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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여 부자
이경여(李敬輿)의 자(字)는 직부(直夫)인데, 세종 대왕(世宗大王)의 7대손이다. 세종 대왕의 별자(別子)인 밀성군(密城君) 휘(諱) 침(琛)으로부터 3대를 지나 왕실(王室)과의 친속(親屬) 관계가 조금 소원(疏遠)해진 때에 미쳐 비로소 드러난 이가 있었으니, 이가 곧 첨정(僉正) 이극강(李克綱)으로 공의 아버지인 목사(牧使) 이수록(李綏祿)이 바로 그의 아들이다.
이경여의 묘가 있다는 포천시 내촌면 음현리로 가는 버스가 잠실에서 출발했다. 7007번 버스를 타고 음현2리 주금산 입구에서 내려 약천사를 지나 까페 산꼭대기 윗쪽에서신도비는 찾았는데 묘가 있는 곳을 찾지 못해 조금 그 부근을 헤멨다. 묘역 안내 표시가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오기 전부터 걱정하던 일이 실제로 벌어져 30분 너머 주변 이곳 저곳을 기웃거렸다. 겨우 찾은 묘역에는 이경여의 묘 아래에 장남 이민장(李敏章)의 묘도 같이 있었다.
이경여는 청나라 감옥에 두 차례나 갇혔었다. 인조 20년(1642년) 12월 11일 한해가 끝날 무렵의 일이었다. 이경여(李敬輿)는 청국의 연호를 쓰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명한(李明漢)은 지난해에 명나라와 통신할 때 글을 지은 일이고, 허계(許啓)는 그 논의에 참여하였다는 것이고, 동양(東陽) 신익성(申翊聖)은 시론(時論)을 주도하였다는 것이고, 신익전(申翊全)은 기자묘(箕子廟)의 제향에 참여하여 궁관(宮官)을 그만두려고 꾀하였다는 일로 청나라는 이들 다섯 명을 심양으로 끌고 가기 위해 청나라에서는 두 박씨(博氏)를 보냈으며 이 때 따라온 정명수는 길가에 꽂아놓은 횃불이 드물게 있다고 크게 노하여 도사 신응망(辛應望)을 잡아 갓을 벗기고 몰고 오다가 풀어주는 행패를 부렸다.
전 정승 이경여(李敬輿),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전 판서 이명한(李明漢), 전 참판 허계(許啓), 전 정언 신익전(申翊全) 등이 심양에 당도하니 청인(淸人)이 칼을 씌우고 두 손을 결박하고서 동관(東館)에 구금하였다. 조금 후에 정역(鄭譯: 정명수)이 이들을 몰아 아문(衙門)으로 가니, 용장(龍將: 용골대)이 가린박씨(加麟博氏) 및 압송해 간 두 박씨(博氏)와 벽을 등지고 나란히 앉아서 오신(五臣)에게 일제히 들어와 기둥 밖에 앉게 하고 차례로 문답한 뒤에 도로 동관에 안치하였다.
소현세자가 재신들을 거느리고 황제의 처소에 나아가 글을 올리니, 황제가 곧 동양 형제를 풀어주며 말하기를,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국왕의 가까운 척속이며(동양 신익성은 선조의 부마였다) 세자가 또 와서 하소연하기 때문에 특별히 용서하여 국왕과 세자의 광채를 내주기 위해서이다. 그 나머지는 세자가 아무리 이와 같이 간청하더라도 섣불리 풀어줄 수 없다.”
세자가 관소에 돌아오니 용장(龍將) 등 세 사람이 뒤따라 와서 동양 형제를 불러냈다. 그들이 도착하여 앞기둥 아래에 꿇어앉자 용장 등이 일어나 서서 황제의 명을 전유(傳諭)하고 풀어주니, 정역이 칼과 포박을 풀고 황제의 처소를 향해 사배(四拜)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신익성과 그 아우 익전은 동쪽(고국)으로 돌아왔다.
