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동수면에 들어간 날짜를 기억하나?"
"2545년... 여름이었습니다! 자세한 날짜는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2956년이군. 난 자네보다 먼저 냉동수면을 시작했기에 이 행성의 상황에 대해 전혀 모른다. 아니, 이 행성이 어디인지도 모른다.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겠나?"
"대좌 동지께서는 다른 행성에서 오신 것이군요! 드디어 외부의 지원이 오다니 다행입니다! 앗, 이 행성은 코즐로프그라드입니다."
"코즐로프그라드라니, 꽤 멀리 흘러왔군."
"제가 잠들기 직전, 히언트 제국군은 내무군의 거점을 차례차례 함락시키며 이 그로즈니 지역에서의 공세를 지속하고 있었습니다."
"히언트 제국이라? 좀 더 이전부터 설명하도록. 자네가 잠들기.. 64년 전부터 설명하라."
"네, 대좌 동지! 제가 잠들기 64년 전, 제가 태어나기 39년 전에 갑자기 별들 사이를 오가는 모든 우주선이 더이상 별들 사이를 오갈 수 없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당시에 코즐로프그라드는 은하 제국군의 침공을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갑자기 다른 행성과의 모든 연결이 차단되면서 은하 제국군과 코즐로프그라드 내무군은 모두 보급이 끊겨서 전투를 지속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고 합니다. 전투가 계속되었지만 보급 없이 오래 싸울 수 없었고 은하 제국군은 더 이상의 진격을 포기하고 행성 북부를 장악한 상태에서 점령지를 늘리지 않은 채 점령 유지와 방어로 전략을 바꿨다고 했고 내무군도 일단 남부 지역을 방어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은하 제국군을 몰아낼 수는 없어 현상 유지에 주력했다고 합니다."
"우주선들이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혹시 그 이유를 아는가?"
"아마 이 행성에서는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확실한 것은 소련 우주선과 은하 제국의 우주선들이 모두 가동 불가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전 은하적인 기후변화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다른 행성들과의 한 번 답신에 몇년씩 걸리는 전파 통신은 유지되었는데 다른 행성들도 비슷한 상황이 일어난 것 같았습니다. 이런 통신도 다른 행성들의 체제가 붕괴되며 서서히 끊겼다고 했습니다."
"그렇군. 계속하게."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간 후 외부에서의 식량 공급이 중단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습니다. 불과 20년만에 안전지대에 거주하던 소련 인민 70%가 아사했고 은하 제국군도 병력이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은하 제국군 점령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식량을 수탈당하며 거의 90%가 사망했다고 들었습니다.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가고 25년 후, 어느 정도 인구가 줄어들었고 농지를 빠르게 개간한 끝에 식량 공급이 잠시 안정화되자 은하 제국 침략군의 카인 히언트 원수가 은하 제국에서 독립하여 자신의 점령지를 히언트 제국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에 은하 제국군 사이에서 히언트파와 반 히언트파 사이의 내전이 일어났고 수 개월만에 히언트 원수는 반대파를 모두 제압하고 황제로 등극했습니다. 코즐로프그라드 내무군은 제국군 사이에서의 내전이 이들을 몰아낼 기회라고 보고 공세를 펼쳤습니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히언트 제국과 내무군 사이에서 다시 대규모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약 5년간 지속되었고 내무군은 상황이 불리해지자 전 전선에서 코발트 폭탄을 터트렸습니다. 코발트 폭탄으로 히언트 제국군은 큰 피해를 입었고 코즐로프그라드의 적도 지역에는 넓은 방사능 오염지대 벨트가 형성되어 아무도 살 수 없는 땅이 되었습니다. 양쪽 모두 큰 피해를 입었기에 전쟁은 다시 소강상태에 빠져들었고 기후 변화로 식량 사정은 또다시 악화되어 다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전 이 두번째 기아 시기에 태어났습니다."
"처참하군. 계속하게."
