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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 당신이 아스트반에 다녀오셔야겠습니다. 이번 회담 날짜를 잡아오시면 됩니다. 잠시나마 인간과 여행을 했던 당신이라면 가능할 겁니다."
별의 투시자의 명령. 아마테라스에 귀환한지도 5년. 그 동안 내내 방에 틀어박혀 물건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던 아리스에겐 그리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별의 투시자의 명령은 절대적. 싫든 좋든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아리스는 아스트반의 필리스 성으로 가기 전 필리스의 서쪽, 백의 도시 윈드폴트를 먼저 방문했습니다. 그때의 아리스는 명분상 시간이 남기에 그곳을 방문한다고 했었지만 아마 아리스의 은인, 로실리아를 만나러 가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은인인데도 제대로 된 인사 하나 못했었으니까. 인간은 너무나도 빨리 늙고 또 죽는다는 것을 알기에 아리스는 시간이 남을 때 얼른 가서 인사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었던 겁니다.
“누구십니까?”
역시 아스트반 최고의 공작 가였습니다. 아리스처럼 외견상 어린 아이가 접근했는데도 불구하고 흰 갑옷을 입은 사병들은 잔뜩 경계하는 눈초리로 물었습니다.
“아리스라고 합니다. 공작 영애를 만나 뵈러 왔습니다. 아마 제 이름을 말씀드리면 아실 겁니다.”
“기다려주십시오.”
병사는 자신의 옆, 동료에게 뭐라 뭐라 하더니 서둘러 저택 안으로 들어가더군요. 뭐 그 정도의 경계는 예상 했었으니 아리스는 조금 지루하게 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었습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이윽고 들어갔던 병사가 나오더니 아까와는 사뭇 다르게 정중함을 표했습니다. 공작 영애와 아는 사람이라니 대우가 높아진 모양입니다. 아리스는 잠시 기다려달라는 병사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숙여 정원에 핀 꽃들을 바라봤습니다. 인간들은 이런 꽃을 좋아하는 걸까요? 아리스는 문득 별의 투시자와의 대화를 떠올렸습니다.
「아리스, 꽃은 정말 신비롭지 않습니까?」
「무엇이?」
「어느 척박하고 황량한 곳이라도 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면 아름답게 변한답니다. 그리하면 점차 다른 생명들도 모이기 시작하고, 그 자리는 생명이 살 수 있는 공간으로 변화한답니다. 인간의 말로 하면… 그래요, 성녀와도 같은 존재겠네요.」
「별의 투시자께선 성녀의 존재를 좋게 보시는 겁니까?」
「글쎄요. 분명 우린 지난 전쟁 때 성녀에 의해 많은 동족들을 잃은 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입장에선 성녀는 영웅과도 같은 존재겠죠. 따지고 보면 평화조약을 먼저 깬 건 우립니다. 그렇게 보고 나면 성녀의 존재가 그리 밉지만은 않더군요.」
별의 투시자는 너무나도 온화하고 공정한 성품을 갖고 계십니다. 그 온화함은 우리 악마족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그래도 아리스는 그를 따릅니다.
"아얏!"
잠시 꽃을 보고 있었던 아리스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답니다. 눈부신 은발에 보랏빛 눈동자의 작은 꼬마 아이더군요. 넘어진 게 꽤나 아픈지 눈물까지 글썽입니다.
"괜찮습니까."
아리스는 그 꼬마 아이를 일으켰습니다. 인간 나이로 대충 네 살? 정도 됐을까요. 뭐 외견상으론 아리스 역시 이 아이와는 별로 차이가 나지 않지만요. 그런데 꼬마는 얼른 치마를 털고 일어나선 우아하게 치맛자락을 올리더니 꽤나 귀티 나게 인사하더군요.
"감사하옴니다."
발음은 아직 굉장히 어색했지만요. 문득 아리스는 그 아이가 누군가를 닮은 것 같단 생각을 했습니다.
"에르샤에. 여기에 있었구나."
많이 익숙한 목소리. 아이를 보고 있었던 아리스는 고개를 돌렸습니다. 희게 빛나는 은발. 안정적이면서도 온화한 물빛 눈동자. 5년 만에 만난 로실리아, 그녀는 어느새 성숙한 귀족 부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인간은 빨리 죽는 만큼 변화도 매우 빠른 종족이라더군요. 그 말이 정말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너무나도 창백하게 보였습니다.
