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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8. 묵상글 (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 탈바꿈.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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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8.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탈바꿈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 축일-2021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오늘 두 사도의 축일을 지내며 우리가 자연스럽게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은
왜 두 사도의 축일을 같이 지내는지 그것이겠지요?
그리고 두 분의 축일을 같이 지내는 것은 두 사도가 주님의 형제들이라고
교회가 인정하기 때문인데 두 분이 사도가 된 것은 자원한 것인지 아니면
오늘 복음 말씀처럼 주님께서 뽑아서 된 것인지 그것이 두 번째 질문이지요.
제 생각에 두 분이 제자가 된 것은 자원한 것이고,
열두 사도 중의 하나가 된 것은 뽑힌 것일 겁니다.
저의 이런 생각은 열두 사도 외에 주님을 추종한 사람들
곧 제자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에 근거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자가 되기로 자원할 때와 사도로 뽑힐 때
두 분의 마음이나 의도는 어땠을까 다시 생각이 됩니다.
망설임은 없었을까요?
두려움이나 조심스러움은 없었을까요?
오히려 불순한 의도나 뻐기는 마음이 있었을까요?
불순한 의도나 뻐기는 마음이라면 주님의 형제라는 것을 이용하여
주님이 세상의 지배자가 되셨을 때 한 자리 차지하려는 것과
사도단 가운데서 자기들은 주님의 형제라는 것을 뻐기는 것이지요.
만일 두 분이 이랬다면 제자에서 사도로 뽑힐 때는 기뻤을 것이고,
그러나 나중에 진정한 주님의 사도로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절망과 죽음의 계곡을 건너는 회개와 세례가 필요했겠지요?
그렇습니다.
주님의 형제라는 것 때문에 제자와 사도 되는 것에
망설임이나 두려움이나 조심스러움이 없었다면
열두 사도 중 주님의 진정한 사도가 되기 위해
제일 많이 탈바꿈해야 할 분은 두 분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탈바꿈에 대해 생각해보려는데
탈바꿈의 사전적 의미는 모양이나 형태나 상태가
바뀌고 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동물의 경우는 매미에게서 볼 수 있듯이
유충이나 유생에서 성충이나 성체로 탈바꿈하고,
식물의 경우는 본래의 것과는 아주 달라져 독립된 종으로 탈바꿈하지요.
그러니까 탈바꿈이라는 말에는 성숙과 완전한 변화라는 좋은 뜻이 있고,
그렇게 되기 전에는 미숙하고 불완전하였다는 뜻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두 분의 축일을 같이 지내는 것은
두 분이 이런 탈바꿈의 대표이고 모범이기 때문이겠는데
우리는 두 분의 탈바꿈을 영적인 탈바꿈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 영적인 탈바꿈은 요한 복음에서 세례자의 물의 세례와 비교하여
주님의 세례를 불의 세례, 성령의 세례라고 한 것과 같이
성령의 세례를 받아 완전히 영적인 존재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 영적인 탈바꿈은 존재의 영적 탈바꿈 뿐 아니라
삶과 역할도 영적으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자기만 영적으로 탈바꿈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탈바꿈하도록 모범이 되고 역할을 하는 겁니다.
