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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명동주교좌성당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 대성당은
명실 공히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자 심장이다.
이곳은 한국 교회 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곳이자
여러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기도 하다.
1882년 명동은 한미수호 조약의 체결로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될 것을 예견한
제7대 교구장 블랑 주교에 의해 성당 터로 매입된다.
블랑 주교는 이곳에다 우선 종현 서당을 설립, 운영하면서
예비 신학생을 양성하는 한편 성당 건립을 추진해
한불 수호 통상 조약(1886년)을 체결한 이듬해인 1887년 5월,
대지를 마저 구입하면서 그 해 겨울부터
언덕을 깎아 내는 정지 작업을 시작했다.
신자들의 열성으로 시작된 명동 대성당의 정지 작업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운 정부와의 부지 소유권 분쟁에 휘말려
4년이 지난 1892년 5월 8일에 가서야 기공식을 갖는다.
그 사이 초대 주임 블랑 주교가 1890년 선종하고
두세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성당 설계와 공사의 지휘 감독은 코스트 신부가 맡았는데
그는 약현(현 중림동약현) 성당과 용산 신학교의 설계 감독도 맡았다.
코스트 신부가 1896년 선종하고
그 뒤를 이은 프와넬 신부에 이르러서야 성당 건축을 마무리짓고
드디어 1898년 5월 29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역사적인 축성식을 가졌다.
기공 후 무려 12년 만에 완공된 명동 성당은
순수한 고딕 양식 건물로 그 문화적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1977년 11월 22일 사적 제258호로 지정된 명동 성당이 준공된 후
그 지하 묘소에는 1900년부터 기해 · 병인박해 당시
믿음을 지킨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치해 왔다.
150.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 - 수표교 인근
한국 천주교회는 중국 북경에서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세례성사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베드로, 1756-1801년)이
1784년 겨울, 수표교(水標橋) 인근 이벽(세례자 요한, 1754-1785년)의 집에서
이벽과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정약용(사도 요한) 등에게
세례식을 베풀면서 시작되었다.
이로써 평신도에 의한 자발적인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기념표석에는
“1784(정조 8)년 겨울, 수표교 부근 이벽(李蘗, 1754-1785)의 집이던 이곳이
세례식이 최초로 거행되어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된 터이다.”
라는 내용이 담겼다.
151. 김범우집터
1784년 늦게 이승훈, 정약전·약종·약용 3형제, 권일신 형제 등이
이벽을 지도자로 삼아 종교 집회를 가짐으로써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됐으나
이듬해인 1785년(을사년), '명례방 공동체'는 형조의 추조적발 사건으로 발각되어
김범우가 충청도 단양으로 유배를 당하는 수난을 겪게 되었다.
명례방 공동체는 이렇게 하여 와해되고 말았다.
이어 김범우는 유배된 지 얼마 안되어
형벌로 인한 상처가 덧나 배소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김범우의 죽음은 앞으로 한국 교회가 얻게 될 수많은 혈세(血洗)
곧 '피의 세례'를 예견해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152. 좌포도청터
조선시대 한양과 인근지역의 방범과 치안을 담당하던 기관입니다.
그러기에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박해의 역사 살아있는 장소입니다.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 병인박해 등의 역사가
벽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치는 종로3가역 9번출구앞입니다
종로성당
1801년 시작된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조선 왕조의 근간인 성리학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한 지배층의 탄압으로
천주교 교인들은 줄줄이 처형되었습니다.
특히 천주교인들과 외국인사제들은 성 안의 좌우 포도청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했고 처형되었는데
순교한 이들을 기념하는 성당이 종로성당입니다.
서울대교구는 2013년 2월 28일 서울 좌 · 우 포도청을 관할구역에 둔
종로성당을 포도청 순례지 성당으로 지정했습니다.
153. 광화문 124위 시복터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북측광장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 집전으로 이곳 광화문 광장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이 열렸습니다.
