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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20-25)아기 예수로 오신 목적
이 시간에 “아기 예수로 오신 목적”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성탄절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얼마 전에 팻머스 문화선교회에서 서울 경기 소재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이런 여론 조사를 하였습니다. “성탄절이면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까?” 여기에 대해서 싼타크로스가 29.9%로 가장 높았고, 예수님이라는 사람은 불과 예수님 7.2%에 불과했습니다. 그 중에서 자신의 종교를 기독교라고 답한 학생들 중 80%가 넘는 학생들이 크리스마스에 예수님 보다는 산타클로스와 눈, 캐롤, 선물 등이 먼저 떠오른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예수님이 주인공이니 모든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와 아기 예수님께 돌려야 할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 목적을 다 말할 수 없어서 본문에 나타난 성탄을 중심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라는 이름은 사람이 지은 이름이 아닙니다. 천사가 알려준 이름입니다.
이 이름 속에 예수님이 하실 일이 담겨 있어요. 그 뜻이 무엇일까요? 예수는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죄에 빠진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냥 오신 것이 아닙니다. 속죄의 제물이 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이 구원 그 자체고 영생 자체예요. 다른 누가 필요한 것 아니예요. 예수면 됩니다. 예수를 모시면 구원을 얻고 영생을 누립니다.
그래서 요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12:47에도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인을 사랑하셔서 자기를 버리신 사건이 바로 성탄인 것입니다.
2. 다스려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마 1:20에 보면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그랬습니다. 다윗이 자손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족보상의 관계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혈통을 따라 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하신 것은 예수님이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유대인의 왕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는 메시아, 메시아라는 뜻이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므로 왕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뜻도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왕이라는 뜻입니다.
사32:1에 “보라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 이 말씀처럼 이 통치는 의로운 통치입니다. 군림하는 세상의 왕과는 다릅니다. 아무리 선한 왕도 세금을 걷기 때문에 부담을 주는 왕입니다. 그러나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는 다스려 주시면 다스려 주실수록 복이 되고 은혜가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마귀의 시험에서도 다스려 주십니다. 가정도 교회도 나라도 잘 다스려집니다. 문제의 자녀가 있습니까? 주님을 높이고 엎드려 기도해 보세요. 다스려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다스림을 받는 곳이 천국입니다.
3. 마귀를 멸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마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여기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독생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사람의 후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오실 때 잠시 죄 없는 육신을 입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담의 유전을 받지 않고 남자 없이 여인에게서 태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태만 빌려서 태어나셨습니다. 여기에 신비가 있습니다. 의학자 m.b.디한 박사는 어머니 태속에서 자라고 있는 태아는 한 방울의 피도 어머니 피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어머니는 태속에 있는 그 작은 몸을 기르기 위해 그 태아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나 그 태아 속에 생기는 모든 피는 그 태아 자체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잉태로부터 갓난아기의 탄생까지 단 한 방울의 피도 어머니로부터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공통적인 결론입니다. 성경이 그것을 어떻게 알고 수천 년 전에 이미 동정녀 탄생을 예언했는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 사람의 말이 아닌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것은 마귀를 멸하러 오신다는 뜻도 됩니다.
창3:15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너는 뱀 즉 마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요일3:8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면 승리가 있습니다.
뱀은 따뜻한 일정한 온도가 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겸손하여 예수만 나타나게 하면 악의 세력은 꼼짝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나타나실 때 귀신이 소리 지르며 나갔습니다. 소리 없이 나갈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소리지르고 나가야 덕이 될 때는 소리 지르고 나가게 하십니다. 불신자에게 표적이 필요할 때는 소리 지르며 나가기도 합니다. 신약 성경에 소리 지르고 나가는 표적을 기록한 것은 주님이 오시면 귀신은 나간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4. 우리와 함께 사시기 위해서입니다.
마1:23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 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사시기 위해서 중생이라는 신비를 통해서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성령으로 주님이 우리에게 들어오실 때 우리 영혼은 새롭게 태어납니다. 이것을 신령한 의미에서 성탄이라고 한다면 성탄입니다. 주님을 받아들이는 척도에 따라 변화의 척도가 결정됩니다.
