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어사 설선 대법회(선수행의 바른길)/지환스님◆
법문에 들어가기 전에 여러 불자님들께
찬탄의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생사해탈을 하기 위해서는
이 부처님 무상묘범을 배워야 하는데
이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구족심이 강렬해야 합니다.
오늘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법문을 듣기 위해서
여기 오신 마음은 구도심으로 꽉 찼다고 느껴집니다.
이 인연으로 여러분들은 성
불이 한걸음 앞당겨 질 것으로 저는 확신합니다.
편안하고 쉽게 배우는 공부는
금방 잊어버리고 물러서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오늘 초하루 날이어서 바쁜 날이고
비가 오는 데에도 올 수 있었던 것은
구도심이 아니면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는 단비를 내려서
모든 산천초목에게 감로의 소식을 전해주는 것 같고
또 이 비는 일어나고 있는 모든 먼지를 씻어버리며
여러분들의 마음 가운데에 있는 있지도 않는 업장도
오늘 이 비로 씻어 내는 그런 자리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참 훌륭하신 분입니다.
그러면 한번 법문을 시작해 볼까요?
오늘 주제가 좀 딱딱한 주제입니다.
그래서 이 주제에 충실하게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해봤는데 대중 전체에게
만족시키는 힘들겠지만 이 주제에
충실하게 하려고 노력을 하겠습니다.
보리자성(菩리自性)이
본자청정(本自淸淨)하니
단용차심(但用此心) 하라
직료성불(直了成佛) 하리라.
이 한마디 속에 불교의 대의가 다 들었습니다.
이 한마디 속에 선의 삶이 다 들었습니다.
한번 풀어서 말씀을 드려볼까요?
보리자성이라.
이 보리자성은 우리에게 깨달음의 자리,
참마음의 자리를 말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참 마음은
도를 닦고 참선을 하고 수행을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청정하다 말입니다.
청정하다는 말은 모든 번뇌망령이 텅 비었고
우리들이 싫어하는 죄니 업장이니 그러한 것들이 도무지 없는
다시 말해서 나의 자의식이라는 것이
텅 비어 버린 그러한 성품자리를 말합니다.
이렇게 텅 비었지만 일체 공론이
원만하게 구족돼 있는 그런 자리입니다.
이를 일러서 보리자성이 본자청정하다고 합니다.
비었다고 하는 말에서는 선 도리로 말하면
살인검적인 표현으로서 텅 비었지만
텅 비었다고 부정하는 이 가운데에 전체를 살려 내는
일체 모든 것들이 다 구족되어 있는 이 활이,
대 긍정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지요.
부정과 동시에 긍정이고 긍정과 동시에 부정인
이와같은 존재의 원리, 생명의 실상이
이 보리자성이 본자청정하다는 말 속에 다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참마음으로 우리가 살게 되면 단용차심이라.
이와 같은 참마음으로 살게 되면 직료성불이다.
곧바로 깨달음의 삶을 살게 된다.
곧바로 이와 같은 참마음으로만 살면
곧바로 우리는 깨달음의 삶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먼훗날이 아니라 지금 바로.
깨달음의 삶, 부처님의 삶,
자유자재한 해탈의 삶을 살게 된다.
우리들이 좋아하는 용어로 말한다면
완전하고도 참다운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 이말입니다.
우리가 같고 있는 우리의 본래 못습인
참마음만 바로 알고 살면 이것이 바로 선 하는 삶이고
닦고 말고 수행하고 할 것이 없어요.
자 한번 그러면 시험을 해 보겠습니다.
(죽비를 들고) 이것 보입니까?
(대중 예라고 대답)
(죽비를 치고) 이 소리가 들립니까?
(대중 예라고 대답) 이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볼 줄만 알면 되는 겁니다.
들을 줄만 알면 다 된 것입니다.
이 본다고 하는 현상 속에는 온 우주법계가 총 동원돼서
보는 작용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죠?
온 우주법계가 총 동원되어서 보는 눈.
그래서 볼 때는 그냥 볼 뿐입니다.
그리고 들을 때는 들을 뿐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만약에 보는 현상, 작용 속에
뭐 하나만 빠져도 보는 작용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공기가 없어도 안 되고,
태양이 없어도, 빛이 없어도, 물이 없어도,
우주의 원소 가운데 단 하나만 빠져도
이 보는 작용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본다고 하는 작용이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는 작용을 정말로 그렇게 연기 실상의 작용으로
우리가 본다면 제 법문 들을 것 없어요.
그런데 내가 죽비를 본다 이러면 보는 나와
죽비라고 하는 대상이 결정되어서
주관과 객관이 나눠져 버리고
이 속에는 나라고 하는 것이 들어가서
이 나 속에는 내가 그동안에 살아오면서 받았던,
과거 무시겁래로 살아오면서 아뢰야식 속에
축적된 경험들을 바탕으로 해서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경험 속에 온갖 것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보는 것이 그런 모든 업기운들이 개입이 되어서
보게 되면 거기에는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좋고 싫고가 벌어집니다.
좋다 싫다가 벌어져.
그래서 좋은 것은 취하려고 하고 안 좋은 것은 싫어합니다.
배척하고. 이렇게 해서 갈등이 우리한테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갈등 구조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괴로움이 벌어져요.
그래서 볼 때 당신이 볼 줄만 알며
법계의 등유라고 해서 말하자면
법계 실상의 흐름이어서 참마음의 묘용이어서
진여대용이어서 여기는 활발발한 우주법계의
생명력의 힘으로 활발발한 그것은 바로 해탈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내가 무엇을 보는 것이 되어 버리니까
금방 말한 대로 갈등구조가 벌어져서
좋다, 나쁘다, 밉다, 사랑스럽다 이런
모든 차별 경계가 벌어져서 그 갈등구조 속에서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가 하면 이 법계의 흐름,
연기실상의 흐름과 참마음의 작용과
나 사이에 어떤 갭이 생겨 버려요.
