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부활 제4주간 (수) 말씀 묵상 (사도 12,24-13,5ㄱ) (이근상 신부)
그들이 주님께 예배를 드리며 단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이르셨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 그래서 그들은 단식하며 기도한 뒤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나서 떠나보냈다. 성령께서 파견하신 바르나바와 사울은 셀레우키아로 내려간 다음, 거기에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건너갔다. 그리고 살라미스에 이르러 유다인들의 여러 회당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사도 13,2-5)
바르나바와 사울은 사람들에게 안수를 받고 파견을 받아 떠났다. 그들이 사람들에게 안수를 주고 떠난게 아니라 사람들이 그들에게 안수를 주어 그들으 파견했다. 결국 파견받는 이들, 그것도 하느님의 파견을 받는 이들은 사람들의 안수를 받는 이들이다. 사람들의 안수가 없이는 파견이 아름답지도 온전치도 못하다. 예언자와 교사들이 안수해 주었을텐데 아마도 그들만이 아닐 것이다. 사람들의 안수. 이름없는 이들의 안수.
교황 프란치스코가 교황직에 선출되고 바티칸 베드로 광장 발코니에서 그의 첫번째 축복은 세상을 향한 교황의 축복이 아니었다. 그는 축복이 필요한 세상에게 청했다. 그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며 고개를 숙이고 기다렸다. 그리고 그 짧은 침묵의 시간이 교황 프란치스코의 시대를 규정하는 가장 확실하고 소박한 선언문이었다. 참 장엄한 침묵이었다.
교황만이겠는가. 아주 작은 파견도 결국 사람들, 우리가 파견되어 도와주어야 할 것이라 여겨지는 이들의 축복이 필요하다. 그들의 축복이 우리의 무기다.
우리는 사람들의 파견을 받은 자.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거듭해서 또 다시 사람들의 파견이 필요한 자들이다. 파견되는 자들은 가르치는 자들이 아니라 배우는 자들이다. 하느님의 움직임이 그들 안에 있음을 발견하는 자들이다. 하느님을 가져다 주는 이들이 아니라 이미 거기 계신 하느님을 향해 가는 이들이다. 그 하느님의 축복에 힘입어 그리로 가는 이들이다.
출처: https://www.facebook.com/simonksyi/posts/pfbid03775HewayGdVX7cU4QVBrn7hmV4ipi7YwTetFkoLUyReoC4MmcKpYZDcNNTtTS7Aj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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