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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저 입술도 너무 차가운데... 어떡하죠?"
"변탠가 봐요. 그러니까 자꾸 뽀뽀하고 싶지."
"그래요. 뽀뽀했어요."
"치범씨가 너무 늦게 다가와서 그렇잖아요."
"징그럽긴요. 너무 좋아요."
"그러게요. 저도 납치범이 좋은 적은 처음이에요. 헤헤헤"
"그냥 치범씨 옆에 있을래요."
"난 치범씨가 좋아요. 너무 너무.."
쓰러진 여진을 안아 올려 2층으로 올라 가는 길,
이환의 머릿속엔 지금껏 여진이 했던 달콤한 고백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너무 좋다고, 옆에 있겠다고 뽀뽀하고 싶다고.. 했던 그 말들이 그저 어린아이가 '착한 사람이 좋아요' 라고 말하는 그 정도의 감정일거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니, 이환은 수줍게 표현하던 여진의 표정을 떠올려 내며 묘한 감정의 일렁임을 느꼈다.
날 정말로 좋아한다? 그럼 납치범을 좋아한 인질인가? 내 납치범 연기는 빵점이었나 보군.
이환은 여진을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방안엔 어느새 가정부 아주머니가 침대시트를 정리하고 있었고, 여민이 긴장을 한 채 바쁘게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의사를 부를 모양이었다. 이환이 여진을 안아 들어오자 여민은 빠르게 통화를 끝마치고 여진을 침대에 눕히도록 도왔다. 여진이 침대 속에 편하게 자리 잡고서야 한숨 돌린 여민이 이환을 바라봤다.
"
"뭐가?"
"우리 여진이가 어디가 아픈지.."
이환은 사뭇 어두워진 얼굴로 여민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자 매우 어색하리만큼 진지하게 말을 잇는 여민이었다.
"동우새끼라고.. 호로 잡을 놈이 하나 있는데.. 그 새끼가 내가 아프다고 사기를 쳤나 봐. 그래서 뒤도 안 돌아보고 허겁지겁 달려왔는데 내가 아픈 게 아닌 거야. 그날부터 매일같이 침대에 누워서 밥도 안 먹고 시름시름 앓더라. 치범씨를 찾아주라는데 치범씨가 누군지 알 수가 있어야지. 난 치범이란 자식 잡히면 정말 족쳐 놓을뻔했다. 그게 너라고 해서 참았지."
"....................."
"너 여자 사귀지도 않고, 누군 갈 사랑해본 적도 없다는 거 안다. 하지만 너무 외면하지는 마. 우리 여진이 어렸을 적부터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라 누군가가 자신에게 등돌리고 있는 거 되게 어색해 해. 항상 예쁘다. 예쁘다 해서..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예쁜지 아는 단순한 아이야."
여민은 여진을 정말 사랑하나 보다.
여진과 닮아있는 그의 눈동자에서 진실함이 배어 나온다.
여진에 대한 사랑이 가득해 보인다.
아끼고 있는 마음이 그 표정 안에 모두 드러난다.
이환은 유난히 진지해진 여민을 뚫어질 듯 바라보다가는 그 시선을 내려버린다. 그 역시도 아직 혼란스러운 탓이었다. 그때 소식을 듣고 왔는지
"정여민~! 넌 오라버니라고 하는 자식이 동생이 이렇게 될 때까지 대체 뭐하고 있었던 거냐?."
"..................."
"여진이가 아프면 당장 병원에 데리고 가던지.. 아님 윤박사를 불러서 도움을..."
"당신은 조용히 좀 해요! 호통친다고 쓰러진 애가 깨어나는 것도 아니고..."
여민이 고개를 숙이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아무튼 이 집 남자들은 하나 같이 어린애라니까!!
"그래, 의사는 불렀니?"
"네, 어머니.."
