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자마자 은행에서 돈을 뽑고, 바로 찾아간 곳은 아줌마가 지키고 있는 화장실 이였죠. 민박에 check in하고 바로 부근의 “성 이스트반” 성당을 둘러보았습니다. 건국의 아버지 성 이스트반 대왕을 기리기 위해 1851년 건축가 “요제프 힐드”에 의해 신 고전주의 양식으로 착공하여, “야클로스 이블”에 넘겨졌고, 공사 중 폭풍에 의해 돔이 무너져, 신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되었으며, 야클로스 이블이 자살한 후, 1891년 “요제프 카우저”가 내부를 완성했다고 합니다. 이스트반 성당과 국회의사당 모두 높이가 96m인데, 이것은 1896년 헝가리 정착 1,000년을 기리기 위해 1896의 96을 따서 정했다고 하네요. 정면의 처마에는 “Ego Sum Via Veritas Et Vita”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는 뜻이랍니다. 성당 내에는 이스트반 의 오른 손목이 있다고 합니다. 입구에 이 성당의 건축 과정이 설명되어 있었고 마침 미사가 진행 중이라 사진을 찍을 수 있었지요.
다음 날 우리는 숙소로부터 뻗어있는 Andrassy거리를 걸어 영웅광장까지 갔습니다. 중간에 오페라하우스가 있어 연주회 프로그람을 보니 유명한 부다페스트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손님이 없어서인지, 살 수 없었습니다. Andrassy거리는 빠리의 샹제리제 거리를 본떠서 건설하였다고 하는데, 곳곳에 유명한 위인들의 동상이며, 중간 분리대가 있는 넓은 거리는 샹젤리제에 버금가는 듯 화려했습니다. 영웅광장 옆의 박물관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소장 미술품들...마네, 모네, 렘브란트, 로댕의 조각품 등 너무나 많은 그림들을 주마간산 식으로 구경했지요. 정말 다리가 아파서 진력이 날 정도였습니다. 점심으로는 헝가리의 대표적인 음식 “굴라쉬”를 먹었습니다. 우리의 입맛에 맞고 뜨끈한 게 뱃속으로 들어가니 살 것 같았습니다.
다뉴브강 강의 서쪽 Buda와 동쪽 Pest사이에 놓인 8개의 다리 중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 불리는 세체니 다리 (Szechenyi lanchid)는 건설에 공헌한 이스트반 세체니 공을 기리기 위해 건설된 현수교로서 다리가 시작되는 부분에 양쪽으로 놓인 두 마리의 사자 상 때문에 '사자다리'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 다리의 설계자는 테임즈 강의 런던 다리를 성공적으로 건설한 William Tierney Clark와 헝가리로 귀화한 영국 건축가, Adam Clark로 19세기 말의 기술을 뛰어넘은 건축물이라 칭송받을 정도로 15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견고함을 인정받고 있답니다. 다리 앞에 있는 광장도, 그의 이름을 따서 클라크 아담 광장이라 부르며, 광장 뒷쪽의 100여년 된 터널도 그가 설계한 것이라고 하네요. 1849년에 처음으로 개통되어 최초로 부다와 페스트를 잇는 다리가 되었으며, 이 다리를 통해서 부다와 페스트 도시의 건설도 발전하게 되었답니다. 민박주인의 말로는 Adam Clark는 이 사자를 조각하기 위해 1년을 동물원에서 사자의 생태를 연구하고 작업했는데, 완성된 조각품을 본 어느 꼬마가 “혓바닥이 없잖아!” 라고 평을 하여 매우 상심했다고 합니다.
세체니 다리를 건너 언덕에 서 있는 부다 왕궁은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을 받아 온 헝가리 역사와 운명을 함께했다고 합니다. 13세기 중반에 최초로 성을 지었으나, 몽골군의 습격을 받아 철저히 파괴되었고 15세기 마차시 1세가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했지만,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또다시 파괴되었다지요. 17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는데 제 1, 2차 세계대전으로 다시 한 번 막대한 손상을 입은 후 1950년에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루드비크 박물관, 부다페스트 역사박물관, 국립 세체니 도서관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하네요. 도나우 강 쪽으로 난 정원 입구에는 헝가리 민족의 상징인 전설의 새 '투룰' 조각상이 서 있고, 정원 중앙에는 오스만투르크를 무찌른 외젠 왕자 청동상이 있습니다.