그래서 롬8:9-11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예수님은 누룩과 같아 우리를 신령한 성분으로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임마누엘은 바로 이런 자기희생을 뜻합니다. 그렇지만 믿어야 그리스도를 모십니다. 그리고 더욱 겸손과 경배로서 그리스도를 더욱 영화롭게 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탄생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람들에게 완전한 희망을 주시기 위해서 아기 예수로 오셨습니다. 죄 가운데 방황하십니까? 악이 다스려지지 않습니까? 원수 마귀의 지배하에 있습니까? 공허하십니까? 슬픔 가운데 있습니까? 우리 모두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모든 슬픔을 씻고 더욱 온전히 영화롭게 해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느 왕이 나라의 여기저기를 돌아보았습니다. 시골에 들어갔을 때 아주 예쁜 처녀를 보았습니다. 왕은 그 처녀를 아내로 맞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신하에게 “저 처녀를 데리고 오라. 결혼하겠다.” 그러자 그 대신이 깜짝 놀라며 거절했습니다. “'폐하! 안 됩니다. 왕의 신분으로 천민과 결혼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시골로 내려가서 거기서 살련다.” 신하가 또 말했습니다. “폐하! 그것도 안 됩니다. 왕의 신분으로 시골에 내려가서 살면 안 됩니다.”그러나 왕은 너무도 그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습니다. 왕의 자리를 포기하고 천민의 신분이 되어 시골로 갔습니다. 이 이야기는 덴마크가 낳은 유명한 철학자 키엘케콜이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전하려고 쓴 '왕과 시골 처녀의 사랑'이라는 이야기의 줄거리입니다.
의술로서 병을 다스린다고 하지요. 병이 다스려지지 않으면 얼마나 힘듭니까? 그러나 잘 다스려지게 되면 그만큼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처럼 예수님이 오시면 얼마나 잘 다스려 지는지 놀랍습니다. 악한 마음을 의로운 마음으로 다스려줍니다. 풍랑 같은 마음을 잔잔한 마음으로 다스려 주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마귀의 시험에서도 다스려 주십니다.
(눅 2:15-20) 예수님을 깊이 만나자
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18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하는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이 시간에 “예수를 깊이 만나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만남입니다. 누구와 만났느냐가 인생을 좌우합니다. 사람은 일생동안 세 번의 만남을 가진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부모와의 만남입니다.
이것은 자기 의사와 전혀 상관이 없이 만나는 만남입니다.
두 번째는 배우자와의 만남입니다.
잘 만나게 되면 제 2의 도약을 할 수 있는 발판이 됩니다.
그런데 세 번째의 만남이 있습니다. 이 만남은 너무나 중요해서 현세는 물론 영생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만남입니다. 그 만남은 바로 하나님과 만남,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만납니다. 그런데 좀 더 깊이 만나야 합니다.
어떻게 예수를 깊이 만나는 것일까요?
1. 예수만을 사모할 때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맨 처음 아기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베들레헴의 목자들이었습니다. 이 목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그것을 알려면 그들이 살던 곳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양을 치던 베들레헴 들판은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사이 지금의 라못라헬이라는 곳으로 벧학게렘이라고도 불리는 곳입니다.
그 벧학게렘은 분문이라 해서 분뇨를 푸던 문이 있던 곳으로
느3:14을 보면 레갑의 아들 말기야가 그곳을 중수하고 문을 달았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 목장은 레갑 자손들이 양을 치던 곳입니다. 레갑 자손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 조상 요나답이 후손들 신앙의 타락이 염려되어 집을 짓지 말고 파종하지 말며 포도원도 만들지 말고 술 마시지 말고 범죄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기 위해 양을 치며 살라 한 그 명령을 300년 동안이나 지켜온 경건한 백성들입니다. 그 신앙이 아기 예수 오실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주업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벨론이 침략해 왔을 때도 비천한 백성이라 해서 그들만은 잡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땅에 남아 순수하게 메시아를 기다리는 족속이 되었습니다. 헤롯을 비롯해서 바리세인 서기관 할 것 없이 모두 타락했어도 그들만은 신앙을 이어가고 있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를 깊이 만나려면 예수만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 것 다 사랑하면서 예수를 만날 수 없습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우상과 타협할까봐 다 포기하게 하고 양떼만 치며 목동 생활했던 것처럼 진실로 하나님만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날마다 경배하는 자가 예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을 보면 시므온이 나옵니다. 눅2:25부터 보면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를 소개하면서 성령이라는 단어가 여러 차례 나옵니다. 25절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절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절 “성령의 감동으로” 성령 성령 성령,,, 그의 신앙의 특징은 성령입니다. 성령의 은혜가 있었기에 그는 의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럼 그를 의롭게 하고 그에게 성령의 충만을 주고 성령과 지시를 받게 한 그 믿음은 무엇이었을까요? 경건했다는 데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늘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고 예배했습니다. 그가 아기 예수를 만났을 때도 그 입에서는 찬양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28-32절에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찬양했습니다.
