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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월야영매(陶山月夜詠梅)
달밤에 매화를 읊다
이황(李滉, 1501~1570)
늦게 핀 매화의 속내를 다시 헤아리니
내가 추위를 겁내는 줄 알아서라네
애석하다 이 밤에 내 병이 낫는다면
밤새도록 달과 더불어 노닐 텐데
晩發梅兄更識眞(만발매형갱식진)
故應知我怯寒辰(고응지아겁한진)
可憐此夜宜蘇病(가련차야의소병)
能作終宵對月人(능작종소대월인)
퇴계 선생은 만년에 도산서원을 짓고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는 데 전념했다.
글을 읽는 틈틈이 계절을 좇아 다섯 친구를 가꾸며 그들과 더불어 살았다.
“내 벗은 다섯이니 솔, 국화, 매화, 대, 연꽃이라, 사귀는 정이야 담담하여 싫지가
않네”라고 노래했다. 도산서원 안에 화단을 만들어 절우사(節友社)라 이름짓고
몸소 화초를 가꾸었다. 윤선도는 물(水), 돌(石), 솔(松), 대(竹), 달(月) 이 다섯을
친구라 했으니 소나무와 대나무가 겹쳤다. 일반적으로 매난국죽(梅蘭菊竹)에 소나무
혹은 연꽃을 포함하여 오우(五友)라 했다. 퇴계는 오우 중에서도 매화를 가장 좋아
했다. 매화와 달과 퇴계가 서로 정을 나누는 모습이 이미 신선의 경지다.
[작가소계]
이황[ 李滉 ]
자 : 경호(景浩), 호 : 퇴계(退溪), 퇴도(退陶), 도수(陶叟), 시호 : 문순(文純)
출생 – 사망 : 1501년(연산군 7) ~ 1570년(선조 3)
성격 : 문신, 학자
출신지 : 안동
성별 : 남
본관 : 진보(眞寶)
저서(작품) : 심경후론, 역학계몽전의, 성학십도, 주자서절요, 자성록, 송원이학통록
대표관직(경력) : 단양군수, 풍기군수, 성균관대사성, 대제학, 지경연
<정의>
조선전기 성균관대사성, 대제학, 지경연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개설>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叟).
<생애 및 활동사항>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좌찬성 이식(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했으나,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 갔다.
12세에 작은아버지 이우(李堣)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해, 특히 도잠(陶潛)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18세에 지은 「야당(野塘)」이라는 시는 이황의 가장 대표적인 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20세를 전후하여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 뒤부터 다병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한다.
1527년(중종 22) 향시(鄕試)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 해에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1533년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고, 『심경부주(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이 해에 귀향 도중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537년 어머니 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간 복상했고, 1539년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임금으로부터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은택을 받았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를 한양에서 떠나보냈다. 이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힌 듯하다. 1543년 10월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삼아 사가를 청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1546년(명종 1)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얽어서 산운야학(山雲野鶴)을 벗 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 생활에 들어갔다. 이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 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아 영영 퇴거(退居)해 버릴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하여, 1548년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해, 봉임 전에 청해서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 중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安珦)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하여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조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년 후 퇴임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다시금 구도 생활에 침잠하다가, 1552년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1556년 홍문관부제학, 1558년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1543년 이후부터 이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이르렀다.
1560년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했다. 이로부터 7년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명종은 예(禮)를 두터이 해 자주 이황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명종은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에다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해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해 조석으로 이황을 흠모했다 한다. 그 뒤 친정(親政)하게 되자, 이황을 자헌대부(資憲大夫)·공조판서·대제학이라는 현직(顯職)에 임명하며 자주 초빙했으나, 이황은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1567년 명나라 신제(新帝)의 사절이 오게 되자, 조정에서 이황의 내경(來京)을 간절히 바라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해 이황을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황의 성망(聲望)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이황을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에 임명하며 간절히 초빙하였다. 이황은 사퇴했지만 여러 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했다 한다.
그 뒤 이황은 선조에게 정이(程頤)의 「사잠(四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의 「서명(西銘)」 등의 온오(蘊奧)를 진강하였다. 노환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하여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1569년(선조 2)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이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환향 후 학구(學究)에 전심하였으나, 다음 해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되었다. 그 달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 해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簀: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영사를 추증하였다. 장사는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산소에는 유계(遺誡)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만 세워졌다.
<학문세계와 저서>
이황이 『주자대전』을 입수한 것은 중종 38년, 즉 43세 때였고, 이 『주자대전』은 명나라 가정간본(嘉靖刊本)의 복각본(復刻本)이었다. 가정간본의 대본(臺本)은 송나라 때 간행된 것을 명나라 때 복간한 성화간본(成化刊本)의 수보본(修補本)이었다. 이황이 『주자대전』을 읽기 시작한 것은 풍기군수를 사퇴한 49세 이후의 일이었다. 이황은 이에 앞서 이미 『심경부주』·『태극도설』·『주역』·『논어집주』 등의 공부를 통해 주자학의 대강을 이해하고 있었으나, 『주자대전』을 완미(玩味)함으로써 이황의 학문이 한결 심화되었고, 마침내 주희의 서한문의 초록과 주해에 힘을 기울였다.