이경여(李敬輿)·이명한(李明漢)·허계(許啓)·김상헌(金尙憲)은 그대로 동관(東館)에 구금하고, 최명길(崔鳴吉)·심천민(沈天民)·이지룡(李之龍)은 북관에 구금하였는데, 얼마 후에 지룡과 천민은 하찮은 인물이라서 깊이 문책할 것이 없다는 이유로 관소(館所)에 전유(傳諭)하여 석방하였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 용골대 등이 황제의 뜻으로 와서 세자에게 전유(傳諭)하기를 ‘김상헌은 북관(北館)으로 옮겨 안치하고, 이경여(李敬輿)·이명한(李明漢)·허계(許啓) 세 사람은 사형으로 조율하였으나 황제께서 차마 죽이지 못하여 모두 삭직(削職)하여 방송한다. 이경여와 이명한은 각각 은 1천 냥을 바치고 허계는 6백 냥을 바치되, 그들에게 각자 자기 집에서 준비하여 바치게 하라.’ 하고, 또 세 신하를 불러 뜨락에 꿇어앉히고서 황제의 명을 전유한 뒤에 곧 칼과 결박을 풀어주고 서쪽을 향해 사배(四拜)하고 나가게 하였습니다. 한달 쯤 지나서 이경여(李敬輿), 이명한(李明漢)과 허계(許啓)가 돈을 바치고 심양에서 돌아왔다.
또, 그때부터 1년의 세월이 흐른 뒤 이경여가 우의정이 됨으로써 장남 이민장은 볼모로 심양으로 가야했다. 부친이 정승이 되고 아들은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야 하는 배반의 현실이 가족 모두를 가슴아프게 했다.
사은사 이경여(李敬輿), 부사 홍무적(洪茂績), 서장관 이여익(李汝翊)이 심양에 갔다. 이때 우의정인 이경여의 질자로 장남 이민장(李敏章)이 같이 들어갔으며 심기원의 질자 심석경을 대신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3월 말경 사은사 일행이 심양에 도착했을 때 용골대(龍骨大)와 가린박씨(加麟博氏)가 정역(鄭譯: 정명수)을 거느리고 관소(館所)에 와 우의정 이경여(李敬輿)를 구류시켰고, 부사 홍무적이 사명을 수행하였다. 한편 우의정 이경여가 감옥에 갇혔기에, 좌의정 심열이 우의정이 되고 홍서봉이 좌의정이 되었고 홍명립이 홍서봉의 질자로 심양에 들어갔다. 사은사 일행과 함께 심양에 간 이민장은 옥에 갇힌 이경여의 수발을 해야했다. 이때 같은 감옥에 갇혀있던 김상헌이 이민장에게 주는 글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완산(完山) 이 상공(李相公: 이경여)이 북정(北庭)에 조빙(朝聘)하러 올 적에 가독(家督: 이민장)이 따라왔는데, 얼마 뒤에 명이(明夷)의 화에 걸려 나와 함께 전후하여 별관(別館)에 구류되어 있으면서 지붕을 나란히 해 거처하였다. 이에 담장을 뚫고 서로 왕래하였는데, 아침저녁을 가리지 않았으니, 이는 평소에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이었으며, 또한 함께 환란을 만나서였다. 내가 그의 아들을 나의 아들처럼 여겼는데, 깨끗하고 명석하며 풍부하고 두터웠으며, 속은 반듯하고 겉은 순하였는바, 공손하여 법도가 있는 집안의 자제였다. 그는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서는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은 다음 단정히 앉아서 글을 읽었는데, 밤이 이슥해져서야 비로소 그치었다. 또한 아버지의 명이 있지 않으면 문밖으로 나가는 자취를 자주 볼 수 없었다. 때때로 나를 찾아와서 의심스러운 점을 질문하면 내가 알고 있는 바로써 고해 주었는데, 말을 하면 곧바로 깨달았다. 그의 안색을 살펴보면 마치 기뻐하는 듯하였으며, 역시 권태로워하는 기색을 볼 수가 없었다.