"어머니~."
아이가 자신에게 달려와 안기자 로실리아는 힘없이 부드럽게 아이를 안아주더군요. 아리스는 문득 아이의 아버지가 궁금해졌습니다.
"에르샤에. 먼저 방으로 가 있겠니?"
"예, 어머니."
발음은 엉성하지만 대답을 또박또박 잘하는 게, 무척 똘똘해 보이더군요. 다음에 봤을 땐 저 아이도 로실리아만큼 커 있겠죠. 아이가 후다닥 달려 안으로 들어가자 로실리아는 아리스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아리스. 안으로 들어가시겠습니까?"
"음. 그보단 정원을 구경해보고 싶네요.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니까."
이런 흰 저택의 방들은 뭔가 밝은 분위기일 것 같았습니다. 차라리 그보단 이런 정원이, 아리스는 더 맘에 들었습니다. 아리스는 로실리아와 저택 뒤쪽 나무가 우거진, 인공 연못 옆의 흰 벤치에 앉았습니다. 잠시 후 하녀로 보이는 인간 여자가 다가와 벤치 앞의 흰 유리 테이블에 찻잔을 가져다주더니 아리스와 로실리아에게 차를 따라주었습니다.
"홍차입니다. 드셔보세요."
"감사합니다."
이런 차는 원래 우리 악마들에겐 익숙하지 않습니다만 아리스는 별의 투시자의 영향을 받아 굉장히 익숙했습니다. 별의 투시자께선 자주 차를 드시니까요. 아리스는 무척이나 맛있게 차를 마셨습니다. 그리고는 문득 떠올라 물었습니다.
"아이의 이름이 에르샤에였던가요."
"네. 저와 카인의 딸입니다."
"응? 카인 말입니까?"
아리스는 깜짝 놀랐습니다. 카인은 분명 죽었는데 말이죠. 설마 죽기 전에?
"…… 어제까진 살아있었답니다. 데카님의 도움으로."
"자세히 말씀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별의 투시자의 이름까지 나오자 아리스는 꽤나 흥미가 생겨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무언가를 회상하듯, 잠시 눈을 감더니 가만히 입을 열었습니다.
"데카님의 별의 힘으로 저승으로 가서 카인을 살렸습니다. 그러니까, 저의 목숨을 담보로 카인을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원래 다시 이승으로 나올 수 없었지만 제가 이승에 나오는 대신 카인은 5년 후에 다시 저승으로 돌아가기로 했었지요. 그래서 어제, 카인은 다시 저승으로 돌아간 겁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 잠깐 5년 사이 그런 일이 있었다니, 아리스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카인을 만났을 텐데. 엄청 아쉬웠습니다. 저승은 어떤 곳인지도 궁금하고. 어렴풋이 기록으로는 본 기억이 있긴 있습니다만, 대충 읽어서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더군요. 쉽게 믿기 어려운 일들이었지만 우리 레르칼 부족 중 가장 별의 마력이 강한 자는 저승에 딱 한 번 갈 수 있다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아리스 역시 레르칼 부족이니까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별의 마력의 강함을 판단하고 선정하는 자는 별의 신이자 예지의 신, '에르렌디아'가 정한다고 합니다. 거의 주기는 3,4천년 주기라고 들었습니다.
"…… 당신은 오래 살지 않은 인간족이시면서 정말 여러 일을 겪으시는군요."
처음으로 인간족이 부러워졌습니다. 우리 악마족은 긴 세월을 삽니다. 아리스 역시 거의 천 년을 살아왔고요. 그런데 인간족은 짧은 수명을 사는 대신 우리들 보다 더 많은 일들과 변화를 겪는 것일까요? 아리스의 말에 로실리아는 소리 없이 웃었습니다. 정말 고작 5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너무 어른스러워졌습니다.