이처럼 예배 신앙이 바로 서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할 뿐 아니라 자기를 영화롭게 아니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에게 성령이 임합니다. 이 신앙만 바로 세워지면 우리는 주님을 더 깊이 만날 수 있고 주님과 함께 동거 동행 동역할 수가 있습니다.
3. 말씀을 목숨 걸고 붙드는 자가 예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장에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예방합니다.
그들의 손에는 황금 유향 몰약이라는 3대 예물이 있었습니다.
이 예물은 왕에게 바치는 예물입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가 왕으로 나신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그럼 동방박사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직업은 점성가로서 별을 연구하는 천문학자들입니다. 그런데 학자들 중에는 이 동방박사들이 바벨론에 끌려갔던 유대인들의 후손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볼 때 그들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해방될 때 그곳에 남아있던 사람들의 후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헤롯 궁에 와서야 태어나실 곳을 알았다는 점에서 변변한 성경도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별을 연구하다가 별 따라 왔는데 그런 개념은 어디서 얻었을까요?
그들은 성경은 없었지만 구전으로 조상적부터 내려온 민24:17의 한 구절만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몰랐다면 유대인의 왕이 났다고 별 따라 올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감동하게 됩니다. 성경도 없지 그들이 아는 것은 민24:17 한절 뿐, 그러나 그들은 그 한 말씀일지라도 그것을 목숨 걸고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 약속하신 메시아가 오실까?
메시아를 기다리기 위해 태어날 왕에게 드릴 예물부터 마련하면서 별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상한 별 하나가 나타나 계속하여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름 모를 그 별을 따라 예루살렘까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많이 알지 못할지라도 한 말씀이라도 생명 걸고 붙들면 예수를 만납니다. 그들이 따라간 길은 수천리길 험한 광야였습니다. 헤롯이 그들에게 듣고 별이 나타난 시점을 계산하여 두 살 아래 아이들을 학살한 것을 보면 그 여행길이 1년 이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 박사들은 가스팔, 메키울, 발다살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별을 발견하고 출발하였을 때 4명이 함께 길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알타반 박사는 도중에 무슨 일로 일행과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뒤에 일행을 찾아 아무리 헤매어도 찾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예수님을 찾아 헤매다가 30년이란 세월이 지나서 겨우 찾았는데 벤허 영화에도 나오지만 그는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을 극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얼마나 주님을 사모했으면 일생을 찾았을까요? 그가 출발할 때는 청년이었지만 주님을 만났을 때는 백발이 허연 노인이었습니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리라”는 그 한 말씀 붙들고 자기 일생을 다 투자한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한 말씀이라도 목숨 걸고 실행하며 충성하면 예수를 만납니다.
4.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때 예수를 만납니다.
마지막 예수를 만난 사람이 안나입니다. 안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눅2:36-37에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그리하여 그 때 아기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선지자 안나의 믿음의 포인트는 자기를 이김입니다. 말이 그렇지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젊은 나이에 과부 되고 팔십사 년 동안 얼마나 고통스런 나날을 보냈을까요? 기도가 아니면 이길 수 없기에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겼습니다. 나를 죽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처럼 예수를 깊이 만나려면 나를 죽여야 합니다. 자아를 포기해야 합니다. 나를 죽여 겸손해야 합니다. 자아가 죽을 때 예수가 나타납니다. 딤후2:11-12에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씨를 파종했어도 엄동설한에는 나지 않은 것처럼 우리 마음에 예수님이 계셔도 내가 강하면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나를 죽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습니다. 자랑하는 나, 교만하는 나, 탐욕 품는 나, 말씀 떠나 빗나가려는 나, 하나님보다 앞서 가는 나, 묻지 않고 하려는 나, 월권하는 나, 내 기분으로 사는 나, 게으른 나, 외식하는 나, 담대하지 못하는 나, 나 나 나 나를 이겨야 합니다. 나를 죽여야 합니다. 나만 죽으면 만사형통입니다. 문제는 나입니다. 적은 가까운데 있습니다. 나를 죽이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안나처럼 엎드려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아기로 나실 때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 많았지만 아기 예수를 만나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다면서 얼마나 깊이 만나셨습니까? 목자들처럼 예수만 사랑하십시다. 시므온처럼 날마다 예배의 삶을 삽시다.