154. 형조터
서울시 종로구 세종대로 175 세종문화회관 앞 바닥돌
광화문 앞은 조선시대 육조거리가 위치했던 곳입니다.
형조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행정기관
6조(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중 하나로
법률의 제정과 시행을 맡은 기관이었습니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명례방 집회(김범우의 집) 참석자들이 형조로 압송되었을때부터
이곳에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문초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최필공 토마스, 최필제 베드로, 윤운혜 루치아,
정철상 가롤로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고, 김천애 안드레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윤지헌 프란치스코 등은 전주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남명혁 다미아노, 김효임 골롬바,
김효주 아네스,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전장운 요한, 최형 베드로 성인 등도 형조를 거쳐 갔다.
155. 의금부 터
서울시 종로구 종로 47 (종각역1번출구 SC은행 본점 앞 화단)
의금부(義禁府)는 조선 시대에 중대한 범죄를 다루던 사법 기관입니다.
박해시대 천주교신자들은
서울의 좌·우포도청과 지방의 각 진영과 군, 현에서 문초를 받았는데
그 중 중죄인, 주교와 신부 평신도지도자들은 의금부에서 국문(鞠廳)을 받았습니다.
위치는 지하철 1호선 종각역 1번출구 우측 화단에 표석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천주교 박해시기, 천주교 신자들 중 중죄인, 즉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은
임금의 특별한 명령으로 의금부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았다.
박해 당시, 이승훈(베드로, 1756-1801),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1759-1801),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년), 조동섬 유스티노(1738∼1830) 등
많은 천주교 신자가 의금부에서 고초를 겪었고
대부분 이곳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156. 전옥서 터
서울시 종로구 청계천로 41 (1호선 종각역 6번출구 화단)
전옥서는 형조 아래에서 감옥과 죄수를 관리하던 관서입니다.
미결수를 구류하는 곳으로 형조에서 심문을 받고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전옥서에 구금되었습니다.
전옥서의 옥사는 남자 옥사와 여자 옥사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남옥과 여옥은 각각 담장이 둘러져 있고 각 담장에 출입문이 있었다.
또 죄의 크고 작음에 따라 분리 수용하도록 하였다.
박해시기 많은 천주교인들이 형조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고,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전옥서에 수감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유관검 등이
형조에서 의금부로 이송되었다가 전주에서 참수되었고,
강완숙 골롬바, 최필제 베드로, 김현우 마태오 등은
형조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에서 순교하였다.
기해박해 때에는 남명혁 다미아노 성인과 정정혜 엘리사벳 성녀가
형조에서 심문을 받은 후 참수되었고,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인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은
의금부에서 형조로 이송되어 처형될 때까지 전옥서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이호영 베드로 성인은 4개월 동안 전옥서에 갇혀 있다가 옥사하였다.
병인박해 때에도 많은 순교자들이 전옥서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전장운 요한 성인과 최형 베드로 성인 등은 의금부에서 신문을 받은 후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밖에서 참수되었다.
전옥서 터 표지석은 지하철 1호선 종각역 6번 출구 도로 쪽 화단에 있다.
157. 우포도청 터
서울시 종로구 종로6 (광화문 우체국 앞 화단)
포도청은 조선시대의 경찰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좌포도청, 우포도청으로 한성부를 나뉘어 관할하였습니다.
포도청은 죄인을 잡거나 다스리는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었으나,
북산사건(北山事件)을 계기로 천주교 문제에 직접 관여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북산(즉 북악산) 아래의 계동에 숨어 지내던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의 거처가 밀고 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좌포도청(좌포도대장 조규진)에서는 주 신부를 체포하기 위해
포교와 포졸들을 계동으로 급파했으나
지도층 신자들의 기지로 체포에 실패하고 말았다.
대신 신부 댁 주인 최인길(마티아), 밀사 윤유일(바오로)과 지황(사바) 등 3명을 체포하여
좌포도청에서 혹독한 매질로 순교에 이르도록 했으니,
이것이 을묘박해(乙卯迫害)이다.