두 분의 경우 단순한 제자에서 사도로 탈바꿈하는 것인데
사도란 열두 지파의 대표로서 주님 교회의 기둥이 되는 것이니
두 분을 본받는다면 우리도 제자에서 사도로 영적 탈바꿈을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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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8.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3)
오늘은 사도 시몬과 유다(타대오)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열두 사도를 뽑으신 장면을 이렇게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2-13)
이는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를 시나이 산으로 불러올리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산으로 불러올리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분께서는 먼저 부르시어 뽑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뽑으시기에 앞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선발 기준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의 일반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그들이 사도로 뽑힐만한 충분한 조건들을 갖춘 자들로 보이지 않습니다. 곧 신분이나 능력이나 지위에 있어 사도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춘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름 없는 무명인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뽑힌 후에도 여전히 특별한 내력을 전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거룩한 이들이었기에 뽑힌 것이 아니라, 뽑히었기에 거룩한 이들이 된 것입니다. 거룩한 분에 의해 뽑히었고, 거룩한 사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성 유다와 시몬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도 시몬이 카나 출신으로 열혈당원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뿐, 다른 내력을 알 수가 없습니다. 사도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단지 타대오, 곧 “용감한 자”라고 불렸다는 사실 뿐, 다른 내력을 알 수가 없습니다. 마치, “사도”란 모름지기 ‘이름 없이 주님의 뜻을 위해 살다가 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기나 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룩한 ‘건물’이 되고, 거룩한 분의 ‘거처’가 되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모퉁이 돌이십니다.”(에페 2,20)
사실, 교회는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령스럽게도 이 “건물”(집)은 “자라납니다”. 곧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에페 2,21). 그렇게 자라나면서 신령스런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집니다.’ 그렇게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2,22). 참으로 신령스런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고 있다’는 이 사실! 지금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지고 있다’는 이 사실! 이토록, 우리 안에 당신의 신비가 살아있다니, 헤아릴 수 없이 크나 큰 분이 나보다 작아져 내 안에 들와 있는 이 사랑의 신비 앞에 그저 어안이 벙벙하고 경탄할 뿐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뽑으신 다음,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군중들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상에 녹아, 세상에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집’, ‘하느님의 가정’을 건설합니다. 바로 내가 그 나라의 백성이요, 그 집의 건축자재요, 그 가정의 식구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3)
주님!
당신이 불러 뽑으셨으니, 저는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을 저의 거처로 내어주시고,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하오니, 당신 뜻의 실행이 제 양식이 되게 하시고,
제 몸이 당신 사랑으로 녹아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뜻에 맞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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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8.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참된 스승과 제자
축일을 맞이한 모든 이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굳건한 믿음과 사도적 열성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냥 뽑으신 것이 아니라 밤을 새우시며 기도한 다음 뽑으셨습니다. 그 기도의 열매는 확실했습니다. 열혈당원이라 불리는 시몬과 세리 마태오를 비롯하여 배신자 유다까지도 그 대열에 속해 있었습니다. 시몬과 마태오는 서로의 위치가 대립적입니다. 일제 강점기의 독립군과 친일파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도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26,33).하고 장담했지만 죽음 앞에서는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태26,72).하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습니다. 개별적으로 볼 때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뽑힌 것입니다. 이것이 밤새껏 기도한 결과입니다. 그냥 뽑았으면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뽑혔을 텐데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렸기에 장차 당신을 배신할 배반자들까지도 뽑으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15,16). 이것이 스승의 참모습입니다. 그분의 품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내가 그분의 품을 떠날 뿐입니다. 예수님은 잘나고 똑똑한 사람을 뽑은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을 선택하여 당신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한눈팔지 않는 이들로 만드셨습니다.
제자들은 부족함 투성이였지만 예수님을 만나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는 진리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잘못을 범한 베드로는 으뜸 제자로써 역할을 다하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열혈당원 시몬은 늘 투쟁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투쟁과는 상관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살았고 또 전했습니다. 죄인 취급 받던 마태오도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세관장 자캐오를 생각하면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남을 속여먹은 것은 네 곱절로 크게 갚아주고 구원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세리 마태오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다는 잘못은 뉘우쳤지만, 죄책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변화된 삶을 살면 행복이 오고, 변하지 않으면 끝이 불행합니다. 주님의 자비를 믿으면 미래가 열리고, 믿지 못하면 그 자체가 영벌입니다.