"그동안 계속 강경한 입장을 유지해오던 소비에트 연방 시절의 행성 지도부들이 사망하자 새로운 지도부는 당분간 다른 행성과 교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판단하고 히언트 제국을 인정하고 같이 살아남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코즐로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과 히언트 제국은 정전 협정을 맺고 제한적이게나마 교류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배운 바로는 코즐로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인구는 약 8억, 히언트 제국의 인구는 약 3억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자라는 동안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고 전 대학에서 간호학을 전공한 뒤 간호사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잠들기 몇 달 전, 뉴스에서 히언트 제국과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는 소식이 나왔지만 전 일이 바빴기에 별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공습 경보가 울려 도망쳤고 이내 히언트 제국의 기습 핵공격으로 공화국의 주요 도시들이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문일 뿐이지만 히언트 제국의 도시들도 보복 핵공격으로 모두 파괴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곳 그로즈니 시는 접경 지대였기에 히언트 제국군이 곧바로 진격해왔고 전 내무군에 의용군으로 자원입대했습니다."
"그래서 등에 스프레이로 써있는 게로군. 자네가 가지고 있던 총, 그 당시의 군대는 모두 그런 것으로 무장했나?"
"네. 이즈마쉬 소총이 내무군 제식 소총이었습니다. 히언트 제국군도 동일한 이즈마쉬 소총을 사용했습니다. 강화갑옷이나 전자기소총같은 무기는 만들 기술력이 사라졌다고 들었고 남아있던 물량은 전부 정예 부대들에게만 지급된다고 들었습니다. 전 의무중대에 배치되었고 몇일간 전투를 치뤘습니다. 내무군의 피해는 막심했고 곧 제국군에게 지역 전체가 점령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제 동료들은 병원에서 구동 가능한 냉동수면기를 딱 하나 발견했고 이렇게 있다가 제국군에게 잡혀서 끔찍한 꼴을 당하느니 제비뽑기로 한 사람이 냉동수면기에 숨고 나머지는 다같이 자살하자고 했습니다. 전 동의했고, 저와 동료들은 냉동수면기를 깊은 동굴 속으로 옮긴 후 제비뽑기를 했습니다. 어째서인지 제가 당첨되었고, 전... 냉동수면기에 들어갔고... 웃으며 손을 흔들던 친구들의 얼굴이... 마치 몇 시간 전에 본 것만 같은데..."
"울지 말게. 살고 죽는 것은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네."
"아티! 혹시 루시페륨 중독자인지 물어보세요!"
"아, 자네 혹시..."
"지금 그거, 영어 아닙니까? 잠깐, 당신 진짜 정보총국 대좌 맞아? 밖에 저거 누구야! 난 아무 증거도 없는데 뭘 믿고 떠들은거지?"
"진정해보게. 천천히 설명해주겠네."
"싫어!!!! 꺼져!!! 나가!!! 으흐흐흐흑... 아아아아아악!!!!"
아르티옴은 아나스타샤를 진정시키려다 포기하고 아나스타샤가 진정하도록 잠시 혼자 놔둔 후 리스와 프레야에게 들은 정보를 모두 전달한다.
"요약하자면 우리가 잠든 딱 그 시점에 전 은하의 모든 우주선이 먹통이 되었고, 그걸 이유로 모든 행성이 고립되어 인류 문명이 붕괴되었다는 말이군요. 우주선 고장이 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을 거고. 이 행성은 제국군이 공격 중인 소련 행성이었는데 그 여파로 식량난으로 인구가 급감하다가 핵전쟁이 나면서 제대로 망해버렸고."
"생각했던 것보다 사태가 심각하군. 그래도 그 전쟁이라는 것도 이미 3000년 가까이 되었으니 별다른 영향은 없겠지."
"잘은 모르겠지만 부족 사람들이 독구름이라고 부르는 현상이 있습니다. 짙은 독구름이 깔리면 부족 사람들은 모두 건물 안이나 동굴 안으로 들어가죠. 그리고 3달 정도 절대 나가지 않고 그 안에서 머뭅니다. 밖에서 돌아다니다가는 당장은 아무 이상이 없지만 곧 온몸이 아프게 되고 좀 더 오래 있으면 눈이 멀고 정신이 나가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되죠. 어머니는 이 현상이 먼 옛날에 사람들이 큰 폭탄을 터트려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셨습니다."
