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1)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요한 6,1-15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초라한 우리 삶의 결실이라 할지라도
오늘 아침 저는 안드레아 사도의 언행을 두고 묵상해보았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몇몇 안드레아와 관련된 기사들에 비추어볼 때 그는 매우 현실적인 사람으로 추정됩니다.
말보다는 행동을 중요시 여기던 실천가, 머리로 오래 생각하기보다는 발로 뛰던 사람, 민첩하게 움직이던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그런 안드레아였기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필립보와 ‘굶주린 군중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대화하고 있을 때, 그는 성급하게 대화에 끼어듭니다.
그는 이미 직면한 문제에 앞에서 백방으로 뛰어다니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는 이미 굶주린 군중들의 문제를 해결해보기 위해 여기저기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다니면서 음식을 찾아보았습니다.
안드레아는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이 꿀처럼 달고, 생명수처럼 시원하다할지라도,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아가 찾아낸 것은 너무나도 보잘 것 없었습니다.
남자 장정만 해도 오천 명, 총인원은 줄잡아 이만명이상인데, 확보된 비상식량은 겨우 한 소년이 들고 있던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습니다.
이는 갈릴래아 호숫가 가난한 백성들이 겨우 끼니를 때우기 위해 즐겨먹던 초라한 식사였습니다.
준비성, 계획성이 투철했던 그는 최우선적으로 당면한 문제인 ‘식사’ 문제에는 전혀 관심도 계획도 없이 말씀만 선포하시던 스승 예수님이 무책임하게 보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안드레아는 볼멘 목소리로, 실망에 가득 찬 목소리로 이렇게 외치는 것입니다.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보잘 것 없는 결과 앞에 실망과 회의, 분노로 가득 찬 안드레아의 목소리는 어쩌면 오늘 우리의 목소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외침 역시 자주 안드레아의 그것과 닮아있습니다.
“주님, 정말 야속합니다.
제 인생,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이것 보십시오. 이것이 무엇입니까?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주님, 하는데 까지 노력했지만 보시다시피 결과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손에 쥔 게 없습니다.
부끄럽습니다. 비참합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손때 묻은 한 소년이 지니고 있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많은 군중을 배불리셨듯이 보잘 것 없는 우리의 인생, 초라한 우리 삶의 결실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우리의 보잘 것 없는 결실을 통해서도 당신 사랑의 기적을 계속 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일상이 비록 지극히 구차스러워 보이고, 엄청 하찮아보일지라도 힘내십시오.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봉헌하십시오.
일어서십시오.
주님께로 나아가십시오.
2)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2024년 나해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세례의 상징이라고?>
복음: 요한 6,1-15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는 대그룹 장가 아들을 참교육하다 학교에서 퇴학 당하고 아버지까지 죽게 된 박새로이가 3년 간의 감옥 생활에서 아버지의 꿈을 이룰 15년 목표를 세우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아버지의 꿈은 작은 가게 하나 갖는 것이었습니다. 박새로이는 장가 그룹을 파괴하고 자신에게 오히려 무릎 꿇게 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도 마음의 문을 열어서 동료들을 받아들이고 자기를 위해 헌신한 한 사람을 사랑하게까지 됩니다.
이 드라마는 복수의 이름으로 박새로이의 성장을 그리고 있습니다. 자아를 복종시키는 가장 완전한 방법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란 결론입니다. 그리고 그 불가능에 도전하게 만드는 힘은 누군가의 죽음입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박새로이는 대기업을 무너뜨릴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고 그러면 이전의 객기만 있던 청소년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계속 무너지는 것 만으로는 자존심만 강해질 뿐입니다. 자존심은 성장하며 자존감으로 바뀝니다.
우리 인생은 이 성장의 시험대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5천 명의 사람들이 먹지 못하고 배고파하는 것을 보시며 필립보를 시험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시험하는 것일까요?
“나는 하느님이다. 그런데 널 위해 죽을 거야. 그러면 넌 나와 함께 무엇을 할 수 있겠니?”
그러나 제자들은 시험에 통과하지 못합니다. 그들을 먹일 수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돌아가셨다고 믿어도 그럴까요? 그분은 우리에게 다 주신 분이십니다. 이것을 믿으면 이제 이러한 사람이 됩니다.
켈커타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그곳에 큰 보육원을 짓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때 많은 기자가 물었습니다.