일상의 삶을 봅니다. “여자는 결혼 후 남자가 변하길 바라지만 남자는 변하지 않는답니다.” 아니 오히려 기대와는 반대로 변한답니다. 또한 “남자는 결혼해도 여자가 변하지 않길 바라지만 여자는 변한답니다.” 여자도 역시 남자가 기대하는 바와는 다르게 변한답니다. 집에서는 체육복을 입고 그야말로 아줌마가 된답니다. 서로서로 부족함을 채워주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변해야 하는데 부족함에 대해 서로 잔소리만 늘어가면 불행합니다. 변하되 상대를 바꾸려 하지 말고 내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 전이나 세례 후나 변한 게 없으면 불행합니다. 세월이 갈수록 예수님과의 만남이 깊어져야 행복합니다. 사도들이 주님을 만나 새 삶을 살았듯이 우리도 새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참된 스승 앞에 참된 제자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필리3,21).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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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8.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 성지순례 중에 각 지역마다 ‘사도’로 존경받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제주도에는 제주도 출신의 복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를 제주도의 사도라고 이야기합니다. 김기량 순교자는 1857년 중국 광동 해역까지 표류하다가 영국 배에 구조되어 홍콩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때마침 휴양 중이던 조선 신학생 이만돌 바울리노에게 교리를 배워 그해 5월 31일 루세이유(Rousseille)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아 입교하였습니다. 이듬해 우리나라 국경인 의주부를 거쳐 귀국해 이 바울리노가 전해 준 서한과 안내 정보를 가지고 많은 어려움과 고생을 겪으며 교우촌을 찾았습니다. 다행히 교우촌에 도달하여 최양업 신부를 만났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성실함과 그의 신앙에 대한 열성을 보고는 그가 제주도의 훌륭한 사도가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가 한창일 무렵, 김기량은 세례 받을 준비를 마친 예비 신자들을 데리고 가족들과 함께 육지로 나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1866년 통영 관아에 이송된 그는 문초를 받는 과정에서 떳떳이 신앙을 고백하고 함께 이송된 교우들에게 치명할 것을 의연히 권면하였습니다. 제주 출신의 첫 신자인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장렬하게 순교하였습니다. 김기량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어와 벗님네야 치명길로 횡행하세. 어렵다 치명길이야 평생소원 사주모요 주야 앙망 천당이로다. 펠릭스 베드로는 능도 주대전 하옵소서.” 이렇게 교회는 복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를 제주의 사도라고 이야기합니다.
거제도에는 거제의 사도 윤봉문 요셉이 있습니다. 거제도는 예로부터 유배지였습니다. 이 고장에 복음이 전해 진 것은 병인박해 때 부산 영도에서 피난하여 온 윤사우 다니슬라우에 의해서입니다. 윤봉문은 바로 윤사우의 둘째 아들입니다. 윤봉문은 1851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 부친을 따라 피난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이 거제도로 들어간 것은 1868년경입니다. 그들 가족은 우연한 기회에 옥포에서 동수로 있던 진진부와 인연을 맺고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훗날 윤봉문은 전진부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복자 윤봉문 요셉은 거제의 사도로 교회 회장직을 맡아 신자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고 붓 장사를 하면서 전교에 힘썼습니다. 순교자 윤봉문은 신자들을 모아 교리를 가치고 전교에 힘쓰는 한편 자신의 수계에도 열심이었습니다. 1887년 11월 병인박해 후 처음으로 당시 대구 본당 초대 신부였던 로베르(Robert) 신부가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 거제를 방문하자 그는 자신이 가르치던 예비신자 15명을 영세 입교시켰습니다. 그러나 한 달 후 뜻밖에도 이 지역에는 공식적인 박해가 아닌 사사로운 탄압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순교자는 칡넝쿨로 발목을 얽어 끌고 갔기에 살이 뭉개지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거제의 사도 윤봉문 요셉은 1888년 2월 20일 37살의 나이로 순교하였습니다. 조선의 초대 교회에는 이밖에도 호남의 사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있고,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가 있습니다. 이런 사도들의 열정과 신앙이 있었기에 모진 박해와 환난 속에서도 교회는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50년 역사를 자랑하는 미 동북부의 한인 천주교회에도 뉴욕에는 정욱진 토마스 신부님과 뉴저지에는 박창득 아우구스티노 몬시뇰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1970년대 초반에 이민자들을 위한 공동체를 설립하였습니다. 정욱진 토마스 신부님의 헌신과 열정으로 뉴욕에는 퀸즈 정하상 성당, 베이사이드 성당, 우드사이드 성당, 브루클린 성당, 롱아일랜드 성당이 생겨났습니다. 사제성소에도 관심을 기울여서 많은 젊은이들이 사제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10여 명 이상의 1.5세 사제들이 사목하고 있습니다. 박창득 아우구스티노 몬시뇰의 헌신과 열정으로 뉴저지에는 메이플우드 성당, 데마레스 성당, 103위 성당, 마돈나 성당, 마이클 성당이 생겨났습니다. 사제성소에도 관심을 기울여서 많은 젊은이들이 사제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20여명 이상의 1.5세 사제들이 사목하고 있습니다. 