부다 왕궁의 옆에 겔레르트 언덕이 있습니다. 왕궁을 둘러본 후, 그 언덕을 오르는데 집사람이 점점 뒤처지더니 내가 기다리니까, 말할 기운도 없는지 혼자 가라고 손짓만 겨우 합니다. 이 언덕은 원래 “캐렌 언덕”이라고 했답니다. 11세기 경, 이스트반 1세가 아들의 교육을 위하여 이탈리아의 수도사 겔레르트를 초빙하였다고 합니다. 그때까지 종교가 없었던 헝가리에서 기독교가 전파되었는데, 1046년 이에 반대하던 폭도들이 이 수도사를 산 채로 와인 통에 넣어 도나우 강에 던져버렸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겔레르트의 순교를 기리기 위하여 “겔레르트 언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새의 깃을 들고 서 있는 여인상이 있는데, 이 동상은 헝가리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구 쏘련에서 1947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쏘련 병사를 위한 위령탑 이였답니다. 여인의 눈도 소련을 향하고 있는 듯...그리고 이 탑에는 소련병사를 위로하고, 헝가리를 나치로부터 독립시켰다는 내용의 글귀가 있었는데, 싹 지워 버리고 “용서는 한다, 그러나 잊지는 않겠다”고 바꿔 놓았다고 하는군요. 어쩐지 우리나라의 경우와 닮은꼴이 아닐까요?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크다는 국회의사당은 1884년부터 1904년까지 헝가리 건국 1,000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순전히 헝가리의 건축기술, 인력, 자재만을 사용하여 Neo Gothic양식으로 축조된 헝가리의 자부심이라고 합니다. 건물의 벽에는 88명의 헝가리 역대 통치자들의 동상이, 광장에는 존경받는 정치가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영어 설명 시간을 기다릴 수 없어, 불어 설명으로 내부를 둘러보았는데, 엄격한 소지품 검사 후, 개별행동이나 양탄자에 앉는 등 관람객들의 이상행동을 호위병이 따라다니며 제지하드군요. 특별한 왕관을 보관한 유리 상자 양쪽에는 군용 검을 든 호위병이 따로 서 있고, 사진 촬영도 금지되었습니다.
저녁에는 도나우 강에서 유람선을 예약 했습니다. 시간이 촉박하여 저녁도 못 먹고 배를 탔는데, 음료만 먹을 수 있는 표라 배가 고팠지요. 그래도 샌드위치 정도는 팔겠지 하고, 선상 뷔페 옆의 주방에서 먹을 걸 좀 달라고 했더니, 나쵸만이 가능하다네요. 두 바구니로 가득 쌓인 나쵸더미를 쏘스와 함께 집사람과 꾸역꾸역 먹었지요. 과연 부다페스트의 밤은 그 유명한 조명으로 내가 낮에 본 건물들이 또 다른 모습으로 화려하게 빛났습니다. 약속된 음료, 쥬스와 맥주 한잔으로 도나우 강을 1시간 반 정도 유람했습니다.
헝가리는 15세기 후반 마차시 왕 통치하에서 한때 비엔나를 함락시키는 등 왕국의 최대 판도를 실현합니다. 마차시라는 이름은 마자르 인들에게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거지요. 그러나, 16세기 오스만 투르크 지배 시에 성당은 이슬람의 모스크로 사용되는 비운을 겪습니다. 1867년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셉 1세가 이중제국의 황제이며 헝가리 왕으로서 마차시 성당에서 대관식을 가졌고, 예식을 위해 작곡된 리스트의 대관미사곡이 연주되었다는 사연도 있답니다. 광장 중앙에 교황과 황제를 상징하는 이중 십자가를 들고 있는 성 이슈트반 황제의 기마상이 있습니다.