그것을 소외라고 해요.
그 소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가 하면
우리는 괴로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중생들은 괴롭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볼 줄만 알면 된다.(죽비를 치고)
들을 줄만 알면 된다. 이것입니다.
자 아무튼 이 속에서 여러분들이 지금 볼 때 볼 줄만 알 고,
들을 때 들을 줄만 알고 예를들어서
거울을 볼 때 똥덩어리가 오면 똥덩어리인줄 알고
금덩어리가 와도 금덩어리를 그대로 비춰주고.
똥 덩어리를 싫어하고 금덩어리를 싫어하는 것이 아닌
그냥 비춰주듯이 우리의 보는 작용,
듣는 작용, 우리의 마음작용이 그렇게만 일어난다면
그렇게 살면 해탈의 삶이라는 것인데, 그렇게 됩니까?
안되니까 아까 말한대로 무엇이 일어난다고 했죠?
갈등이 벌어진다고 했죠?
이 갈등속에서는 나를 중심으로 해서 대표적으로
좋아하고 싫어하고 하는 반응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내 마음은 계속 좋아하는 애착반응과 싫어하는 혐오반응이
우리 마음의 갈등구조 속에서 번갈아 가면서
마음 속에서 일어나면서 괴로움을 느끼면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우리 현실 속에는 여러 가지 괴로움이 있습니다.
이 괴로움의 문제만을 가지고 한 시간 내에 이야기를 못다하는데
오늘 법문 주제는 너무 포괄적이어서,
제가 법문 주제를 너무 어려운 것을 잡아가지고,
법문 주제는 사실 그렇습니다.
소주제를 가지고 상세하게 감동적으로 설명해야만
그 법문은 성공한 겁니다. 그런데 오늘 법문은,
저는 아주 각오를 단단히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는 오늘 비 올 것을 느꼈어.
그리고 또 이날은 초하루날이라서
여러 가지 애로점이 있을 것 알았습니다.
그래서 좋은 날
어른 스님들께서 하시라고 나는 오늘을 선택한 거야.
그렇지만 이 속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소수정예가 계실 것이니까
시간 같은 것 구애받지 말고
진짜 선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고
진짜 어떻게 하면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이 원리를 제대로 배워보자 이 말입니다.
그렇게 해보시겠습니까?
수행은 어디서부터 출발하느냐,
괴로움을 느끼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불교의 출발은,
부처님께서도 괴로움을 느끼는 것에서 출발하셨고
모든 중생들을 괴로움에서 해탈시키려고 출가하셨습니다.
불교의 출발점은 괴로움에서.
여러분들이 괴롭지 않았다면 불교에 대한 입문도,
노크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오늘 이 자리에도 참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잘만 활용하면
해탈로 가는 안내자이고 인도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 괴로움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것을 생각해 보자면 괴로움이 왜 생기는 가를 통찰해 가지고
이 괴로움을 해결할 방도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괴로움을 도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잔을 먹는다던지,
춤을 춘다던지,
그냥 도피하는 식으로 살고 있거나,
또 아니면 숙명적으로 어쩔 수 없지 하고 생각하면서
그냥 어쩔 수 없이 괴로움을 받고 있는,
그런 식으로 사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태도가 아닙니다.
괴로움이라는 것도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예요.
괴로움이 실체가 있다고 하면
우리는 한번 괴로우면 계속 괴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괴로움이란 실체가 없어요.
또 이 괴로움이라는 것도 인연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이 괴로움이 어떻게 생겼는가 이 원인을 잘 살펴보면
어디서 이 괴로움이 발생되느냐.
오온이라고 하는 몸과 마음의 작용.
이 몸과 마음을 마음작용을 오온이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몸과 마음.
그리고 이 세계를 다 포함하는 것인데
이 오온이라는 것이 실체가 있다,
실제다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렇게 실체라고 생각하면 오온이 나에 대한 미혹이 생겨서,
그 미혹으로 말미암아서 애착하고 집착하는 것이 생겨서
거기서부터 모든 괴로움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렇게 생각안하십니까?
그렇죠? 한마디로 말해서 오온이 나다,
색수상행식이라고 하는 것이 나라고 간주해버리면
나를 중심으로 끝없는 탐심 작용이 일어납니다.
나라고 하면 이 마음작용이 탐심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끝없는 탐심이 일어나서 싫고 짜증나고 밉고
화나고 분노하는 그런 진심작용이 벌어지게 되어 있어요.
이렇게 탐, 진, 치가 벌어져서
이 탐, 진, 치로 말미암아 수많은 번뇌가 생기게 되는데
이 번뇌가 생기면,
번뇌가 일어나면 그 순간 우리는 괴롭습니다.
괴롭지 않다가 번뇌가 딱 들어오면 괴로운 것입니다.
그래요, 안그래요? 괴로움이 항상 있습니까?
번뇌가 딱 들어오면 괴로운 겁니다.
우리는 괴로움이 없어요.
번뇌만 들어오면 괴로운 겁니다.
번뇌의 실체가 없기 때문에 괴로움의 실체도 없는 겁니다.
괴로움도 번뇌들에 의해서 엮어져가지고
이러저러한 일을 만들어서 괴로움이 생기는 것이니까
그 괴로움의 원인을 잘 살펴 들어가가지고
그런 원인을 싹 제거해버리면
우리는 본래해탈의 자리에 들어가게 됩니다.