“보육원 건축기금은 얼마나 준비되어 있습니까?”
데레사 수녀님이 대답했습니다.
“지금 준비된 기금은 3실링뿐입니다.”
그러면서 테레사 수녀님은 책상 위에 실제로 동전 세 닢을 꺼내 놓았습니다. 그러자 기자들은 웃었습니다. 그러나 테레사 수녀의 표정과 말은 진지했습니다.
“이 3실링과 나로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3실링이 하느님의 것이 될 때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녀는 3실링으로 고아원과 병원 등을 전 세계에 수백 개 지었습니다.
무언가를 이뤄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거기에서 벌어지는 나의 성장이 중요합니다. 그것 아니면 이기지 못할 자아와의 싸움이 중요합니다. 참 자유는 주님과 함께 꿈을 이뤄나가는 데서 얻어집니다.
얼마 전에 『더 높은 기도』 책 홍보 행사를 했습니다. 북 콘서트라고도 하고 출판 기념회라고도 합니다. 많은 분이 오셔서 그 짧은 시간에 1,300권의 책을 사 주셨습니다. 저는 행사의 모든 과정을 기획하고 홍보하고 주인공 역할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유튜브 생방송을 하는 중에 노래도 세 곡씩이나 했습니다. 그러면서 느꼈습니다.
‘많이 성장했구나!’
잘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 긴장도 했습니다. 아침에 고춧가루를 팍팍 넣고 끓여 먹은 라면 때문인지 속이 쓰려왔습니다. ‘내가 왜 이런 것을 하며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 친구들 앞에서도 노래를 못 하던 저였습니다. 자아가 강했기에 실수하는 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봉사자 분들과 함께 세 시간 동안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했습니다. 노래를 잘하지 못해도 그냥 했습니다. 이런 저의 모습은 어렸을 때는 상상도 못 할 모습입니다. 그러며 주님과 함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겠다는 꿈이 저의 자아를 조금씩 무너뜨리고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감이 ‘세례’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세례는 삶의 의미와 목적이 있음을 인정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당신과 함께 배고픈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인지, 아니면 계속 꿈속에서 살 것인지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례의 결단이 있은 다음의 삶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되어가는 삶으로 완전히 바뀝니다.
주님과 함께 불가능한 것에 도전하십시오. 진짜 성공은 그 과정에서 내가 죽고 그리스도와 닮아가는 나의 성장과 자유입니다.
3)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6,1-15: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신 때를 “파스카가 가까운 때”(4절) 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온 많은 군중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5절) 하신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당신께서 행하실 기적을 똑똑히 지켜보게 하시려는 뜻이었다. 즉 증거를 보여주시려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먼저 예수님은 사람들을 먹일 양식이 없는 어려운 상황을 필립보가 깨닫고 걱정하게 하신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나면 모든 일은 하느님께 맡겨야 하며, 무엇이 모자란다고 당황할 필요는 전혀 없음을 깨달을 것이다. 필립보가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7절) 한다. 이때 안드레아가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9절) 말한다. 그것을 풀어 주님께 바치니 기적이 일어났다.
예수님께서는 풀밭에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10절) 하신다. 사람들은 자리를 잡았고 장정만도 오천 명쯤 되었다고 한다. 주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드시고 하늘을 바라보시며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고 음식들을 축복하여 떼어 나누어 주셨다. 그리고 사도들을 통해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주신다. 사람들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부르게 된다. 그곳에 앉아있던 모든 이가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들로 열두 광주리를 가득 채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12절) 예수님께서는 얼마 안 되는 음식을 군중이 먹고 남을 만큼 많아지게 하셨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치면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주실 것이다.”(루카 6,38)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바친 것보다 더 많이 받는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사랑의 나눔에 있어서 게을러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선행도 한껏 불려주신다.