이황의 학문이 원숙하기 시작한 것은 50세 이후부터였다고 생각된다. 50세 이후의 학구 활동 가운데서 주요한 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53세에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개정하고 후서(後敍)를 썼으며, 『연평답문(延平答問)』을 교정하고 후어(後語)를 지었다. 54세에 노수신(盧守愼)의 「숙흥야매잠주(夙興夜寐箴註)」에 관해 논술하였다.
56세에 향약을 기초하였고, 57세에 『역학계몽전의(易學啓蒙傳疑)』를 완성하였으며, 58세에 『주자서절요』 및 『자성록』을 거의 완결지어 그 서(序)를 썼다. 59세에 황중거(黃仲擧)에게 답해 『백록동규집해(白鹿洞規集解)』에 관해 논의하였다. 또한 기대승(奇大升)과 더불어 사단칠정에 관한 질의응답을 하였고, 61세에 이언적(李彦迪)의 『태극문변(太極問辨)』을 읽고 크게 감동하였다.
62세에 『전도수언(傳道粹言)』을 교정하고 발문을 썼으며, 63세에 『송원이학통록(宋元理學通錄)』의 초고를 탈고해 그 서(序)를 썼다. 64세에 이구(李球)의 심무체용론(心無體用論)을 논박했고, 66세에 이언적의 유고를 정리하여 행장을 썼고 「심경후론(心經後論)」을 지었다. 68세에 선조에게 「무진육조소」를 상서했으며, 「사잠」·『논어집주』·『주역』「서명」 등을 강의하였다. 또한, 그간 학구의 만년의 결정체인 『성학십도』를 저작하여 왕에게 헌상하였다.
「무진육조소」의 내용은, 제1조 계통을 중히 여겨 백부인 선제(先帝) 명종에게 인효(仁孝)를 온전히 할 것, 제2조 시신(侍臣)·궁인의 참언(讖言)·간언(間言)을 두절하게 해 명종궁(明宗宮)과 선조궁(宣祖宮) 사이에 친교가 이루어지게 할 것, 제3조 성학(聖學)을 돈독히 존숭해 그것으로서 정치의 근본을 정립할 것, 제4조 인군(人君) 스스로가 모범적으로 도술(道術)을 밝힘으로써 인심을 광정(匡正)할 것, 제5조 군주가 대신에게 진심을 다해 접하고 대간(臺諫)을 잘 채용해 군주의 이목을 가리지 않게 할 것, 제6조 인주(人主)는 자기의 과실을 반성하고 자기의 정치를 수정해 하늘의 인애(仁愛)를 받을 것 등으로, 시무 6개조를 극명하게 상주한 풍격(風格) 높은 명문이다.
『성학십도』는 제1도 태극도(太極圖), 제2도 서명도(西銘圖), 제3도 소학도(小學圖), 제4도 대학도(大學圖), 제5도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제6도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제7도 인설도(仁說圖), 제8도 심학도(心學圖), 제9도 경재잠도(敬齋箴圖), 제10도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와 도설(圖說)·제사(題辭)·규약 등 부수문(附隨文)으로 되어 있다.
제1도는 도와 도설이 모두 주돈이(周敦頤)의 저작이며, 제2도의 「서명」은 장재의 글이고, 도는 정복심(程復心)의 작품이다. 제3도의 제사는 주희의 말이고, 도는 『소학』의 목록에 의한 이황의 작품이다. 제4도의 본문은 주희의 『대학경(大學經)』 1장(章)이고, 도는 권근(權近)의 작품이다. 제5도의 규약은 주희의 글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며, 제6도의 상도(上圖) 및 도설은 정복심의 저작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다.