동족들 중엔 인간족을 무시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물론 아리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만, 잠시나마 그들과 여행을 하고 나선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라곤이 사라지고 난 후, 로실리아는 아스트반과 우리와의 교류에 앞장섰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다른 대륙의 나라들도 우리에게 서신을 보내오더군요. 로실리아는 항상 말했었습니다. 우리들이나 자신들이나 종족만 다를 뿐이지 다 똑같이 살아 숨 쉬고 또 각자의 생각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고. 오래 전 별의 투시자께서도 같은 말을 하신 적이 있었지만 아리스는 쉽게 이해하지 못했었답니다. …… 하지만 이제 별의 투시자의 뜻을 알 것 같습니다. 아리스 역시 온 힘을 다해 다시는 500년 전처럼 인간과 우리들과의 사이가 벌어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하데스는 저와 카인을 도와준 것이 아닐까 싶어요."
"예?"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던 로실리아의 얼굴에 잠시나마 화색이 돌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무언가를 떠올리듯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미소만 짓더군요. 그 미소가 어찌나 성숙해보이고 아름답던지. 마치 별의 투시자를 뵙는 기분이었답니다. 만약 로실리아가 동족이라 우리와 같이 긴 세월을 살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지.
"음, 그럼 아리스는 슬슬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애초에 시간이 그리 많이 남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렇군요. 어느새 시간이……."
"로실리아께선 이번 회담에도 참여하십니까?"
여태까지 회담에 그녀가 앞장섰다고 들었으니 그리 생소할 정도의 질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회담엔 별의 투시자를 따라 아리스 역시 참여할 생각이니까요.
"…… 제가 요새 몸이 좋지 않아 힘들 것 같군요."
씁쓸하고 힘없어 보이는 미소. 아리스는 별 생각 없이, 아니 별 생각 없는 듯 돌아섰습니다.
"아리스."
아리스는 다시 돌아서서 로실리아를 바라봤습니다. 그녀는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듯 상당히 쓸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당신을 오늘 만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감사했습니다."
"…… 아리스가 하고 싶은 말이랍니다. 그럼."
아리스는 뭔가 불안한 마음을 뒤로한 채, 로실리아의 그런 미소를 뒤로한 채 묵묵히 그 저택을 걸어 나왔습니다.
그것이.
그것이 아리스가 본 로실리아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
"아리스, 방금 귀환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리스."
아리스는 그날, 꽤 늦은 밤이 되어서야 겨우 아마테라스에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별의 투시자께선 평소와 달리 방에 계시지 않고 레르칼 부족의 천측실(天測室)에 계셨습니다. 레르칼 부족이 모여 사는 아마테라스 북쪽의 산, 레시스칼 산은 별의 투시자의 감시에 의해 철저히 깨끗하게 보호되는 구역이니 그 만큼 오염이 적답니다. 천측실은 그런 산의 꼭대기에 있으니까 무척이나 별이 잘 보이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별의 투시자께선 무척이나 쓸쓸히 홀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계셨습니다.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 제가 항상 주시하고 있었던 큰 별이 떨어졌습니다."
아. 아리스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다시 물었습니다.
"큰 별이라면 무엇을, 아니 누구를 뜻하는 것입니까?"
아리스의 물음에 별의 투시자는 다시 하늘을 올려보시더군요.
"하늘의 중앙에서 환하게 빛나던 큰 별입니다. 중간에서 빛과 어둠을 중계하면서도 다른 별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빛을 밝혀 인도해주었었죠. …… 그런 별을 잃은 겁니다, 이 세상은. 그런데 어떻게 근심이 없겠습니까."
로실리아. 그녀는 그녀도 모르게 이 세상에선 없어선 안 될 존재였던 겁니다. 그것을 알기에 별의 투시자께선 그토록 애통해하시는 거겠지요. 꼭 별의 투시자께서 로실리아라고 말을 하진 않았지만 천 년 동안 그의 곁에서 그를 보좌해온 아리스로썬 별의 투시자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의 생각을 알 수 있었습니다. 별의 투시자께선 무척이나 침통해보이셨습니다. 어쩌면 아리스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별의 투시자껜 보이는 것일지도요.
「어쩌면 하데스는 저와 카인을 도와준 것이 아닐까 싶어요.」
아리스는 가만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제야 그녀의 말뜻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습니다.
"아마 로실리아께선 이제야 진짜 행복을 찾은 걸지도 모릅니다."
"아리스?"
"이로써 그녀는 카인과 영원히 함께 있도록 된 것이니까요."