"얘가 몇일 동안 끼니를 안 차리더니 끝내는 병이 났구나. 그래 그 치범이란 자식은 잡아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가 도착했고 여진의 상태를 확인한 의사는 별거 아니라는 듯 영양제를 투입했다. 의사의 말에 의하면 가벼운 영양실조라고 했다. 하루 정도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라며 안심하라는 의사의 말에 그제서야 재형과 미자가 자리를 떠났다. 아무리 그래도 집안파티를 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넋 놓고 여진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여진의 방안엔 다시 여민과 이환만이 남게 되었다. 잠시 후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이환이 여민에게 낮게 읊조렸다.
"정여민!"
"왜?"
"여진이 말이야."
"어..."
"내가 다시 납치해도 되겠냐?"
"뭐?"
"아무리 그래도 계약상이였는데 하루 남기고 실패한 것도 맘에 걸리고, 또 여진이 아픈 것도 나 때문인 것 같은데.. 확실히 맘 정리를 시켜야지. 내가 니 친구라는 것도 말해야 하고.."
물론 구차한 변명일지도 몰랐다. 이환은 가슴 속 깊이 생겨난 애뜻한 감정을 혼란스러움이란 이름 아래 애써 부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제안에 여민은 잠시 뜸을 들이며 대답했다.
"좋아. 하지만..단 하루뿐이야."
"뭐?"
"우리 여진이가 깨어나고.. 단 하루. OK?"
"OK"
"그럼 데리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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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사랑한다? 그건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야. 사랑? 누가 사랑이 영원하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마. 사랑은 불 같은 거야. 쉽게 타올랐다가 쉽게 식어버리지. 식어버린 사랑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마치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와도 같지.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를 마시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탈이 나게 되어있어. 배를 잡고 방바닥을 구르게 될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날 원망하지마. 난 그저 세상이란 방바닥을 구르고 싶지 않을 뿐이야.'
곱게 잠들어있는 여진을 차에 태운 이환은, 차 핸들을 붙잡은 채 예전 어느 누군가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자신이 가장 힘들었던 시절 가슴 속 깊이 파고들 수 밖에 없었던 그 말들, 그날 이후 그는 사랑을 믿지도 않았고 사랑을 하지도 않았었다. 아니 하고 싶지 않았었다. 그 말을 했던 이의 못된 사랑을 혹시나 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사랑이란 자체를 병적으로 거부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순간, 그 말을 담고 있던 이환의 눈동자가 점점 빛을 잃었다. 어느새 커져버린 감정을 아직도 느끼지 못한 걸까. 이환은 낮게 중얼거렸다.
"정말 목이 타. 이유도 없이."
무언가에 짜증이 난 듯 이환은 빠르게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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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치범씨 같았는데.. 생긴 것도 꼭 치범씨 닮았는데 꿈이었나 봐.
따스한 느낌, 포근하면서도 낯익은 향기, 잠깐 기절했었던 여진은 어설프게 눈을 뜬 채로 캄캄한 천장을 바라봤다. 생전 처음 보는 곳 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편안한 느낌이었다. 여진은 깨기 싫은 꿈에서 깨어난 듯 얼굴을 찌푸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가 어디지? 내가 여기에 왜 누워있는 거지? 어리둥절한 여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자신도 모르게 '엇' 하는 탄성을 내질렀다. 침대에서 한 2m정도 떨어진 곳에 마주한 쇼파에서 잠이 들어있는 낯익은 남자 때문이었다.
어머! 치범씬가? 어떡해, 이제 헛것이 보이나 봐.
여진은 한동안 그 남자를 빤히 바라보다가는, 그 자리에서 쿵 하고 넘어지고 말았다.
"엄마얏! 아우~ 침대가 왜 이렇게 높아"
혼자서 투덜투덜 거리며, 여진은 무릎을 손으로 문질렀다. 그 소리에 살짝 잠이 들었던 이환이 깨어났다.
"뭐야?"
"어머! 치범씨 목소리네. 치범씨 맞아요?"
"그래."
