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익철 玄益哲(1890 ~ 1938)】「조선혁명군 총사령관으로 일제와 투쟁」
1890년 4월 27일 평안북도 박천군(博川郡) 동면(東面) 상구동(上溝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연주(延州)이며 부윤공파(府尹公派) 26세손이다. 호는 묵관(黙觀)이고, 이명으로 한자를 달리한 현익철(玄益喆)을 썼다. 부인은 탁씨(卓氏)이다. 농사와 주류제조업에 종사했던 집안에서 자랐다. 일찍이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20세에 평양(平壤)으로 가서 객지생활을 하였다.
1910년 독립운동에 참가하여 호남 방면에서 활동하였다. 1911년 서간도 지역으로 망명하여 동지규합에 노력하였으나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본은행권을 위조하여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코자 하였다가 1912년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통화위조죄로 반 년 동안 옥고를 겪었다. 1918년 다시 중국 펑톈성(奉天省) 싱징현(興京縣)으로 망명하여 흥동학교(興東學校)의 교사로 일하면서 김규환(金奎煥)·백남준(白南俊) 등과 함께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한인공회(韓人公會)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대한독립의용단(大韓獨立義勇團)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북간도로 건너가 김좌진(金佐鎭)이 활약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참가하여 무장 항일투쟁에 뛰어들었다. 대일전쟁을 위한 체계적인 군사교육과 군사훈련의 필요성을 느껴 신흥무관학교 분교에 입학하여 김학규(金學奎) 등과 함께 6개월 동안 군사학을 이수하였다.
이후 남만주 지역 한인들의 자치기관인 한족회(韓族會)에 참가하는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할의 군정부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서로군정서의 계획이 대규모 군사행동을 위한 소극적인 훈련기관에 불과함을 깨닫고 같은 집안 출신의 현정경(玄正卿) 등 소장파들과 함께 1920년 2월 콴뎬현(寬甸縣) 향로구(香爐溝)에서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광한단(光韓團)을 조직하였다. 40여 명의 동지와 함께 일제의 식민지 착취기관과 친일주구배의 습격과 처단, 독립운동자금 모집 등의 치열한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1921년 4월 콴뎬현 묘자구(苗子溝)에 근거지를 두고 김준경(金俊京) 등 9명 단원을 국내로 파견하여 정주군(定州郡)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이들이 곧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이에 피신하다가 결국 붙잡혀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1924년 풀려난 후 다시 남만주로 건너가 통의부(統義府)에 합류하였다. 외무위원장으로 중국 관헌들과의 교섭 및 임시정부와의 연계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1월 남만주의 독립운동단체가 김이대(金履大)·지청천(池靑天)·오동진(吳東振)·김동삼(金東三) 등에 의하여 정의부(正義府)로 통합되자, 여기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 및 재무부장을 맡아 정의부의 재정운영과 한인동포들의 생횔 안정을 도모했다. 푸쑹(撫松)·창바이(長白)·안투현(安圖縣) 등 오지에서 활동했던 단체들이 통합하여 결성된 흥업단(興業團)을 정의부로 통합시켰다. 동시에 아동과 청소년 교육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
1926년 4월 5일 정의부의 양기탁(梁起鐸)·현정경 등이 주도하여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조직하자, 중앙위원으로서 정의부의 정치이념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활동하였다. 하지만 이 단체는 내부 이념적 갈등 및 당원의 체포로 인해 곧 해체되고 말았다. 한편으로 친일파 숙청에도 나섰다. 같은 해 9월 정의부 의용군의 대원 김원국(金元國) 등 5명을 파견하여 한의사 출신의 친일 한인 신한철(申漢喆)을 처단하였다.
1928년 9월 정의부 주류파와 신민부 민정위원회 측, 참의부 심용준(沈龍俊) 계열 인사들이 통일된 자치정부와 민족유일당을 구성코자 하여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을 결성하였는데, 김이대(金履大)와 함께 동맹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북만주와 동만주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다물당(多勿黨)을 해체하고 그 당원을 민족유일당조직동맹에 가입시키기로 결정하였다.
1929년 4월 정의부 대표로서 이동림(李東林)·고활신(高豁信)·최동욱(崔東旭)·이탁(李鐸) 등과 함께 국민부(國民府)를 조직하여 자치행정을 전담하였다. 같은 해 5월 28일 국민부의 중앙집행위원회가 구성되자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어 김이대·장승언(張承彦)·이웅(李雄) 등과 함께 한인동포들의 생활안정과 민족교육, 독립운동의 지도, 친일파 및 일제 통치기관의 숙청 등에 관한 활동을 펼쳤다.
1929년 9월 이탁 등 20여 명이 지린(吉林) 중마항(中馬港)에서 회합하여 조선공산당의 선언 강령을 발표하고, 중앙위원에 선거되었다. 그해 말에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이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으로 강화 개편되었을 때 중앙집행위원, 1930년 중앙집행위원장, 1931년 7월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조선혁명당의 당군으로 창설된 조선혁명군의 총사령을 맡아 무장투쟁을 지휘하였다. 일제의 동북침략을 감지하고 1930년 6월 한중합작을 위하여 「동삼성한교정세(東三省韓僑情勢)」, 「중한양민족합작의견서(中韓兩民族合作見解書)」를 작성하였고, 이것을 동삼성 당국 용인 및 중국 민간지도자에게 제출하여 한중연합 항일투쟁을 제의하였다.
이런 활동으로 인해 일제의 우선적 제거 대상이 되었다. 1930년 10월 8일 농민동맹회장으로부터 습격당한 일이 일어났는데, 현장에서 무사히 피신하였다. 그러나 ‘9·18사변’이 일어나기 두 달 전인 1931년 7월 외교 교섭차 펑톈성에 갔다가 밀정의 밀고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서 징역 7년을 받고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1936년 신의주형무소에서 병보석으로 풀려난 뒤 일제 경찰의 감시를 피해 같은 해 말 다시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곧이어 임시정부 요인들이 머물고 있던 난징(南京)으로 이동하였다. 1937년 4월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에서 이탈한 지청천·최동오·유동열(柳東說) 등에 의해 조선혁명당이 재건되자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7월 16일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군사위원회의 위원 및 상무위원으로 선임되어 유동열·지청천 등과 함께 임시정부의 군사 활동을 담당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 1937년 8월 난징에서 조선혁명당의 대표로서 9개 단체연합회에 참가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한국광복진선)를 결성하고, 그 운영간부가 되어 동지들과 함께 잡지, 전단, 표어 등을 발행 배포하였다.
1938년 5월 김구(金九)·지청천·유동열 등과 함께 조선혁명당 사무실이 있는 남목청(南木廳)에서 회합한 자리에서 일제와 내통한 박창세(朴昌世) 일파의 이운환(李雲煥)이 쏜 흉탄을 맞아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