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님을 어떻게 부르는가?
누구든지 자신을 다 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하여 아주 소상하게 알고 있다는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정말로 잘 안다는 것은 자신 없는 일입니다. 평생을 같이 살았던 부모님이나 배우자나 자녀들도 잘 모릅니다. 직장에서 사람들을 만나도 사실 잘 모르는 채 잘 안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을 전혀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을 잘 알고 있고, 하느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고, 하느님의 계획도 잘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사실은 하느님을 가장 모르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리그베다’(Rig-veda)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의 진리를 가지고 현자들은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다." 리그베다(Rig-veda. BC2000~BC 800)란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적 문헌으로, 브라만교(敎)의 근본경전(根本經典)인 4베다 중 첫째 문헌을 말합니다. 그 경전의 창조설화에는 비슈바까르만(‘모든 것을 만든 자’의 뜻)을 창조자라고 하는 설이 있답니다. 성선(聖仙)인 그는 모든 방향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고, 모든 방향으로 뻗어있는 팔을 갖고 있으며, 모든 방향으로 나있는 발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의 본체를 다방면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자신의 어쩐 기준과 판단의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자신들이 보는 눈은 외형적으로는 같아 보일지 몰라도 전부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은 전부 다르고 또한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르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솜씨도 각각 다를 수 있으며, 사람들의 걸음걸이나 걷는 방법도 또한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는 눈도 다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세상을 볼 때,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판단할 수도 없고,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알 수도 없습니다. 진실은 숨어 있는 때가 더 많고, 실체는 항상 표면에 나타나는 것과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볼 수 있는 눈과, 진실을 들을 줄 아는 귀와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답니다. 그런 다음에 그 모든 것을 올바르게 행하는 실천의 길이 참으로 중요할 것입니다. 발걸음을 어떻게 떼어 놓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구태여 ‘리그베다’를 인용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게 계시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이시며 인간적인 안목으로 그분은 세상을 구석구석 볼 수 있는 눈도 많으신 분이고, 어느 것 하나도 그분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으며, 그분은 무량(無量)하시니 아니 계신 곳이 없고, 발이 닿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이 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있고, 보고 있으며, 제자들을 어떻게 알고 있고, 보고 있는지를 질문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지금 나에게 되짚어서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아무리 내가 세례를 받고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고 하여도 주님을 누구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말도 도저히 자신이 없답니다. 주님이라는 말은 ‘주인(主人)님’이라는 말의 준말이니까 나는 그 분의 노예라는 뜻인데 노예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입에 발려서 주님이라고 부른답니다. 나는 정말로 노예가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답니다. 그러나 주인은 노예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가지고 있으니 내 생명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주님이라고 부르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 말을 아무 거부감 없이 평생을 사용하면서 살았고 지금도 쓰고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를 노예로 생각하지 않으시고 ‘벗’으로 불러주셨으니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형님’이라고 불러야 맞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이시며 주님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자신이 없고, 생각되지도 않는 것입니다. 어려서 형이 있는 사람들이 가장 부러웠답니다. 지금이라도 형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자라고 말씀하셨으니 ‘스승’이라고 부를까? 그런데 제자들이 나를 스승으로 불러주지만 나는 스승답지 못하게 살고 있으니 나는 참 스승이 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비교해서 주님을 ‘스승’이라고 부르고 생각해보면 나와 같은 자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주님을 모독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이시니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생각해야 하겠지요. 하느님 아들이라고 생각해야 하겠지요. 그런데 내가 그렇게 고백할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그리스도’라고 불러야 하는가? 베드로는 주님과 같이 다녔고, 살았으니 또한 성령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라고 부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건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도 정말 자신이 없답니다. 구세주(救世主)로서 그분은 너무 멀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또한 ‘크리스천’과 같은 말인‘그리스도인’이라는 말도 실감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말을 굴비 엮듯 모두 끌어다 붙여서 주님의 이름을 만들고 그 이름을 며칠이고, 몇 년이고 불러대도 못마땅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실 때만 하여도 많은 말들이 설왕설래(說往說來)하였을 것입니다. 나도 그들과 같이 세상의 모든 것을 그분에게 붙일 것입니다. 내가 붙인 그 말이 주님을 호칭하는 정답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나만의 변명을 늘어놓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을 어떻게 부르고 어떻게 생각해도 나를 살려주시고, 해방시켜 주시는 내 신앙의 대상인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고난을 받으시고, 죄인으로 사형언도를 받고 처형을 당하시면서 까지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죄를 속량하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잘 느끼고 있으면서도 주님을 증언하지 못하고 살고 있답니다. 그 모두를 드러내 놓고 증언은 못하지만 주님은 나의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하고, 그렇게 믿고 있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고 고백한답니다.
주님, 저도 주님을 이렇게 부르고 싶답니다. 저는 언제나 친형을 갖고 싶었습니다. 힘들고 어렵고 서러워 지쳐 쓰러지기 직전에 비틀거리는 저를 꼭 안아주시고, 들썩이는 제 어깨를 두드려 주시며 “많이 힘들었구나. 형이 있으니 이제는 걱정하지 마라. 아우야!”하시는 형님이 되어 주시겠습니까?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