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덕과 의덕으로 주를 섬기게 하심이로다
묵시 7,2-14; 1요한 3,1-3; 마태 5,1-12 / 모든 성인 대축일; 2024.11.1.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위령 성월에 기리는 모든 죽은 이들과 또 그들을 기억하고자 하는 모든 산 이들이 공통으로 이루어야 할 인생의 목표를 오늘 모든 성인 대축일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서나 죽어서나 이루어야 할 이 보편적인 목표라는 진리가 오늘 말씀의 초점입니다.
성인은 거룩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로움 때문에 박해 받는 사람들이 가난한 마음으로 거룩해지기를 바라셨습니다. 사실은 박해 받는 이유가 의로움을 시기하는 악인들의 사악함 때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박해를 계기로 삼아 자신의 행동 동기를 정화시키고 더 나아가서는 행동 지향을 하느님께로 승화시켜야 비로소 거룩함에 이를 수 있습니다. 박해자와 박해는 의인들이 자신을 정화시키고 하느님께로 초점을 맞추어 승화시킴으로써 성인들이 되게 해 주는 구원의 발판입니다: “하느님이 내 주께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기까지,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시편 109,1) 역설적이게도 모든 고통과 역경 또한 다 이러한 구원적 기능을 감추고 있습니다.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노력하며 살다가 하느님께로 돌아갔는데, 교회는 그들 모두를 오늘 모든 성인 대축일에 기리고 있습니다.
전례 중에 우리는 모든 성인들과 이루는 영적인 통공을 믿는다고 사도신경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인들은 지상에 남아 있는 우리가 의로움으로 시작하여 거룩함에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도와 주는 천사들입니다. 첫째는 그들이 이룩한 삶의 모범으로 목표가 되어 주고, 둘째는 그들 역시 지녔던 허물과 약점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를 극복해 낸 노력으로 자극이 되어 주며, 셋째는 우리가 노력하여 성취하거나 실수로 실패한 모든 경우에 우리를 위하여 전구해 줌으로써 도와줍니다. 이것이 통공의 신비인데, 우리 믿는 이들이 통공을 기대하는 대표적인 성인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그래서 성모송에서도, “천주의 성모 마리아여,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하고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로사리오 성월이나 평소에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 이 성모송의 전구 기도를 얼마나 많이 바치는지 모릅니다. 여기서 이룩하는 통공의 신비로운 힘으로 우리가 일상의 십자가를 거뜬하게 짊어지고 있습니다.
의롭게 살고자 노력했으나 현실에서 박해를 당하는 이들은 아직도 우리 주변에 대단히 많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힘겨운 박해가 종식되기를, 아울러 이들이 그 박해를 발판으로 삼아 거룩함에로 나아가기를, 그리하여 하늘 나라를 차지하는 이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것이 통공의 신비를 수평적으로 실현하는 사회적 연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악인들보다는 이미 의로움을 사는 의인들이 거룩하게 변화되도록 회개하는 일에 더 마음을 쓰셨고, 이에 따라서 교회도 회개하기 싫어하면서도 의인으로 자처하는 아흔아홉의 위선자보다 스스로 죄인으로 고백하며 회개하고자 노력하는 의인 하나를 위해서 기도해 왔던 것입니다. 이 의인이 회개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면, 이 세상도 덩달아서 거룩하게 될 뿐 아니라 장차 하늘 나라에서 하느님을 돕는 천사가 될 것입니다. 사실 천상에 올라간 모든 성인들은 지상에 남아 있는 우리가 더 거룩하게 살도록 돕는 천사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하느님을 찬양하는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전례 기도에서나 매일의 가정 기도에서 또는 개인 기도를 통해서 이 성인들을 기억할 때마다 우리의 성화를 돕는 영적인 통공이 일어납니다. 우리도 이 지상 생애를 열심히 살다가 천상에 오르게 되면 그들처럼 지상에 남아 있는 이들의 성화를 위한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이들의 마음이 가난해지는 일이 중요합니다. 세상의 불의 때문에 분노하며 슬퍼하는 이들도 마음이 가난해져야 불의한 자들로부터 여분의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이나 마음이 깨끗한 이들도 야무지기 위해서는 마음이 가난해져야 합니다. 자비를 베푸는 이들과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도 가난한 마음까지 지녀야 지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박해하는 자들을 포함한 세상 바깥에서 오는 외부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의 내면에서 스스로 버틸 수 있는 기운은 결국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오는 자기 자존감입니다. 우리 스스로 무너지지 않는 한 이 자존감은 말 그대로 자기 자신을 존엄한 존재로 지켜주는 힘입니다. 이 자존감을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태도가 진정한 자기 사랑입니다.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남들을 사랑한다 해도 피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알아야 남들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도록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이들은 모두 의로움을 출발선으로 삼고, 박해와 역경을 도약 발판으로 삼아서, 가난한 마음을 지님으로써 거룩함에 이르러야 하는데, 이는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서 통공하고 연대하는 힘의 도움을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성무일도의 아침 기도에서 바치는 즈카르야의 찬미가에 보면, “성덕과 의덕으로 우리 모든 날에 주를 섬기게 하심이로다.”(루카 1,75) 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미 구약시대의 아나빔 사이에서도 의덕을 기본으로 하되 성덕을 목표로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천상에 계신 모든 성인들과 수직적으로 연대하는 영적 통공의 위대한 힘에 바탕하여, 현재의 의인이며 장래의 성인들과 수평적으로 통공하는 사회적 연대의 거대한 힘으로 이 세상을 하늘 나라로 만들어 나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