그와 같이 지낸 것이 한 해가 넘었는데, 일이 끝나고서 장차 동쪽으로 돌아가게 되자, “저에게 지금 소원이 있어 청해 볼까 합니다. 종신토록 외우면서 지킬 만한 말 한마디를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아, 옛날 사람들은 이별에 임하여 서로 간에 처증(處贈: 덕담)하는 일이 있었다. 이런 도가 오랫동안 없어졌었는데, 지금 자네로부터 다시 행해지게 되었다. 비록 그러하지만 나는 그런 말을 해 줄 만한 사람이 아니니, 어찌 능히 두터운 소망을 채워 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일찍이 듣건대 장사(長沙) 도공(陶侃, 도간:진나라 대장군)이 한 말이 있으니, ‘대우(大禹)는 성인(聖人)인데도 오히려 촌음(寸陰)을 아꼈으니, 중인(衆人)들은 의당 분음(分陰)을 아껴야 한다.’ 하였으니, 선비의 마음 씀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하고서도 오히려 잃을까 두려워해야 한다.’ 하였으며,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안연이 말하기를, 「순 임금은 어떠한 사람이며,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훌륭한 일을 하는 자는 또한 이 순 임금과 같다.」 하였다.’ 하였네. 이제 자네가 장사(長沙)가 시간을 아까워한 뜻을 지니고, 공자와 안자(顔子)의 훈계를 가슴 깊이 새기고서 날마다 부지런히 힘쓴다면 거의 이룸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시를 써서 준다.
종남산과 백악 모습 양쪽 고운 눈썹인데 / 終南白岳兩脩眉
그 중간에 대문 있어 바라보면 뚜렷하네 / 門巷中間望不迷
작은 등불 은은한 빛 한 점 붉게 비치이면 / 隱映小燈紅一點
새벽녘에 그대 앉아 글 읽는 줄 내 알았네 / 知君曉坐讀書時
1645년 초, 마침내 심양에 인질로 잡혀있던 소현세자를 필두로 모든 인질은 석방되어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듬해 이경여는 1646년 3월 소현세자빈(姜嬪)의 사사(賜死)를 반대하다가 삭탈관직(削奪官職), 문외출송(門外黜送)당하고, 진도로 유배되었다. 지천 최명길은 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 사죄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몇 해 전에 '서하의 재앙[西河之厄]과 심양 북옥에서의 치욕[北扉之辱]'은 그 처음이 모두 아우가 형을 천거하여 조정에 드시게 한 데에서 생긴 일입니다. 대개 청나라 사람이 형의 명성을 듣고는 황각(黃閣: 정승 자리)에 크게 쓰이는 것을 미워하여 이와 같이 잡아 가두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형의 국사를 위한 고심과 천조(天朝: 명나라)를 위한 높은 절개는 결단코 아우의 천거로 해서 천하에 드러날 수 있었고, 후세에 드리울 수 있게 되었으므로, 심양 옥에 갇히게 되었던 곤욕도 모두 저의 천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일찍이 남옥에 있을 적에, "어지러운 세상에 부질없이 경륜(經綸)을 펴 보았다가, 늦게 친구에게 누만 끼쳤구나[雲雷枉許效經綸, 晩節眞成累故人]."라는 시구로 형을 옥중에서 맞아 슬퍼도 하고 기뻐도 했던 것입니다.
형도 또한 심양 옥에 같이 갖히게 된 것을 슬퍼도 하시고 기뻐도 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벗의 이러한 누(累)는 기뻐할 만한 것이니, 천리마의 꼬리에 매달려 이름을 드러내는 일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하신 형의 뜻은 긴요한 곳을 집어낸 진실한 표현의 말씀이셨습니다만, 아우의 마음은 이제 벗에게 누를 끼쳤다는 겸연쩍은 탄식이 더욱 간절합니다.