제7도는 도 및 도설이 모두 주희의 저작이고, 제8도는 도 및 도설이 모두 정복심의 저작이며, 제9도에서 잠은 주희의 말이고, 도는 왕백(王柏)의 작품이며, 제10도의 잠은 진백(陳柏)의 말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다. 그러므로 제3·5·10도와 제6도의 중간 하도(下圖) 등 5개처는 이황의 독자적인 작품이고, 나머지 17개처는 상기한 선현들의 저작이다. 그러나 이들 유학 사상의 정수는 이황에 의해 독창적으로 배치되어 서로 유기적으로 관련됨으로써 생명 있는 전체적 체계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황의 학풍을 따른 자는 당대의 유성룡(柳成龍)·정구(鄭逑)·김성일(金誠一)·조목·이덕홍·기대승·김부륜(金富倫)·금응협(琴應夾)·이산해(李山海)·정탁(鄭琢)·정유일(鄭惟一)·구봉령(具鳳齡)·조호익(曺好益)·황준량(黃俊良)·이정(李楨) 등을 위시한 260여 인에 이르렀다. 나아가 이황은 성혼(成渾)·정시한(丁時翰)·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익(李瀷)·이상정(李象靖)·유치명(柳致明)·이진상(李震相)·곽종석(郭鍾錫)·이항로(李恒老)·유중교(柳重敎)·기정진(奇正鎭) 등을 잇는 영남학파 및 친영남학파를 포괄한 주리파 철학을 형성하게 했으니, 이는 실로 한국 유학 사상의 일대장관이 아닐 수 없다.
임진왜란 후 이황의 문집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도쿠가와가 집정(執政)한 에도[江戶]시대에 그의 저술 11종 46권 45책이 일본각판으로 복간되어 일본 근세 유학의 개조(開祖) 후지와라[藤原惺窩] 이래로 이 나라 유학 사상의 주류인 기몬학파 및 구마모토학파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황은 이 두 학파로부터 대대세세(代代世世)로 신명(神明)처럼 존숭을 받아 왔다.
<상훈과 추모>
죽은 지 4년 만에 고향 사람들이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해 이듬 해 낙성하여 도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그 이듬 해 2월에 위패를 모셨고, 11월에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09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고, 그 뒤 이황을 주사(主祀)하거나 종사하는 서원은 전국 40여 개 처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황의 위패가 있는 도산서원은 제5공화국 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국비 보조로 크게 보수·증축되어 우리나라 유림의 정신적 고향으로서 성역화 되었다.
이황의 학덕은 이황의 생시(生時)와 한·일 양국의 역사에서 크게 선양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국제적 규모로 널리 부흥되어 재검토되고 있다. 1970년 서울에 퇴계학연구원이 창립되었고, 1972년 퇴계 400주기 기념 논문집 『퇴계학연구』가 간행되기 이전부터 발행된 계간 학술지 『퇴계학보』는 2009년 126집에 이르렀다. 경북대학교에 퇴계연구소가 부설되었는가 하면, 서울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 동경에 이퇴계연구회가 설립되었다.
대만에도 국립사범대학 안에 퇴계학연구회가 부설되었고, 근래에는 미국의 워싱턴·뉴욕·하와이에 이퇴계연구회가 조직되었으며, 독일 함부르크 및 본에 퇴계학연구회가 생겼다. 1986년에는 단국대학교에서 퇴계기념중앙도서관이 낙성되어 그 안에 퇴계학연구소를 부설하였다. 또한, 국제퇴계학회가 창설되어 1976년 이래로 거의 해마다 한국·일본·대만·미국·독일·홍콩 등지에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여, 세계 각국의 이 방면의 석학들이 회동해 주제 논문을 발표하며 진지한 토론을 거듭해 오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이황의 학문은 일대를 풍미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를 통해 영남을 배경으로 한 주리적(主理的)인 퇴계학파를 형성해 왔다. 그리고 도쿠가와[德川家康] 이래로 일본 유학의 기몬학파[崎門學派] 및 구마모토학파[熊本學派]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 왔다. 또한, 개화기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에게서도 크게 존숭을 받아,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3국의 도의철학(道義哲學)의 건설자이며 실천자였다고 볼 수 있다.
『언행록』에 의하면, 조목(趙穆)이 이덕홍(李德弘)에게 “퇴계선생에게는 성현이라 할 만한 풍모가 있다.”고 했을 때, 이덕홍은 “풍모만이 훌륭한 것이 아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언행통술(言行通述)』에서 정자중(鄭子中)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생은 우리나라에 성현의 도가 두절된 뒤에 탄생해, 스승 없이 초연히 도학을 회득(會得)하였다. 그 순수한 자질, 정치(精緻)한 견해, 홍의(弘毅)한 마음, 고명한 학(學)은 성현의 도를 일신에 계승했고, 그 언설(言說)은 백대(百代)의 후에까지 영향을 끼칠 것이며, 그 공적은 선성(先聖)에게 빛을 던져 선성의 학(學)을 후학의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이러한 분은 우리 동방의 나라에서 오직 한 분뿐이다.”
이익은 『이자수어(李子粹語)』를 찬술해 이황에게 성인(聖人)의 칭호를 붙였고, 정약용(丁若鏞)은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을 써서 이황에 대한 흠모의 정을 술회하였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황이 제자들에게서 성현의 예우를 받는, 한국 유림에서 찬연히 빛나는 제일인자임을 엿볼 수 있게 된다.