분명 로실리아께선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더 일찍 그녀를 찾아가는 건데, 라는 후회도 생기더군요. 그런데 잠자코 아리스의 말을 듣고 계시던 별의 투시자는 뭐가 그리 재미있으신지 계속 웃으셨습니다.
"무슨 재미있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그제야 가까스로 웃음을 멈추시더군요.
"하하핫,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리스가 이런 말을 하실 줄은. 정말이지. 아리스는 상당히 인간다워지셨군요."
"……."
아리스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한 발짝 걷고 내뱉듯 말했습니다.
"아리스는 지키고 싶습니다. 그녀가 이룩해둔 인간족과 우리들과의 관계를. 별의 투시자와 함께."
잠시 적막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뒤에선 또다시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별의 투시자, 라는 호칭은 딱딱합니다. 데카라 불러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부탁을 거절할 겁니다."
별의 투시자는 대체 무슨 생각이셨을까요. 그런데 묘하게도 별의 투시자의 이름이 좀처럼 입에서 나오려하질 않더군요. 결국 아리스는 아리스의 생각을 그대로 말했습니다.
"무리입니다, 별의 투시자."
"음. 그럼 방금 당신이 하신 부탁역시 무리입니다."
순간 머리에 힘줄이 솟는 것 같았습니다.
"어린 애 같군요. 데카."
"하핫.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자, 들어갑시다, 아리스. 아스트반에서의 일을 듣고 싶군요."
…… 뭐 어떻게든 함께 이 평화를 지키기로 별의 투시자, 아니, 데카와 약속하게 된 겁니다. 로실리아. 아리스가 이런 말하는 거, 아리스가 봐도 정말 이상하지만 이 세계의 뒷일은 아리스와 데카, 그리고 당신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맡기시고 저승에선 부디 그와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
"어서 와~ 기다렸다고."
"하데스님? 카인!"
나는 뭔가 대리석 같으면서도 투명한 재질로 지어진 아주 신비스런 느낌의 방에 서 있다. 낯익은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하데스와 어제 저승으로 돌아갔던 카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렇지, 나 죽었었지……. 이렇게 일찍 죽어버린 것이 나의 부모님, 그리고 나의 딸, 에르샤에에겐 너무나도 큰 미안함으로 느껴진다. 부모님과 루이엘에게 부탁은 했었지만 그 아이가 얼마나 나를 그리워할까. 얼마나 부모를 찾을까. 그 생각만 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하지만 이제 정말로 돌아갈 수 없어. 난 정말 죽은 거니까. 에르샤에, 부디 밝게 자랐으면…….
"아이 생각으로 꽉 차있군. 걱정 돼?"
"헉, 어떻게 그것을……."
하데스가 나를 읽은 걸까. 그런데 그는 그런 건 간단하다는 듯 잠자코 서 있었던 카인을 손가락으로 슬쩍 가리켰다.
"하루 전에 온 이 녀석도 상당히 걱정했으니까."
"……."
당황한 듯 시선을 돌리는 카인의 반응으로 봐서 진짜인 모양이다. 나는 마치 카인이 예전 첫 키스를 하고 난 후처럼 어색하고도 귀엽게 느껴져 피식 웃었고 카인 역시 웃었다. 그러자 그런 우리를 본 하데스 역시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사이좋은 커플이네! 자, 그럼 난 이제 그만 가봐야겠어."
"아, 그런……."
하데스는 수명이 다 되면 이승으로 환생할 수가 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하데스가 죽는다.' 라는 표현도 옳으니까. 죽으러 간다는데 그리 좋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나, 아직 그에게 감사하단 인사를 못했으니까.
"어이, 그런 표정 짓지 마. 이승으로 환생한단 건 어찌 보면 내겐 축복이라고. 드디어 이 지루한 곳을 떠나 사람답게 사는 거잖아?"
그는 정말로 기쁘다는 듯 히죽 웃어 보인다. 그러자 이번엔 카인이 입을 열었다.
"하데스. 당신은 저승의 왕. 이미 처음부터 로실리아의 수명을 알고 계셨을 테죠."
내가 묻고 싶었던 말이다. 카인이 저승으로 떠나기 전에도 대화했었던 주제이기도 하고. 하데스는 빙긋 웃었다.
