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경제공황으로 침체와 무기력의 악순환에 빠져있던 미국 사회에 커다란 경종을 울렸던 작가이자 철학자 앨버트 허버드는 “직업에서 행복을 찾아라. 아니면 행복이 무엇인지 절대 모를 것이다”라는 경구를 남겼다. 이것은 직업이 생계수단이지만 또한 자신의 가치, 자아실현을 위한 중요한 도구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직업은 인간이 살아있는 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학문이나 정치·경제·사회 등 각 분야에 특정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소위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전체 직업군에서 ‘상위 소득계층’을 형성하고 거기에 더해 사회적 권위까지 인정받고 있다.
‘전문가’는 사전적 의미로 “어떤 분야를 연구하거나 그 일에 종사하여 분야에 상당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 “어떤 분야의 일에 굉장히 정통하며,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으며, 필요로 하는 기술이나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면 학문분야의 전공별 교수들, 그 밖에도 전문직 면허를 가지고 있는 의사나 약사, 변호사·판사·검사 등 법조인 등도 여기에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흔히 ‘과학자’라고도 불리는 과학기술 분야의 전문가들도 있다.
또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공무원들 중에서도 ‘전문가’라고 칭할 수 있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법률분야 전문가, 교육분야 전문가, 경제·금융분야 전문가, 행정분야 전문가, 의료분야 전문가 등등. 이러한 전문가들은 사회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동료 시민들에게 존중받으면서 자신의 사회생활을 영위하며, 그 직업의 결과물로 사회에 더욱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지난 9월 이후 ‘이태원 참사’ 관련 피고들에 대한 1심 재판 결과가 모두 나왔다. 그리고 검찰이 업무상과실치사상 등의 혐의로 기소하고 징역 7년을 구형했던 용산경찰서장과 용산구청장의 경우에 전 경찰서장은 금고 3년, 구청장은 무죄가 선고됐다. 이후 검찰이 ‘이태원 참사’ 부실 대응 등 혐의로 기소했던 전 서울경찰청장 등 간부들도 “구체적 주의의무 위반을 인정할 수 없다는 등의 이유”로 전부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러한 1심 재판 결과에 유족들이 참담한 심정으로 울분을 토로하는 것을 많은 국민들이 뉴스미디어를 통해 지켜보았다. 아마도 이 판결은 한국 사회에 ‘안전관리와 책임’에 대한 근본적인 논의를 촉발할 것으로 생각한다. 특히 관할경찰서장과 구청장에 대한 판결에서 법원은 피고인들의 양형 사유를 설명하면서 대통령실 용산 이전이라는 ‘외부 환경’을 언급하고, 지자체장의 경우 법률상 주의의무의 범위와 한계를 설시하면서 재난안전법 등에 ‘구체적 주의의무의 근거’가 없다는 법리적 판단을 내렸다.
법조 전문가들인 검사·판사·변호사들의 논증의 산물이 ‘판결’이니, 검사는 이 판결에 불복하는 경우 형사소송법의 절차에 따라 항소하면 될 것이다. 그래서 이미 나온 1심 판결은 사회적으로 존중돼야 하고 받아들여져야 하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상당수 국민들이 이러한 법조 전문가들의 판단과 관련 행정 전문가인 ‘공무원’들의 조치에 커다란 아쉬움을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시간을 과거로 되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성찰해야 할 것은 있다. 참사가 일어나기 전에 이른바 ‘전문가’들은 자신의 경험과 역량에 따른 객관적인 판단을 하였는가? 하였다면 예견가능한 ‘참사’를 피하기 위해 소속 조직이나 상사에게 강력하게 주장하였는가? 그리고 상위 전문가들은 하위 전문가의 이러한 의견을 진중하게 청취하고 객관적으로 검토하였는가? 과연 전문가라는 집단에게 따르는 책임의 범위와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이라는 강연에서 “더욱 전문화되고 나날이 진보되는 학문의 세계에서 살려는 자는 자기의 전문영역에 전적으로 파묻힐 것”과 또한 “학문이 사실의 객관적 인식에 노력하는 전문적 ‘직업’인 이상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엄격히 구별해야 하고, 교수나 교사는 특정 세계관이나 당파의 주장에 치우쳐 학생을 교수해서는 안된다”라고 했다. 직업으로서의 정치나 직업으로서의 공직에 종사하는 ‘전문가’ 집단은 이를 전범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런데 국민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전문가 집단이 대다수 시민의 판단과 괴리되는 의견이나 결과물을 제시하게 되면 역설적으로 사안별 이해당사자인 시민들은 ‘서발턴(Subaltern)’의 입장에 처하게 된다. 서발턴은 이탈리아의 철학자 안토니오 그람시가 처음 사용한 것인데, 주류 지배 이데올로기에서 배제되어 ‘잉여적 위치’에 존재하는 하위 주체들을 통칭하는 것이다. 그는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차별받던 이탈리아 남부의 하층 농민 계급을 이러한 하위주체로 보았다.
이후 ‘서발턴’ 개념은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에 의해 대중화됐는데, 그는 주류 담론이 서발턴의 경험·의식·주장을 읽어낼 능력이 없다는 점과 그 결과 서발턴은 주류 담론에서 그들의 의견이나 주장이 왜곡되고 누락되어 마치 유령과 같은 존재가 된다고 보았다. 즉 스피박은 저항하거나 자신들의 주장을 사회에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려운 ‘서발턴’의 상황에 주목했던 것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것을 ‘천붕(天崩)’이라고 하고, 자녀가 부모보다 일찍 죽는 것을 ‘참척(慘慽)’이라 한다. 두 가지 슬픔 모두 가장 극한의 슬픔이지만, 그 중에서도 자식을 먼저 앞세우는 참척의 슬픔이 더 깊고 고통스럽다고 한다. 참사 후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지금까지 사고 수습을 위한 과정과 ‘판결’이라는 결과물을 도출하기까지 국가나 시민사회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유족들의 의견이나 입장을 어느 정도 진지하게 청취하고 처분에 반영했는지, 처절한 ‘참척’의 슬픔을 겪었던 데 대한 사회적 위로가 됐는지 참으로 아쉽다.
왜 이런 참사가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는가? 그 근본적 질문은 아직 유효하다. 여러 가지 원인을 들 수 있겠지만, 그 ‘중핵’을 이루는 문제는 2014년 ‘세월호 참사’와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 이후에도 “재난 및 안전관리에 대한 총체적 시스템”이 과연 제대로 작동하는지 많은 국민들이 확신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러한 재난 및 안전관리에 대한 국가책무를 적정하게 이행하기 위해 법률 전문가와 재난 및 안전관리 전문가들은 ‘총체적 재난 및 안전관리시스템’에 대해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살펴보고 그 개선점을 제시하고, 법과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
그리스 신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서 의미하는 “자신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의 생각을 억지로 자신에게 맞추려고 하는 횡포나 독단, 독선과 아집에 빠진” 전문가는 전문가 집단에서 배제돼야 한다. 전문가들은 스스로 ‘프로크루스테스화’ 되지 않도록 객관적이고 냉정한 자기성찰을 지속해야만 한다.
더불어 국가와 시민사회는 참사 2주년을 맞아 자녀를 황망하게 떠나보내고 참척의 슬픔에 빠진 많은 국민들이 마음을 추스르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지금부터라도 다시 서로 힘을 모아 함께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다.
김경화 편집기획위원
동의과학대 경찰경호행정과 교수·기획처장
출처 : 교수신문(http://www.kyosu.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