기몬학파의 창시자 야마사키[山崎暗齋]는 이황을 “주자의 직제자(直弟子)와 다름없다.”며 ‘조선의 일인(一人)’이라 평가하였다. 그리고 야마사키의 고제(高弟) 사토[佐藤直方]는 “이황의 학식이 이룬 바는 크게 월등해 원명제유(元明諸儒)의 유(類)가 아니다.”라고 찬양하였다. 이나바[稻葉默齋]는 ‘주자의 도통(道統)’에서 ‘주자 이래의 일인(一人)’이라고 존신(尊信)했으며, 구마모토학파의 시조 오쓰카[大塚退野]는 “만약에 이 사람이 없었다면 주자의 미의(微意)는 불명해 속학(俗學)이 되어 버렸을 것이라 생각된다”고 하였다.
도쿠가와 말기의 요코이[橫井小楠]는 이황을 원·명시대를 통해 ‘고금절무(古今絶無)의 진유(眞儒)’라 절찬했고, 역시 이 계통에 속하는 막부(幕府) 말 메이지[明治]시대의 구스모토[楠本碩水]는 “명대의 대유(大儒) 설경헌(薛敬軒)·호경재(胡敬齋)와 명말청초의 육가서(陸稼書)·장양원(張楊園)과 비교하면 훨씬 탁월하다.”고 단언하였다. 마쓰다[松田甲]의 『일선사화(日鮮史話)』에 의하면, 요코이의 친구이자 제자로서 메이지 제일의 공신이며 교육칙어(敎育勅語)의 기초자인 모토다[元田東野]는 “정주(程朱)의 학은 조선의 이퇴계(李退溪)에게 전해졌고, 타이야[退野] 선생이 그 소찬(所撰)의 『주자서절요』를 읽고 초연히 얻은 바 있었으니, 내 지금 타이야의 학을 전해 이것을 금상황제(今上皇帝)에게 봉헌하였다”고 술회했다 한다.
1926년 중국의 북경(北京) 상덕여자대학(尙德女子大學)에서는 대학의 증축·확장기금에 충당하기 위해 『성학십도』를 목판으로 복각(復刻)해 병풍을 만들어서 널리 반포(頒布)하였다. 이때, 중국 개화기의 대표적인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는 찬시(贊詩)를 써 그 제1연에서 “아득하셔라 이부자(李夫子) 님이시여”라며 거리낌 없이 이황을 성인이라 호칭하였다.
다음과 같은 조호익의 말은 이황의 학적 지위를 간결하게 표현한 매우 적절한 평가라 볼 수 있다. “주자가 작고한 뒤 …… 도(道)의 정맥은 이미 중국에서 두절되어 버렸다. 퇴계는 …… 한결같이 성인의 학으로 나아가 순수하고 올바르게 주자의 도를 전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이만한 인물을 볼 수 없다. 실로 주자 이후의 제일인자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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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전서(陶山全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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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의 사상과 그 현대적 의미』(김형효 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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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퇴계철학 -그 심층연구 및 이론-』(전두하, 국민대학교출판부, 1987)
『퇴계와 율곡의 철학』(유명종, 동아대학교출판부, 1987)
『퇴율성리학의 비교연구』(채무송, 경인문화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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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의 생애와 사상』(유정동, 박영사, 1974)
『퇴계의 생애와 학문』(이상은, 서문당, 1973)
『퇴계의 교육철학』(정순목, 지식산업사, 1971)
「퇴계의 가정관」(금장태, 『퇴계학연구』1,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1987)
「도산십이곡고」(최진원, 『도산학보』7·8, 도남학회, 1985)
「퇴계선생의 인성론」(배종호, 『퇴계학보』32, 퇴계학연구원, 1981)
「유교의 우환의식과 퇴계의 경」(안병주, 『퇴계학보』25, 퇴계학연구원, 1980)
「퇴계철학의 근본문제」(유승국, 『퇴계학보』19, 퇴계학연구원, 1978)
「퇴계의 경사상」(이남영, 『한국인의 인간관』, 한국교육개발원, 1977)
「퇴계의 시가문학연구-단가의 가사에 대하여-」(이가원, 『퇴계학연구』, 퇴계학연구원, 1972)
「퇴계선생과 기고봉」(이을호, 『퇴계학연구』, 퇴계학연구원, 1972)
「이퇴계와 그의 학설」(이병도, 『한국학연구총서』, 성진문화사, 1971)
「이황-성리학의 진수-」(박종홍, 『한국의 인간상 4』, 신구문화사, 1971)
『退溪書節要』(張立文, 中國人民大學出版社, 1989)
『李退溪と敬の哲學』(高橋進, 東京東洋書院, 1985)
『李退溪-その行動と思想』(阿部吉雄, 評論社, 1977)
[네이버 지식백과] 이황 [李滉]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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