본래해탈이야. 지금, 여러분, 괴로움이 항상 있지 않죠?
한 생각 일어나고, 번뇌가 일어나면 괴롭죠?
바로 여기서 소식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이것만 가지고도 벌써 시간이 많이 가니까
오늘은 총괄적인 법문이예요.
‘선 수행의 바른 길’이기 때문에 아주 총괄적이예요.
굉장히. 그러니까 좀 바쁜 식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고
정말로 제가 때가 되면 제가 아직은 자격이 미달이라서
아직은 조금 부족감을 느끼니까 좀
제가 이만하면 되었다 싶을 때가 되면
정말로 상세하게 해가지고 제가 강의하는 것을 통해서
한 몇주만 들으면 불교가 이렇게 좋구나.
참선이 이런 것이구나.
선찰대본산 범어사만 오게 되면 해탈의 길로 들어갈 수 있구나.
주지스님과 의논해서 범어사에 선센터를 만들어가지고
여러분들이 전부 다 해탈의 길로 들어갈 수 있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아무튼 우리는 이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잘못보고 이것을 나라고 여기는 데서
이 괴로움이 생긴 것일 뿐인데
이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나라는 정체를 봐 버리면
내가 나의실체를 딱 보면
그 순간 괴로움은 싹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야 된다.
정체를 모르기 때문에 이것을 나라고 하니까
탐진치가 벌어져서 번뇌가 일어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무엇인가.
나의 정체를 알아야 됩니다.
나의 정체가 무엇이냐.
참마음이다.
아까 말한 보리자성이 본자청정한 것이 우리 본연의 모습이예요.
이와 같은 참나를 깨달아 가지고
왜 생겼는가? 깊이 통찰하여 괴로움을 해결할 방도를 찾아야지
괴로움으로부터 도피하거나 괴로움이 숙명적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받고 살아서도 안 됩니다.
괴로움이라는 것도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의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나를 깨달아 가지고,
참마음의 수준은 참다운 행복으로 되어 있습니다.
참다운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참마음이 본래로 원만하게 구족되어 있는 내용이예요.
다른 것은 구해서 얻어지지만 참마음의 행복은
우리에게 원만하게 구족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나의 정체 참마음을 딱 드러내면
참행복은 지금 영원히 불생불멸로
우리는 참다운 행복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이 수행을 할 때는 수행의 목표,
삶의 좌표가 딱 확립되어 었어야 합니다.
수행을 할 때는 수행의 좌표가 확립돼야 합니다.
우리의 참마음을 확실하게 알지 않으면
우리는 이런 영원한 참마음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딱 모아졌지요? 잡혔죠?
수행의 목표가 뭐예요?
참마음을 깨닫는 말도 사실 어패가 있지만
깨닫는다는 말을 좋아하니까
이 표현을 쓴다면 우리의 참마음의 자리.
참마음의 자리는 깨닫는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따가 말씀드리겠지만요.
지금 우리는 참마음의 존재야.
이 참마음의 존재를 조금 쉽게 표현해보자면
참마음 아 이렇구나 하고 확인해 버리면 된다 이 말입니다.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있고
이렇게 수행을 하려면 수행하는 목표가,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그러면 수행을 통해서 이러한 참다운 행복이 열리니까
우리의 삶의 좌표도 아, 이와같이 살아야 겠구나 하고
삶의 좌표가 딱 확립된다 이말이죠.
이와 같이 수행의 목표와 삶의 좌표가 확립되지 않으면
우리는 수행을 열심히 할 수 없고
진실 되게 할 수 없고 꾸준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삶의 목표.
인생의 목표,
수행의 좌표가 확실하게 확립 되어야 합니다.
이게 안되는 사람은 강의를 듣던지,
법문을 듣던지,
열심히 공부를 해서 이러한 확고한 믿음이 생기고
발심이 되도록 꼭 공부를 하셔서 참선수행을 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항상 강조합니다.
자,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서 어떻게 해야
올바른 수행이 되는가에 대해서 말씀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올바른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만 제가 압축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세가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사실은 하나 속에 셋이 다 들었지만
조금 벌려서 얘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세가지로 벌려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는 반야안목. 진정견해 (眞正見解)라고도 합니다.
참되고 바른 견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반야안목.
참되고 바른 견해인 진정견해를 가져야 합니다.
불교를 배우고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으로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반야안목,
즉 참되고 바른 견해를 갖는 일입니다.
만약 반야안목 즉, 참되고 바른 견해만 갖게 되면,
나고 죽음에 생사에도 자유자재하고,
가고 머무름에도 자유롭고,
대조화와 절대평안,
참 행복은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구족해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반야지혜만 있게 되면
절대평화와 대자유의 해탈의 삶,
참다운 행복의 삶을 살게 된다 이런 말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데 있습니다.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믿고 밖으로 찾지 말아야 됩니다.
왜 그러냐? 내가 부처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부처니까 그래요.
내가 부처인데 뭘 밖으로 찾아.
내가 부처라고 하는 소식.
이 엄청난 비밀스런 의미를,
비밀스런 소식도 아니지만,
이런 엄청난 소식을 여러분들이 믿음이 서도록
짧은 시간에 말씀드릴 수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이 믿음이 서지 않으면 참선 뿐만 아니라
모든 수행의 기초가 마련돼지 않아요.
한국 선불교가 임제 선사의 가풍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임제선사 께서도
<스스로를 믿고 밖으로 찾지 말라>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씀으로 우리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자, 합장해주시겠습니까?
