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0일은 한국인에게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습니다. 어제(10월 10일) 목요일, 한국 사회에서 요즘 벌어지고 있는 정말 피곤하고 참기 괴로운 뉴스속에 힘든 하루를 마감하려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녁시간 아직도 방송사에 다니는 후배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목소리가 흥분돼 있었습니다. 처진 느낌의 저의 반응을 혼내려는 듯한 목소리로 한강 작가의 노벨 수상 소식을 알린 것입니다. 그 순간 저는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알 수 없는 기운이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기분을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그야말로 온 몸이 전율하는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드디어 한국도 해냈구나 그리고 한국 여성인 한강 작가가 그 역할을 담당했구나 하는 뭔가 응어리진 구석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시청하지 않았던 텔레비젼 방송을 틀어보았지만 한두꼭지로 수상 소식만 전하고 마는 모습이었습니다. 아마도 준비가 안되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현역에 있을 때가 생각났습니다. 매년 이맘때 그러니까 노벨상이 발표되던 그 무렵에는 회사가 온통 노벨상 수상자를 대비하는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한국은 지금껏 노벨상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화상이 전부였습니다. 물론 노벨 평화상도 정말 엄청난 것이지만 평화상으로 그치는 것이 무척 섭섭했습니다. 한국인의 역량이 정말 이것밖에 안되는 것인가 하는 회의감도 든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당시 특히 문학상 수상자를 놓고 이런 저런 분들이 거명되고 있었습니다. 아직 생존해 있는 인물들이기에 실명 거론은 않겠습니다. 그 분들이 수상할 것에 대비해 프로필과 그들의 작품세계 그리고 수상 소감 인터뷰 등 당시 문화부 기자들은 거의 20여 아이템을 확보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인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연락과 동시에 모든 방송을 중단하고 특보로 한시간이상 아니 무한대 시간을 할애해서 방송할 계획 즉 큐시트를 작성해 놓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십여 년동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어제까지 말입니다. 하지만 정작 바로 그 날이 왔지만 한국의 방송사 어느 곳도 방송을 중단한 채 특보로 소식을 전한 곳은 한곳도 없었습니다. 어느 곳도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받으리라고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방송국은 토크쇼를 하다가 급하게 그 소식을 전하는데 그냥 단편적인 인터넷에 올라온 소식을 전하는데 급급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만큼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은 극적이었습니다. 예전에 호들갑을 떨면서 수상 소식을 기다렸던 그 과거보다 정치사회적인 위축감속에 노벨상을 받으리라는 기대는 더욱 축소되었고 뭔가 한국인이 일을 낼 것이라는 그런 야무진 바람도 사그라든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2024년 10월 10일 밤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후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는 환호성과 함께 많은 독자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매장 직원들이 한강 작가의 문학상 수상소식을 알리는 모습이 매우 흥분돼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독자들은 대부분 예상하지 못했지만 능히 수상할 자격이 있는 작가가 수상했다며 자신의 일인냥 흥분하고 즐거워했다고 전해집니다. 어느 독자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며 한국 문학을 넘어 전세계적으로 역사가 된 것 같다며 떨리는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또 다른 독자는 노벨 위원회에서 한강 작가를 수상자로 뽑은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면서 한강 작가의 소설에서 드러나는 역사적인 맥락과 젠더, 그리고 시대적 부분을 반영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밝혔습니다.