신자들에 대한 교수형이나 백지사형에 의한 처형은
주로 포도청의 옥에서 이루어졌다.
한국 성인 103위 가운데서도 23명이나 이곳에서 옥사했다.
즉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수록되어 있는 <순교자 일람표>에 따르면,
좌·우포도청의 옥에서 교수형이나 백지사형을 받아 순교한 신자들의 수가
형장에서 참수형이나 효수형을 받아 순교한 신자들보다 훨씬 많았다.
158. 경기감영 터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9 적십자병원 정문 옆 (서대문역 4번출구)
경기도 도청이라 할 수 있는 경기감영은 조선시대 외관(外官)의 하나로서
경기감사 또는 경기관찰사가 있던 관아입니다.
경기지방의 신자들은 서대문밖 반송방에 위치한 경기감영으로 이송되어
형벌과 문초를 받았습니다.
159. 서소문밖네거리순교성지
서소문 밖은 바로 임금의 궁성이 있는 한양의 공식 처형지였다.
창업이래 조선에서는 갖가지 모반 사건과 범죄, 정변 등으로
수많은 죄인들과 억울한 사람들을 처형하였다.
사형수는 크게 모반죄와 일반 범죄로 나뉘어졌는데,
그중 모반죄의 경우는 형장이 일정치 않았지만
나머지 사형수들은 주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형이 집행되었다.
"서경"에서 말한
"형장은 사직단 우측에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따른 것이다.
경복궁에서 바라볼 때는 이곳이 바로 사직단 우측이었기 때문이다.
또 한양의 성문 밖이란 점도 있었고,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이었으므로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줄 수 있는 효과도 있었으며,
최종 판결을 내리는 형조나 의금부와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형장으로는 아주 적격이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 이래 서소문 밖은
가장 먼저, 가장 많은 신자들이 처형된 순교터가 되었다.
그들은 포도청으로 끌려가 1차로 문초를 당하거나 형벌을 받고
형조나 의금부로 이송되어 판결을 받았다.
그런 다음 형조의 옥인 전옥서(지금의 광화문 사거리 동쪽 서린동 소재)에
갇혀 있다가 사령들에 의해 끌려 나와 형장으로 향하게 되었다.
"처형이 결정된 신자들은 옥에서 끌려 나와
수레 한가운데 세워진 십자가에 매달렸다.
십자가의 높이는 여섯 자 정도로,
신자들은 양팔과 머리칼만 잡아 매인 채 발은 발판 위에 놓여지게 된다.
수레가 광화문통을 옆으로 지나 서소문에 이르면
그 다음은 가파른 비탈길이다.
이 때 사령들은 신자의 발이 놓여져 있는 발판을 빼내고
소를 채찍질하여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달리게 했다.
수레는 무섭게 흔들리고 신자의 몸은
머리칼과 팔만이 십자가에 매달린 채 고통을 받게 된다.
현장에 이르면 옷을 벗기고 꿇어 앉힌 뒤
턱 밑에 나무 토막을 받쳐 놓고 목을 잘랐다."
(달래, [한국 천주교회사], 서설)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숨져 간 순교자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중 성인품에 오른 이만도 44명으로 이들은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39년 기해박해,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온갖 고통 속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희광이의 칼 아래 스러져 갔다.
160. 중림동약현성당(藥峴聖堂)
약현이란 만리동에서 서울역으로 넘어오는 곳에 있는 고개 이름인데
옛날에는 이곳에 약초를 재배하는 밭이 많았으므로
'약초밭이 있는 고개'라는 뜻으로 '약전현(藥田峴)'이라 불렀고
이를 줄여 '약현'이라 하였는데 점차 고개 부근의 지명으로 쓰였다고 한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서소문 밖 형장에서
이렇듯 잔인한 대우와 형벌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 첫 순교자들로부터 80여 년 뒤인 1887년 블랑 주교는
이곳 순화동의 수렛골에 교리 강습소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공소가 되고 4년 뒤에는 서울에서 두 번째 본당인
약현 본당(현 중림동 본당)으로 발전하였으며,
1893년에는 약현 성당(사적 제 252호)이 완공되었다.