“너의 한 생각 마음위에 청정한 광명,
이것이 네 자신 속의 법신불이요,
너의 한 생각 마음 위에 분별없는 광명,
이것이 네 자신 속의 보신물이며,
너의 한 생각 마음위에 차별 없는 광명,
이것이 네 자신 속의 화신불이니라.”
합장을 푸십시오.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 자신의 참마음이 참부처라는 말입니다.
이게 믿음이 서야 참선이 돼지,
이 믿음이 안서면 참선 안됩니다.
자, 그래서 조금 더 보충설명을 해볼까요?
이것만 가지고도 충분할 것 같은데 조금 미진할 것 같아서,
좀더 확실하게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보충설명을 해보자면요.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여기 바로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나의 생명의 실상인 모든 존재의 원리는 어떻게 돼 있느냐?
지금 말하고 있는 이 세 가지 특성을 다 갖추고 있어요.
우리가 볼 때 내가 있다. 이렇게 보거든요.
또 세계가 있다. 죽비가 있다. 다 있다. 있다고 보는데
이 있다는 견해에 빠져 버리면 미혹 속이라는 겁니다.
생명의 실상, 존재의 원리로 보면
이것은 있으면서 없는 것이고 없으면서 있는 것이다.
어렵죠? 그러면 제가 쉽게
여러분들이 알게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꿈속에서 내가 있습니까?
꿈속에 나라는 것이 있잖아요.
꿈속에 태양도 있고 세계도 있고 지구도 있고 다 있지만
꿈을 깬 입장에서 보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거죠?
마치 존재의 실상은 꿈에 있는 현상처럼 그렇게 있는 겁니다.
실체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공한 모습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생명의 실상인 공 자리를 우리는
‘진공’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자리는 생긴 것도 아니고 없어진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 육체로 볼 때 내가 생겼다가 태어났다가 죽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것은 하나의 생명의 운동이고,
내 생명의 근원에서 보면
나는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자, 이것을 믿어야 되요.
자, 제가 믿게 해드리겠습니다.
저는 이것을 믿게 하는 기술이 있습니다. 오
늘 비오는데도 이 자리에 오셨으니까
이런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이 쉬운 것이지만,
부처님 당시에는 전기가 없어서 이 비유를
부처님께서 안붙이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도 틀림없이 이런 비유를 드셨을 겁니다.
존재의 원리를 비유를 통해서 알려드리는 것인데,
여러분 저 전등불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죠?
저 전등불이 고장이 나서 전등불이 나가버렸다.
안오죠? 안보이죠? 자, 그러면 없다. 이겁니까?
전등 고쳐서 불이 들어오면 있다 그러잖아요.
그런데 전등불 입장에서 볼 때는
그렇게 오고 가는게 있지만
전등불의 정체인 전기 에너지 입장에서 볼 때는
전등불이 들어왔다고 해서 생기고
전등이 고장 나서 나가버렸다고 해서 없어진 것입니까?
이 전기에너지가 전등불의 정체입니다.
여러분의 정체도 눈에는 안보이지만 마치 이와 같아서
생명의 실상인 그 자리에 운동으로 어떨 때는 있는 것으로 보이고
또 어떨 때는 없는 것으로 보이고,
또 어떤 때는 가는 것으로
그렇게 주인공 자리가 묘용으로 작용하고 있는,
운동하는 모습입니다. 알겠어요?
정말 알고 대답하는 거예요? 참 좋다. 박수한번 쳐요.
이렇게 알면 여러분들,
지금 자기 정체를 어렴풋하게 짐작했습니다.
지금 두가지 비유를 들었는데요,
제가 세 가지 비유를 들어서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손에 꼭 쥐어드리겠습니다.
하나는 전기불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내가 죽어도 없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내가 있다고 해서 여기 새로 생긴 것도 아니지요?
나는 본래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존재로서 묘한,
텅 비어서 나의 생명의 존재도 눈에 안보여요.
진공이야.
그 생명의 완전한 진공의 모습이 묘용을 하고 있어요.
운동을 하고 있어요.
작용을 하고 있어요.
그 참마음 본연의 근본자리에서 보면
이 우주도 그 힘으로 운행하고 있습니다.
봄이 되면 꽃이 피고 풀이 스스로 푸르고
이것은 누가 시켜서 이렇게 납니까?
이 대생명의 운동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지금 눈에는 안보이지만 말을 들을 줄 아는 이놈이,
죽비를 볼 줄 아는 그놈이,
놈이라고 해서 내 속에 무엇인가가 있다고 보지 말고
눈에 안보이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여.
실체로, 모양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말이예요.
텅 비어있으면서 온 조화가 다 들어있는
그런 자리를 다시말해서 무엇이라고 하느냐,
앞에 없어지지 않는 도리를 불생불멸이라.
새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져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반야심경에 불생불멸이 나오지요?
그러면서 온갖 조화와 일체 모든 대 조화를,
지혜며 자비며 그런 능력을 완전하게 구족하고 있는
그 생명력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묘하게, 무한하게 대 조화 속에서 잘 작용하고 있어요.
거기에 망상들이 끼어 들어가기 때문에
이 조화가 깨어져서 몸에는 병이 생기고
마음에도 갈등이 생겨서 괴로운 겁니다.
이 대조화의 흐름에 딱 우리가 합류하면 우리는 바로,
지금 본래부터 대생명이라는 것은 이와 같은 대조화요,
대해탈의 그 자리이기 때문에 참다운 행복을 바로 발견하고
해탈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알겠습니까?
이 도리를 구족하고 또 반야심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부증불감이야. 보탤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다.
알아들었지요? 자, 그래서 곧이어서 하나만 더 하구요.
이 참 마음자리를 대생명이라고 보면 어떻게 되느냐.