저는 정욱진 토마스 신부님과 박창득 아우구스티노 몬시뇰은 뉴욕과 뉴저지의 사도라고 생각합니다. 신부님들과 함께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며 힘들게 공동체를 가꾸었던 교우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민 초기에 한인 공동체를 위해 헌신했던 교우들 역시 뉴욕과 뉴저지의 사도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사도 시몬과 유다(타대오) 성인의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불러 주셨던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따라 갔고, 주님의 품을 그리워하며 거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었습니다. 사랑하고 살기에도 부족한 인생입니다. 나누고 살기에도 바쁜 인생입니다. 늘 감사드리고, 항상 기도하고, 언제나 기뻐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들 또한 각자 삶의 자리에서 ‘사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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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8.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당신의 사도, 즉 12사도를 뽑으시는 장면입니다. 사실 전승과 더불어서 성경 여러 곳에는 주님의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제자는 수는 분명 12명보다 많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는 그중 12명을 뽑으십니다. 왜 오늘 등장하는 12명이 뽑혔을까요? 왜 그들이 12사도라고 불리게 됐을까요? 그 기준은 무엇일까요? 사실 12명이 다른 제자들보다 더 뛰어나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12명을 뽑을 때의 기준이 무엇이었는지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아니, 아예 그 기준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12사도로 뽑힌 이들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건 바로 주님께서 밤을 새우며 기도하실 그 기도 안에 들어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기도의 내용도 알 수 없을뿐더러 하느님께서 어떤 응답을 들려주셨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기력과 정신을 다해 12사도를 위해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인간적인 눈으로 보기에는 그저 그런 사람들이 12사도가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뽑힌 12사도는 주님을 마음에 담고 몸에 새깁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겸손으로 예물을 바치며 악한 무리 앞에서는 사랑과 희생이라는 무기로 투사가 됩니다.
그렇게 사도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한 봉사로 한평생을 살아갑니다.
왜 뽑혔는지는 모르지만 잘 뽑혔다는 생각은 듭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뽑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사랑과 희생이라는 힘을 주십니다. 12사도들이 받았던 그 은총 말입니다.
영시(靈詩)
가끔 문인들의 시들을 읽다 보면 영적인 시를 만납니다.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흐름을 느끼게 됩니다.
그 안에 들어있는 하느님의 손길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손길은 이내 제게도 전해지곤 합니다.
영시들은 제게 기쁨을 줍니다.
주님께서 세상 모든 것을 통해 움직이고 계심에.
성령께서 세상 모든 것을 통해 활동하게 계심에.
영적인 시를 만나보세요.
모든 것을 이해할 필요 없습니다.
그저 그 안에 숨어 있는
따스함과 위로와 사랑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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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8.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돈이 아무리 많아도 행복도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긴 새 주택을 구하고, 원하는 물건을 구매하면 처음에는 행복도가 높아지지만 계속해서 그 행복도를 유지하지 못합니다. 어느 순간이 되면 그 전과 같은 상태가 된다고 하지요. 그래서 돈으로는 행복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많습니다. 그런데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심리학과 엘리자베스 던 교수와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마이클 노튼 교수는 돈으로 행복을 높이는 좋은 방법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돈으로 경험을 구매하라.”
물건은 점차 남루해지고 유행도 바뀌고 지겨워지지만, 가령 여행지에서의 새로운 경험은 시간이 지날수록 달콤해진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특히 좋은 사람과 함께한 경험을 많이 만들면 행복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파멸로 이끌 수 있는 경험을 사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파멸로 이끌 수 있는 경험은 지속될 수 있는 행복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가정을 파괴하는 외도, 자신을 파괴하는 마약류의 섭취, 다른 이의 몰락을 위해 부정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것 등은 순간의 만족을 가져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지속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파멸로 이끌 뿐입니다.