"당연하지! 난 하데스인걸!"
"…… 이 은혜를 어떻게 갚죠? 정말, 정말 감사해요, 하데스님."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의 대답이다. 하데스는 내 수명이 5년 밖에 남지 않았단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내 수명을 준다 해도 카인은 이승에 5년 밖에 있을 수 없고, 다시 결국에 저승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도 자신에게 유리한 거래인 냥 말은 했지만 실질적으론 우리 둘을 배려해줬던 거야.
"괜찮아~. 있지, 카인 너도 알게 되겠지만 하데스는 환생하기 직전에 소원을 빌 수가 있어. 어느 어느 환경에서 살고 싶다던가, 종족이나, 이름이나. 전부 이루어지는 건 아니어도 대충은 이루어질 때도 있지. 내가 원하는 이름은 에렌프리안. 환경은… 그래, 너희의 딸과 친해질 수 있는 환경!"
"하데스님……."
"카인. 하데스란 자리는 고독한 자리다. 하지만 나와는 달리 네 곁엔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늘 함께이니 꼭 그렇지만도 아닐 거야."
카인은 하데스의 말에 수긍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묵묵히 입을 열었다.
"저승은 본디 황량한 곳이었다고 가루다에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당신께선 이 황량한 곳을 아름답게 만드셨다더군요. 슬픈 영혼들이 황량한 곳에 있으면 더욱 쓸쓸해 할 거라고. 저승을 바꾸기 위해 자신의 생명력을 깎으시며. 그 결과 당신은 하데스이면서도 역대 하데스들과는 달리 가장 적은 수명을 누리셨다고."
"아하하, 가루다 이놈, 애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
하데스는 쑥스러운지 괜히 허를 끌끌 차며 웃었다.
"…… 아름다운 저승을, 쭉 유지할 겁니다. 당신이 나중에 죽어 돌아온다 해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뭐 우리는 서로를 모르겠지만."
"흐응, 그래, 그래. 게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황량한 곳에 둘 순 없잖아? 잘 해보라고, 신참 하데스!"
무척이나 넉살 좋은 성격이다. 그 같은 남자가 나의 딸의 곁에 있다면. 하데스의 기억이 그대로 있다면야 더욱 안심이지만, 뭐 기억이 없어도 그는 믿음직스러울 것 같다.
"아, 가루다에게도 전해두었어. 너희를 잘 보필하라고. 특히 로실리아, 필요한 거 있으면 가루다에게 부탁하도록 해."
"감사합니다! …… 하데스, 이승으로 가면 기억은 없어지겠지만 저희 딸을 잘 부탁드려요."
내가 돌보지 못하는 부분까지, 당신이 돌봐주길 바래요.
"흐응. 너무 꼬맹이라 잘은 모르겠지만! 자, 그럼 이제 헤어질 시간이야."
하데스는 자신의 귀에 걸고 있었던 귀걸이를 빼내어 카인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자 그 귀걸이는 형태가 없어지더니 그냥 빛 덩어리로 변했다.
"곧 있으면 너에게 어울리는 형태로 변하겠지. 이제 난 자유라고. 하데스가 아니야. 에렌프리안이지. 그럼 이만~."
하데스는 새장에서 벗어난 새처럼 자유롭게 바람과 같은 미소를 지으며, 알 수 없는 마법진의 문양이 그려진 벽에 가만히 손을 댔다. 그러더니 이내 그 벽의 마법진에서 은빛 마력이 뿜어지더니 이내 마법진이 사라지며 이이 보이지 않는 빛의 문으로 변환되었다. 수명이 다 된 하데스만이 열 수 있다는 문. 나는 하데스의, 아니, 에렌프리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카인의 손을 꼭 잡았다. 언젠가 카인도 저렇게 보내야할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
하데스는 잠시 눈을 감더니 마치 하늘을 향해 자유롭게 날아가는 새인 냥,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그 문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문은 닫혔고 벽 역시 아까의 벽으로 돌아갔다.
파아앗―.