아까 말한 바와 같이 텅빈,
진공의 참마음은 절대청정이어서 다시 더
깨끗해질 수도 없고 더러워 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절대 청정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런 것입니다.
본래 번뇌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번뇌가 있는 것 같지만 본래 없습니다.
마치 실체없는 구름이 하늘에 왔다갔다 하는 모습입니다.
하늘에 구름이 왔다갔다 하는 모습입니다.
하늘에 구름이 왔다갔다 한다고 해서
하늘에 무슨 흔적이 있습니까?
구름 왔다갔다 한다고 하늘에 흔적이 있습니까?
흰구름이 왔다가도 검은 구름이 왔다가도
하늘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습니다.
우리의 참마음 자리는 번뇌에 아무 영향을 안받습니다.
번뇌가 우리가 있다고 빠져버리면 안됩니다.
번뇌가 공한 줄을 알아버려야 돼요.
번뇌가 있다고 생각하고 번뇌를 닦는다 이것은 참선이 아닙니다.
번뇌가 없는 자리를 보는 거예요.
그게 참선입니다.
번뇌 없습니다.
번뇌는 공한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생각해야 되느냐,
구름이 왔다 갔다 해도 그것은 구름 차원이고
하늘은 본래부터 구름의 영향을 받지 않는
하늘 입장을 우리 마음 속에서 보는 것입니다.
하나만 더 비유를 드려 말씀드리자면
여기 흙탕물을 상상해 보십시오.
흙탕물에 맑은 물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흙탕물에는 맑은 물이 있어요.
분명이 있지요?
범어사 설선법회에 오신 신도님들
정말 훌륭하신 분들만 오신 건가봐요.
맑은 물이 있습니다.
정답입니다.
자, 흙탕물인데 흙탕물인 그때 맑은 물이 있다 이겁니다.
흙탕물을 맑혀서 나중에 그 흙탕물이
맑은 물이 되는 것이 아니고
지금 흙탕물인체 그 속에 맑은 물이 있다 이겁니다.
흙탕물이라는 말은 맑은 물 플러스 흙탕이라는 내용이거든요.
맑은 물이 흙탕물인 그때도 맑은 물이 그 속에도 있다는 말이예요.
알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번뇌망상을 일으키고
미워하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넘어지고 그렇게 해도
이것은, 참마음은 여여한거여.
흙탕물이 맑은물이듯이 우리한테 참마음의 묘용이
지금도 이렇게 여여하다는 이 도리를 믿어야 합니다.
믿어야만 참선할 수 있습니다. 믿겠습니까?
이러면 여러분들이 참선할만한 조그만 기초가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에게 제가 시간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이 좋은 소식을 말씀 더 드리고
다음으로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왜냐, 아까도 힌트를 드렸습니다만 초심자를 위해서
비유를 들어서 좀 쉽게 정리해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내가 누구를 미워할 때 행복하던가요?
사랑할 때 행복하던가요?
내 마음이 무엇인가에 꽉 얽매이고 집착할 때 행복하던가요?
자유로울 때 행복하던가요?
내 마음이 막 그냥 번뇌망상이 우글거리고
우중충하고 불안하고 그럴 때 행복하던가요?
아니면 마음이 맑고 고요할 때 행복하던가요?
그런데 아까 말한 것처럼 참마음은 맑고 대 절대청정이고
걸림없는 대자유고 거기에 대지혜와 참마음이
원만하게 구족돼 있는 자리라고 말씀드렸죠?
참마음이 참다운 행복이라고 되어 있다고 하는 힌트입니다.
무슨 말이냐. 내 마음이 현실적으로 살면서
자연히 참마음에 사이클이 맞춰져서
참마음에 가깝게 이 마음이 작용이 되면 우리가 행복을 느껴요.
거기에 어긋나게 작용되면 괴로움을 느껴요.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참마음이 본래로 참다운 행복으로 되어 있다는
이 도리를 이 힌트를 통해서 딱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번뇌를 일으키고 또 원망도 하고 질투도 하고
이러는 중에도 참마음이 고요히 함께 있다는 것,
함께있다는 말이 어패가 있지만 표현상,
일분일초도 참마음을 떠나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바로 지금 참다운 행복 속에서 살고 있다.
왜, 참마음은 참다운 행복이니까.
왜, 일분일초라도 참마음을 떠나서는 살 수 없으니까.
우리는 참다운 행복 속에서 살고 있는데 다만
참마음속에서 약간 각도를 달리 해가지고 비뚫어져서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을 받고괴롭게 살고 있다.
이런 말을 한단 말이예요.
참다운 행복은 참마음에 맞춰서,
참마음에 맞게 마음작용이 되면 바로 행복이 그속에서 나오고
완전한 행복은 참마음 묘용으로 갈 때
절대 자기중심으로 성내고 미워하는 작용이 끝나버리고
이제는 지혜와 자비에 대한 참마음의 묘용으로 살 때
그때는 우리가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행복으로
영원히 살게 된다 이말입니다.
원리적으로는 이렇게 이해를 해야 됩니다.
내가 그렇게 되고 안되고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원리적으로는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럼 여기서 조사 스님의 말씀 한 구절을 들려드리면서
지금까지의 말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합장하시구요.
“마음이 본래 성불해 있다는 것을 홀연히 깨달으면,
본질적으로 한없이 자유로워 여실히 안락할 것이며,
또한 묘한 작용이 외부로부터 오지 않을 것이니,
본래부터 스스로 갖추고 있기 때문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참마음이 그런 것이다.
우리는 본래 성불해 있다.