동방박사들처럼 말씀실행에 목숨을 거십시다.
여선지 안나와 같이 나를 이기십시다.
이 한 가지라도 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예수님을 더 온전히 만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3가지로 이루어집니다.
1. 하나님(말씀)을 아는 것입니다. 2. 하나님(말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말씀)을 사랑하며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서 2:19절을 보면,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인줄 알고 믿고 떤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귀신들도 하나님을 알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우리 자신들보다 하나님을 더 잘 알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귀신은 하나님을 신뢰한다거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더더욱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말씀을 잘 알아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귀신의 믿음을 우리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 1:20-25)아기 예수로 오신 목적
이 시간에 “아기 예수로 오신 목적”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성탄절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몇 년 전에 미국 보스턴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 소머벌에서 있었던 사건이라고 합니다. 시청에서 성탄절을 기념하려고 시청 앞 광장에 예수님 탄생 장면을 재현하여 놓았습니다.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님을 중심으로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동방박사들이 절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시민들의 눈길을 끌렸습니다.
그런데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아기 예수를 훔쳐 갔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성탄 장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청에서는 라디오와 TV를 통하여 이런 방송을 여러 차례 내 보냈습니다. “시청에서 알려 드립니다. 아기 예수가 없어졌습니다. 가지고 간 사람은 도로 제자리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알려 드립니다. 아기 예수가 없어졌습니다,,,.” 우리에게 뭔가 깨달음을 주는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탄절을 지키지만 사람이 주인공이 되어 예수 없는 성탄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팻머스 문화선교회에서 서울 경기 소재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이런 여론 조사를 하였습니다. “성탄절이면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까?” 여기에 대해서 싼타크로스가 29.9%로 가장 높았고, 예수님이라는 사람은 불과 예수님 7.2%에 불과했습니다. 그 중에서 자신의 종교를 기독교라고 답한 학생들 중 80%가 넘는 학생들이 크리스마스에 예수님 보다는 산타클로스와 눈, 캐롤, 선물 등이 먼저 떠오른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예수님이 주인공이니 모든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와 아기 예수님께 돌려야 할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 목적을 다 말할 수 없어서 본문에 나타난 성탄을 중심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라는 이름은 사람이 지은 이름이 아닙니다. 천사가 알려준 이름입니다.
이 이름 속에 예수님이 하실 일이 담겨 있어요. 그 뜻이 무엇일까요? 예수는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죄에 빠진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냥 오신 것이 아닙니다. 속죄의 제물이 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이 구원 그 자체고 영생 자체예요. 다른 누가 필요한 것 아니예요. 예수면 됩니다. 예수를 모시면 구원을 얻고 영생을 누립니다.
그래서 요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12:47에도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인을 사랑하셔서 자기를 버리신 사건이 바로 성탄인 것입니다.
2. 다스려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마 1:20에 보면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그랬습니다. 다윗이 자손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족보상의 관계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혈통을 따라 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하신 것은 예수님이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유대인의 왕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는 메시아, 메시아라는 뜻이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므로 왕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뜻도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왕이라는 뜻입니다.
사32:1에 “보라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 이 말씀처럼 이 통치는 의로운 통치입니다. 군림하는 세상의 왕과는 다릅니다. 아무리 선한 왕도 세금을 걷기 때문에 부담을 주는 왕입니다. 그러나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는 다스려 주시면 다스려 주실수록 복이 되고 은혜가 됩니다.