카인의 손에 쥐어져 있었던 '하데스의 증표'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는 긴 빛줄기가 되더니 이내 빛이 씻어 내리자 곧 카인의 앞엔 신비로운 검은 빛이 전신을 감싸고 있는 검이 나타났다. 그가 갖고 있었던 마검 그람과는 달리 무척이나 신비로운 검은 광택의 검이었다. 검은 색인데도 어두운 공간에서 그 빛이 보일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어둠을 이끄는 왕이 되어라. 감히 그대의 어둠을 거역하는 자, 멸하여라. 라는 군요."
카인이 가만히 두 손으로 그 검을 잡으며 중얼 거렸다. 한 손으로도 충분히 휘두를 수 있을 정도로 보이는 검이었다. 그렇다면 전 하데스, 에렌프리안에게 증표가 내렸던 말은 뭐였을까? 귀걸이였는데. 검에 박힌 보랏빛 구슬이 카인의 눈동자만큼이나 아름답고 영롱하게 보인다. 정말 하데스를 상징하는 듯, 조용하면서도 고요한 아름다움. 너무 멋지다.
그러나 감탄하는 것도 잠시, 에렌프리안이 들어간 벽의 맞은편 벽에 마찬가지로 새겨져 있던 마법진이 금빛으로 빛나더니 이내 에렌프리안 때와 마찬가지로 안이 보이지 않는 빛의 문으로 변했다.
"나는 이제 저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카인의 한마디. 나는 가만히 카인을 바라봤다. 카인 역시 살짝 고개를 숙여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의 허리를 둘러 안으며 가만히 나의 머리를 그에게 기대었다. 그 역시 그런 나를 안아주었다. 이게 마지막이 아니잖아. 단지, 단지 기억이 없어지는 것뿐이야. 하지만 기억이 없어져도, 그는 카인, 같은 사람이니까.
"카인."
나는 가만히 그를 놓아주며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기억은, 아니, 추억은 우리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면 사라지는 게 아니에요. 나는 당신과 쭉 함께 있을 거 에요. 그러니까 이제 아무 걱정 말고 들어가요."
"감사합니다. 기억을 잃는다 해도 난 당신을 만난다면 분명 다시 사랑하게 되겠죠. …… 이렇게 나를 부탁드려도 되는 걸까요?"
"당연한 말을요. 우린 이미 부부. 한 몸이잖아요."
밝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기분으로. 내가 과연 그에게 잘해줄 수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가 사랑한 나니까, 분명 다시 그에게 잘해줄 수 있을 거야.
“사랑해요, 로실리아.”
카인은 가만히 나의 뺨에 키스를 해주고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카인, 걱정 말아요. 나는 영원히 당신의 곁에 있을 거니까. 당신이 외롭지 않도록 영원히 당신만을 사랑하고, 또 당신을 도울 거니까. 사랑해요, 카인.
음악 저작권이 갑자기 심해졌나.. 죄다 저작권 위법 의심이네........
별로 쓰지 않는 음악까지 동원되는듯!
하아, 마지막이니까 봐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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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옥의 왕과 왕비가 되었다. 뭔가 반전인가. (...) 그래도 사랑하는 둘이 있으니 다행인듯~.
영원히는 아니지만 -ㅠ-
엇 로실리아 수명이!! 다시 배드엔딩?! ㄷㄷ
뭔가 단명하신듯..;ㅁ;
뭔가 닭살이 마구마구...[...] 아, 저 소설 슬럼프걸려서 우울하네요...ㅠ
닭살닭살~. 저도 슬럼프에서 겨우겨우 ㅠㅠ
정말 낭만적인 부부인겅미 ㅠㅠ 잘 읽었어!!
낭만적인 부부>ㅅ</ 고마워 엘이!
해피앤딩이되겠죠 .......... 카인이로실리아기억할꺼에요 ㅜㅜ
ㅇㅅㅇ! 원래계획은 새드가 섞인 배드였는데 해피인것같아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ㅇㅅㅇ.. 배려해준듯요!
잘 읽었어요. 후, 로실리아 그럼 결론적으로 평화로운 유년시절에서 성 갔다가 일 꼬이면서 고생하고 사건 터지고 평화로워지고 죽은거네.....
참 복잡 미묘한 인생임.=_=;
4년째...정말 수고 하셧어용 나름...해피엔딩...
헉 4년째란거 어찌아셨지/... 감사합니다;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