지속적인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이 사랑을 위해 돈을 쓴다면, 분명히 행복의 길로 이끌어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모범을 계속해서 보여주셨습니다. 병자를 고쳐 주셨고, 마귀 들린 사람을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돈이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돈이 더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참된 행복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기에 직접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셨습니다. 그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또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보상이 전혀 없는 어렵고 힘든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따라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참 행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이 부름은 세상의 것과는 분명 구별되는데, 우리는 세상의 기준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주님의 부르심에 문제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주님을 따르는데 왜 이렇게 어렵고 힘들게 사느냐면서 불평불만을 멈추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보다는 더 편하고 쉽게 세상을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면서 반문합니다.
지속될 수 있는 행복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가질 수 있는 행복이어야 합니다. 바로 주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할 때, 행복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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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우리는 약함과 실패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그분 아드님의 모상이 될 실질적 역량으로 이루어진 존재입니다(성 요한 바오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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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8.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장중인 신앙의 사랑 공동체
-기도와 말씀-
새벽 휴게실에 들렸다가 어제 금요 강론 자료를 읽었습니다. 어제 읽었던 한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대가들의 글을 읽어야 배울 것이 많다.” 그러니 기라성 같은 대가들의 주옥같은 말씀이 배경을 이룬 가톨릭 교리서의 공부는 성장중인 신앙 공동체에 큰 도움이 됨을 깨닫습니다. 가톨릭 교회 신학의 대가인 성 예로니모와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의 말씀, 그리고 신앙의 일곱가지 특징을 공부하는 마음으로 다시 나눕니다.
“성경을 모른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른다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과거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과거가 아닌 현재에 말씀하고 계시며, 오늘 우리와 이야기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빛을 주시고 생명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또한 우리에게 공동체를 선물하시고, 평화를 누리도록 우리를 준비시키며 우리 마음을 열어 주십니다.”
대가들의 글을 보면 개인 신상에 관한 사적인 말들은 거의 없고 보편적인 진리만을 말합니다. 신앙은 일곱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신앙은 순전히 하느님의 하느님의 선물이며, 우리가 진심으로 청할 때 얻게 된다.
2.신앙은 구원을 얻기위한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초자연적 능력이다.
3.인간이 하느님의 초대에 응할 때, 신앙에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명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4.예수님이 신앙을 보증하시기 때문에 신앙은 전적으로 확신할 만하다.
5.신앙이 사랑으로 증명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불완전하다.
6.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더욱 주의 깊게 경청하고, 기도를 통해 그분과 살아있는 관계에 머문다면 신앙은 성장한다.
7.신앙은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기쁨을 미리 맛보여 준다.
그러니 신앙이 없는 인간은 인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인간의 본질이다, 신앙할 때 비로소 참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의 신앙이요 신앙의 은총이요 신앙의 성장입니다. 신앙 공동체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시고 이런 신앙공동체인 교회는 끊임없이 내적성장중에 있는 역동적 실재입니다.
어제의 즐거웠던 추억을 잊지 못합니다. 70대를 넘어선 사촌 형제들과 남한산성 하루 나들이를 했습니다. 수도원에서는 미쳐 몰랐는데 요즘 산마다 단풍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남한산성은 약 400년전 인조임금이 병자호란(1636-1637)을 겪어낸 참혹한 장소입니다. 인조임금의 행궁 후원 400년쯤 된 느티나무에 감동했습니다.
커다란 느티나무가 흡사 사람처럼, 공동체처럼 생각되었습니다. 함께 한 70대 사촌 형제들도 세월과 더불어 연륜을 지닌 나무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무한한 추억을 지닌 나무같은 사람입니다. “침묵하는 나무”와는 대조적으로 “말하는 나무”같은 사람입니다. 주로 나눈 대화는 50-60년대 공유한 아기자기한 추억들이 담긴 이야기들이었고 아픈 몸들에 대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나이들면 누구나 아픈 것은 일상입니다.