이환이 목인 잠긴 듯 낮게 대답하자, 여진은 이환이 앉아있는 쇼파 옆에 냉큼 파고들며 동글동글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방금 까지도 쓰러져있던 아이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발랄했다. 물론 그토록 보고 싶었던 치범씨를 만났으니 상사병이 사라진 것이겠지만...
"어머, 어머 저 쓰러졌을 때 또 납치 한 거예요?"
뭐라고 해야 할까? 또 납치했다고? 아님 여민의 친구라고 밝혀야 하는 걸까? 잠깐 뜸을 들이던 이환은 곧 입을 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은 밝힐 때가 아니었다. 그래, 차근차근 하자.
"그래, 그런데 너 아프지는 않아?"
"아니요. 저 많이 아픈 거 있죠. 막 배도 고프구.."
이제서야 배가 고픈가 보다. 그렇게 그리워하던 치범씨를 만나니 드디어 뱃속에서 신호가 오나 보다. 몇 일 동안 굶다시피 했던 여진은 눈을 아래로 깔며 또 다시 연기를 시작했다. 오늘 연기의 주 컨셉은 당장이라도 안아줘야 할 것 같은 가냘픈 여주인공이었다.
"저 그리고 실은 몇 일 동안 아무것도 안 먹었어요. 그래서 혼자 몸을 지탱하기가 힘들어요. 너무 아파요. 치범씨."
"..............."
하지만 무심한 이환은 그녀를 안아주지 않았다. 여진은 살짝 부루퉁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다시 연기를 시작했다. 이번 컨셉은 이래도 가만히 있을래? 라는 듯한 비련의 여주인공이었다.
"몸은 으스스 떨리고 추워서 누가 좀 안아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것 좀 봐요. 너무 못 먹어서 입술이 까칠까칠해졌어요."
여진은 그 말을 하며, 이환의 코앞까지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정말 아팠던 탓에 여진의 입술은 바싹 말라있었다. 코앞에 와있는 여진이 '어서 촉촉하게 해주세요' 하고 말하는 것 같아 이환은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또 시작이군..
그렇게 여우가 사는 동굴에 겁도 없이 들어간 발톱 빠진 사자는 위험한 시험에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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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킬킬, 사장님께선 어쩜 그렇게 총명하십니까?"
"내가 총명한고 잘난 거 이제 알았나?"
"실은 진작에 알고 있었습니다. 흐흐흐"
오랜만에 전화상이 아니라, 직접 대면을 한 정사장과 최비서는 은밀한 대화를 하며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대체 뭐가 총명하고 뭐가 잘난 건지, 아부를 떨고 있는 최비서와 그 아부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왕자 병 정사장이었다. 여민은 최비서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
"큭큭큭 잘 참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떻게 하긴.. 우선 최비서가 이환이 오피스텔로 투입 해야지."
"헛, 그 그건 또 무슨.."
여민이 무언가 생각해 둔 게 있다는 듯 최비서에게 더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우선 최비서가 투입이 되어야, 상황을 알고 작전을 세울 거 아닌가? 내가 이환이에게 잘 말해둘 테니. 자네는 몰래 지켜보면서 보고나 잘하라고, 그렇다고 이환이랑 여진이 사이에 불꽃이 튀고 있는데 설마 주책 맞게 둘 사이에 끼어 앉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다 당연합니다. 사장님. 제가 이래 봬도 한 센스 합니다."
"하긴.. 사장이 센스가 있는데 비서도 당연히 센스가 있겠지. 믿어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런데 겨우 하루인데 제가 투입되어도 될까요?"
"자네는 우리 여진이가 순순히 돌아올 거 같나? 돌아가라고 한다고 쪼르르 돌아올 것 같느냔 말이야? 내가 여진이를 그렇게 약하게 키운 거 같나?"
"훗, 아 아닙니다. 사장님의 뜻을 잘 알 것 같습니다. 그럼 전 투입 준비하겠습니다."
첫댓글 역시,남자들의마음이란,ㅋㅋ
넘 재밌어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