"아, 그건 저도 알아요. 사제들은 매 겨울마다 독구름이 오지 말라고 제사를 지내죠."
"그건 그렇고, 저 사람 어떻게 하죠?"
"당분간 정상적으로 대화하기 어려울 것 같네. 그렇다고 저 정신상태로 풀어줬다가는 얼마 못 버티고 부족민들에게 잡혀가거나 굶어죽겠지. 당분간 데리고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네."
거짓말처럼, 바로 이틀 뒤 독구름이 찾아왔다. 리스의 강화갑옷에 설치된 방사선 계측기 수치가 위협적으로 치솟았다.
"이제 몇 달간 실내에서 살아야 한다는 거군요. 식량을 아끼려면 우리 중 한 명이 아나스타샤가 있던 냉동수면기에 들어가서 식량을 아끼는 게 좋겠어요. 원하는 사람이 없으면 제가..."
"제가 가겠습니다. 전 독구름을 질색해서, 이거 잠자는듯이 넘겨버릴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군요. 그것 말고도, 여러분들과 제 어머니가 겪으셨던 냉동수면이라는 것을 저도 한 번 겪어보고 싶습니다."
드릴은 홀로 아나스타샤가 2956년을 보냈던 냉동수면기에 들어간다.
낙진을 피해서 실내에 틀어박혀있는 생활은 지루함 그 자체였다.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둔 식량과 소련 구호물자였던 옥수수로 만든 페미컨의 양은 상당히 많았기에 굶어죽을 가능성은 높지 않았지만 너무 지루하고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아르티옴은 언제나처럼 책상 앞에 붙어있었고 리스는 이 참에 집안 전체에 창고까지도 벽돌 바닥을 깔아버렸다. 그러나 두 여성은 하루 종일 수다떠는 것과 편자 던지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한 달쯤 지나자 프레야는 샘의 땋은 머리에 편자를 던져서 걸치게 할 정도로 실력이 좋아졌다. 아나스타샤는 여전히 하루 종일 멍하니 벽만 바라보고 있거나 몇 시간씩 흐느껴 울거나 고함을 지르며 감옥 벽을 주먹으로 쳤다. 그래도 가끔 기분이 좋은 날에는 아르티옴과 몇 마디 대화 정도는 나눌 수 있었다.
굳게 잠긴 집 문 앞에 북극곰 여러 마리가 울부짖으며 서성이기 시작했다. 샘은 이들이 먹을 것이 없어 사람을 사냥하기 위해 온 것일 거라며 몇 일 지나면 독구름으로 죽을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아르티옴은 간단한 화학 도구들을 만들었다. 프레야는 이를 이용해 피임약을 합성해서 샘이 아이를 낳은 후 샘과 리스 부부의 자녀 계획을 도울 생각이었다. 의사가 자제하라고 말했는데도 만삭의 몸으로 이틀에 한번씩 관계를 가지는 샘이 알아서 참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르티옴은 직접 사람이 조종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총을 발사하는 자동 포탑을 설계하기 시작한다. 사람이 들고 쏘는 것에 비해 정확도나 대처 능력은 떨어질 것이 분명했지만 소규모 전투에서 화력 우위는 중요했기에 만들 가치는 충분했다.
서서히 기운이 없어지던 북극곰들이 하나둘씩 털썩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5502년의 새해가 밝았다.
첫댓글 저렇게 되면 저 곰고기들은 먹을수있으려나......아니면 방사능에 오염되어있으려나
밖에 놔두면 평소보다 빨리 부패한다는 점 빼곤 일반고기와 다를게 없어서 저는 줏어먹습니다
현실이었다면 방사능에 쩔어있는 단백질덩어리겠지만...
게임에서는 그냥 줏어먹어도 무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