나이들어갈수록 평등해지고 겸손해지는 나무들 같이 참 서로들 편안했습니다. 함께 했던 사촌들은 저 빼놓고는 열심한 개신교 신자이며 한분은 침례교회 목사님입니다. 사촌 아우 부인인 제수씨는 뜻밖에 슬며시 선물금을 제 주머니에 넣어 주었고 진정성 가득한 따뜻한 신앙의 마음에 참 마음 뿌듯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내일 미사봉헌하겠다 말씀드렸습니다.
400년쯤 수령의 느티나무에서는 “침묵, 고독, 인내, 믿음, 기도”를 배웠습니다. 말그대로 느티나무는 인고의 세월을 하늘 향해 침묵과 고독중에 인내하며 기도하며 끊임없이 성장중인 개인을, 공동체를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참으로 수도자들은 물론 참 사람으로, 참 공동체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침묵과 고독, 사랑의 기도와 인내의 믿음”이 절대적입니다.
“나무와 같은 사람이다. 나무처럼 사는 것이 잘사는 거다” 라는 생각과 더불어 서로 닮아가는 노목과 노승을 연상했습니다. 어제의 400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참 좋은 친구와의 만남인 듯 오후 내내 행복하고 뿌듯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복음의 예수님 제자공동체는 예수님 기도의 산물이자 하느님의 선물인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중심한 살아있는 한몸 공동체로 계속 성장해야 하는 살아 있는 공동체요, 그대로 오늘 우리 교회 공동체로 면면히 계승되어온 제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태어난 공동체이기에 우리 또한 한결같은, 끊임없는 기도가 예수님과의 살아 있는 우정 관계에, 신앙공동체의 성장에 얼마나 결정적인지요.
교황님이 많이 강조하는 말마디가 “더불어(together)”입니다. 신앙의 여정은 반드시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우리 모두가 더불어 예수님 한몸 운명 공동체에 속한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이며 이 두분 사도 역시 우리 교회 공동체에 초석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우리 교회 공동체의 특성을 참 적절하고 은혜롭게 표현합니다.
“우리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지고 있습니다.”
영원한 현재진행형으로 완성을 향해 성장중인 미완의 살아 있는 한몸 공동체요, 바로 여기 지체에 속한 우리들입니다. 작게는 우리 수도공동체이지만,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2000년 전통의 거목의 가톨릭 교회 공동체에 속한 지체들인 우리임을 알게 됩니다. 2000년 전통의 가톨릭 교회 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사랑의 보물 열매들인 성인성녀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우리만의 자랑이며 긍지입니다. 이런 자각이 날마다 참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금도 여전히 잠깨면 맨 먼저 만세육창을 하고 하루를 시작하게 합니다.
1.하느님 만세
2.예수님 만세
3.대한민국-한반도 만세
4.가톨릭 교회 만세
5.성모님 만세
6.요셉 수도원 만세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만세육창대로 이루어 주시며, 우리 가톨릭 교회 공동체를 날로 성장, 성숙시켜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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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8.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날 밤 바로 오늘 밤>
그날 밤
바로 오늘 밤
그분께서
산에 오르시어
하느님께 기도하시는
그날 밤
바로 오늘 밤
그분께서
칠흑 같은 어둠을
빛나는 영혼으로 사르시는
그날 밤
바로 오늘 밤
그분께서
홀로라도 끝내 가야 할 길을
가슴 깊이 아리게 새기시는
그날 밤
바로 오늘 밤
그분께서
가슴 벅찬 길을 함께 걸을
벗들을 마음으로 헤아리시는
그날 밤
바로 오늘 밤
그분 곁에
삶과 죽음을 그분과 함께하고픈
그분의 벗들이 함께 하는
그날 밤
바로 오늘 밤
그분은 벗들에게 더욱 가까이
그분의 벗들은 그분께 더욱 가까이
갈림 없이 서로를 향하는
그날 밤
바로 오늘 밤
이내 먼동이 트면
그분과 벗들이 하나 되어
새 길 여는 발걸음 곧게 내딛는
그날 밤
바로 오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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