이 자리만 확인해 버리면 자유자재하고
참다운 행복의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선에서는 모든 생명이 성불해 있음을 강조합니다.
모든 생명들이,
모든 존재가 본래 성불해있다.
참마음이기 때문이다.
본래 성불해 있는 완전한 그런 내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참마음을 미혹하고 가리고 있는
알음알이라고 하는 미혹 때문에 이 참부처의 묘한
작용을 못하고 있을 뿐이므로 이런 분별망상만 비워버리면,
구름만 걷히면 푸른 하늘이 그대로 있듯이
분별망상만 딱 비워버리면 우리는 본래 참부처로서
참마음의 묘용으로서 영원토록 절대적인
참다운 행복의 삶을 살게 된다 이 말입니다.
자, 이제 원리적으로는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 가닥을 잡았죠?
여기서 문제가 생겨.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문제가 되는 것이 분별망상이야.
분별망상만 비워버리면 만사오케이 인데,
부처노릇을 하는데,
부처로서 참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인데,
이 분별망상이 많은 사람은 더 부처노릇을 못하고 있고
분별망상이 적은 사람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겁니다.
완전한 행복은 아니지만 분별망상이 적은 만큼 행복한 겁니다.
여러분도 살면서 분별망상이 적은 날이 행복하겠지요?
번뇌망상이 막 올라오면 괴롭지요? 자,
이정도는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뭡니까? 번뇌망상이죠?
그러면 번뇌망상을 어떻게 비워버릴 것이냐?
여기에 문제의 초점이 있는 겁니다.
두 번째,
이 번뇌망상을 비워버리는 입장으로 들어가는 것은
선의 삶이 아니라 선수행의 차원이 돼 버려요.
아까 말한대로 사는 것은 선의 삶이고
지금은 선수행 차원으로 한 단계 내려온 거예요.
우리는 이제 번뇌망상을 인정했습니다.
있지도 않는 번뇌망상을 인정하고 이놈한테 우리가 속고 있으니까
있지도 않는 번뇌망상한테 우리가 안 속고
그 놈한테 끌려다니면서 우리에게 지배를 받고 있느냐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분발심을 내야 하는 겁니다.
분발심을 내어서 어떻게 하면
있지도 않는 번뇌망상을 비워버릴 것이냐?
있지도 않는 것은 어떻게 지워?
있지 않지만 있다고 간주하니까 있는 겁니다.
마치 꿈을 깨어버리면 꿈의 내용은 없어요.
그러나 꿈을 꾼 사람한테는 꿈의 내용이 확실하잖아요?
꿈에서 금덩이를 보면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꿈에 돈 10억 잃어버리면 꿈이니까 괜찮아 이런 사람 있어요?
그사람은 제법 공부를 한 사람입니다.
만약에 실제라고 한다면 괜찮다고 안할거라 이말입니다.
그렇지요? 만약 집에 불이 났다.
꿈속에서는 그것이 실제로 느껴지기 때문에 불이야 하고 힘들다.
그런데 이게 꿈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은
꿈에 불이 나고 호랑이가 덤벼들고
내가 저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그런 상황이 돼도
아 이거 꿈이야 이렇게 들어다 보면 그 공포,
괴로움이 줄어들어요.
가끔 꿈속에서 꿈인 줄 아는 사람이 있어요.
손들어 봐요. 꿈속에서 꿈인 줄 아는 사람은
그 꿈속의 공포, 괴로움이 싹 줄어듭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현실에서 살아갈 때
이게 실제가 있다고 하니까 작은 것에도 놀라고
공포감을 느끼고 괴롭고 힘들고 부딪히고 갈등을 일으키고 미워하고.
이게 다 꿈하고 똑 같아는 실체만 알아버리면
누가 내 뺨을 때려도 상관없어요.
쌍계사 공부할 때 내가 공부가 잘 됐다.
잘 됐다고 하는 말도 방망이 맞을 소리지만
정말 그 때는 내가 다 사라져
떡 하니 참마음의 흐름만 있을 뿐이야.
화두 삼매에 들어서 내가 사라지고 없어.
내가 본래 없는 거니까.
내가 꿈속에 빠지니까 꿈나라가 생겼지,
꿈나라는 본래 없는 거니까.
화두 들고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내가 없어.
우주법계와 내가 하나 된 참마음만 있는 거야.
그만큼 청정한 한 자리만 탁 이렇게 있어서.
일어나서 누가 내 얼굴에 침을 뱉어도 웃을 것 같다.
누가 내 뺨을 때려도 발로 차도 웃을 것 같다.
그 때 뿐이더라니까.
그 때는 될 것 같았는데 내가 싹 나오니까
누가 싫은 소리 하니까 니가 나한테 그럴 수 있어.
내가 선원장인데,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고 미운 생각이 들어요.
언제는 뺨을 때리고 해도 괜찮다고 하더니
이렇게 자기한테 빠져버리면 작은 것도 못견디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 겁니까?
우리가 잘산다고 하는 것은
나한테 묶여 살면 잘사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많고, 지위가 높고, 권세가 많고,
얼굴이 예쁘고 해도 자기한테 묶여 살면 힘듭니다.
내가 잘났다, 잘났다고 하면 반드시 못났다는 생각도 따라옵니다.
내 얼굴이 괜찮지 하다가도
나는 왜 예쁘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잘났다, 못났다 하는 생각은 따라오게 되어 있어요.
열등감이 있으면 우월감이 있고 그렇게 돼 있어요.
나한테 메여 살면 나만 힘든게 아니라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까지 힘들게 해요.
내가 답답해서 짜증을 내고 하면
괜히 죄없는 옆사람을 힘들게 한다니까요.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는 겁니다.