높게 솟은 마차시 성당의 첨탑 앞쪽으로 어부의 요새가 흰색 고깔모자 7개를 쓰고 막아서 있습니다. 헝가리 건국의 주역 마자르의 7부족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1896년 헝가리 1000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건축물로 마차시 성당의 개축을 담당했던 건축가 프리제시 슐레크가 지은 걸작으로 Neo-Gothic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7첨탑과 회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요새의 목적이 아닌 도시 미화를 위해 건축한 것으로 옛날 어부들이 이곳에서 적의 침입을 방어한 데서 유래한다고 합니다. 겔레르트 언덕과 함께 이곳에서 내려다 보이는 부다페스트의 광경은 한 폭의 그림 이였습니다.
마지막 날 우리는 그 간의 피로를 풀 겸 세체니 온천으로 향했습니다. 관절염에 좋다고 하네요. 유럽 최대의 온천이라는데, 물의 깊이에서 유럽 사람들의 가슴까지 오는 깊이가 나에게는 목까지 찰랑찰랑...쪽 팔리더군요. 실내에도 탕이 있고 사우나도 하며 여독을 풀었습니다.
이번 여행을 하며 몇 번이고 집사람과 다짐한 건 “이제는 이런 여행 마지막이다”였습니다. 그저 깃발 든 가이드를 따라다녀야지 개인으로 다니는 건 앞으로 힘들 듯 합니다. 열심히 듣고도 돌아서면 까먹고, 눈은 안 보이고, 추우니까 화장실 찾는 게 일이고...빈에서 이제 지하철 노선도를 보고 한 번에 목적지를 찾을 때 쯤, 프라하로 가야하고, 또 다시 프라하와는 다른 교통체제의 부다페스트로...글쎄요...이런 기회가 또 올까요? 서두에도 얘기 했듯, 불과 1년 전의 나는 상상도 못할 일이였습니다. 인간만사가 새옹지마라더니 내가 전 회사에서 애 먹지 않고 편안히 잘 지냈다면, 이곳 태국까지 올 생각을 했을까요? 또 하나, 태국의 찌는 듯 한 더위와 불교 문화권에서 갑자기 닥친 기독교 문화, 그리고 빈에서의 뼛속을 파고드는 추위...극과 극의 대비였습니다. 후끈한 열기가 밀려드는 방콕공항에 돌아와서, 35도를 넘나드는 더위를 대하니, 이틀 정도는 얼떨떨 정신이 멍~했답니다.
돌아다닌 수많은 곳의 역사와 사연 등은 구경할 땐 전혀 몰랐죠, 들어도 까먹고...돌아와서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정리하면서 인터넷을 뒤진 결과이지요. 참 편한 세상입니다. 내가 미처 놓진 사진, 사연들은 전부 누군가 열심히 정리해 놓았고...마지막으로...나이 많은 분들은 가실 때 기저귀를 지참하시길 권합니다.
첫댓글 샘** 이광욱 얼마나 고생이 심했누? 어부의 성에서 다뉴브를 향해 시원하게 한번 갈기지 그랬나. 아무튼 뜻깊은 추억이길 바라네.5년전 내가 갔을때 마차시 성당 수리중이 었는데 말끔히 정리되었군그래 P.S. 달동군이 쓸개를 빼 버렸다는군. 지금 회복중...
샘??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네~~기저귀만 가져가면 되나 기저귀 가방과 유모차도 가져가야지
여유로움이 있어 좋아, 달동군이 쓸개가 없다고 쓸개 없는 분이 한 분 더 늘었네...요즈음은 복강경 수술이라 회복이 빠르지, 달동씨 쾌유를 빈다.
유모차? 기가막힌 아이디어네 그려...기저귀 가방과 마누라를 태우고 밀고 다닌다?...
서로 잃어버릴 염려도 없고...일석이조로구만. 다음 번에 갈 때 꼭 참고하겠네.