아우가 만일 당초에 형을 재상으로 천거하지 아니하였다면 애당초 북비(北扉)에서의 구금은 없었을 것이요, 다음으로는 남해의 먼 유배지에서 위리까지 당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니, 이것은 분명히 벗에게 누를 끼친 것입니다. 어찌 벗으로서 스스로 허물하여 책망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최명길은 1586년 8월 25일생이고, 이경여는 1585년 1월 9일생이다.
참조: 조선왕조실록, 청음집, 지천선생집
(이경여 부인)해평 윤씨
다음은 청나라 심양에 있던 심양관에 인질로 가 있던 소현세자의 심양일기 1643년 3월 1일자에 나오는 내용으로 어줍잖은 명목으로 심양으로 끌려온 다섯 신하 중 두 사람이 먼저 풀려나고 남은 세 사람이 풀려난 후 세자를 찾아뵈었을 때의 이야기이다.
좌부빈객 한형길(韓亨吉), 우부빈객 이소한(李昭漢), 사서 유경창(柳慶昌), 전 참찬 이경여(李敬輿), 전 판서 이명한(李明漢), 전 참판 허계(許啓), 질자 이일상(李一相), 진사 이만상(李萬相), 전 군수 윤창구(尹昌耉)를 차비문 안으로 불러들여 승호색 유호선(兪好善)으로 하여금 술과 안주를 하사하도록 하명하였다.(윤창구와 이만상은 이경여와 이명한 두 재신을 따라온 자제이다)
오신(五臣)이 심양에 끌려왔으나 왕의 인척이란 이유로 동양위 형제가 풀려나고 이경여, 이명한, 허계는 옥에 갇혀있다가 속환금을 바치고 돌아가라는 허락이 떨어지고 감옥에서 풀려난 뒤의 일이다. 여기서 질자 이일상과 진사 이만상은 이명한의 아들이고 이소한은 이명한의 동생이다. 이명한이 이조 판서에 임명되자 아들 이일상은 볼모로 심양에 들어와 있었고, 동생 이소한은 소현세자를 보필하는 우부빈객으로 이곳에 와 있었다. 이만상은 끌려가는 부친 이명한을 옆에서 보살펴 주기 위해 따라온 길이다. 청나라 심양에서 만난 그들 부모, 형제의 마음이 어떠했을지는 상상 밖의 일이다.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해서 강화도에서 겪은 엄청난 비극이 오래전의 일도 아니었다. 죽지 않고 피해갈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사람의 운명이란게 묘해서 명한, 소한, 일상 그들의 부인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이 사연은 이명한을 이야기 할 때 좀 더 알아보자. 지금은 윤창구가 이경여를 따라왔다는데 그가 누구인가를 따라가 보았다.
윤창구와 이경여의 관계를 조사하다 보니 이경여가 1599년 15살 때 결혼한 첫 부인이 해평윤씨 윤승훈(尹承勳)의 딸이라는 사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슬픈 가족사가 곧이어 나타났다. 조선왕조실록 1615년 9월 7일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백령첨사 윤숙(尹璛)과 봉산군수 윤공(尹珙)이 그의 일족 변제원(卞悌元)·변충원(卞忠元) 등과 함께 역모를 꾸몄습니다. 그리하여 윤숙으로 하여금 군사를 배 안에다 숨겨 싣고 서강(西江)에 있는 허욱(許頊)의 정자 아래로 가서 정박한 다음 대비를 빼내오고 인성군(仁城君)의 어린 아들을 안아다가 몰래 섬에 체류하면서 옹립하고자 하였는데, 그렇게 하면 황신(黃愼)·남이공(南以恭) 등이 방금 해서(海西)에 귀양가 있는 중이므로 하나의 조정을 만들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배경은 윤공의 큰아버지 윤승길(尹承吉)의 사위가 선조의 일곱째 아들인 인성군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추정되었다. 역모는 사실무근이었으나 왕이 끝까지 의심해 윤숙은 영흥(永興)에 유배하고 윤공은 통천(通川)에 유배하였다.