참선은 그만두고 참선 곁에도 못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수행의 초점은 나로부터 벗어나는 겁니다.
벗어날 것도 없어. 뭘 벗어나.
나는 텅 빈 진여,
참마음 작용으로 있다는 이 도리만 알면 나는
대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데 이게 전등불처럼 꺼져버리기도 하거든.
파도가 자기 정체를 딱 알아버려요.
아 나도 바다야.
전기불이 아 나도 전기에너지야 이
런 태도로 살아버리면 전기불이 크던 적던,
파도가 크던 작던,
무슨 거기에 비교가 생기고 무슨 우열이 있겠느냐 이 말이여.
그러니까 탁 놓고 보면 나는 우주 대생명이고 대부처요,
참마음자리라는 것을 머릿속에 마음속에 입력을 시켜놔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절대 작은 나에 묶여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해서, 시간이 없네.
여러분들이 조금 더 연장해주시면 제가 조금 더 말을 하겠습니다.
분별망상을 어떻게 하면 되느냐?
화두만 잘 들면 분별망상은 없애려고 하지 않아도
화두에는 분별망상이 붙을 수가 없어요.
마치 이 불덩이가 활활 타고 있으면 그 불덩이 앞에는
벌이니 나비니 참새니 다 타 버리니까.
그래서 화두의심만 간절하게 일어나고 있으면
번뇌망상이 그 순간에 작동을 못합니다.
그래서 번뇌망상이 작동을 못하니까 참마음의 흐름만 흘러갑니다.
그때는 참선해보면 알지만 참 편안하고 고요하고 맑고 행복감이고,
그렇게 좋을 수가 없는 거예요.
이것이 사실은 24시간 삶 전체가 되어 버려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가정에서 번뇌망상을 없애기 위해서
미운 마음 한가지를 없애야 겠다,
시기하는 마음 한가지를 없애야 겠다
이렇게 해가지고는 떨어지질 않아요.
화두만 탁 들고 있으면 그 화두의단으로 번뇌망상이
들어올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분별망상을
근본적으로 치료하는 방법인 겁니다.
화두삼매를 통해 망상이 뿌리를 뽑아 버리면
망상은 뿌리가 없기 때문에 불꽃으로 말하면
기름을 부어주지 않으면 망상의 불꽃이 꺼져버려요.
화두에는 의심이 붙을 수가 없으니까
나중에는 불이 꺼져버려서 탐진치 삼독의 불이 꺼져버려요.
열반이라는 말은 범어로 니르바나라고 하는데
니르바나라는 말이 무엇이냐,
탐진치 삼독의 불이 꺼져버린 상태예요.
탐진치 삼독만 꺼져버리면 니르바나,
완전한 참다운 행복의 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대조화와 묘용을 전개하는 그 자리가 보고 있을 때,
듣고 있을 때, 지금 바로 여여한겁니다.
다만 번뇌망상이 있다고 생각하는 속에 갖혀 있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깁니다.
번뇌망상이 일어나는 원인은 뭐냐,
바로 내가 있다고 하는 생각.
내가 있다고 하는 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해서 반야삼매,
화두의심을 잘 들고 있으면 선정과 지혜가 그 속에 함께 있어요.
그것이 올바른 수행입니다.
지혜를 따로 닦고 선정을 따로 닦는 게 아닙니다.
화두 의심만 잘 들면 그 속에 선정이 있고
지혜의 측면인 성성함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행의 원리입니다.
지혜를 따로 닦고 선정을 따로 닦는 방법이 아닙니다.
선정 속에 지혜가 있고 지혜 속에 선정이 있는
그러한 것이 바로 화두삼매입니다.
마치 불이 있으면 불빛이 있죠?
불의 입장이 선정이라면 불빛은 반야(지혜)의 입장입니다.
선정과 지혜과 불과 불빛관계로 있는 것이 바로
올바른 선과 선정이 함께 되는 수행인데
화두삼매가, 화두의심 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선정과 지혜가 함께 되는 것.
그런 수행이기 때문에 화두의심만 딱 하게 되면
나중에 번뇌망상은 기름을 부어주지 않으면
저절로 꺼져버리듯이 비워지게 된다는 것이 바로
반야삼매. 정혜일체, 지관동지가 되도록 화두를 참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제 세 번째는 뭐냐,
반야행입니다.
우리가 참다운 수행은 무엇이냐,
첫째 반야안목이 있어야 된다.
둘째로 반야삼매를 하라.
셋째로 반야행을 행하라.
이 세가지는 서로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사실은 셋이면서 하나고 하나면서 셋입니다.
반야삼매를 갖추고 있으며 반야삼매 속에 지혜가 나와.
반야지혜 속에 반야선정이 함께 있는것이고.
이런 삶을 살면 참생명의 모습으로 반야행을 행하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하나인데
세 측면으로 나누어 말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셨지요?
그러면 반야행은 어떤 것이냐?
반야행을 하기 위해서는 아까도 제가 말한 기초적인 것을
쭉 얘기했을 때 내가 본래 공한 것이다.
오온이 공한 것이다.
나는 뭐냐 하면 몸과 마음이 나인데,
이 몸과 마음을 반야심경에서는 오온이라고 하잖아요.
오온이라는 것은 공한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오온은 곧 공한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오온이 공하나 것이다. 공이 곧 오온이다.
뒤집어 말하면 오온이 공하다는 말은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이니까.
오온을 나로 삼고 있는데 오온이 공이니까 뭐가 됩니까.
나는 공이야. 그런데 이렇게 알아서는 소용없어.
나는 공이다 한다고 해서 공이 돼?