노벨 수상자를 선정하는 스웨덴 한림원은 한국의 한강 작가를 올해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공식 발표하면서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생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수상 이유를 밝혔습니다. 그렇습니다. 한강은 1970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소설가 한승원선생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한강은 초기작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인간의 폭력성과 그에 따른 상처와 삶의 비극성을 집요하게 탐구해 왔습니다. 이같은 작품세계가 형성된 계기는 바로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입니다. 한강은 어느 인터뷰에서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고 밝힌 바가 있습니다. 한국의 대표적 소설가인 아버지 한승원 선생이 자신의 학창시절에 1980년 5월 광주에서 군인들에 의해 학살된 국민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첩을 보여줬다면서 열세살때 본 그 사진첩은 자신이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된 비밀스러운 계기가 됐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이때부터 간직해온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세 번째 장편 <채식주의자>부터 탐구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채식주의자>는 주인공과 남편 그리고 형부 언니 등 관찰자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주인공 여자가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육식을 멀리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한강 작가가 설명했다시피 한국의 현대사에는 여러가지 역사적 트라우마가 존재합니다. 1950년 한민족이 서로 살육했야만 했던 한국전쟁이, 그전에 제주에서 발생해 무고한 국민이 살해당한 4.3 사건, 그후 여순 사건, 1980년에는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군부세력이 광주에서 민주화를 외치던 국민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한 광주민주화운동 등 한국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아직 엄청나게 불편한 기억속에 존재하는 사건들이 있습니다. 한강 작가는 그런 사건들의 속내를 자신의 시각으로 들여다 본 것입니다. 스웨덴 한림원이 밝힌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생의 연약함을 드러낸 것이라는 바로 그 말 말입니다. 물론 한국적 트라우마를 글로 표현한 작가가 한두명이 아니지만 그런 트라우마속으로 들어가 그속에 흐르는 인간의 강직하지 못한 연약하고 휘둘리기 쉬운 그런 내면적 심리상태를 잘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한강 작가는 <채식주의자>로 문학계의 노벨상이라는 영국의 부커상을 수상한데 이어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다룬 <소년이 온다>로 2017년 이탈리아 말라파르테 문학상을, 지난해 2023년에는 제주 4.3사건을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로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한국인들의 뇌리에 깊에 파고든 역사적 트라우마를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한강의 작품들은 역대 보수적 정권에서는 항상 사상적 편향성을 이유로 도서 사업에서 배제된 것이 또한 현실입니다. 한림원이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섰다는 그 소설들이 보수정권하에서는 이른바 블랙리스트 명단에 맨 앞줄에 오른 것입니다. 2016년 박근혜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을 수사한 특검은 당시 문체부가 작성한 블랙리스트에 소설가 한강이 포함됐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당시 특검은 블랙리스트가 청와대 주도로 작성됐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당시 한강 작가는 인문학 강좌에서 자신의 작품들이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소리를 들었다면서 5.18 민주화운동이 아직 청산되지 않았다는 것이 가슴 아프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에 당당히 오른 지금도 그의 작품은 유해한 작품으로 국내에서 취급받고 있는 곳이 존재합니다. 바로 경기도 교육청내에서 입니다. 지난해 경기도 초중고등학교 도서관에서는 청소년들에게 부적절한 도서라면서 대규모 도서가 폐기 처분됐습니다. 그안에는 한강의 <채식주의자> 등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기도 교육청이 지난해 11월 성관련 도서를 폐기하는 것을 권고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산하 각급 학교에 내려 보낸 것입니다. 지금 경기도 교육감은 국민의 힘 정당 출신의 인물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물론 작품을 보는 시각이 각기 다른 것은 인정하지만 자신들에게 불편하다고 학생들에게 아예 읽지 말라고 강요하는 것은 상당히 문제가 있어보이는 상황입니다.
각설하고 한강 작가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것에 아직도 가슴이 뜁니다. 어린 시절인 1968년 일본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설국>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부터 한국에는 왜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탄생하지 않는 것인가라는 진한 아쉬움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경제적으로 일본에게 뒤지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문학적인 면에서 일본에 상대적으로 뒤쳐진다는 것은 정말 견디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김대중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으로 조금 위로가 됐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이젠 됐습니다. 정말 문학적 문화적 갈증이 해소됐습니다. 가슴속에 맺혀 있던 체한 것 같은 느낌이 일시에 해소되는 느낌입니다. 정말 이런 날도 오긴 오네요. 아직도 역사적 트라우마가 만연하고 보혁의 갈등이 극에 달한 한국에서 여성작가로서 이같은 쾌거를 이뤄준데 대해 한강 작가에게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또한 한국의 여성작가 그리고 아시아 최초로 여성작가에게 노벨 문학상 수상결정을 내린 스웨덴 한림원측에게도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표합니다. 비유하기는 좀 그렇지만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우승한 것 이상으로 기쁩니다. 정말 기분좋은 날입니다.
2024년 10월 11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