사람들은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14절) 말한다. 배불리 먹은 그들은 모세가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주실 것”(신명 18,15)이라는 말을 따라서 한 것이다. 그 ‘예언자’는 광야에서 백성을 먹일 예언자, 물 위를 걸을 예언자(마태 14,25-31), 구름 속에서 나타날(마태 17,5) 예언자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여호수아에게 맡겼듯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요한에게 맡기셨다. 그래서 ‘나와 같은 예언자’에 관한 말씀이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모셔다가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산으로 물러가시어 기도하신다. 주님께서는 피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언제나 기도가 더욱 필요함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이제 우리 자신도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듯이 보이지만 주님께서 유용하게 쓰실 수 있도록 우리의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소년처럼 있는 그대로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4)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1코린 12장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이를 통해, 개인적으로 주어지는 모든 은사는 우선 공동체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영적 체험을 했을 때, ‘공동체를 위해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가?’라는 질문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어떤 자매님께서 자신의 신앙 체험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아주 신비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이고 공동체성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만나는 사람에게 모두 알리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공동체성보다는 자기를 알리려는 마음이 더 큰 것 같았습니다. 즉, 자신은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놀라운 일이고 신비로운 일이지만, 이렇게 개인적인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병이 낫고, 마귀를 쫓아내고, 하느님의 천사가 나타나는 것 등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이미 요나의 기적보다 더 큰 표징은 없다고 말씀하셨듯이, 우리 마음의 변화 이상 큰 표징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관점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만을 믿으려고 합니다. 이를 통해 교만에 빠지게 되고, 마귀의 유혹을 받는 순간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신비는 모두 우리 공동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공동체를 깨뜨리는 말과 행동을 하고 있다면, 하느님 신비에 반대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의 기준을 따져야 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공동체성’입니다.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서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습니다. 어떻습니까? 정말로 놀라운 기적이고 신비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이 기적만으로도 충분히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가 분명하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이런 움직임에 예수님의 반응은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그들이 당신이 보여주신 빵의 기적에서 의미하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공동체를 위해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모두를 위해 내려질 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늘 공동체를 강조하셨고, 공동체 안에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공동체보다는 나만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집중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오히려 마귀의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당신에게 있다(다윈 킹슬리).
5)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오천 명의 굶주린 이들이
먹고도 남을 양의
양식이 되기 위해서는
군중을 가엾게 바라보시는
그분의 속 깊은 애정이 담긴
기도가 필요했다네.
우리의 비천한 삶이
모욕과 멸시를 기뻐하며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그분의 축복과
자비가 필요하다네.
6)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이야기는
‘희망’이라는 또 다른 이름의 기적입니다.
불균형 혹은 결핍 안에서
희망을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 하겠지만
실제 우리 삶 안에서
무수히 많이 경험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양’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펼쳐 보이는
거룩한 살아있는 빵이 되어야겠습니다.
거룩하고 살아있는 빵이란
적어도 저에게는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실제 빵이 되는 것,
누군가를 위해
좋은 빵 한 조각이 실제 될 수 있는 것
그래서 죽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오늘 기적의 핵심입니다.
7)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요한 6,10)
삶이라는 식탁에서
매순간 사랑의
식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매순간이
특별한 순간입니다.
재대로 먹어야
제대로 살 수 있는
우리들 생명입니다.
하느님 생명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됩니다.
사람과 빵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친히
빵이 되시어
흩어진 우리를
한 데 모으십니다.
나누는 사람이
가장 풍요로운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기꺼이 누군가의
빵이 되는 사람입니다.
성체성사는
바로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생명의
이야기입니다.
함께 할 사람은
언제나 바로
우리 앞에
있는 이들입니다.
삶의 중심은
성체성사입니다.
성체성사는
사람을 살리는
성사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만남의 자리는
성체성사의
자리입니다.
우리를 살게하는
모든 것에서
감사를 나누는
따뜻한 부활시기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사랑의 식탁에서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실천하라고
주님께서 친히
오늘의 빵이 되십니다.
부활의 삶은
다시 살게하는
빵의 밥의
삶입니다.
8)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요한6,11)
'빵의 기적!'
오늘 복음(요한6,1-15)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는 빵의 기적'입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기적)들을 보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6,5) 하고 물으십니다.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이 말씀에 필립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6,7)
그리고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6,9)
예수님께서는 소용이 없어 보이는 보잘것 없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는 군중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그리고 남은 빵 조각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차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빵의 기적입니다.
이 빵의 기적이 지금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빵의 기적의 모습을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잘 보여줍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사도4,32.34)
누구는 먹을 것이 없어 매일 무엇을 먹어야 하나 걱정하는데, 누구는 먹을 것이 너무 많아 무엇을 먹어야 할지를 고민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날마다 배 터지게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메시아이시며 공정과 정의이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돌아갑시다! 그래야 빵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복음 말씀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1-15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4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5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7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8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9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