이는 1898년에 완공된 명동 성당(옛 종현 성당: 첫 번째 본당)보다 6년 앞선 것으로
1892년 한국교회 최초의 서양식 벽돌 건축물로 완공되었다.
161. 노고산성지
젊은이들의 거리 신촌.
이곳에는 해발고도 106m의 그리 높지 않은 산,
노고산이 있다.
바로 서강대학교가 자리한 곳이다.
작은 정원처럼 보이는 이 공간에 서 있는
3개의 조각에는 성직자 3명의 얼굴이 새겨져있다.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 성 모방 베드로 신부, 성 샤스탕 야고보 신부.
서강대가 예수회에서 설립한 학교이니
예수회 출신의 성직자인가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지만,
파리외방전교회 출신인 이 3명의 성직자들은
예수회와도, 서강대와도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들이다.
바로 170여년 전 우리나라 땅에 천주교 박해가 극심하던 시기,
우리나라의 신자들을 돌보고자 찾아온 선교사들이다.
서강대학교가 세워지기 120여 년 전,
노고산에 이 성인들이 묻혔다.
조선대목구 제2대 교구장으로서
우리 땅의 신자들이 처음으로 맞이한 앵베르 주교,
앵베르 주교보다 앞서 박해 중인
조선의 신자들을 돌보던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
우리가 103위 한국성인호칭기도 중에 범라우렌시오,
나 베드로, 정 야고보라고 부르며 전구를 청하는 성인들이다.
순교한 성인들의 시신은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었다.
신자들이 성인들의 시신을 수습하러 오리라 여긴
관헌들의 감시가 삼엄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몇몇 신자들이 성인들의 시신을 찾으려다 체포되기도 했다.
마침내 20여 일이 흘러서야
신자들은 성인들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그렇게 처음 안장한 곳이 바로 이 노고산이었다.
성인들의 유해는 4년 동안 노고산에 묻혀있다
성인들의 유해를 수습한 신자 중 한 명인
박 바오로가 자기 집안의 선산인 삼성산에 이장했다.
성인들의 유해는 1901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겼다가
명동 성당 지하 묘지에 안장됐고,
현재는 절두산순교성지 지하 성해실에 모셔져 있다.
▲서울대교구 노고산성지에 있는
성 앵베르 주교(맨 왼쪽)와 성 모방 신부(가운데), 성 샤스탕 신부의 현양비.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강대학교 캠퍼스 내 자리잡은 성지는
새남터에서 순교한 세 성인의 유해가 4년 동안 안장됐으며,
이밖에도 많은 순교자들의 유해가 묻혔던 곳이다.
노고산성지를 끝으로 순례를 마무리 지으면서 점심 약속장소로 이동했다.
제주에 한 달 살이하러 오셨던 황모니카 부부와 좋은 인연을 갖고 있었다.
당시 우리집도 방문하고 함께 식사도 했는데,
서울에 오면 꼭 한번 만나자고 하셔서 오늘 일정을 빨리 마치고
함께 점심식사를 하기위해 위해서다.
홍대근처 일식점인데 손님으로 가득차 있었다.
회사근무 중이신데도 안토니오 형제님은 시간을 내어 주신 것도 고마운데,
순례가 끝나 홀가분하게 마시고 싶었던 마음을 아시고
술 한잔 같이 하는 배려도 해 주셨다.
두 분 부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이로써 국내성지 순례도 끝이났다.
처음 시작할 때는 마칠 수 있을까 걱정을 했는데
작년 대림시기, 그리고 사순시기동안 은총을 많이 받은 것 같다.
특히 그립고 고마운 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이제 차분히 남은 사순시기 잘 보내고 기쁜 부활을 맞을 준비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