나는 진공이다 이걸 아무리 외운다고 내가 진공이 돼?
사실 나는 진공자리 인데 내가 진공이라고 해봤자 말뿐이고
생각뿐이기 때문에 와 닿질 않아요.
여러분들이 선정 체험을 통해서 기도를 하든
화두 참구를 통해서 내가 텅빈 체험을 만나야 됩니다.
사실은 나는 없는 겁니다.
‘무아’라는 말은
‘무’는 빈병 할 때 병이 없다 이 말이 아니고
병속에 잡동사니가 아무것도 안 들었다 이 말이거든요.
무아라는 말이 나의 실체가 없고
이 나의 생명의 정체인 진공인 참마음은 여여하다 이 뜻입니다.
무아라고 아무것도 없다.
그렇지만 생명의 실체인 진공이라는 자리는 여여하다.
완전하다는 믿음이 서면 나를 비울 줄압니다.
그래서 반야행의 첫걸음은 나를 비우는 것입니다.
행복하려면 나를 비워야 됩니다.
내가 드러나면 반드시 대립이 있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순수하게 사랑할 때 그때는 결혼하기 전에
서로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있을 때를 상상해 보세요.
그 때는 나를 안 내 세우죠?
나를 안내세우니까 하모니, 대조화가 일어나요.
결혼해서는 당신은 내꺼 하는 소유가 생겨요.
그때는 내가 들어가요.
나라는 것이 있으면 당신이 있게 되고
당신이 있게 되면 내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대립이 생겨요.
그래서 그 조화가 깨집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는 참다운 행복을 위해서는
나를 비워야 됩니다.
가장 기초적인 것부터 해야 됩니다.
이것이 반야행의 첫걸음입니다.
못 비우면 또 한 가지,
꿈 체험은 여러분들이 다들 해본 것이니까.
이 나는‘꿈나’다. 꿈속에서는 분명히 내가 있어서
희노애락을 느끼면서 살아기지만 깨고 보니까
그 나는 진짜가 아니였죠?
마찬가지로 이 나도 대 생명의 작용으로 있는 것이지
꿈나와 같은 그런 현상으로 있는 겁니다.
그래서 자꾸 자신을 꿈나와 대치시켜서
생각해 보면 쪼금 났습니다.
그리고 삶은 나 중심으로 살면서 내가 있다, 내가 잘났다,
나다, 이렇게 살면서 수행은 따로 하려고 하면
참선이 안되고 화두가 안 잡혀.
화두가 안 들리는 가장 큰 이유는 나를 딱 잡아 놓고
탐심과 진심이 막 출렁이고 있으니 화두가 잡힐 리가 있나요?
나를 비울 때 화두가 잡히게 되어 있습니다.
화두공부, 참선공부뿐만 아니라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이런 나를‘꿈나’처럼 보고 살아가자.
무아행을 실천하자.
하겠다고 하면 오늘부터 실천해요.
공부의 첫째는 나를 비우는 것.
그다음에 내가 비우지 않으면 주더라도 상을 내면서 주지 않아.
생명의 자비의 흐름으로 어머니가 자식에게 주듯이
내 생명의 자비한 기운으로 주게 돼 있어요.
생명에는 자비의 힘이 있는 겁니다.
사랑의 힘,
이 힘으로 주는 거야.
마치 내 오른손이 내 왼손에 잘못된 게 있으면 씻어주듯이
이렇게 내가 비워지면 동체가 되는 겁니다.
멀리는 못하더라도 가정에서는 동체적인 삶을 살아야 됩니다.
가정이 수행공동체, 동체적인 관계가 되어서
아내와 나는 하나의 삶의 장속에서
남편따로 아내따로 자식따로 부모따로 살면
그것은 불행한 가정입니다.
가정이라는 대 하모니 속에서 주한바 없이
그저 베풀어 줘야 됩니다.
남편한테 아내한테 자식한테 이웃한테
상에 주하지 않고 베푸는 연습을 하다 보면
내 마음이 무한히 넓어지고 내 마음이 참마음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어서 행복감을 느끼고
자유를 느끼고 평화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만 더 말씀드리자면 사랑수행을 하세요.
사랑은 엄청나게 좋은 수행법입니다.
이 세계를 사바세계라 합니다.
사바세계를 무엇이라고 하느냐,
감인의 세계다.
참고 견디며 살아야 합니다.
사바세계에 사랑이 없다면 못삽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사랑을
수행차원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사랑을 멋지게 하세요.
사랑을 멋지게 하는 방법은 먼저 상대방 입장에서 서 주는 거,
그것은 기초입니다.
나중에는 나를 비우고
오직 상대만을 위해서만 사는 게 사랑입니다.
나를 비우는 것이 사랑이지
내가 이렇게 해줬으니까
남도 이렇게 해달라는 것은 거래일 뿐입니다.
그런 거래적 사랑을 하지 말고 참 사랑을 하세요.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참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활이야.
여러분, 활기있게 사세요.
어떤 어려운일이 있어도 활기 있게 살면
웬만한 장애물 극복됩니다.
이 참생명은 대활이라.
그리고 기쁘게 살아야 돼.
참생명은 대환희라.
살 때 기쁘게 살고 활기 있게 살자.
이것이 참선수행 할 수 있는 반야행을 닦는
기초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 따라서 하세요.
기쁘게, 활기 있게 살자.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게송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총결론입니다.
하심청정 유일무여를 돌출한처 전체로 하면
이 마음은 청정하여 한물건도 없거늘
탐진치로 말미암아 경계의 막힘을 보는도다.
눈동자가 돌출해서 전체가 드러나면
삼라만상이 허공의 꽃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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