1617년 3월 통천에 정배(定配)한 윤공(尹珙)의 배소(配所)에 불이 났다. 윤공의 어미(창녕 성씨 成好問의 딸)는 상신 윤승훈의 부인인데, 윤승훈이 1611년 세상을 떠났기에 장남인 윤공을 따라갔다가 한밤중에 화를 당하여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였다. 이에 윤공 및 윤공의 여동생인 이경여의 아내, 윤공의 서모가 서로 뛰어들어가 구하려다가 모두 불에 타죽었고 14살인 윤공의 막내딸 마저 죽었다.
윤씨 부인의 묘가 이경여의 묘 십여걸음 위쪽에 있다는 것을 처음 이경여의 묘에 갔다온 뒤에 알게 되었다. 윤씨 부인의 묘를 보려고 이경여의 묘를 다시 찾은 두번 째는 다른 곳에 들렀다가 시간이 많이 늦어져 이경여의 묘 위쪽에 있는 윤씨부인의 묘에 도착하니 이미 날이 어두워진 후였다. 묘로 올라가는 길 입구에 있는 집 앞에 사람이 나와있다가 언덕으로 올라가는 나를 보고 어디를 가느냐 묻기에 연유를 설명하고 올라갔다. 사진 찍는 것을 실패하고 내려 오니 그 때까지 그곳에 있던 그 사람이 혼자서 한참을 걸어나갈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본인도 나가는 길이니 자기 차를 같이 타고 나가자고 해서 광릉내까지 쉽게 나올 수 있었다.
세번 째로 다시 찾았을 때는 오후 6시가 안된 시간에 도착했기에 그동안 그냥 지나쳤던 약천사로 올라갔다. 사람이 그리워서인지 개가 반색을 하며 내곁에 와서는 떠날 생각을 안했다. 목이 마르던 참이었는데 물통이 밖에 있어서 물을 몇 잔 마시고 4월 초파일이 지난지 한 달이 넘었지만 연등이 아직도 달려 있는 마당으로 나갔는데 스님께서 꽃에 물을 주고 계시다 쳐다보길래 지나는 길에 잠시 들렀다고 인사하고 대웅전 앞을 지나 다시 가던 길로 빠져나갔다.
이경여 묘로 올라가는 길 옆 집에 있는 개들이 요란스레 짖어댄다. 한 마리는 아예 묶인 상태도 아니어서 뒤를 따라오며 짖는다. 이경여 묘를 지나 위로 올라서니 길 위로 묘가 보였다. 양쪽으로 문인석이 서있을 뿐 묘비도 없어서 기록을 보지 않았더라면 윤씨부인의 묘인지 알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픈 사연을 지닌 묘인데 묘비가 있었다면 좋지 않을까 혼자 생각해 본다.
한편, 윤창구(尹昌耈, 1603~1689)는 본관이 해평이고 자(字)는 수경(壽卿)이다. 부친은 윤상(尹瑺, 1579~1637. 4/24)이고 어머니는 전주이씨다. 할아버지 승서(承緖, 1544~1602)는 이경여의 장인 승훈(承勳)의 형이었다. 이경여와 윤씨부인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두번째 부인 풍천 임씨 별좌 경신(景莘)의 딸로 둘 사이에 4남 2녀가 있었지만 이경여가 심양으로 끌려갈 무렵에 이경여의 아들들은 모두 어렸기 때문에 윤창구가 대신 따라간 것으로 보인다.
출처 : 역사를찾아/볼모 2013/06/02 19:06 태허 역사를찾아 태허(spencer204) 역사를찾아/볼모 2013/06/11 17:10 태허 http//blog.ohmynews.com/historyseek/303021 & 303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