 보게 해 주신 것이다.
끝으로 오늘 복음에서 “소경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따라 나섰다.”(43절)는 마지막 구절을 주목해야 한다. 바르티매오가 광명을 찾고 예수를 따라 나선 것은 단순히 감사의 표가 아니다. 그는 곧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된다. 그것은 바르티매오가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예수님의 마지막 일을 목격하고 증언할 진정한 ‘보는 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참된 기적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보고 믿겠다는 사람들은 보통 볼 수도 없을뿐더러 보고도 믿지 않을 사람들이다. 참으로 보기 위해서는 먼저 믿어야 한다. 오늘 예리고의 소경처럼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