의술로서 병을 다스린다고 하지요. 병이 다스려지지 않으면 얼마나 힘듭니까? 그러나 잘 다스려지게 되면 그만큼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처럼 예수님이 오시면 얼마나 잘 다스려 지는지 놀랍습니다. 악한 마음을 의로운 마음으로 다스려줍니다. 풍랑 같은 마음을 잔잔한 마음으로 다스려 주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마귀의 시험에서도 다스려 주십니다. 가정도 교회도 나라도 잘 다스려집니다. 문제의 자녀가 있습니까? 주님을 높이고 엎드려 기도해 보세요. 다스려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다스림을 받는 곳이 천국입니다.
3. 마귀를 멸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마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여기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독생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사람의 후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오실 때 잠시 죄 없는 육신을 입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담의 유전을 받지 않고 남자 없이 여인에게서 태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태만 빌려서 태어나셨습니다. 여기에 신비가 있습니다. 의학자 m.b.디한 박사는 어머니 태속에서 자라고 있는 태아는 한 방울의 피도 어머니 피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어머니는 태속에 있는 그 작은 몸을 기르기 위해 그 태아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나 그 태아 속에 생기는 모든 피는 그 태아 자체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잉태로부터 갓난아기의 탄생까지 단 한 방울의 피도 어머니로부터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공통적인 결론입니다. 성경이 그것을 어떻게 알고 수천 년 전에 이미 동정녀 탄생을 예언했는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 사람의 말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지만 신학적으로는 교파에 따라 약간 차이를 보이기도 합니다. 박형룡박사의 기독론에는 예수님은 마리아의 실체, 곧 피에서 모든 인성을 취하셨다는 기록이 그것입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아담의 악성은 물려받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교리의 근간입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것은 마귀를 멸하러 오신다는 뜻도 됩니다.
창3:15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너는 뱀 즉 마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요일3:8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면 승리가 있습니다.
뱀은 따뜻한 일정한 온도가 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겸손하여 예수만 나타나게 하면 악의 세력은 꼼짝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나타나실 때 귀신이 소리 지르며 나갔습니다. 소리 없이 나갈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소리지르고 나가야 덕이 될 때는 소리 지르고 나가게 하십니다. 불신자에게 표적이 필요할 때는 소리 지르며 나가기도 합니다. 신약 성경에 소리 지르고 나가는 표적을 기록한 것은 주님이 오시면 귀신은 나간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4. 우리와 함께 사시기 위해서입니다.
마1:23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 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사시기 위해서 중생이라는 신비를 통해서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성령으로 주님이 우리에게 들어오실 때 우리 영혼은 새롭게 태어납니다. 이것을 신령한 의미에서 성탄이라고 한다면 성탄입니다. 주님을 받아들이는 척도에 따라 변화의 척도가 결정됩니다.
그래서 롬8:9-11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예수님은 누룩과 같아 우리를 신령한 성분으로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어느 왕이 나라의 여기저기를 돌아보았습니다. 시골에 들어갔을 때 아주 예쁜 처녀를 보았습니다. 왕은 그 처녀를 아내로 맞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신하에게 “저 처녀를 데리고 오라. 결혼하겠다.” 그러자 그 대신이 깜짝 놀라며 거절했습니다. “'폐하! 안 됩니다. 왕의 신분으로 천민과 결혼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시골로 내려가서 거기서 살련다.” 신하가 또 말했습니다. “폐하! 그것도 안 됩니다. 왕의 신분으로 시골에 내려가서 살면 안 됩니다.”
그러나 왕은 너무도 그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습니다. 왕의 자리를 포기하고 천민의 신분이 되어 시골로 갔습니다. 이 이야기는 덴마크가 낳은 유명한 철학자 키엘케콜이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전하려고 쓴 '왕과 시골 처녀의 사랑'이라는 이야기의 줄거리입니다.
임마누엘은 바로 이런 자기희생을 뜻합니다. 그렇지만 믿어야 그리스도를 모십니다. 그리고 더욱 겸손과 경배로서 그리스도를 더욱 영화롭게 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탄생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람들에게 완전한 희망을 주시기 위해서 아기 예수로 오셨습니다. 죄 가운데 방황하십니까? 악이 다스려지지 않습니까? 원수 마귀의 지배하에 있습니까? 공허하십니까? 슬픔 가운데 있습니까? 우리 모두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모든 슬픔을 씻고 더욱 온전히 영화롭게 해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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